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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왕국 역사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프라까샤다르마왕(Prakāśadharma, 재위 653~687)의 시대를 거치면서 참족은 이제 바다를 떠돌던 유랑민족이나 도래인(渡來人)에서 벗어나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해안에 정착하여 날로 융성해가는 신흥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족에게 적(敵軍) 이라면 여전히 반도의 동쪽 해안 전부를 오로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수시로 침략하는 비엣족(Nam Viet)이었다. 중국(후한과 수나라)이 참족의 정착을 막고 남진하기 위하여 식민지배하는 비엣족을 앞세워 여러 차례 쳐들어왔었으나,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협약을 통해 조공을 받치면서 군사적 압력에서 벗어났음이며, 오히려 당나라와 국제 교역을 확대하면서 당나라 조정과 참족 사이에 공동의 이익을 크게 창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버림받고 치인 꼴이 된 비엣족은 절치부심(切齒腐心) 반듯이 처절한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磨) 라고 해야 할까? 모든 일이 제 뜻대로만 되어 질 수는 없는 것 또한 세상살이의 이치(理致)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제까지의 군사적 충돌은 오로지 북쪽의 상림현 인근을 방어하는 비엣족과의 분쟁이 전부였는데, 참족이 바다 비단길(실크로드)로 불리는 해상무역을 통해 아주 부유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소문이 온 세상에 자자하게 되자 그만....... 사방에서 참파왕국을 노리는 새로운 적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탈라소크라시(thalassocratie)로 명명된 새로운 거대 해상세력(海上制覇))이 등장한 것이다. 남중국해에 등장한 막강한 해상세력이 수마트라와 자바는 물론 말레이반도 지역까지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해상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중국해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버린 해적 떼들이 거의 모두 이들 탈라소크라시의 소규모 파견 분대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들 탈라소크라시의 혹여 배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들의 롤 모델이 된 것이 바로 대마도를 근거지로 멀리 동남아 원정까지를 감행했던 왜구(倭寇)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서기 767년 자바 출신의 칼라소크라시에 속하는 쿤룬 해적들이 북쪽 하노이 앞바다에 해당하는 통킹만을 습격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점차 확대되어 반도의 전체 해안지역은 물론 무역선을 탈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하여 마침내 해적들은 참파왕국의 근거지와 다름없는 까우타라(K까authara. 나짱)를 습격하여 포 나가르(Po Nagar) 사원을 불태우고 여신의 부조상이 새겨진 황금동판을 약탈해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해적들의 침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787년엔 나짱 이남의 중요거점인 현재의 판랑(Phan Rang)지역의 고대도시 비라푸라(Virapura)에 침입하여 도시하나를 완전 쑥대밭으로 약탈한 후에 불태워버렸다. 이들의 극에 달한 만행은 이 시기에 즉위하여 해군력 증강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인드라바르만 1세(재위 799–64) 왕에 의해서 모두 쫓겨났을 때 까지 피해가 그야말로 너무도 극심했다.
참파왕국을 침입 노략하던 해적들의 활동은 이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바야흐로 인도차이나반도의 역사는 거대한 해일처럼 대변혁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만 하겠다
소규모 해적들의 활동이 참파왕국의 함대를 이용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거의 소멸되었다고는 하나 참파왕국이라는 화려하고 값진 노획물을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나 일렀던 것이다. 수마트라와 자바 섬은 물론 말레이 반도의 곳곳에 나누어져 부족단위의 여러 왕국으로 활약해오던 세력들이 해상 세력과 손을 잡고 대대적인 왕국차원의 대륙침략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꼭 유의해야 할 것이........ 이들 수마트라와 자바와 말레이반도의 모든 왕국들이 전부 참파 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일거에 정리하게 위해선 이런 상황쯤이 되면 이들을....... (참파족)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폴리네시안) 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이다. 베트남에 상륙한 참파족의 고향에서 온 큰집 식구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살짝만 비틀어서 보게 되면 이해가 아주 쉽고도 빠르게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시아 반도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섬들이 놓여 있다.
거기에 뿌리는 같지만 여기저기 자기 입맛대로 흩어져 사는 수많은 참파 부족 집단이 있지만 부족들 끼리 외에는 단절된 채 각자 도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 숫자가 늘어나고 교류가 시작되면서 마찰과 분쟁이 생겨났고, 이제 이것들은 생사를 건 전쟁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승자는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었고 패자는 노예가 되는 동물의 왕국이 바야흐로 여기 섬나라에서도 시작이 된 것이다. 사실 이들 참족의 애초 조상 또한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로 이곳까지 바다를 건너와 흩어져 살아왔던 것인데 말이다.
