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說分第六 【해제】 여기에서 강유위는 진분(秦分, 즉 소전)을 중점적으로 논하였다. 소전 서예가는 이사를 종주로 삼고, 작품은 마땅히 <석고문>을 제일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는 당나라 이양빙으로부터 금나라 당회영에 이르는 기간까지 각 서예가 전서의 장점을 분석하였다. 그는 특별히 청나라 등석여를 숭상하고 그에 이르러 “위로는 천고를 가렸고, 아래로는 백년을 열었다[上掩千古, 下開百?].”라고 할 정도로 전서 필법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전서 비각에서 <소실석궐명>ㆍ<개모석궐명>ㆍ<사삼공산비>ㆍ<천발신참비>ㆍ<봉선국산비> 등이 가장 아름답고 법으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학서 경험에서 깨달은 것은 종정문과 진ㆍ한나라 와당의 문자 필의를 전서에 도입하면 새로운 이치와 독특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서한시기의 팔분서는 전서ㆍ예서의 사이에 있으면서 질박하고 굳세며, 웅장하고 표일하여 예스러운 기가 아직 엷지 않고, 동한시기 환제ㆍ영제 이후에 예스러움은 변한 것이 이미 심하고 맛이 담박하여서 이미 고법보다 못하다. 【원문】 秦分(?小篆). 以李斯爲宗(1), 今瑯?, 泰山, 會稽, 之?諸山刻石是也. 相(2)斯之筆?如鐵石, 體若飛動, 爲書家宗法(3). 【해석】 진분(즉, 소전)은 이사를 종주로 삼으니, 지금 낭야ㆍ태산ㆍ회계ㆍ지부 여러 산의 각석이 이것이다. 이사의 필획을 보면, 마치 철과 돌 같고, 형체는 마치 날아 움직이는 것 같아 서예가의 법칙이 되었다. 【주석】 (1) 以李斯爲宗(이이사위종) : ‘위종(爲宗)’은 종주로 삼는다는 뜻이니, 청나라 전영(錢泳)은 『서학(書學)』에서 “전서를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이사를 정종으로 삼아야 하니, 이른바 소전이다. 아깝게도 전해지는 각석에서 오직 <태산각석> 29자와 <낭야대각석> 12행만 있을 뿐이다[學篆書者, 當以李斯爲正宗, 所謂小篆是也. 惜所傳石刻惟有泰山二十九字, 及瑯?臺刻石十二行而已].”라고 하였다. (2) 相(상) : 이는 본다는 뜻이다. (3) 宗法(종법) : ‘종법(宗法)’은 원래 봉건사회의 가법(家法)을 가리켰으니, 송나라 여조겸(呂祖謙)의 『동래문집(東萊文集)』에 ‘종법조목(宗法條目)’이 있다. 이는 인신하여 ‘법칙’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원문】 若石鼓文則金鈿落地, 芝草團雲(1), 不煩整截, 自有奇采. 體稍方扁, 統觀??, 氣體相近. 石鼓?爲中國第一古物, 亦當爲書家第一法則也. 【해석】 <석고문>은 금비녀가 땅에 떨어지고, 지초의 구름이 모이며, 번거롭지 않고 가지런하게 끊어졌으며, 스스로 기이한 풍채가 있는 것 같다. 형체는 조금 모나고 넓적하며, 충전ㆍ주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기세와 형체가 서로 가깝다. <석고문>은 이미 중국 제일의 옛날 기물이며, 또한 응당 서예가의 제일 법칙이 된다. 【주석】 (1) 金鈿落地, 芝草團雲(금전락지, 지초단운) : ‘금전(金鈿)’은 부녀자의 머리 장식이고, ‘지초(芝草)’는 일명 영지(靈芝)ㆍ자지(紫芝)라는 버섯으로 이미 마른 나무에 기생하고 윗면은 구름무늬에 흑갈색을 나타내고, 아랫면은 담갈색을 띠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고, 바탕은 견고하고 매끄러우며, 옛날에 상서로운 풀로 여겼다. 여기에서는 <석고문>의 서체가 마치 금비녀가 땅에 떨어져 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잘린 것 같고, 영지 위의 구름무늬가 자연스럽게 기이한 풍채를 내는 것 같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李少溫(1)以篆名一時, 自?於天地山川衣冠文物, 皆有所得, 斯翁(2)以後, 直至小生(3). 然其筆法出於?山, 僅以瘦勁取勝, 若謙卦銘, 益形怯薄, 破壞古法極矣. 【해석】 이양빙은 전서로 한때 이름이 있었고, 스스로 “천지ㆍ산천ㆍ의관ㆍ문물에서 모두 얻은 바가 있다고 일컬었다. 이사 이후 곧바로 소생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법은 <역산각석>에서 나왔고, 겨우 파리하고 굳센 것으로 뛰어남을 얻었으며, <겸괘명>은 더욱 형태가 겁박하여 고법의 한계를 파괴한 것 같다. 【주석】 (1) 李少溫(이소온) : 이양빙(李陽?, 생졸미상)은 자가 소온(少溫)이고 조군(趙郡, 지금의 하북성 趙縣) 사람이다. 그는 당나라 문학가이고 서예가로 이백의 숙부이다. 벼슬은 집현원학사를 거쳐 소감(少監)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감(李監)’이라 불렸다. 전서를 잘 썼고, <역산각석>에서 법을 얻었으며, 서원여(舒元輿)는 그의 글씨가 이사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후세 전서를 배우는 사람은 대부분 이양빙을 종주로 삼았다. 작품으로는 <삼분기(三墳記)>ㆍ<성황묘비(城隍廟碑)>ㆍ<겸괘명(謙卦銘)>ㆍ<이정명(怡亭銘)>ㆍ<반야대제명(般若臺題名)> 등이 있는데, 모두 후세의 번각본이다. (2) 斯翁(사옹) : 즉 이사(李斯)를 가리킨다. (3) 小生(소생) : 즉 이양빙(李陽?)이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 夫自斯翁以來, 漢人?法, 莫不茂密雄厚, 崔子玉許叔重?善小篆, 張懷瓘?其師模李斯, 甚得其妙. 曹喜蔡邕邯鄲(1)韋(2)衛(3)目覩(4)古文(古文雖劉歆?作, 然此非攷經學, 但論筆墨, 所出?古, 亦不能廢), 見聞濡染(5), 莫非奇古. 【해석】 대저 이옹으로부터 한나라 사람의 예서 필법은 무성하고 긴밀하며 웅후하지 않음이 없고, 최원ㆍ허신은 함께 소전을 잘 썼는데, 장회관은 “이사를 스승과 법으로 삼아 매우 묘함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조희ㆍ채옹ㆍ한단순ㆍ위탄ㆍ위기는 눈으로 고문(고문은 비록 유흠의 위작이나 여기에서는 경학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필묵만 논하는 것이어서 이미 옛날에 나온 것으로 또한 없앨 수 없다.)을 보았고, 보고 들음이 물들어 기이하고 예스럽지 아니함이 없다. 【주석】 (1) 邯鄲(한단) : 한단순(邯鄲淳, 약 132-221)은 삼국시대 위나라 문학가ㆍ서예가로 자는 자숙(子叔)이고 영천양적(?川?翟, 지금의 하남성 禹州) 사람이다. 박학다재하고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고문ㆍ대전ㆍ예서에 정통하였다. (2) 韋(위) : 위탄(韋誕, 179-253)은 삼국시대 위나라 서예가로 자가 중장(仲將)이고 경조(京兆, 지금의 西安) 사람이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제서(題署)에 뛰어났고, 먹 제조로 유명하여 세칭 “위탄의 먹은 한 점의 칠과 같다[仲將之墨, 一點如漆].”라고 하였다. 또한 붓을 제조할 수 있어 『필경(筆經)』을 남겼다. (3) 衛(위) : 위씨 가문이 글씨를 잘 썼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위기(衛?)ㆍ위관(衛瓘)ㆍ위항(衛恒)의 삼대가 유명한데, 여기에서는 위기를 가리킨다. (4) ‘사고본’ㆍ‘화정본’에는 ‘覩’, ‘상해본’ㆍ‘호남본’에는 ‘睹’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5) 見聞濡染(견문유염) : 이는 즉 ‘목유이염(目濡耳染)’으로 이목이 항상 접촉하여 자연히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일컫는다. ‘유(濡)’는 또한 ‘유(?)’로 쓰기도 하며, 지금은 대부분 ‘이유목염(耳濡目染)’으로 쓴다. 【원문】 少溫生後千年, 舊跡日湮, 古文不復見於世, 徒以瘦健一新耳目. 如昌黎(1)之古文, 陽明(1)之心學, 首開家法, 斯世無人, 驟獲盛名. 豈?能過出漢人, 空前?後哉. 漢人秦分書存於世者, 吾以寡陋, 所見?二十餘種. 吳碑二種. 【해석】 이양빙이 태어난 뒤 천년, 옛날 묵적이 날로 잠기고 고문은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한갓 파리하고 굳센 것으로 이목을 일신하였을 뿐이다. 한유의 고문과 왕수인의 심학이 먼저 가법을 열었을 때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 없어 갑자기 큰 명성을 얻은 것과 같다. 어찌 참으로 한나라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음이 전무후무하랴! 한나라 사람의 진분 글씨가 세상에 존재하나 내가 고루하고 견문이 좁아 본 바가 아직 20여 종이다. 오나라 비 2종이 있다. 【주석】 (1) 昌黎(창려) : 한유(韓愈, 768-824)는 당나라 문학가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하양(河陽, 지금의 하남성 孟主) 사람이다. 관적이 하북성 창려이기 때문에 한창려(韓昌黎)라 불렸다. 또한 이부시랑을 지냈기 때문에 한이부(韓吏部)라고도 불린다. 그는 육조 이래의 변려문을 반대하고 산문을 제창하였으며, 유종원과 더불어 고문운동의 창시자이다. 그의 산문은 선진시기와 양한의 고문을 계승한 기초에서 창신과 발전을 더하여 기세가 웅건하였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다.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전한다. (2) 陽明(양명) :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은 명나라 철학가ㆍ교육가로 자는 백안(伯安)이고 여요(餘姚, 지금의 절강성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집을 고향인 양명동에 건축하였기 때문에 양명선생(陽明先生)이라 불렸다. 벼슬은 남경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는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발전시켜 정주학파(程朱學派)에 대항하여 양명학파(陽明學派)를 창시하였다. 저서로는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38권이 있다. 1. 趙王群臣上壽 <조왕군신상수>는 서한시기 문제 후원 6년(기원전 158)에 새겼고, 전체 문장은 ‘조입이년팔월병인군신상수차석북(??二年八月丙寅群臣上?此石北)’이다. 2. 魯王泮池刻石 <노왕반지각석>은 또한 <노효왕각석(?孝王刻石)>ㆍ<오봉각석(五鳳刻石)>이라고도 일컬으며, 서한시기 선제 오봉 2년(기원전 56), 즉 노 효왕 34년에 새겼다. 3. 祝其卿墳壇題字 <축기경분단제자>는 서한시기 왕망 거섭 2년(7) 2월에 세웠고, 4행 12자가 있으며, 산동성 곡부의 공묘에 있다. 4. 上谷府卿墳壇題字 <상곡부경분단제자>는 서한시기 왕망 거섭 2년(7) 2월에 세웠고, 4행 13자가 있으며, 산동성 곡부의 공묘에 있다. 5. 少室神道闕 <소실신도궐>은 <숭악소실석궐명(嵩岳少室石闕銘)>으로 <소실석궐명(少室石闕銘)>이라고도 일컬으며, 동한시기 안제 연광 2년(123) 숭산에 세운 ‘숭산삼궐(嵩山三闕)’의 하나이다.
