LA 인근 뮤지엄의 그림들을 보며 마음을 챙기다
스텔라박

게티센터 소장품,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유화 ‘봄’

로렌스 알마 타데마 경의 작품,‘봄’의 세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로 인해 국민적 인용구가 되어버린 이 구절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서화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 영조 8년-1811 순조 11년)의 글을 토대로 한다. 형조참의를 지냈던 유한준은 저서로 <저암집>이 전해져 내려오며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가까이 어울렸던 벗들 가운데에는 화가들이 많았다. 당시 그의 화가 친구들이나 수장가들이 화첩을 낼 때마다 그는 서화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그 유려한 문체로 발문(跋文)을 써주곤 했었다. 다음은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 (石農畵苑)>에 그가 쓴 발문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그리는 이의 영혼으로 탄생되지만 이를 알아보는 수집가(컬렉터)로 인해 제 2의 가치가 더해진다. 화가의 예술혼을 알아보는 컬렉터들은 김춘수의 시처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의 이름을 불러 꽃이 되게”하는 시인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당대에는 냉랭한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지만 그 잠재 가치를 알아보았던 뽈 기욤(Paul Guillaume 1891-1934), 뽈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과 같은 컬렉터들로 인해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다.
컨템퍼러리 아트는 솔로몬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 1861-1949)과 그의 조카딸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등의 컬렉터들이 가치를 알고 모으기 시작했다.
뮤지엄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그동안 이 보물들이 도대체 누구의 거실에 걸려, 그들을 바라다보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걸까, 궁금해진다. 뮤지엄에 걸린 그림을 앞에 대하자면 캔버스 앞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화가와 그들의 재능을 알아본 컬렉터들의 영혼이 화답하듯 가깝게 헤아려지기도 한다.
명화 한 장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애정을 가지고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들 앞에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아픔, 그의 가슴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여인, 당시의 생활상과 풍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치 정지돼 있던 그림이 활동사진이 되어 돌아가는 것처럼.
꽃들이 찬란하게 피어 대지를 물들이는 이 계절, 언제라도 좋은 게티 센터를 다시 한 번 찾는 이유는 로렌스 알마 타데마 경(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의 유화 ‘봄’(Spring)을 눈이 시리도록 들여놓기 위함이다. 그의 나이 58세 때인 1894년에 그린 ‘봄’은 가로 31.5인치, 세로 70.25인치 크기의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화가였던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냈다. 빅토리아 왕조의 폐위와 함께 그의 작품은 비난을 받기 시작한다. 급기야 존 러스킨은 그를 가리켜 19세기 최악의 화가라고까지 혹평한다. 1973년 러셀 애쉬에 의해 그의 전기와 화집이 출간되고 나서야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빅토리안 시대 때는 봄이 최고조에 달하는 5월 1일 이른 아침, 어린이들을 시골 들판으로 보내 꽃을 꺾어오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꺾어온 봄꽃들로 그들은 찬란한 봄날을 축하하는 축제를 벌였다.
로렌스 알마 타데마 경은 이런 빅토리아 시대의 풍습을 그가 사랑하는 고대 로마 시대의 배경과 결합시켜 화폭을 장식했다. 머리에 화관을 쓴 여인네들과 어린이들이 꽃을 들고 플로라 여신의 신전을 내려와 Cereralia 축제 퍼레이드를 벌이는 광경은 백 년이 지난 오늘날,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한다. 바구니에 가득한 꽃을 흩뿌리는 소녀들의 하늘거리는 드레스와 맨발은 때묻지 않은 거룩한 관능미를 보여준다.
그림의 배경은 실제가 아닌 상상의 결실이다. 폼페이의 벽화, 박카스 신전의 부조, 눈부신 대리석 건물, 코린트 기둥 등 그가 좋아하는 고대 로마 건축물들의 요소를 그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세세하게 표현한 건축물들은 그의 그림에 고아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악기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그는 그림 속에 피콜로, 팬파이프, 탬버린을 그려 넣었다.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에서 파파게노가 들고 다니던, 새소리 닮은 경쾌한 피리 소리가 세월을 뛰어넘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는 친구와 가족 등 친숙한 얼굴들을 축제 참가자의 얼굴로 그려 넣기도 했다. 오른쪽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경꾼으로는 음악가 친구인 조지 경, 릴리안 헨셀과 그의 딸 헬렌 헨셀의 얼굴을 그렸다. 그림 한 가운데 꽃을 들고 있는 아리따운 소녀는 그의 딸 애나와 로렌스다.
