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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 개혁신앙인에게 주신 복음 (갈라디아서 1:6-10)
동아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김철권 교수님이 쓴 “사람들의
가슴에는 구멍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전 400년경에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욕망과 결핍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있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나에게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 따라서 욕망은 결핍이다.” 그는 ‘욕망의 전제조건이 결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욕망은 결핍이고, 결핍은 구멍이고, 그 구멍을 채워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드는 1939년 죽기 직전에 ‘have’동사와 ‘be’동사의 차이에 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그 후에 프랑스 정신분석가 라캉은 프로이드의
글에 언어학을 도입하여 실제 인간의 가슴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더 나아가 존재결핍과 소유결핍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소크라테스의 결핍이론에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프로이드와 라캉은 말합니다. “인간이 태어나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가슴에는 구멍이 생긴다. 구멍은 결핍이며 그래서 인간은 욕망한다.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결핍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그 결핍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소유개념의 결핍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알고 싶은 존재개념의
결핍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은 존재결핍 때문에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재결핍은 소유결핍으로 오인하여 가슴속 구멍을 수많은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삶을 채우고, 메워도 가슴은 여전히 텅 빈
구멍으로 남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결핍을 사람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더 좋은 물건, 더 많은 물질로 채우려고 합니다. 사회적 지위로
채우려고 하고, 명예로 채우려고 집착합니다. 자기 마음속의 구멍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구멍을 메울 대상을 찾습니다.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몸에 술로 채워보고, 영화도 보고, 산책을 해봐도 쓸쓸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노가 없어지지 않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동양사상가
노자가 말했습니다. “삼십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연결되어 수레가 굴러가지만 / 마땅히 가운데를 비게 하여야 수레의 구실을 하게 된다 /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지만 / 마땅히 그 가운데를 비게 하여야 그릇으로서의 효용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비워야 영의
생각으로 채웁니다. 비워야 비로소 보입니다. 마음을 비워야 변화를 읽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이다.(갈 2:19)”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변화되신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였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7-11) 지금 나(우리)의 삶과 신앙은 어떻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오늘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시작된 후로 499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중세 가톨릭교회의 변질과 타락을 지적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경’에서 벗어나서 교회전통을 앞세웠고, 진리를 변질시켰습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자본(물질)으로 ‘면죄부’를 판매하고, 구원의 복음을 타락시켰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데, 공로사상으로 복음을 타락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은혜를 자기애중심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이런 중세 가톨릭교회가 새롭게 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변화의 방향은 본질로,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Reform)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교회입니다. 공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저울에 자신을
올려놓아야 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변화하는 것이 개혁정신입니다. 회개하는 삶의 종착점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신학적인 오류를 시정합니다.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개혁신앙인’에게 주신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를 앙망하는 사람입니다.(사
33:2) 여기서 “앙망하다(카바/???/qawah)”는 말은 “(꼬아서) 함께 묶다, 수집하다, 기대하다, 모이다, 쳐다보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대망하다”는 뜻입니다. 주와 함께 묶여 있는 사람은 주를 대망합니다. 주를 기대하는 사람은 주께 모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사람은
참을성 있게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다.”(사 55:3)
여러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갔습니다. 회당에 나가서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나서
요청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두 사도가 그들에게 권하며 말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2-43) 여기서 “항상 있으라(프로스메노/προσμενω/prosmeno)”는 말은 “더 머물러 있다, 남아 있다, 지지하다,
인내하다, 관계를 갖다, 붙어있다. 계속 유지하다, 수중에 있다, 꼭 매달리다”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중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항상 복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항상 주께 나와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왜 항상 주께 나와서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복음을 들어야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살아야 기쁨이 있고,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됩니다.(요삼 1:2)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우리)를 은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나(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요 1:17) 복음을 들어야 능력을 깨닫고, 그 복음이 엄청난 파워가 있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올 때 내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와야 내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와야 인생이 변화됩니다.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신앙을 개혁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인도에
선교하러 갔던 배정희 선교사님(58세)이 23년 동안 선교하면서 체험한 간증입니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로 사람들이 3억 3000개의 신을
믿고, 윤회의 굴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날마다 폭력과 매춘이 판을 치고, 술주정뱅이, 구걸하는 아이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에 오물이 쌓여 있고, 화장터에서 뿜어내는 연기에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죽으면 화장되어 뼛가루를 강물에
뿌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강에서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합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1996년 12월에 북부 델리의 무카지역 시장통에 있는 건물 3층(10평)에 ‘선가티연합순복음교회’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교실과 공부방을 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영혼과 몸을 치유하도록 통성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무카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회를 참 좋아했어요. 저 역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좋았구요. 매일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했지요.
지금은 그 아이들이 다 커서 교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8년 만에 미션센터를 열었고, 유치원도 정식으로 개원했습니다. 이 시장통 교회가 무카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전도는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나 예수 믿어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한
번은 시골에 가서 전도했는데, 아주머니가 말했어요. “예수도 좋고, 십자가도 좋은데 밥 먹여주는 사람이 최고요.” 그 아주머니는 사흘이나 배를
곯았는데, 맨손으로 소똥을 긁어 연료를 만들고 있었어요. 이분에게 복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에게 “나 예수 믿어요.” 그러면서
떡을 준비해서 먹였습니다. 내 사역주변에서 툭 하면 사건, 사고가 터지고, 뎅기열과 장티푸스, 말라리아와 열병도 수없이 걸렸습니다. 죽음의 영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현지인 목회자 사모가 갑자기 죽고,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배신하고, 18세 모누가
성폭행을 당해 자살했을 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울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울고, 몸과 마음이 아파서
울고... 이렇게 울다보면 마음이 시원해졌어요. 그래도 인도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사는 목적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내 심장을 주고서라도 복음을 주고, 주님의 집으로 인도하고 싶어서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윌리엄 케리 선교사의 묘비명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가엽고, 비천하며, 연약한 벌레 같은 내가 주님의 온유한 품에
안기다.” 지금 내(우리)가 이곳에서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우리)가 지금 이 사람을 만나고, 이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을 받은 내(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개혁신앙인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이 복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상대화시키고, 진리를 상대화시키면 변질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과 전한 복음을 절대화시켰습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보세요.
“다른 복음은 없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 말은 ‘나는 이 십자가의 복음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선택할 것이 없다. 이 복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 확신이 나에게 용기를 주고, 복음의
능력을 얻게 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외치고, 개혁하자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변화가 없고,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 개혁이 없이 개혁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좋게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개혁신앙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합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할 때에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딤후 3:12) 개혁신앙인은 항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일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고난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데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인가?’
여러분! 이제 내(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들에게 좋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좋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개혁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주시면 만족합니다. 개혁신앙인은 때로
하나님의 의를 따르기 위해서 불의에 항거합니다. 불의에 맞서다가 고난을 겪고, 환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개혁신앙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시고, 큰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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