6. 開母廟 <개모묘>는 <개모묘석궐명(開母廟石闕銘)>으로 동한시기 안제 연광 3년(124) 숭산에 세웠다. ‘개모(開母)’의 원래 이름은 ‘계모(啓母)’이나 한 경제 이름을 휘한 것이고, ‘啓’는 하나라 우임금의 아들로 명문은 우임금이 치수를 한 일을 기록하였다. ‘숭산삼궐(嵩山三闕)’의 하나이다. 7. 三公山碑 <삼공산비>는 <사삼공산비(祀三公山碑)>로 전체 명칭은 <한상산상풍군사삼공산비(?常山相?君祀三公山碑)>이고, 속칭 <대삼공산비(大三公山碑)>라고도 일컫는다. 옹방강의 고증에 의하면, 동한시기 안제 원초 4년(117)에 새겼다고 한다. 8. 是吾碑 <시오비>는 <도관시오비(都官是吾碑)>로 또한 <연광잔비(延光?碑)>라고도 일컫는다. 동한시기 안제 연광 4년(125)에 세웠다. 9. 建初殘石 <건초잔석> 10. 孔宙碑額 <공주비액>는 동한시기 환제 연희 7년(164)에 세웠다. 11. 衡方碑額 <형방비액>에서 <형방비>의 전체 명칭은 <위위경형방비(?尉卿衡方碑)>로 동한시기 영제 건령원년(168)에 새겼고, 현재 산동성 태안의 대묘 안에 있다. 12. 혜안서표 <혜안서표>는 <서협송(西狹頌)>으로 전체 명칭은 <한무도태수한양아양이흡서협송(?武都太守??阿?李翕西??)>이다. 이를 민간에서는 속칭 <이흡송(李翕?)>ㆍ<황룡비(??碑)>라고도 한다. 동한시기 영제 건령 4년(171) 6월 13일에 새긴 것으로 무도태수 이흡이 칙령으로 서협의 마애 벽에 새겼는데, 글은 구정(仇靖)이 쓰고 새겼다. 13. 孔彪碑額 <공표비액>의 전체 명칭은 ‘한고박릉태수공부군비(?故博陵太守孔府君碑)’로 2행 10자이다. 동한시기 건령 4년(171)에 세웠고, 현재 곡부의 공묘에 있다. 14. 韓仁碑額 <한인비액(韓仁碑額)>의 전체 명칭은 ‘한순리고문희장한인명(?循吏故?熹??仁?)’으로 2행 10자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한인명(韓仁銘)>이라 일컬으며, 동한시기 영제 희평 4년(175) 한인(韓仁)이 죽은 뒤에 세운 묘지명이다. 현재 하남형양시문물관리소 안에 있다. 15. 尹宙碑額 <윤주비액> 전체 명칭은 ‘한예주종사윤공명(?豫州?事尹公?)’이고, <윤주비>의 전체 명칭은 <한예주종사윤주비(?豫州?事尹宙碑)>이다. 동한시기 희평 6년(177)에 세웠고, 현재 남릉현의 공묘에 있다. 16. 白石神君碑額 <백석신군비액>은 동한시기 영제 광화 6년(183)에 세웠고, 비는 원래 하북성 원씨현의 서북쪽으로 30리 떨어진 봉룡산(封?山) 아래 백석신군 사당에 있었는데, 이후 하북성 진정현(?定?)으로 옮겼다. 17. 婁壽碑額 <루수비액>은 동한시기 영제 희평 3년(174)년에 새겼다. 18. 張遷碑額 <장천비액>의 전체 명칭은 ‘한고곡성장탕음령장군표송(?故穀城???令?君表?)’으로 2행 12자이다. <장천비>는 또한 <장천표송(??表?)>이라고도 일컬으며, 동한시기 영제 중평 3년(186)에 산동성 동평현(?平?)에 세웠는데, 현재 산동성 태산의 대묘에 있다. 19. ?敏碑額 <초민비액>의 전체 명칭은 ‘한고소황문초군지비(?故小???君之碑)’로 3행 9자이고, 동한시기 영제 중평 4년(187)에 세웠다. 20. 樊敏碑額 <번민비액>의 전체 명칭은 ‘한고령교파군태수번부군비(?故?校巴郡太守樊府君碑)’로 2행 12자이며, 동한시기 헌제 건안 10년(205)에 새겼다. 21. 魯王墓石人(太守?君亭長題字) <노왕묘석인>(태수 포군정장이 글씨를 썼다.)의 전체 명칭은 ‘한고낙안태수미군정장(?故?安太守?君亭?)’으로 1행 10자이다. 동한시기 화제 영원 7년(95)에서 순제 한안 4년(145)에 새겼다. 원석은 곡부의 공묘에 있다. 22. 魯王墓石人(府門卒題字) <노왕묘석인>(관부의 수문 병졸이 글씨를 썼다.)의 전체 명칭은 ‘부문지졸(府?之卒)’로 1행 4자이다. 동한시기 화제 영원 7년(95)에서 순제 한안 4년(145)에 새겼다. 원석은 곡부의 공묘에 있다. 23. 華山碑額 <화산비액>의 전체 명칭은 ‘서악화산묘비(西嶽華山廟碑)’로 2행 6자이다. 이를 <화산묘비(華山廟碑)>라 일컬으며, 동한시기 연희 8년(165)에 섬서성 화음현 서악묘에 세웠으나, 원석은 이미 없어졌다. 24. 馮?碑額 <풍곤비액>의 전체 명칭은 ‘한고차기장군풍공지비(?故?????公之碑)’로 2행 10자이고, 동한시기 혜제 영강원년(167)에 세웠다. 25. 仙人唐公房碑額 <선인당공방비액> 26. 中平殘石 <중평잔석> 27. 范式碑額 <범식비액>의 전체 명칭은 ‘고려강태수범부군지비(故?江太守范府君之碑)’로 2행 10자이고, 또한 <범씨경비(范氏卿碑)>라고도 일컫는다. 삼국시대 위나라 청룡 3년(235)에 임성(任城, 지금의 산동성 濟寧)에 세웠다. 28. 上尊號奏額 <상존호주액>의 전체 명칭은 ‘위공경장군상존호주((魏公卿??上尊號奏)’로 2행 9자이고, 삼국시대 위 문제 황초원년(220)에 새겼다. 29. 受禪表額 <수선표액>은 ‘위수선표(魏受?表)’로 1행 4자이다. 동한시기 헌제가 연강원년(220) 10월 을묘일에 위왕 조비(曹丕)에게 선위하자 조비는 곧바로 즉위하여 황제라 칭하고 황초라 개원하며, 10월 신미일에 이 비를 세워 한나라가 선양(禪讓)한 일을 기록하였다. 30. 天發神讖碑 <천발신참비>는 삼국시대 오나라 천새원년(276)에 새겼다. 이를 또한 <천새기공비(天??功碑)>라고도 일컬었고, 송나라 이전에 이미 3개의 돌로 잘라졌기 때문에 <삼단비(三?碑)>라고도 일컫는다. 31. 封禪國山碑(蘇建書) <봉선국산비>(소건이 썼다.)를 또한 <선국산비(禪國山碑)>ㆍ<천기비(天?碑)>라고도 일컫는다. 삼국시대 오나라 천새원년(276)에 새겼고, 소건(蘇建)이 썼다고 전한다. 원석은 강소성 의흥현의 서남쪽에 있는 이리산(離里山) 마애에 있다. 32. 大風歌 <대풍가> 【원문】 諸碑中蒼古則三公山, 妙麗則碑額(1) 奇偉則天發神讖, 雅健則封禪國山, 而茂密渾勁, 莫如少室開母. 漢人篆碑, 祇(2)存二種, 可謂希世(3)之鴻寶, 篆書之上儀(4)也. 【해석】 여러 비에서 굳세고 예스러운 것은 <사삼공산비>이고, 묘하고 아름다운 것이 비액이고, 기이하고 위대한 것은 <천발신참비>이고, 우아하고 굳센 것은 <봉선국산비>이며, 무성하고 긴밀하며 혼후하고 굳센 것으로는 <소실석궐명>ㆍ<개모묘석궐명> 만한 것이 없다. 한나라 전서 비는 단지 2종만 존재하니, 가히 희세의 큰 보물이고 전서의 으뜸 법도라 일컬을 만하다. 【주석】 (1) 碑額(비액) : 이는 비 머리의 글씨를 쓴 것을 가리키니, 왕기손(王?孫)은 『비판광례(碑版廣例)』에서 “비수는 혹 교룡ㆍ호랑이ㆍ용ㆍ주작을 장식으로 삼고, 그 가운데를 깎아내어 규수를 만드는데, 혹 다른 장식이 없고 곧바로 규수를 만들기도 한다. 모나고 예리하며, 둥글고 길쭉하며, 한결같이 제작하지 않는다. 규수에 문자가 있는 것을 액이라 일컬으니, 액의 글씨가 전서이면 전액이라 일컫고, 예서 문자는 제액이라 일컫는다[碑首或刻?虎龍雀以爲飾, 取?其中爲圭首, 或無他飾, 直爲圭首. 方銳圓?, 不一其制. 圭首有字謂之額, 其額書篆字謂之篆額, ?字謂之題額].”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위에서 기술한 비액을 가리킨다. (2) ‘사고본’ㆍ‘화정본’에는 ‘祇’, ‘상해본’ㆍ‘호남본’에는 ‘只’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3) 希世(희세) : 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것을 가리키니, 구양현(歐陽玄)은 「제자미노인대자가(題紫微老人大字歌)」에서 “집에 소장한 것에 이 희세의 보배가 있네[家藏有此稀世珍].”라고 하였다. (4) 上儀(상의) : ‘의(儀)’는 법도 혹은 준칙이니, 『삼국지ㆍ촉지ㆍ제갈량전평(三國志ㆍ蜀志ㆍ諸葛亮傳評)』에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를 보여준다[撫百姓, 示儀軌].”라고 하였으니, 또한 법을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전서 필법에서의 상품을 일컫는다.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천발신참비>는 필봉을 내는 곳에서 팔분서의 필세를 갖추었고, <봉선국산비>는 낙필하는 곳에 진서의 필의가 있으니, 오직 <소실석궐명>ㆍ<개모묘석궐명>만 이에 진정한 전서이다[神讖出鋒處具分勢, 國山落筆處有眞意, 惟少室開母乃眞正篆書也].”라고 하였다. 【원문】 大風歌傳爲曹喜作, 然不類漢人書, 以其爲黨懷英(1)所自出, 故?於末焉. 又州輔石獸膊有天祿?邪四字, 體與谷口銅筒銘同. 【해석】 <대풍가>는 조희가 쓴 것이라 전해지나 한나라 사람 글씨 같지 않으니, 그것을 당회영에서 나왔다고 하였던 까닭에 끝에 첨부하였다. 또한 <주보석수박>에 ‘天祿?邪’ 4글자가 있으니, 형체는 <곡구동통명>과 같다. 