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1부 / 알을 낳지 않겠어!
방금 낳은 알이 굴러 내려 철망 끝에 걸렸다. 잎싹은 핏자국이 약간 있고
윤기 없는 알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잎싹은 이틀 동안 알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알을 못 낳는 암탉이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또 낳고 말았다. 그것도 작고 볼품없는 알을.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주인 여자가 이런 알도 가져갈까? 알이 점점 작아진다고 불평하면서도 꼬박꼬박 꺼내 갔으니 볼품없다고 남겨 두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먹은 것도 없이 알을 낳았으니 당연했다.
'뱃속에 알이 몇 개나 더 남았을까?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잎싹은 한숨을 쉬며 밖을 보았다. 닭장 철망 속에서나마 잎싹 은 밖을 내다볼 수 있다. 문 쪽에 살기 때문이다. 양계장 문이 잘 맞지 않아서 언제나 문틈으로 아카시아나무가 보였다. 잎싹은 그 사실이 더없이 좋았다. 그래서 겨울에 찬바람이 들이치고, 여름에 비가 들이쳐도 군소리 없이 견디며 살아왔다.
잎싹은 난용종 암탉이다. 알을 얻기 위해 기르는 암탉이라는 말이다. 잎싹은 양계장에 들어온 뒤부터 알만 낳으며 일 년 넘게 살아왔다. 돌아다니거나 날개를 푸덕거릴 수 없고, 알도 품을 수 없는 철망 속에서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남몰래 소망을 가졌다. 마당에 사는 암탉이 앙증맞은 병아리를 까서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뒤부터였다.
'단 한 번만이라도 알을 품을 수 있다면. 그래서 병아리의 탄생을 볼 수 있다면...’
알을 품어서 병아리 탄생을 보는 것. 잎싹은 이 소망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알이 굴러 내려가도록 앞으로 기울어진데다 알과 암탉 사이가 가로막힌 철망 속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양계장 문이 열리고 주인 남자가 외바퀴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꼬꼬꼬, 아침밥이다!"
"배고프다, 빨리빨리 줘, 꼬꼬끄" 암탉들이 보채는 소리로 양계장 안이 시끄러워졌다.
"먹성이 좋은 만큼 값을 해야지! 사료값이 또 올랐으니까" 주인 남자가 바가지로 모이를 퍼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잎싹은 눈을 깜짝이며 활짝 열린 문 밖에만 신경을 썼다.
잎싹은 얼마 전부터 입맛을 잃었다. 알을 낳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주인 여자가 알을 가져갈 때마다 잎싹은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알을 낳을 때 뿌듯하던 기분은 곧 슬픔으로 바뀌곤 했다. 발끝으로조차 만져 볼 수 없는 알, 바구니에 담겨 밖으로 나간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도 없는 알을 일 년 넘게 낳다 보니 잎싹은 지쳐 버렸다.
눈부신 바깥. 마당 끝에 있는 아카시아나무에 새하얀 꽃이 피었다.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양계장까지 들어와 잎싹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잎싹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철망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털이 숭숭 빠진 맨 목덜미가 빨갛게 드러났다.
'잎사귀가 또 꽃을 낳았구나!’
잎싹은 아카시아나무 잎사귀가 부러웠다. 눈을 가늘게 떠야 겨우 보이던 연두색 잎사귀가 어느 새 다 자라서 향기로운 꽃을 피워 냈다. 잎싹은 양계장에 갇히던 첫날부터 아카시아나무를 보았다. 처음에는 아카시아나무에 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 안 가서 꽃은 눈송이처럼 날리며 졌고, 초록색 잎사귀만 남았다. 초록색 잎사귀는 늦은 가을까지 살다가 노랗게 물들었고, 나중에 조용히 졌다. 거친 바람과 사나운 빗줄기를 견딘 잎사귀들이 노랗게 질 때 잎싹은 감탄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연한 초록색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또 감탄했다.
잎싹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진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세상에 또 없을 거라고 믿었다. 바람과 햇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떨어진 뒤에는 썩어서 거름이 되는 잎사귀. 그래서 결국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내는 게 잎사귀니까. 잎싹도 아카시아나무 그 잎사귀처럼 뭔가를 하고 싶었다.
잎싹은 아카시아나무 잎사귀가 부러워서 '잎싹'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 지어 가졌다. 아무도 불러 주지 않고, 잎사귀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분이 묘했다. 비밀을 간직한 느낌이었다. 이름을 갖고 나서부터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문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달이 차고 기우는 일, 해가 떠오르는 일, 마당 식구들이 아옹다옹 다투는 일까지.