‘봄’이라는 작품을 위해 역사적 고찰 등 8개월 동안 쏟아 부은 노력의 열매는 이 그림 한 장으로 맺어졌다. 할리웃 초기 시대 세실 드밀의 1934년 작 영화, 클레오파트라에는 바로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장면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그림에 나오는 라틴어 문장은 마치 조선시대 남인화의 화제(畵題)처럼 멋들어진다. “태양이 꽃의 화려한 색채를 창조하듯 예술은 우리 삶에 색채를 부여한다.” 그래, 그의 그림으로 인해 우리 삶은 더욱 풍성하다.
때로 가까이 있다는 건 그것이 아무리 세상 사람 모두가 경탄해 마지않는 것일지라도 손 뻗으면 닿는 아내처럼 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심드렁하게 만든다. LACMA에 걸려있는 끌로드 오스카 모네(Claude Oscar Monet, 프랑스, 1840-1926)의 ‘수련’(Nympheas, 1897-1898)이 그렇다.
가로 41인치, 세로 26인치의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오르세이, 루브르에 가서도 대하기 힘든 명작이건만 가까이 있어 늘 볼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마냥 게으르기만 하다.
어린 시절부터 통제 불능할 정도의 자유혼이었던 모네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바다가 태양빛을 받아 부서질 무렵이면 그 아름다운 빛의 마법을 눈에 들여놓기 위해, 들로 산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그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화가, 부뎅은 그에게 하늘과 바다, 사람, 나무, 자연 등 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참 모습을 느낌 그대로 그릴 것을 권유한 존재다. 부뎅으로 인해 모네는 예술에의 심미안이 열리고 자연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는 피사로, 르누아르, 시실리, 마네, 세잔, 드가, 에밀 졸라 등 새로운 화풍과 사상을 추구하는 아티스트들과 친하게 지낸다. 삶과 예술에 대해 밤새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예술혼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은 각자 다르면서도 같은 방향을 추구해가는 동지들에게 서로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아름다운 예술 공동체를 만들어나갔다.
43세 때인 1883년, 모네는 지베르니라는 인구 300명 규모의 작은 마을에 널찍한 농가를 세얻어 여자 친구 알리스,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알리의 6남매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헥타르에 달하는 뜰에는 채소밭, 과수원, 정원이 있었다. “여보게, 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고 싶다네.” 당시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자주 발견됐다.
7년 뒤, 그는 바라던 대로 임대해 살던 이 집을 사들여 정성껏 단장한다. 집 앞의 정원에는 10만여송이 색색의 꽃을 심었고 연못을 판 후 잉어도 놀게 하며 수련도 둥둥 띄웠다. 처음에는 지베르니의 풍경도 곧잘 그리던 모네는 점차 자기 집의 정원과 수련, 일본식 교각만을 반복해서 화폭에 담게 된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바로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1916년부터 10년 동안은 대형 캔버스에 오직 하나의 오브제, 워터 릴리만을 그렸다.
초기와는 달리 1860년 이후, 모네는 밝은 색채의 팔레트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림자에조차 검정을 쓰지 않았던 모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는 모네의 관에 까만 천이 둘러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니, 안 돼. 모네에게 검정이라니. 안 될 일이야.” 그는 검은 천을 떼어내고 꼭 그의 캔버스 같은 꽃무늬 헝겊을 덮었다고 한다.
화가에게 있어 시력장애는 작곡가에게 있어서의 청각장애만큼 치명적이다. 1907년, 67세가 된 모네는 서서히 시력을 잃기 시작한다. 눈으로 본 그대로 그림을 그려왔던 그였지만 시력이 나빠진 이후에는 빨강과 노랑이 화폭의 대부분을 장식했고 파랑은 빛을 감추게 됐다. 표현의 세세함도 사라져갔다. 1926년 12월 5일,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모네는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땅, 지베르니의 묘지에 묻힌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