【주석】 (1) 黨懷英(당회영) : 당회영(1134-1211)은 금나라 문학가ㆍ서예가로 자는 세걸(世桀)이고 호는 죽계(竹溪)이며, 풍익(馮翊, 지금의 섬서성 大?) 사람이다. 벼슬은 한림학사승지를 지냈고, 전서ㆍ주문을 잘 썼으며, 저서로는 『죽계집(竹溪集)』 10권이 있다. 【원문】 凡諸篆雖工拙不同, 皆具茂密偉麗之觀, 誠瑯?之嫡嗣. 且體裁近古, 亦有石鼓之意, 必毫鋪紙上, 萬毫齊力(1)而後能爲, 豈如謙卦銘瘦骨柴立, 致吾邱衍以爲燒筆尖而作書哉. 【해석】 무릇 여러 전서는 비록 공교하고 졸함이 같지 않고, 모두 무성하고 긴밀하며 뛰어나고 아름다운 볼품을 갖추었으니, 진실로 <낭야대각석>의 적자이다. 또한 형체와 마름질은 옛것에 가깝고, 또한 <석고문>의 필의가 있고, 반드시 붓털을 종이에 펴서 모든 털의 힘이 가지런한 뒤에 이를 할 수 있으니, 어찌 <겸괘명>의 파리한 골과 섶이 선 것 같고, 오구연이 붓끝을 태워 글씨를 쓴 것으로 이르랴? 【주석】 (1) ‘사고본’ㆍ‘화정본’ㆍ‘호남본’에는 ‘萬毫齊力’, ‘호남본’에는 ‘萬毫開力’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원문】 又秦漢瓦當文, 皆廉勁方折, 體亦扁(1), 學者得其筆意, 亦足成家. 【해석】 또한 진ㆍ한나라 와당문자는 모두 날카롭고 굳세며 모나게 꺾어 서체 또한 과편전이니, 배우는 사람이 그 필의를 얻으면 또한 족히 일가를 이룰 수 있다. 【주석】 (1) ‘사고본’ㆍ‘상해본’ㆍ‘화정본’에는 ‘’, ‘호남본’에는 ‘?’라 하였으나 전자를 따른다. ‘扁(과편)’은 즉 ‘과편전(??篆)’으로 최융(崔融)은 「우비찬(禹碑贊)」에서 “신성 하나라 우임금은 <구루비>에 덕을 기록하고, 용의 그림으로 곁을 나누었으며, 복사뼈로 쓰고 넓적하게 새겼다[神聖夏禹, ??紀德, 龍畵傍分, ?書?刻].”라고 하였다. 이후 당나라 서호, 강남의 이초금(李楚金) 무리들이 소전에 운용한 것을 ‘과편전’이라 불렀다. 【원문】 ?湯萬年瓦, 瘦硬?倫. 都司空瓦, 微帶尖?, 筆法亦同. 嘗見漢谷口銅筒銘數十字, 瘦渾圓妙極矣. 陽?城隍謙卦, 實祖於是. 必師少溫者, 曷師此邪. 【해석】 <태탕만년> 와당은 파리하고 굳셈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도사공와> 와당은 조금 뾰족한 다리를 띠고, 필법 또한 같다. 일찍이 한나라의 <곡구동통명> 수십 글자는 파리하고 혼원하며 묘함이 지극하다. 이양빙의 <성황묘비>ㆍ<겸괘명>은 실로 이것에서 종주로 삼았다. 반드시 이양빙을 스승으로 삼는 자가 어찌 이를 스승으로 삼지 않으랴? 【원문】 宗正官當, 亦似少溫者, 八風壽存, 綿繆?糾(1), 幾開唐印之體, 然凡瓦當皆繆篆類, 應?秦權漢量三公山碑之後也. 【해석】 <종정관당> 또한 이양빙과 같고, <팔풍수존>은 이어지면서 교룡을 에워싸서 거의 당나라 인장의 체를 열었으나 무릇 와당은 모두 무전 유형이어서 응당 진나라 저울추와 한나라 양기, <사삼공산비>의 뒤에 첨부하여야 한다. 【주석】 (1) 綿繆?糾(면무규규) : ‘면(綿)’은 연속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고, ‘무(繆)’는 에워싸는 것이다. ‘규규(?糾)’는 고대 전설에 나오는 용이니, 『설문해자ㆍ충부(說文解字ㆍ?部)』에서 “용의 자식에 뿔이 있는 것이다[龍子有角者].”라고 하였다. ‘?’는 ‘叫’의 속자(俗字)이다. 여기에서는 글씨체가 에워싸고 서리며 구부러진 것이 마치 교룡과 같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漢鐘鼎文繆篆爲多, 太官鐘, 周陽侯銅, 丞相府漏壺, 慮?尺皆扁繆, 惟高廟, 都倉, 孝成, 上林諸鼎, 則有周鼎意. 若汾陰, 好(1)則肖(2)秦權, 都倉則婉麗同碑額矣. 【해석】 한나라 종정문에 무전이 많으니, <태관종>ㆍ<주양후동>ㆍ<승상부루호>ㆍ<여치척>은 모두 넓적하게 얽었는데, 오직 <고묘정>ㆍ<도창정>ㆍ<효성정>ㆍ<상림정>의 여러 정은 주나라 정의 필의가 있다. <분음정>ㆍ<호치정>과 같은 것은 진나라 저울추를 닮았고, <도창정>은 얌전하고 아름다움이 비액과 같다. 【주석】 (1) 汾陰好(분음호치) : <사고본>ㆍ<화정본>에는 ‘’, ‘상해본’ㆍ‘목이본’에는 ‘峙’, ‘호남본’에는 ‘?’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분음(汾陰)’은 전국시기 위나라 읍으로 한나라 때에 현으로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산서성 만영(萬榮)의 서남쪽으로 분수(汾水)의 남쪽이기 때문에 ‘분음’이라 하였다. ‘호치(好)’는 진나라에서 설치한 현으로 지금 섬서성 건현(乾?)의 동쪽이다. 여기에서는 ‘분음’ㆍ‘호치’ 두 곳에서 나온 한나라 정(鼎)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기(史記)』ㆍ『한서(漢書)』의 봉선서(封禪書)에 기록이 보인다. (2) 肖(초) : 이는 유사하다 또는 서로 같다는 뜻이니, 예를 들면 오직 묘하고, 오직 닮았다[惟妙惟肖]라는 것과 같다. 【원문】 余以光?壬午(1)登焦山, 摩娑(2)?鶴銘, 後問陶陵鼎, 見其篆瘦硬方折, 與?封?同, 心酷愛之. 後見王莽嘉量銘, 轉折方圓, 實開天發神讖之先, 而爲?臺銘之祖者, 筆意亦出於此. 【해석】 나는 광서 임오년(1882)에 초산에 올라 <예학명>을 어루만진 뒤에 <도릉정>을 물어 그 전서의 파리하고 굳세며 모나게 꺾은 것을 보고 <계봉등>과 같이 마음으로 매우 좋아하였다. 이후 <왕망가량명>을 보니, 전절의 모나고 둥글음은 실로 <천발신참비>의 선구를 열었고, <오대명>의 종주가 되었으며, 필의 또한 이에서 나왔다. 【주석】 (1) 光?壬午(광서임오) : 청나라 덕종의 연호(1875-1908)로 임오년은 1882년에 해당한다. (2) ‘사고본’ㆍ‘상해본’에는 ‘娑’, ‘화정본’ㆍ‘호남본’에는 ‘?’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원문】 及悟秦分本圓, 而漢人變之以方, 漢分本方, 而晉字變之以圓. 凡書貴有新意妙理, 以方作秦分, 以圓作漢分, 以章程(1)作草. 筆筆皆留, 以飛動作楷, 筆筆皆舞, 未有不工者也. 【해석】 진분(즉, 소전)은 본래 둥글었으나 한나라 사람이 모나게 변화시켰고, 한분은 본래 모났으나 진나라 글씨가 둥글게 변화시켰다. 무릇 글씨는 새로운 뜻과 묘한 이치를 귀히 여기니, 모난 것으로 진분을 쓰고, 둥근 것으로 한분을 썼으며, 장정서로 초서를 썼다. 필획마다 모두 머물러서 날아 움직이는 것으로 해서를 쓰고, 필획마다 모두 춤추어서 공교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석】 (1) 章程(장정) : 이는 즉 장정서(章程書)로 팔분서의 다른 이름이다. 왕차중이 해예(楷?)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이 편장(篇章)ㆍ법령을 쓰는 데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를 장정서라 일컫는다. 【원문】 凡漢分爲金爲石爲瓦, 有方有圓, 而無不扁密者, 學者引伸新體異態, 生意逸出, 不患無家數(1)也. 【해석】 무릇 한분은 청동기ㆍ돌ㆍ와당에 써서 모남도 있고 둥글음도 있었으나 넓적하고 긴밀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배우는 사람이 인신하여 새로운 형체와 기이한 자태로 삼아 생동한 뜻과 표일함을 나타내며, 유파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주석】 (1) 家數(가수) : 이는 학술 혹은 문예에서의 유파를 일컬으니, 황종희(黃宗羲)는 「강우당시서(姜友棠詩序)」에서 “처음 아직 일찍이 옛사람의 유파가 흉중에 있지 아니하였다[初未嘗有古人之家數存於胸中].”라고 하였다. 【원문】 鐘鼎爲?文, 然劉歆所採甚古(1). 攷古則當辨之, 學書不妨採之. 右軍欲引八分?書入?書中, 吾亦欲採鐘鼎體意入小篆中, 則新理獨得矣. 【해석】 종정문은 거짓 문자이나 유흠이 채용한 것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옛것을 고찰하면 응당 변별해야 하지만 글씨를 배우는 데에 이를 채용함은 거리끼지 않는다. 왕희지는 팔분서ㆍ예서를 끌어들여 해서에 도입하려고 하였고, 나 또한 종정문 체와 필의를 채용하여 소전에 도입한 것은 새로운 이치와 독특함을 얻으려 한 것이다. 【주석】 (1) 鐘鼎爲?文, 然劉歆所採甚古(종정위위문, 연유흠소채심고)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앞에서 유흠이 종정문을 채용하여 거짓 고문을 만들었다고 말한 이것은 또한 고문은 거짓 종정문이라 말한 것과 같다. 어떻게 거짓을 만들었는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하나는 진짜가 있으니,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 또한 어떻게 이를 구별하는가[前言劉歆采鐘鼎以僞古文, 此又似言古文以僞鐘鼎. 無論如何作僞, 必有一眞者矣, 其果孰眞孰僞乎. 又何從而別之乎]?”라고 하였다. 【원문】 吾以壬午試京兆(1), 中秋丁祭(2), 恭謁文廟, 摩?(3)石鼓, 仰瞻高宗純皇帝(4)所頒?尊十器, 乃始講識鼎?. 【해석】 나는 임오년(1882)에 경사에서 시험을 보았고, 중추 정제에 공손히 문묘를 배알하여 <석고문>을 어루만지고, 우러러 건륭이 반포한 이ㆍ준 10기물을 보고서야 비로소 정ㆍ이를 강구하여 알았다. 【주석】 (1) 壬午試京兆(임오시경조) : ‘임오(壬午)’는 청나라 덕종 광서 8년(1882)이고, ‘경조(京兆)’는 경사와 같은 말이다. (2) 丁祭(정제) : 옛날 봉건시대에 매년 중춘(음력 2월)과 중추(음력 8월) 상순 정일(丁日)에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정제(丁祭)’ 또는 ‘제정(祭丁)’이라 하였다. (3) ‘사고본’ㆍ‘상해본’에는 ‘?’, ‘화정본’ㆍ‘호남본’에는 ‘?’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4) 高宗純皇帝(고종순황제) : 즉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曆), 즉 청나라 건륭황제(재위기간, 1736-1795)를 가리킨다. 【원문】 南還遊揚州, 入焦山, 閱周無專鼎, 闇然渾古, 疏落?