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아가 5장 2-7절
설교제목 : 문을 두드리는 이
세 가지 반성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봄의 길로 들어서는 입춘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새 봄의 희망과 활력이 다시금 전개되리라 생각됩니다. 여전히 전쟁의 갈등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 땅에도 다시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새 시간은 저절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세계가 철저히 반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싸움 후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논어》의 ‘학이’편에서 증자는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점에 대해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은 없는가?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없는가” [공자 지음, 김형진 옮김, 《논어》, 홍익출판사, p31]
진심을 다한다는 것은 원문에는 충忠입니다. 마음이 가운데로, 단일하게 있는 상태입니다. 일을 하면서 충직하게 진심으로 일을 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든 진심으로 일할 수 있는 자는 그 자체로 빛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친구와 사귀면서 신뢰함이 중요합니다. 신뢰하는 태도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전제이어야 합니다. 또한 세번째 반성이 특별히 저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히라는 것입니다. 원문에 전불습호傳不習乎는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이 없는지’ 성찰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전하기만 하고 익히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미도 됩니다. 저에게는 배운 것을 숙달할 수 있도록 익히지 못한 것도 반성할 부분이지만, 전하기만 하고 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이 더 큰 반성을 해야 하는 대목인 듯합니다. 매 주일 말씀을 전하지만 삶 속에서 익어지지 않는 모습을 더 크게 반성하며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 속에서 일할 때는 충직한 마음으로 진심으로 일하고, 배운 바를 익어갈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이
오늘 본문은 3장에서 꿈 속에서 님을 찾아나선 이야기와 유사하게 꿈의 장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신부가 사랑하는 님을 찾아다녔다면, 5장은 신랑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자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을 깨어 있었다. 저 소리, 나의 사랑하는 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 열어요! 나의 누이, 나의 사랑, 티없이 맑은 나의 비둘기! 머리가 온통 이슬에 젖고, 머리채가 밤 이슬에 흠뻑 젖었소(1)”
잠을 자고 있지만, 마음은 깨어 있다는 표현은 꿈의 상황을 아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면은 신체적으로 잠을 자지만, 우리의 영혼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의식 수준의 저하로 인한 무의식이 활성화가 일어나는 때입니다. 무의식적 정신과정이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밤이슬에 온통 젖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상황은 종종 꿈의 장면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무의식적 내용이 의식 안으로 들어오려는 시도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상황에서 대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숨거나 안절부절하다가 꿈을 깰 때가 있습니다. 여러 번 꿈에서 무서운 귀신이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 불안해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분석시간에 다시 비슷한 꿈을 꾸게 되면 그때 용기를 내어 문을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불안했지만, 문을 열었더니 문 앞에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꿈에서 문을 두드리지 않고 마구 침투하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신비한 방식으로 일방성으로 경직된 자아를 몰아붙이는 내용입니다. 이런 경우 신경증적 증상이 발현되기도 하고, 새로운 창조적 과정으로 선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을 두드릴 때는 두렵지만 문을 열 때 새로운 정신의 요소를 의식으로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의 문 두드림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도 유사하게 등장합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의식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 주님이 나타나시면 문을 열어줄 것 같지만, 경험적으로는 문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고수했던 나의 태도와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낡고 구태의연한 기존의 나는 결코 문을 열기 어렵습니다.
떠나버린 님
그런 상황은 3절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 나는 벌써 옷을 벗었는데, 다시 입어야 되나? 발도 씻었는데, 다시 흙을 묻혀야 하나?”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시 일어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핑계를 대면서 문 열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왜 그토록 기다리던 님이 밤이슬을 맞으면 오셨건만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일까?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합을 갈망하고 고대하기도 하지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연합은 모든 열망의 근원이지만, 가까이 다가와 문을 두드리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과 욕구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융은 말합니다. “모든 욕구 뒤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당신도 알다시피 거기엔 결코 최선의 것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영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C.G. Jung, Mysterium Coniunctionis, CW 14, para.192.] 이런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음에도 막상 그것이 문 앞에서 노크하기 시작하면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망설입니다. 결혼을 앞 두고 있는 신부나 출산을 해야 하는 어머니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이에 상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님은 문을 열어주지 않자 문을 따기 위해 문 틈으로 손을 내밉니다. 그때 신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사랑하는 님은 그곳에 있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떠나버린 님을 찾을 수 없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맞아들이려고 문을 열었지. 그러나 나의 임은 몸을 돌려 가버리네. 임의 말에 넋을 잃고 그를 찾아 나섰으나, 가버린 그를 찾을 수 없네. 불러도 대답이 없네(6).”
이런 구절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문을 열어주었는데 왜 임은 떠나버렸을까요? 어떤 주석가들은 이렇게 떠나버린 님을 신적 현존이 이스라엘을 떠난 상황으로 해석했습니다. 또는 무시받은 지혜가 떠났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떠나버린 것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분석의 과정에서 때로 경험합니다. 의식의 문턱을 넘기 직전에 자아가 주저하고 망설이고 의심하는 사이 무의식의 내용은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의식 속으로 다시 가라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시의적절하게 문을 열지 못하면 떠나버립니다. 하나님은 때로 즉각적인 응답을 요청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의심하다가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부름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떠났습니다. 5달란트 받은 종과 2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하여 갑절을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무서워하며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기회를 선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 종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며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당하였습니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모험할 수 없고, 새로운 기회는 선용될 수 없습니다. 망설이고 핑계되며 주저하기 보다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와 옷 벗겨짐
이제 여인은 떠나버린 님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그를 찾을 수 없고,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상처를 입히고 핍박하는 이들로 고통을 당합니다.
“성읍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이 나를 때려서 상처를 입히고,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나의 겉옷을 벗기네(7).”
이런 야경꾼과 파수꾼들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이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의 갈대아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교회를 핍박하고 순교자들의 살갗을 벗겨낸 이교도적인 로마의 통치자들”로 이해했습니다. 떠나버린 하나님을 찾아나선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가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구도에서 보면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은 기존의 심리적 체계가 만든 강력한 울타리를 보호하는 자들입니다. 개별적인 연합을 방해하는 개성화의 적들입니다. 무언가 찾아나설 때 내가 견디고 넘어서야만 하는 단단한 심리적 체계의 콤플렉스들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겉옷이 벗겨집니다.
이런 고통의 상처와 겉옷의 해체는 새로운 변환과 갱신을 위한 전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상처받고, 기존의 나의 방식과 태도가 벗겨진다면 그것은 나를 다시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고통받지 않고, 옷이 벗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다시 찾아나서는 여정에서 고통받고 옷이 벗겨지는 불안이 밀려올 때 다시 태어나기 위한 길에 내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고대하던 님을 다시 만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