"많이 먹어라. 큼직한 알 쑥쑥 낳게!"
주인 남자가 또 큰 소리로 말했다. 모이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소리였다. 잎싹은 이제 그 소리에 넌덜머리가 났다. 그래서 들은 척도 안 하고 잠자코 마당만 바라보았다.
마당 식구들도 아침을 먹느라 바빴다. 식구가 많은 오리들은 함지박을 빙 둘러싸고 하나같이 꽁무니를 쳐든 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먹어 댔다. 늙은 개도 게걸스레 먹어 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밥그릇을 따로 차지하고도 허겁지겁 먹는 것은 수탉 때문이었다.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콧잔등을 피 나게 쪼인 뒤부터 늙은 개는 수탉을 겁냈다.
수탉 부부 함지박은 자리가 넉넉했다. 딸린 식구가 없어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 건 수탉 부부뿐이다. 그런데도 수탉은 이따금 공연히 늙은 개의 밥그릇을 넘보곤 했다. 늙은 개가 꼬리를 내리고 으르렁거려도 수탉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당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수탉은 멋지게 솟은 꽁지깃과 붉은 볏을 가졌다. 게다가 겁을 모르는 눈과 날카로운 부리까지 있어서 무척 늠름해 보였다. 새벽마다 "꼬끼오오!" 하고 외치는 게 수탉의 일이다. 그것 말고는 기껏해야 온종일 암탉과 어울려 밭으로 들판으로 쏘다니는 게 전부였다.
잎싹은 마당에 있는 암탉을 볼 때마다 철망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잎싹도 수탉과 함께 두엄을 헤치거나 나란히 걷고 싶었다. 그리고 마당의 암탉처럼 알을 품고 싶었다. 오리들과 늙은 개, 수탉과 암탉이 어울려 지내는 마당. 그 곳은 잎싹이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다른 세상이었다. 아무리 목을 내밀어도 철망을 빠져 나갈 수 없고 깃털만 뽑혔으니!
'왜 나는 닭장에 있고, 저 암탉은 마당에 있을까?’
'모르겠어. 왜 그럴까?’
잎싹은 혼자서 묻고 대답하곤 했다.
수탉 부부가 관상용 토종닭이라는 사실을 잎싹이 알 리 없었다. 그리고
혼자서 낳은 알은 아무리 품어도 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진작에
알았다면 알을 품고 싶다는 소망 따위는 아예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침을 다 먹은 오리들이 아카시아나무 아래를 지나서 앞산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덩치가 조금 작고 깃털 색깔도 완전히 다른 청둥오리가 무리의 맨 뒤에서 집오리들을 따라갔다. 청둥오리의 머리는 아카시아나무 잎사귀처럼 초록색이라 오리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괙괙'거리는 소리나 걷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오리였다. 청둥오리가 어떻게 해서 이 마당에서 살게 되었는지 잎싹은 알지 못했다. 다만 생김새가 별나니까 눈여겨볼 따름이었다.
넋을 놓고 바깥 구경을 하는데 주인 남자가 다가왔다.
"응? 이게 뭐야?"
주인 남자가 모이를 주려다 말고 중얼거렸다. 엊저녁 모이가 그릇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알을 꺼내는 일은 주인 여자가 하기 때문에 주인 남자는
모이 주기가 끝나면 밖으로 나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요즘 들어서 통 먹질 않는군. 쯧쯧, 병든 모양이야." 주인 남자가 못마땅해하며 핏자국이 있는 알과 잎싹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알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주인 남자의 손가락이 닿자 알이 물렁하게 들어가며 잔주름이 잡혔다. 잎싹은 속으로 몹시 놀랐다. 작고 볼품없다고만 생각을 했지 물렁한 알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 껍데기도 여물지 못했다니...’
주인 남자는 이맛살을 찌푸렸을 뿐이지만, 잎싹은 가슴이 아프게 긁히는 것 같았다. 알을 빼앗길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처럼 아프진 않았다. 지금은 울음이 목구멍까지 꽉 차서 온 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가엾게 껍데기도 없이 나오다니.
주인 남자가 물렁한 알을 마당에 휙 던져 버렸을 때 잎싹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알이 소리도 없이 땅바닥에 퍼지자 늙은 개가 와서 핥아먹었다. 얇은 막까지 남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암탉으로 태어나서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잎 싹은 진저리를 치며 부리를 앙다물었다.
'절대로 알을 낳지 않겠어! 절대로!
첫댓글 알을 계속 낳아야 언젠가는 품어도 볼텐데요....!!
잎싹은 혼자서 무정란만 낳아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