斜, 若崩雲乍頹, 連山忽起, 爲之心醉. 【해석】 남으로 돌아와 양주를 노닐고, 초산에 들어가 주나라의 <무전정>이 암연히 혼후하고 예스러우며, 성글고 기울며, 마치 무너진 구름이 잠깐 넘어지고 연이은 산이 갑자기 일어나는 듯한 것을 검열하고는 그것으로 인해 심취하였다. 【원문】 及戊子(1)再遊京師, 見潘?書伯寅(2)盛祭酒柏羲(3)所藏鐘鼎文, 以千計, 爛若雲錦(4), 天下之大觀也. 此學別爲專門, 今言書法, 略條一二, 以發學者意耳. 【해석】 무자년(1888)에 다시 경사를 노닐고, 반조음ㆍ성욱이 소장한 종정문 천 건을 헤아려서 보니, 찬란하기가 마치 운채 비단과 같아 천하의 웅대한 경관이었다. 이 학문은 별도로 전문이 되어 지금 서예라 말하니, 대략 한두 조목으로 배우는 사람의 뜻을 펴내었을 뿐이다. 【주석】 (1) 戊子(무자) : 이는 청나라 덕종 광서 무자년(1888)을 가리킨다. (2) 潘?書伯寅(반상서백인) : 반조음(潘祖蔭, 1830-1890)은 청나라 학자로 자는 백인(伯寅)이고 호는 정암(??)이며, 오현(吳縣) 사람이다. 그는 수장하는 것을 좋아하여 금석을 매우 풍부하게 모았다. 벼슬은 공부상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근(文勤)이다. 저서로는 『공순당총서(功順堂叢書)』ㆍ『방희재총서(滂喜齋叢書)』ㆍ『반고루이기관지(攀古樓?器款識)』 등이 있다. (3) 盛祭酒柏羲(성제주백희) : 애신각라(愛新覺羅) 성욱(盛昱, 1850-1899)은 청나라 학자로 자는 백희(伯熙)이고, 청나라 종실 사람이다. 벼슬은 제주에 이르렀고, 옛날 기물 감상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욱화각문집(郁??文集)』ㆍ『설극심비록(雪??碑錄)』 등이 있다. (4) 爛若雲錦(난약운금) : ‘난(爛)’은 찬란하고 광채가 있는 것이고, ‘운금(雲錦)’은 사직물의 이름으로 꽃무늬를 짠 것이다. 아름다운 무늬가 마치 운채와 같은 까닭에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것으로 반조음ㆍ성욱이 소장한 종정문이 풍부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원문】 鐘鼎亦有扁有長, 有肥有瘦, 章法有疏落有茂密, 與?無異. 擇而採之, 亦河海之義(1)也. 【해석】 종정문은 또한 넓적한 것, 긴 것, 살진 것, 파리한 것이 있고, 장법은 성근 것과 무성하고 긴밀한 것이 있어 예서와 더불어 다름이 없다. 선택하여 채용하는 것 또한 하해의 뜻이다. 【주석】 (1) 河海之義(하해지의) : 『사기ㆍ이사열전(史記ㆍ李斯列傳)』에서 “하해는 가는 흐름을 가리지 않는 까닭에 깊게 나아갈 수 있다[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라고 하였다. 이는 즉 적은 것을 모아 큰 것이 된다는 뜻이니, 여기에서는 전서를 배우면 겸하여 금문 서체의 장점을 모을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章法茂密, 以商太己?爲最古, 至周寶林鐘而茂密極矣. 疏落之體, 乃?篆之餘, 隨?皆然. 【해석】 장법이 무성하고 긴밀한 것은 상나라의 <태기유>를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고, 주나라 <보림종>에 이르러서는 무성하고 긴밀함을 다하였다. 성근 서체는 충전의 나머지이니, 열거함을 따르면 모두 그러하다. 【원문】 闕里(1)孔廟器以商冊父乙?爲最古, 焦山無專鼎亦其體. 楚公鐘奇古雄深, 尤爲傑作矣. 長瘦之體, 若楚曾鐘吳季子逞劍, 字窄而甚長, 極?娜之致. 【해석】 궐리의 공묘 기물로 상나라의 <책부을유>는 가장 오래되었고, 초산의 <무전정> 또한 그 서체이다. <초공종>은 기이하고 예스러우면서 웅장하고 깊어 더욱 걸작이다. 길고 파리한 서체는 <초증후종>ㆍ<오계자영검>과 같은 것은 글씨가 좁고 매우 길며, 지극히 아리따움에 이르렀다. 【주석】 (1) 闕里(궐리) : 이는 산동성 곡부현 성의 마을 이름이니, 『가어(家語)』에서 “공자가 처음 학생을 궐리에서 가르쳤다[孔子始敎學子闕里].”라고 하였으며, 『청일통지(淸一統志)』에서는 “[생각하건대, 노나라에 두 볼거리가 있는데, 궐의 이름이다. 대개 궐문 아래의 마을 이름이 궐리로 공자의 집에 가는데 이것이 있을 따름이다[按魯有兩觀, 闕名也. 蓋闕門之下, 其里卽名闕里, 而孔子之宅適在是耳].”라고 하였다.
【원문】 齊?鐘銘, 銘詞五百餘字, 文?古渾, 書亦渾美, 詛楚之先驅也. ?季敦, 魚冶妊鼎, 茂密?美, 甚近漢篆. 壽敦,蘇公篆體亦相同, 皆可用於秦分體者也. 正師戈字如屈玉, 又爲石經之祖. 若此類不可枚?, 學者善用其意, 便可前無古人矣. 【해석】 <제후박종명> 명문은 500여 자로 문장은 이미 예스럽고 혼후하며, 글씨 또한 혼후하고 아름다워 <저초문>의 선구이다. <시계돈>ㆍ<어야임정>은 무성하고 긴밀하면서 넓적하고 아름다워 매우 한나라 전서와 가깝다. <수돈>ㆍ<소공돈>의 전서체 또한 서로 같고, 모두 진분체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정사과>의 글씨는 마치 굽은 옥과 같고, 또한 <희평석경>의 종주가 되었다. 이와 같은 유형은 일일이 들 수 없으니, 배우는 사람은 그 뜻을 잘 운용하면 문득 이전 옛사람이 없을 것이다. 【원문】 自少溫?作, 定爲一尊(1), 鼎臣兄弟(2), 僅能模範(3), 長?曳尾, 體長益甚, 吾無取焉. 【해석】 이양빙이 이미 씀으로부터 하나의 표준으로 정하였고, 서현 형제는 단지 모범으로 삼을 뿐이며, 긴 다리와 끄는 꼬리의 형체는 길이가 더욱 심하여 나는 여기에서 취함이 없었다. 【주석】 (1) 定爲一尊(정위일존) : ‘존(尊)’은 최고 권위가 있는 사람을 가리키니, ‘정위일존(定爲一尊)’은 사상ㆍ학술ㆍ도덕 등에서 최고 권위가 있는 사람을 표준으로 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2) 鼎臣兄弟(정신형제) : 서현(徐鉉, 916-991)은 오대와 송나라 초의 문자학자로 자는 정신(鼎臣)이고 양주광릉(揚州廣陵, 지금의 강소성 揚州) 사람이다. 벼슬은 지제고ㆍ한림학사ㆍ이부상서ㆍ산기상시를 지냈기 때문에 ‘서상시(徐常侍)’ㆍ‘서기성(徐騎省)’이라 불렸다. 일찍이 『설문해자』를 교정하였다. 서개(徐?, 920-974)는 오대와 송나라 초의 문자학자로 자는 초금(楚金)이고 서현의 동생이다. 저서로는 『설문해자계전(說文解字繫傳)』 40권이 있다. 두 형제가 이름을 나란히 하여 ‘대소이서(大小二徐)’라 불렸다. (3) 模範(모범) : 이는 법을 취하고 본받음을 가리키는데 동사로 사용하였다. 【원문】 郭忠恕(1)致有奇思, 未完牆壁. 黨懷英筆力驚?, 能成家具. 自?以下, 等自於檜(2). 明世分法中?, 懷麓(3)宗師謙卦, 蚓笛蛙鼓(4), 難移我情. 【해석】 곽충서는 기이한 생각이 있었으나 아직 담과 벽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당회영은 필력이 놀랍게 뛰어나 풍격과 유파를 이룰 수 있었다. 이로부터 이하는 「회」 이하와 같이 말한 가치도 없다. 명나라에서 팔분서 법이 중간의 끊어지니, 이동양은 <겸괘명>을 종사로 삼아 지렁이의 피리와 개구리의 북소리처엄 저속하고 비루하여 나의 성정을 옮기기가 어렵다. 【주석】 (1) 郭忠恕(곽충서) : 곽충서(?-977)는 오대와 송나라 초의 화가ㆍ문자학자로 자는 서선(恕先)ㆍ국보(國寶)이고 낙양(洛陽, 지금의 하남성에 속함) 사람이다. 산수화와 문자학에 정통하였고, 전서ㆍ주문을 잘 썼다. 저서로는 『패휴(佩?)』ㆍ『한간(汗簡)』이 있는데, 고문자학 연구에 참고할 만하다. (2) ‘사고본’ㆍ‘상해본’ㆍ‘호남본’에는 ‘檜’, ‘화정본’에는 ‘?’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自於檜(자어회) : ‘회(檜)’는 즉 ‘회(?)’이니, 서주시기 때 제후의 나라 이름이고, ‘자어회(自於檜)’는 즉 ‘자회이하(自檜以下)’이다. 『좌전ㆍ양공이십구년(左傳ㆍ襄公二十九年)』에 의하면, 오나라의 계찰이 노나라에서 주 왕실 건립 이래의 음악과 무용을 감상하고 제후국의 악곡을 모두 평가하였는데, 「회풍(?風)」 이하는 더 이상 평론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후 ‘자회이하’는 뒤로 갈수록 떨어져서 말할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3) 懷麓(회록) :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의 실제 이름은 회록(懷麓)으로 자는 빈지(賓之)이고 호는 서애(西涯)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호남성 다릉(茶陵) 사람으로 ‘다릉시파’의 핵심인물이고, ‘전칠자’의 한 사람으로 복고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회록당집(懷麓堂集)』ㆍ『회록당시화(懷麓堂詩話)』 등이 있다. (4) 蚓笛蛙鼓(인적와고) : ‘인적(蚓笛)’은 세속에서 지렁이가 여름밤에 우는 것을 일컬으며, 또한 ‘인곡(蚓曲)’이라고도 일컫는다. 『포박자ㆍ박유(抱朴子ㆍ博喩)』에서 “지렁이는 입이 없으나 소리를 날린다[蚓無口而揚聲].”라고 하였는데, 지렁이는 사실 울 수 없다. ‘와고(蛙鼓)’에 대하여 『남사ㆍ공규전(南史ㆍ孔珪傳)』에서 “문전 뜰 안에 풀과 명아주를 깎지 않아 가운데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혹자가 물어 이르기를 “진번(?-168)을 위하고자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공규가 답하길 “나는 이를 2부의 고취곡으로 삼으려 하는데 어찌 진번을 본받겠는가?”라고 하였다[門庭之內, 草萊不剪, 中有蛙鳴. 或問之曰, 欲爲陳蕃乎, 珪笑答曰, 我以此當兩部鼓吹, 何必效蕃].”라는 구절이 보인다. 여기에서 ‘인전와고(蚓笛蛙鼓)’는 저속하고 천하며 비루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원문】 國初(1)猶守舊法, 孫淵如, 洪稚存(2), 程春海(3)?自名家, 然皆未能出少溫範圍者也. 完白山人出, 盡收古今之長, 而結胎成形, 於漢篆爲多, 遂能上掩千古, 下開百?(4), 後有作者, 莫之與京(5)矣. 【해석】 청나라 초에 오히려 옛날 법을 지켰으니, 손성연ㆍ홍량길ㆍ정사택은 함께 스스로 명가이나 모두 아직 이양빙의 범위에서 나올 수 없었다. 등석여가 나타나 고금의 장점을 모두 거두고, 온양을 맺고 형태를 이루며, 한나라 전서를 많이 써서 마침내 위로는 천고를 가리고 아래로는 백 년을 열어 이후 작가들이 더불어 나란히 할 수 없었다. 【주석】 (1) 國初(국초) : 이는 청나라 개국의 처음을 가리킨다. (2) 洪稚存(홍치존) : 홍량길(洪亮吉, 1746-1809)은 청나라 경학가ㆍ문학가로 자는 군직(君直)ㆍ치존(稚存)이고 호는 북강(北江)ㆍ갱생거사(更生居士)이며, 강소성 양호(兩湖, 지금의 常州) 사람이다. 벼슬은 편수를 지냈고, 경사ㆍ음운ㆍ훈고ㆍ지리학에 통하였으며, 변문은 당시 명성이 있었다. 저서로는 『홍북강집(洪北江集)』이 있다. (3) 程春海(정춘해) : 정사택(程思澤, 1785-1837)은 청나라 학자로 자는 운분(雲芬)이고 호는 춘해(春海)이며, 안휘성 흡현(?縣) 사람이다. 벼슬은 이부우시랑을 지냈고, 전서와 소학에 정통하였다. 시문 또한 뛰어났고, 가경ㆍ도광 연간에 왕원과 더불어 유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시랑유집(程侍?遺集)』ㆍ『국책지명고(國策地名考)』 등이 있다. (4) ?(사) : 이는 즉 ‘사(祀)’이니, 상나라에서 ‘년(年)’을 ‘사(祀)’라 일컬었으니, 『상서ㆍ홍범(尙書ㆍ洪範)』에서 “오직 13년이다[惟十有三祀].”라고 하였다. (5) 京(경) : 이는 ‘제(齊)’와 같으니, 『좌전ㆍ장공이십이년(左傳ㆍ莊公二十二年)』에서 “더불어 나란히 할 사람이 없다[莫之與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이후 서예가 증에 등석여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完白山人之得處, 在以?筆爲篆, 或者疑其破壞古法, 不知商周用刀簡(1), 故?法多尖, 後用漆書, 故頭尾皆圓, 漢後用毫, 便成方筆, 多方矯?, 佐以燒毫, 而爲瘦健之少溫書, 何若從容自在, 以?筆爲漢篆乎. 完白山人未出, 天下以秦分爲不可作之書, 自非好古之士, 鮮或能之. 【해석】 등석여가 얻은 곳은 예서 용필로 전서를 쓰는 데에 있다. 혹자는 고법을 파괴한다고 의심하였으나 상ㆍ주나라는 칼ㆍ간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주문 필법에 뾰족함이 많고, 이후 옻칠을 사용하여 썼던 까닭에 머리와 꼬리가 모두 둥글며, 한나라 이후 붓털을 사용하여 문득 방필을 이루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방필이 많은 것을 교정하고 도와주려 붓털을 태워 파리하고 굳센 이양빙 글씨를 이루었으나 어찌 느긋하고 자유자재하게 예서 용필로 한나라 전서를 쓰는 것과 같겠는가? 등석여가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 천하에서 진분은 쓸 수 없는 글씨라 여겨 스스로 옛것을 좋아하는 선비가 아니면 혹 이를 쓸 수 있는 이가 드물었다. 【주석】 (1) 刀簡(도간) : ‘도(刀)’는 칼, 즉 도필로 옛날 간독은 죽목을 사용하였는데, 칼로 깎아 필사하였던 까닭에 도필(刀筆)이라 일컫는다. ‘간(簡)’은 전국시기에서 위ㆍ진나라에 이르는 서사재료이다. 죽편ㆍ목편을 사용하여 깎아서 좁고 긴 형태를 이루는데, 죽편을 ‘간(簡)’, 목편을 ‘찰(札)’ 혹은 ‘독(牘)’이라 일컫고, 통칭하여 ‘간’이라 일컫는다. 【원문】 完白?出之後, 三尺??(1), 僅解操筆, 皆能爲篆. 吾嘗謂篆法之有鄧石如, 猶儒家之有孟子, 禪家之有大鑒禪師(2), 皆直指本心(3), 使人自證自悟, 皆具廣大神力功德, 以爲?化主(4), 天下有識者, 當自知之也. 【해석】 등석여가 이미 나온 이후 삼척동자도 겨우 붓 잡는 것을 이해하며, 모두 전서를 쓸 수 있었다. 나는 전서 필법에 등석여가 있는 것을 마치 유가에 맹자가 있고, 선가에 혜능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모두 곧바로 본심을 가리켜 사람이 스스로 증험하고 깨닫도록 하였으며, 모두 광대하게 신령한 힘과 공덕을 갖추어서 교화주로 여겼으니, 천하에 견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다. 【주석】 (1) ??(수동) : 이는 미성년의 남자를 일컫는 말로 아동을 가리키니, 일반적으로 폄하하는 뜻을 띠고 있다. (2) 大鑒禪師(대감선사) : 이는 즉 육조(六祖) 혜능(慧能)으로 당 헌종이 화 10년(815)에 시호 대감선사를 하사하였다. (3) 本心(본심) : 원래는 마음의 자연 상태를 가리켰으니, 즉 천부적으로 착한 성정을 일컫는다. 『맹자ㆍ고자상(孟子ㆍ告子上)』에서 “이것으로 그 본심을 잃었음을 일컬었다[此之謂失其本心].”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곧바로 본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을 계발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4) ?化主(교화주) : ‘교화(敎化)’는 정교풍화(政敎風化)로 교육하여 감화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니, 『시경ㆍ주남ㆍ관저서(詩經ㆍ周南ㆍ關雎序)』에서 “교화를 아름답게 하고, 풍속을 옮긴다[美敎化, 移風俗].”라고 하였으며, 『예기ㆍ경해(禮記ㆍ經解)』에서 “그러므로 예의 교화도 작고, 사악함을 멈추는 것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故禮之敎化也微, 其止邪也於未形].”라고 하였다. 따라서 ‘교화주(?化主)’는 교화를 하는 어른을 가리킨다. 【원문】 吾嘗學瑯?臺?山碑無所得, 又學李陽?三墳記, 栖(1)先瑩記, 城隍廟碑, 庾賁德政碑, 般若臺銘, 無所入. 後專學鄧石如, 始有入處. 後見其篆書, 輒復收之, 凡百數十種, 無體不有, 無態不備, 深思不能出其外也. 【해석】 나는 일찍이 <낭야대각석>ㆍ<역산각석>을 배워 얻은 바가 없었다. 또한 이양빙의 <삼분기>ㆍ<서선영기>ㆍ<성황묘비>ㆍ<유분덕정비>ㆍ<반야대제명>을 배워 들어간 바가 없었다. 이후 오로지 등석여를 배워 비로소 들어간 곳이 있었다. 이후 그의 전서를 볼 때마다 번번이 다시 거두어 무릇 백 수십 종이었는데, 형체가 있지 아니함이 없었고, 자태가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니, 깊이 생각하여도 그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주석】 (1) ‘상해본’ㆍ‘화정본’ㆍ‘목이본’ㆍ‘호남본’에는 ‘栖’, ‘사고본’에는 ‘棲’라 하였으나 탁본에 ‘’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원문】 於是廢然而返, 遂棄筆不復作者數年. 近乃稍有悟入處, 但以石鼓爲大宗, 鐘鼎輔之, 瑯?爲小宗, 西漢分輔之. 【해석】 이에 낙담하고 돌아와 마침내 붓을 버리고 다시 쓰지 않은 지가 수년이었다. 최근에서야 조금 깨달아 들어가는 곳이 있으니, <석고문>을 큰 종주로 삼고 종정문으로 이를 도왔으며, <낭야대각석>을 작은 종주로 삼고 서한시기 팔분서로 이를 도왔다. 【원문】 馳思於萬物之表, 結體於八分以上. 合篆?陶鑄(1)而(2)爲之, 奇態異變, 雜沓筆端, 操之極熟, 當有境界, 亦不患無立錐地也. 吾筆力弱, 性復懶, 度不能爲之, 後有英?之士, 當必於此別開生面也(3). 【해석】 생각은 만물의 겉을 달렸고, 형체는 팔분서 이상에서 맺었다. 전서ㆍ예서를 합하여 굽고 녹여 이를 쓰니, 기이한 자태와 변화가 섞여 붓 끝에서 합치고, 붓을 쥐는 것이 매우 익숙하였으며, 당연히 경지가 있음에 또한 송곳을 땅에 세울 수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필력이 약하고 성정이 다시 게으르며 헤아려 이를 할 수 없으니, 이후 뛰어난 선비가 있으면 마땅히 반드시 여기에서 별도로 새로운 국면을 열 것이다. 【주석】 (1) 陶鑄(도주) : ‘도주(陶鑄)’는 원래 와기를 구워서 제조하는 것을 ‘도(陶)’라 하고, 금속을 녹여 주조하는 것을 ‘주(鑄)’라 하였으나 이를 육성하다는 뜻으로 비유하였다. 여기에서는 전서ㆍ예서의 필법을 한 용광로에서 녹인다는 뜻이다. (2) ‘사고본’ㆍ‘상해본’에는 ‘而’가 있고, ‘화정본’ㆍ‘호남본’에는 ‘而’가 없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3) 自少溫?作(자소온기작)……於此別開生面也(어차별개생면야) : 이 단락에서 논술한 내용에 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석각에서 뛰어난 것은 아래로 진적이 일등이니, 이는 해서ㆍ행서로부터 말했을 뿐이다. 파책과 전절이 분명하게 자취가 있는 것은 체세로부터 정신을 모을 수 있다. 전서는 예로부터 장봉을 숭상한 것은 옻칠 간독에서 근원하였던 까닭에 비록 붓글씨로 고쳐 쓰더라도 감히 높은 법도를 위배하지 않고, 진실로 때에 마땅함을 위배하여도 오히려 옛것을 좇는 뜻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장봉인 까닭에 진적을 얻으면 또한 반드시 익숙하게 살핀 뒤에 필의를 얻을 수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서현의 글씨를 햇빛에 비치면 필획 가운데에 모두 하나의 선이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뒤집어 찾아 구한 뒤에 얻을 수 있다. 만약 한번 돌에 들였다면, 정신ㆍ성정ㆍ맥락이 모이고 흐르는 것을 모륵할 수 없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알겠는가? 다시 번각은 논할 수 없다. 이양빙의 결자는 <낭야대각석>의 굳세고 긴밀함만 같지 못하고, 또한 <역산각석>의 너그러움에 이르지 못하며, 전서 필법 또한 대부분 육서에 합하지 않으니, 이는 진실로 의론을 남기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삼분기>ㆍ<서선영기>ㆍ<성황묘비>ㆍ<유분덕정비> 등은 모두 번각이고, <겸괘명>은 본래 속체로 또한 자주 번각하였으며, <활대신역기>는 아마도 결코 원전을 번각한 것이 아닐 것이니, 이 두 종류는 더욱 말할 만하지 못한다. 오직 <순묘> 및 <안가묘비액>만 원석이나 글자가 많지 않다. <반야대제명>과 <이정명> 번본은 비록 많으나 원석이 아직 존재하고, <반야대제명> 원탁 또한 뛰어남을 볼 수 없다. 일찍이 <이정명> 원탁의 조금 오래된 것을 얻었는데, 넓은 기운이 가볍게 돌아옴을 느꼈고, 필획은 철을 구부린 묘함이 있어 번각본을 보아도 환하게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필의로 조금 <삼분기> 등 여러 각석을 깨달을 수 있고, 나의 뜻으로 잠긴 기운과 안으로 전환해 타당하고 뛰어난 것에 이를 수 없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두기는 찬(贊)에서 집에 효의를 전하고 기운은 풍운을 느낀다고 하였는데, 반드시 진적을 많이 보아 이 말이 있을 것이니 망령되게 탄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유위는 등석여가 유가에 맹자가 있고, 선가에 대감선사(즉, 혜능)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으나 나는 이양빙은 석가의 율종이고 유가에서는 정이ㆍ주자라 말하겠다. 만약 양생가에 비유하면, 등석여는 따름을 운용하였고, 이양빙은 거슬림을 운용하였다. 거슬림을 운용하는 것은 따름을 운용하는 것보다 어렵고, 장봉은 출봉보다 어렵다. 등석여는 스스로 자신의 전서는 이양빙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대개 힘을 낼 수 있으나 옛것을 감출 수 없음을 말하니, 참으로 득실을 마음으로 알았다는 말일 뿐이다. 오구연은 바로 석각을 모방할 때 한번 낙필하고 즉 출봉에 병폐가 있어 이에 붓끝을 태워 닮음을 구하였다. 옛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또한 본심의 편안함에서 구하지 못하였으니, 비유하자면 발을 깎아 신에 맞추고, 학을 잘라 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저것은 스스로 잘못이고 망령된 것일 따름이니, 이양빙을 어찌 나무라겠는가? 石刻精者下眞迹一等, 此自爲眞行言之耳. 以其波撥轉折, 顯?有迹, 可由體勢以會其情神也. 篆書古尙藏鋒, 以導源漆簡, 故雖改用毫書, 仍不敢背高曾規矩, 固違適時之宜, 而尙不失遵古之義. 然惟其藏鋒之故, 卽得眞迹亦必須細審熟視, 而後能得其筆意. 昔人謂徐常侍書, 向日映之, ?中皆有一線, 蓋反覆尋求而後得之. 若一經入石, 其神情脈絡所凝注, 無從摹勒, 何由而知之. 更無論飜刻矣. 少溫結字不如瑯?之?密, 亦不及?山之寬博, 其篆法又多不合六書, 此誠不無遺議. 然今所傳如三墳, 先塋, 城隍, 德政婢, 皆繫飜刻, 謙卦本俗體, 又屢飜刻, 滑臺殊石, 恐幷非原迹飜刻, 此二種更不足道. 惟舜廟及顔家廟碑額繫原石, 而爲字無多. 般若臺及怡亭銘?本雖多, 原石尙存, 般若原拓亦仍不能見其精彩. 嘗得怡亭原拓稍舊者, 乃覺灝氣回薄, 有筆可屈鐵之妙, 視?本煥然改觀矣. 因以此意微會三墳諸刻, 竊意其潛氣內轉, 妥適精能, 必有不可及者. 竇?贊以家傳孝義, 氣感風雲, 必多見眞迹, 乃有斯言, 非妄嘆也. 故長素謂完白如儒家之有孟子, 禪家之有大鑑禪師, 吾謂少溫乃釋家之律宗, 於儒家則程朱也. 若譬之養生家, 完白用順, 少溫用逆. 用逆難於用順, 藏鋒難於出鋒也. 完白自言吾篆不及少溫, 蓋能出力而不能藏舊, 眞得失心知之語耳. 吾丘衍正是模倣石刻, 一落筆而卽病其出鋒, 乃燒筆尖以求肖. 不知古人之意, 而又不求本心之安, 譬削趾以適履, 截鶴而爲鳧, 彼自謬妄耳, 於少溫何譏焉. 【원문】 吾邱衍曰, 篆法扁者最好, 謂之(1)扁. 徐鉉謂, 非老手不能到石鼓文字(2). 【해석】 오구연이 이르기를 “전서법에서 넓적한 것이 가장 좋으니, 이를 과편전이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서현이 이르기를 “노숙한 손이 아니면 <석고문> 글씨에 이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주석】 (1) ‘사고본’ㆍ‘상해본’ㆍ‘화정본’에는 ‘’, ‘호남본’에는 ‘?’라 하였으나 전자를 따른다. ‘扁(과편)’은 즉 ‘과편전(??篆)’으로 최융(崔融)은 「우비찬(禹碑贊)」에서 “신성 하나라 우임금은 <구루비>에 덕을 기록하고, 용의 그림으로 곁에 나눠 곁들이며, 복사뼈로 쓰고 넓적하게 새겼다[神聖夏禹, ??紀德, 龍畵傍分, ?書?刻].”라고 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서호, 강남의 이초금(李楚金) 무리들이 소전에 운용한 것을 ‘과편전’이라 불렀다. (2) 篆法扁者最好(전법편자최호)……非老手不能到石鼓文字(비로수불능도석고문자) :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변별하였다. <석고문>의 결자는 방원ㆍ장단을 갖추지 아니한 바가 없고, 그 격식은 실로 장방형에 매였으니, 옹방강이 기록한 “분촌을 심사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자형 또한 긴 것이 많고, 사이에 가로로 넓은 글자가 있어 치우쳐 논할 수 없다. 대개 중국문자는 위로부터 연속하여 아래로 내려가 결체가 조금 길어야 이치와 기세가 자연스럽다. 한나라 서체는 비로소 가로로 넓적한 형세로 변하였으나 그 격은 여전히 장방형을 많이 사용하였던 까닭에 행서의 관지는 가로가 매우 긴밀하고, 해서는 매우 성근데, 완원은 전서의 격으로 예서를 쓰는 것이 이것이라고 하였다.……최근 사람에 자형이 모나고 넓적한 것으로 <석고문>을 배운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손과 발이 구속되고 걸려서 조화가 유창하지 않음을 볼 따름이다. 맹교(孟郊, 자는 東野)는 ‘시의 죄수’가 되어 구속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글씨의 죄수’이다. 石鼓結字方圓長短無所不備, 其格實繫長方, 翁覃溪所記分寸可覆核也. 其字形亦長者爲多, 間有橫寬之字, 不得以扁論. 蓋中國文字自上蟬聯而下, 結體稍長, 乃理勢之自然. 漢體始變橫扁之勢, 然其格仍多用長方, 故行款橫處甚密, 而眞處甚疏, 阮文達謂以篆格作?書是也.……近人有以字形方扁爲學石鼓者, 正見其手足拘攣不調暢耳. 東野爲詩囚, 此眞字囚矣. 【원문】 唐篆美原神泉銘, 結體方?, 大有石鼓遺意. 李樞王宥謁岳祠題記, 吾寗(1)取之. ?臺銘?溪銘, 參用?筆, 戈戟相向, 亦自可人(1). 碧落碑筆法亦奇, 不獨託(1)體之古, 陽?見之, 寢臥數日不去, 則過陽?遠矣. 【해석】 당나라 전서 <미원신천명>의 결체는 모나고 넓적하며, 크게 <석고문>이 남긴 필의가 있다. 이추의 <왕유알악사제기>는 내가 차라리 취하겠다. <오대명>ㆍ<오계명>은 주문 용필을 섞어 사용하였고, 창과 창이 서로 향하는 것 또한 스스로 사람의 뜻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벽락비> 필법 또한 기이하고, 유독 형체의 예스러움을 의탁하지 않았다. 이양빙은 이를 보며 누워 자면서 며칠 떠나지 않았는데, 이양빙은 멀리 뛰어넘었다. 【주석】 (1) ‘사고본’ㆍ‘화정본’에는 ‘寗’, ‘상해본’ㆍ‘호남본’ㆍ‘목이본’에는 ‘零’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2) 可人(가인) : 이는 사람의 뜻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으로 즉 사람의 뜻을 만족시킨다는 뜻이다. (3) ‘사고본’ㆍ‘화정본’에는 ‘託’, ‘상해본’ㆍ‘호남본’에는 ‘托’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원문】 近世吳山子(1)作西漢分, 體態樸逸, ??欲度??前矣(2). 若加奇思新意, 雖筆力稍弱, 亦當與頑伯爭一席地. 【해석】 근대에 오육이 서한시기 팔분서를 썼는데, 형체와 자태가 질박하고 표일하며, 빨리 달려 화류마 앞으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만약 기이한 생각과 새로운 뜻을 더하면, 비록 필력이 조금 약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등석여와 한 자리를 다툴 만하다. 【주석】 (1) 吳山子(오산자) : 오육(吳育)은 청나라 서예가로 강소성 오강(吳江) 사람이다. 자는 산자(山子)이고, 조부 오조건(吳兆騫), 형 오조궁(吳兆宮)ㆍ오조관(吳兆寬)과 더불어 이름을 날려 당시 ‘삼봉(三鳳)’이라 불렸다. 전서를 잘 썼고, 포세신은 그의 서론을 취하였다. 저서로는 『사애재문집(私艾齋文集)』이 있다. (2) ??欲度??前矣(침침욕도화류전의) : ‘침침(??)’은 말이 빨리 달리는 모양이고, ‘화류(??)’는 또한 ‘화류(華?)’라고도 하니, 주 목왕 팔준마의 하나로 준마라 일컫는다. (度)’는 ‘도(渡)’와 통하니 넘어 지나가다는 뜻이니, 『남사ㆍ공범전(南史ㆍ孔範傳)』에서 “양자강은 천연적 참호로 예로부터 경계가 막혔으니, 포로 군사가 어찌 날아 지날 수 있겠는가[長江天塹, 古來限隔, 虜軍豈能飛度]?”라고 하였다. 기에서는 오육의 서예 형체와 자태가 질박하고 표일하여 거의 앞으로 초월하여 이후 위에 점유할 것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程?衫(1)吳讓之(2)爲鄧之嫡傳, 然無完白筆力, 又無完白新理, ?若孟子門人, 無任道統(3)者矣. 陳潮(4)思力頗奇, 然如深山野番, ?悍未解人理. 左文襄(5)筆法如董宣?項(6) 雖爲令長, 故自不凡. 【해석】 정전ㆍ오희재는 등석여의 직계로 전해지나 등석여의 필력이 없다. 또한 등석여의 새로운 이치도 없어 참으로 맹자 문하에 도를 전하는 정통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진조는 사고력이 자못 기이하나 깊은 산의 오랑캐가 사나우면서 아직 사람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좌종당의 필법은 동선의 빳빳하게 세운 목처럼 비록 우두머리이나 스스로 평범하지 않은 것과 같다. 【주석】 (1) 程?衫(정형삼) : 정전(程筌)은 청나라 가경ㆍ도광 연간의 학자로 강소성 의징(儀徵) 사람이고, 자는 형삼(衡衫)이다. 등석여의 제자로 전서ㆍ전각ㆍ산수화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국조서인집략(國朝書人輯略)』이 있다. (2) 吳讓之(오양지) : 오희재(吳熙載, 1799-1870)는 청나라 전각가ㆍ서화가이고, 원래 이름은 정양(廷?)이다. 자는 양지(讓之)이고 호는 만학거사(晩學居士)이며 강소성 의징(儀徵) 사람이다. 포세신의 학생으로 전각은 등석여를 배웠으나 자신의 풍격이 있다. 글씨는 전서ㆍ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사신헌인보(???印?)』ㆍ『통감지리금석고(通?地理今?稿)』ㆍ『오양지인보(吳讓之印譜)』 등이 있다. (3) 道統(도통) : 이는 도를 전하는 정통으로 송나라 이원강(李元綱)의 『성문사업도(聖門事業圖)』의 첫 번째 도에 ‘전도정통(傳道正統)’이라 하였다. (4) 陳潮(진조) : 진조(1801-1835)는 청나라 학자로 자는 동지(東之)이고 강소성 태흥(泰興) 사람이다. 평생 경학에 힘을 쏟았고, 소전을 잘 썼으며, 육조의 음운과 산학(算學)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속비전집(續碑傳集)』이 있다. (5) 左文襄(좌문양) : 좌종당(左宗棠, 1812-1885)은 자가 계고(季高)이고 호는 상상외인(湘上畏人)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광서 6년(1881)에 군기대신으로 양강총독을 지낸 양무파(洋武派)의 수령이다. 저서로는 『좌문양공전집(左文襄公全集)』이 있다. (6) 董宣?項(동선강항) : 동선은 동한시기 진류어(陳留?) 사람으로 자는 소평(少平)이고, 광무제 때 낙양령을 지냈다. 광무제의 딸 양호공주의 집 종이 사람을 죽이고 공주의 집에 숨었다. 동선은 공주가 길을 나서자 사람을 시켜 종을 죽였다. 공주가 황제에게 하소연을 하자 황제는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죄하라고 하였으나 동선은 두 손을 땅에 대고 머리를 빳빳하게 세우고는 끝내 숙이려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를 ‘강항령(强項令)’이라 일컬으니, 이로부터 후려치는 횡포에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문】 近人多爲完白之書, 然得其姿媚靡靡(1)之態, 鮮有學其茂密古樸之神. 然則學完白者雖多, 能爲完白者其誰哉. 【해석】 최근 사람은 등석여의 글씨를 많이 쓰나 자태의 아리따움이 풍부한 것만 얻고, 무성하고 긴밀하며 고박한 정신을 배우는 이가 드물다. 그러한즉 등석여를 배우는 이가 비록 많으나 등석여가 될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주석】 (1) 靡靡(미미) : 여기에서는 아름다움이 풍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원문】 吾?僻遠海濱, 與中原文獻不相接, 然藝業精能, 其天然勝, 工夫備, 可與虎臥中原抗衡上國者(1), 亦有其人. 【해석】 나의 광동성은 멀리 떨어진 해안으로 중원 문헌과 서로 접하지 않았으나 예술의 정미함과 능함은 자연적으로 뛰어났고, 공부를 갖추었으며, 호랑이가 누워있는 중원과 상국을 대항할 만한 이가 또한 있다. 【주석】 (1) 虎臥中原抗衡上國者(호와중원항형상국자) : ‘상국(上國)’은 제후가 황실을 일컫는 것이니, 『후한서ㆍ진번전(後漢書ㆍ陳蕃傳)』에서 “상국을 지키고 가리었다[藩屛上國].”라고 하였다. 또한 춘추시기 제ㆍ진나라 등 중원의 강대한 제후국을 ‘상국’이라고도 하였다. 원래의 뜻은 제후국이 황실을 웅시하여 서로 대항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광동성 지역의 서예가 성취가 있어 중원의 문헌에 나오는 서예 명가들을 웅시하여 서로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원문】 吾見先師朱九江(1)先生, 出其前明九世祖白岳先生諱完者(2)手書篆?, 結體取態, 直與完白無二, 始歎古今竟有暗合者. 但得名不得名, 自視世風所?耳. 捻道人(3)之心無二, 徐遵明(4)之指心爲師, 亦何異陸子靜(5)哉, 但風?不同, 尊卑??耳. 【해석】 나는 주차기 선생이 명나라 9대조 주완이 손으로 쓴 전서ㆍ예서를 내놓은 것을 보고 결체에서 형태를 취한 것이 곧바로 등석여와 둘도 없이 같으므로, 비로소 고금은 결국 암암리 합함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이름을 얻는 것과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세상 풍조에서 숭상하는 바를 볼 뿐이다. 방진유의 마음은 둘이 없고, 서준명은 마음을 가리켜 스승이라 하였으니, 또한 육구연과 무엇이 다르랴? 단지 풍조 숭상이 같지 않고, 높고 낮음이 판이하게 끊어졌을 뿐이다. 【주석】 (1) 朱九江(주구강) : 주차기(朱次琦, 1807-1881)는 청나라 학자로 자는 자양(子襄)이고 호는 치규(稚圭)이며, 광동성 남해(南海) 사람이다. 함풍 연간(1851-1861)에 진사가 되어 지양릉을 지낸 뒤에 구강향에 은거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구강선생(九江先生)’이라 불렸다. 영자팔법에 뛰어났으나 만년에 원고를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단지 몇 글자만 얻더라도 보배로 여겼다. (2) 白岳先生諱完者(백악선생휘완자) : 주완(朱完, 1559-1617)는 명나라 학자로 자는 계미(季美)이고 호는 백악산인(白岳山人)이며, 광동성 남해(南海) 사람이다. 의협심이 있었고, 시와 난죽에 뛰어났으며, 서예는 전서ㆍ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홍강만록(虹岡漫錄)』ㆍ『백악산인집(白岳山人集)』 등이 있다. (3) 捻道人(염도인) : 방진유(方震孺, 1585-1645)는 명나라 화가로 호는 염도인(捻道人)이고 안휘성 수현(壽縣) 사람이다. (4) 徐遵明(서준명) : 서준명(475-529)은 후위의 경학가로 자는 자판(子判)이고 화음(華陰, 지금의 섬서성 渭水의 남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하여 여러 선생은 모시면서 공부하여 스스로 “내가 지금 진짜 선생이 있는 곳을 알았다[吾今知眞師所在矣].”라고 하였다. 이에 각고의 노력으로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며 밖을 나가지 않은 지가 6년이었다. 마침내 여러 경에 박통하여 해내에서 숭상을 받으면서 큰 선비라 불렸다. 『춘추의장(春秋義章)』을 지었으나 이미 없어졌다. (5) 陸子靜(육자정) : 육구연(陸九淵, 1139-1193)은 남송시기 철학가ㆍ교육가로 자는 자정(子靜)이고 호는 존재(存齋)이며 무주금계(撫州金溪, 지금의 강서성에 속함) 사람이다. 일찍이 초가집을 짓고 강서성 상산에서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상산선생(象山先生)이라 불렸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설을 제시하여 마음과 이치는 영원불변이라 하였다. 학문의 방법은 ‘입대(立大)’ㆍ‘지본(知本)’ㆍ‘발명본심(發明本心)’이다. 단지 본심을 깨우칠 수 있으면 반드시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왕양명이 계승하고 발전시켜 ‘육왕학파(陸王學派)’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육상산선생전집(陸象山先生全集)』ㆍ『명유학안(明儒學案)』 등이 있다. 【원문】 道光間, 香山黃子高(1)篆法茂密雄深, 迫?斯(2)相, 自唐後碑刻, 罕見?匹. 雖博大變化, 不逮完白, 而專精之至, 亦拔戟成隊. 此猶史遷(3)之與班固(4), 昌黎之與柳州(5), 一以奇變?能, 一以摹古擅?, 亦未易遽爲優劣. 【해석】 도광 연간(1821-1850)에 향산 황자고의 전서 필법이 무성하고 긴밀하며 웅장하고 깊어 참으로 이사를 핍박하였으며, 당나라 이후 비각으로부터 드물게 짝한 것이 보인다. 비록 넓고 큰 변화는 등석여를 이르지 못하나 오로지 정미함이 이른 것 또한 창을 뽑아 대열을 이루었다. 이는 마치 사마천과 반고, 한유와 유종원 같이 하나는 기이한 변화로 일컫는다면, 다른 하나는 옛것을 본받음에 뛰어났으니, 또한 아직 쉽게 갑자기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주석】 (1) 黃子高(황자고) : 황자고(1794-1839)는 청나라 서예가로 자는 숙립(叔立)이고 향산(香山) 사람이다. 금석고증에 정통하였고, 소전을 잘 썼다. (2) 斯(사) : 이는 이사(李斯)를 가리킨다. (3) 史遷(사천) : 사마천(司馬遷, 약 기원전 145-기원전 135?)은 서한시기 사학가로 자는 자장(子長)이고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漢城) 사람이다. 그는 『사기(史記)』를 지어 후대 사학ㆍ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인들은 그가 ‘양사(良史)’의 재주가 있다고 하면서 ‘사천(史遷)’이라 불렀다. (4) 班固(반고) : 반고(32-92)는 동한시기 사학가ㆍ문학가로 자는 맹견(孟堅)이고 부풍안릉(扶風安陵, 지금의 섬서성 咸陽 동북쪽) 사람이다. 조서를 받들어 부친이 지은 것을 20년에 걸쳐 완성하여 『한서(漢書)』라 하였으니, 단대사의 체례를 열어 주었다. 또한 『양도부(兩都賦)』ㆍ『백호통의(白虎通義)』ㆍ『반난대집(班蘭臺集)』의 저술이 있다. (5) 柳州(유주) :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당나라 문학가ㆍ철학가로 자는 자후(子厚)이고 하동해(河東解, 지금의 산서성 運城縣 解州鎭) 사람이다. 일찍이 유주자사를 지냈기 때문에 세칭 ‘유유주(柳柳主)’라 한다. 철학에서 유교ㆍ불교ㆍ도교, 삼교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원문】 世人貴耳賤目, 未嘗攷古辨?, 雷同一談, 何足以知之. 番?陳蘭甫(1)京卿, 出於香山, 亦自雄駿也. 【해석】 세상 사람은 귀를 귀히 여기고 눈을 천히 여기며, 아직 옛것을 고찰하고 진짜를 변별하지 않고 부하뇌동하여 한결같이 말하니, 어찌 족히 안다고 하겠는가? 번우의 진풍은 경사에서 벼슬하였고 황자고에서 나왔으며, 또한 스스로 뛰어난 준마이다. 【주석】 (1) 陳蘭甫(진란보) : 진풍(陳?, 1810-1882)은 청나라 학자ㆍ문학가로 자는 난보(蘭甫)이고 호는 동숙(東塾)이며 광동성 번우(番?, 지금의 廣州) 사람이다. 그는 광주학해당에서 10년간 강의를 하였고, 만년에는 다시 국파정사에서 강의를 하여 따르는 학생들이 매우 많았다. 경학에서 한ㆍ송나라 문호의 견해를 힘써 배척하였고, 천문ㆍ지리ㆍ음률ㆍ음운ㆍ산술의 학문을 널리 섭렵하였다. 글씨를 잘 썼고, 저서로는 『동숙독서기(東塾讀書記)』ㆍ『절운고(切韻考)』ㆍ『성률통고(聲律通考)』 등이 있다. 【원문】 杜工部(1)不?陽?之篆, 而?李潮. 吾邱衍謂潮?陽?, 人或疑之. 【해석】 두보는 이양빙의 전서를 일컫지 않고 이조를 일컬었다. 오구연이 ‘조(潮)’라 한 것은 즉 이양빙이나 사람들은 혹 이를 의심한다. 【주석】 (1) 杜工部(두공부) : 두보(杜甫, 712-770)는 당나라 시인으로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이다. 검남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부에서 참모를 지냈다가 검교공부원외랑을 지냈던 까닭에 ‘두공부(杜工部)’라 일컫는다. 【원문】 唐書宰相世係表, 雍門子, 長湜, 次?, 字堅?, 次陽?, 潮之爲名. 與湜?相類, 陽?與堅?爲字相類. 甫詩曰, 況潮小篆逼秦相(1). 而歐陽集古鄭漁仲(2)金石略俱無潮篆, 其爲一人, 無可疑也(3) 【해석】 『당서ㆍ재상세계표』에서 옹문자의 장남은 식이고, 차남은 해이며, 자는 견빙이라 하였고, 다음 양빙은 조라 이름하였다. 식ㆍ해는 서로 같고, 양빙과 견빙은 글자가 서로 같다. 두보의 시에서 “하물며 이조의 소전은 이사를 핍박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양수의 『집고록』, 정초의 『금석략』에는 이조의 전서가 없으니, 한 사람임을 의심할 수 없다. 【주석】 (1) 況潮小篆逼秦相(황조소전핍진상) : 이는 두보의 「이조팔분소전가(李潮八分小篆歌)」에서 보인다. ‘진상(秦相)’은 이사(李斯)를 가리킨다. (2) 鄭漁仲(정어중) : 정초(鄭樵, 1102-1060)는 남송시기의 학자로 자는 어중(漁仲)이다. 저서로는 『통지(通志)』 200권이 있다. (3) 其爲一人, 無可疑也(기위일인, 무가의야) : 이 단락의 내용은 유희재(劉熙載)의 『서개(書槪)』에 보인다. 이에 대하여 황소기(黃紹箕)는 『광예주쌍즙평어(廣藝舟雙楫評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식은 「묵묘정시」에서 두보가 글씨는 파리하고 굳셈을 귀히 여긴다는 설을 반박하였다. 즉 이조에게 보내는 시를 가리키는데, 중간에 “천년의 필법을 이양빙에게 남겼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이조가 즉 이양빙이라는 방증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이양빙의 전서 비에는 스스로 ‘潮’라 쓴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坡公墨妙亭詩, 駁杜陵書貴瘦勁之說, 卽指贈李潮詩, 而中有千載筆法留陽氷之句, 此潮卽陽氷之一傍證. 而金所傳陽氷篆碑, 無一自署潮者, 此不能無疑. 【원문】 秦分體之大者, 莫如少溫般若臺, 黃帝祠宇, 次則?敏碑額, 字大漢寸六寸. 若曹喜大風歌, 字亦尺餘, 亦秦分體之極大者, 但非漢人書耳. 【해석】 진분체의 큰 것은 이양빙의 <반야대제명>ㆍ<황제사우> 만한 것이 없고, 다음은 <초민비액>으로 글씨는 한나라 척도로 6촌이다. 조희의 <대풍가> 같은 것은 글씨 또한 1척 이상이고, 또한 진분체에서 아주 큰 것이나 한나라 사람 글씨가 아닐 뿐이다. 【원문】 西漢分體, 亦有數種, 今?存於世者別白箸(1)焉. 其東漢挑法者, 詳本漢篇. 【해석】 서한시기 팔분서체는 또한 몇 종이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을 들어 명백하게 분별하여 여기에 기록한다. 동한시기의 도법은 본한제칠(本漢第七) 편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주석】 (1) ‘사고본’에 ‘箸’라 한 것 이외에 모든 본에서 ‘著’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別白箸(별백저)’에서 ‘별백(別白)’은 명백하게 분별한다는 뜻이다. 1. 秦權量刻字 <진권량각자> 2. 魯泮池刻石 <노반지각석>은 <노왕반지각석(魯王泮池刻石)>ㆍ<노효왕각석(?孝王刻石)>ㆍ<오봉각석(五鳳刻石)>이라고도 일컬으며, 서한시기 선제 오봉 2년(기원전 56), 즉 노 효왕 34년에 새겼다. 3. 中殿刻石 <중전각석>의 전체 명칭은 <광릉중전석제기(廣陵中殿石題記)>이고, <여왕중전각석(?王中殿刻石)>이라고도 일컫는다. 4 建平?縣刻石 <건평비현각석>은 일반적으로 <건평비현석각(建平?縣石刻)>이라 일컫는다. 5. 永光三處閣道刻石 <영광삼처각도각석> 6. 開通褒斜道刻石 <개통포사도각석>은 동한시기 명제 영평 9년(66)에 세웠고, 섬서성 한중(漢中) 포성진(褒城鎭) 북쪽의 석문(石門) 남쪽 마애 벽에 있다. 7. 裴岑紀功碑 <배잠기공비>의 전체 명칭은 <한돈황태수배잠기공비(?敦煌太守裴岑?功碑)>로 순제 영화 2년(137)에 파리곤(巴里坤)에 세웠다. 8. 石門殘刻 <석문잔각> 9. ?閣頌 <부각송>의 전체 명칭은 <이흡절리교포각송(李翕折里????)>으로 동한시기 영제 희평원년(172)에 새겼고, 원석은 섬서성 약양(略陽)에 있다. 10. 戚伯著碑 <척백저비>는 <발해태수척백저비(渤海太守戚伯著碑)>이다. 11. 楊淮表紀 <양회표기>의 전체 명칭은 <사예교위양회표기(司?校尉?淮表?)>이고, 동한시기 마애각석으로 영제 희평 2년(173)에 포사도(褒斜道)의 마애 벽에 새겼다. 12. 會仙友題字 <회선우제자>는 또한 <한안선집자(?安仙集字)>ㆍ<한소요산석굴제자(?逍?山石窟?字)>라고도 일컫는다. 동한시기 순제 한안원년(142)에 사천성 간양현(簡陽縣) 소요동굴 바위벽에 새겼다. 【원문】 右以篆筆作?之西漢分, 食官鐘銘, 綏和鐘銘亦同, 魏太和石門摩崖由此體也. 北海相景君銘曳?似天發神讖, 漢鐸(1)有永平二年者, ?茂似?閣, 亦可?焉. 【해석】 위는 전서 필획으로 예서를 쓴 서한시기 팔분서이니, <식관종명>ㆍ<수화종명> 또한 같고, 위나라 태화 연간(477-499)의 <석문마애>는 이로 말미암은 체이다. <북해상경군명>에서 다리를 끄는 것은 <천발신참비>와 같고, <한택>에 ‘영평이년’이란 글자가 있는 것은 풍요롭고 무성하며 <부각송>과 같아 또한 여기에 첨부할 수 있다. 【주석】 (1) 鐸(탁) : 고대 악기로 형태는 요(?)ㆍ정(鉦)과 같으면서 혀[舌]가 있는 큰 방울의 일종이다. 춘추시기에서 한나라까지 성행하였다. 1. 三公山碑 <삼공산비>의 전체 명칭은 <한상산상풍군사삼공산비(?常山相?君祀三公山碑)>이고, 속칭 <대삼공산비(大三公山碑)>라고 하며, 일반적 <사삼공산비(祀三公山碑)>라 일컫는다. 옹방강은 동한시기 안제 원초 4년(117)에 새긴 것이라 고증하였다. 2. 是吾碑 <시오비>는 <도관시오비(都官是吾碑)>로 또한 <연광잔비(延光?碑)>라고도 일컫는다. 동한시기 안제 연광 4년(125)에 세웠다. 3. 天發神讖碑 <천발신참비>는 삼국시대 오나라 천새원년(276)에 새겼다. 이를 또한 <천새기공비(天??功碑)>라고도 일컬으며, 송나라 이전에 이미 3개의 돌로 잘라졌기 때문에 <삼단비(三?碑)>라고도 일컫는다. 【원문】 右以?筆作繆篆, 亦可?於西漢八分. 慮?尺同(王?州(1)曰, 夏承碑有四分之篆, 天發神讖碑五分之篆, ?所謂八分書是也). 【해석】 위는 예서 필획으로 무전을 썼는데, 또한 서한시기 팔분서에 첨부할 만하다. <여치척>도 같다.(왕세정이 이르기를 “<하승비>는 4푼의 전서가 있고, <천발신참비>는 5푼의 전서이니, 즉 이른바 팔분서는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1) 王?州(왕엄주) :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명나라 문학가로 자는 원미(元美)이고, 호는 봉주(鳳洲)ㆍ엄주산인(?州山人)이며 태창(太倉, 지금의 강소성에 속함) 사람이다. 벼슬은 남경형부상서에 이르렀고, 이반룡(李攀龍)과 더불어 ‘후칠자(後七子)’의 수령으로 문장은 반드시 진ㆍ한나라, 시는 성당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희곡에도 연구가 있었고, 저서로는 『예원치언(藝苑?言)』ㆍ『엄산당별집(?山堂別集)』ㆍ『왕씨서화원(王氏書畵苑)』 등이 있다. 1. 三老碑 <삼로비>는 전체 명칭이 <한삼로휘자기일비(?三老?字忌日碑)>이고 절강성의 제일의 옛날 비로 삼국시대 위나라 황초 4년(223)에 세웠다. 2. 尊楗閣記 <존건각기> 【원문】 右由篆變?, ?多篆少之西漢分, 建武時之碑僅此. 【해석】 위는 전서로 말미암아 예서로 변했으니, 예서가 많고 전서가 적은 서한 팔분서이며, 건무 때(304)의 비는 단지 이것뿐이다. 【원문】 吾於漢人書酷愛八分, 以其在篆?之間, 樸茂雄逸, 古氣未?(1). 至桓靈已後, 變古已甚, 滋味殊薄. 吾於正楷不取唐人書, 亦以此也. 【해석】 나는 한나라 사람의 글씨에서 팔분서를 매우 좋아하니, 전서ㆍ예서 사이에 있으면서 소박하고 무성하고 웅장하고 표일하며, 예스러운 기운이 아직 엷어지지 않았다. 환제ㆍ영제 이후에 이르러 예스러움이 변한 것은 이미 심하여 맛이 매우 엷어졌다. 내가 해서에서 당나라 사람의 글씨를 취하지 않은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주석】 (1) 古氣未?(고기미리) : ‘리(?)’는 엷다는 뜻이니, 여기에서는 한나라 사람 팔분서의 소박하고 무성하고 웅장하고 표일하며 예스러운 기운이 아직 순후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
출처: 한국서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