부족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하게 되면 왕국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지만, 패하게 되면 드러나는 뻔한 결과에 두렵거나 아예 전쟁을 피하고자 한다면 어디로든지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망을 택했다면 침략자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어야 하고,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딱 하나..... 어딘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 바다를 건넌 어딘가를 찾아가 정착을 해야만 하는 것뿐이다. 적들이 쫓아오지 못한 안전지대는 바로 거기밖에는 없게 되고, 다른 선택이란 애초부터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태초에서부터 참족에게 내려지고 부여된 가혹한 운명이었던 것이다. 참족은 아주 오랜 고대에 시작된 그런 시련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그런 유전적 운명은 이들 도래인(참족)에게까지 고스란히 핏줄 속에 내재된 채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르네오와 자바와 말레이반도의 왕국들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안착한 참파왕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떠했을까?
‘내 집에서 몰래 도망친 노비가 다른 곳에 정착해 성공을 하더니 나보다도 호사스럽고 부유하게 잘살고 있네?’
그럼 어떤 생각과 행동이 뒤를 따르겠는가? ‘도망친 노비는 영원히 내 소유이고, 그가 가진 모든 재화와 영토 또한 당연히 내가 주인이야.’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들 해양세력(보르네오. 자바. 말레이반도)들은 한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재산을 되찾으러 나섰다. 저마다 제 지역에서는 방귀 좀 꾼다는 바다의 부족왕국들이 거창하게 합종연횡(合縱連橫)의 전선을 형성했던 것이다. 저마다 한계가 극심하게 드러난 열악한 군사력을 거창한 ‘참파왕국 정복’이라는 기치 하에 모여들기는 했으나, 꿈만 야무졌을 뿐 국가단위 급의 제대로 된 전쟁을 치러본 경험들이 전무했다. 해적질 정도의 약탈이 아니라 육지에 점령을 해서 적진을 돌파해 가며 점령을 해야 하는데........ 참파 왕국은 당장 막강한 해군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백 년 동안 비엣족을 넘어 거대제국인 중국(한나라. 수나라. 당나라)과 숱한 전쟁경험을 충분하게 갖춘 바야흐로 버젓한 봉건국가였던 것이다.
참파왕국에게 서너 차례 도발을 감행해 슬쩍 간을 본 해양세력들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노비를 무작정 잡아들이려다가는 그보다 먼저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나서 망하겠다.’
그렇다고 눈앞에 출세해서 신수가 훤해진 노비를 그냥 두고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당장 몰아칠 것이 아니라 인근에 교두보를 확실하게 마련하고 나서 호시탐탐 대세를 가를 틈을 살펴보아야 하겠다고 작전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 반도의 북쪽은 비엣족(당나라 정부)가 차지하고 있고, 중남부 지역은 강력해진 참파왕국이 차지하고 있지만, 반도의 맨 끝자락 남부 해안은 좀 사정이 다르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번 (참파왕국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도입부에, 보르네오 섬이었던 말레이시아 반도였던 아니면 태평양의 섬들 중에서 어딘가에서 한 무리의 부족들이 인도차이나반도의 베트남 중부 나짱(Nha Trang) 부근에 나타나면서(渡來人) 참파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도래인들이 상륙한 땅은 본래 비엣족(Nam Viet. 월족)의 영토로 진시황(중국)의 남침에 복속된 이후로 북쪽 중국 국경인근의 원남성 일대에서 하노이 부근까지만을 그나마 겨우 비엣족이 차지한 상태였기에 도래인들이 점차 참파부족의 왕국을 세우기까지 그나마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참족이 바다를 건너와 나짱에 자리를 잡고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을 때, 반도의 남쪽에는 이미 남인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상한 힌두교 문화를 바탕으로 한 푸난왕국(Funan)이 부족국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아울러 계속 바다를 건너와 참족에 합류한 사람들 중에 많은 무리가 남하하여 푸난 왕국에 합세했다고도 밝혔다.
그 푸난 왕국(Funan)이란 명칭이 본래는 첸라 왕국(Chenla)을 가리키는 말로써, 훗날 중국이 바다 비단길(실크로드)을 통해 무역을 하게 되면서,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해양 거점으로 첸라를 거론하면서 푸난(Funan)이라 부른데서 기인한 첸라의 다른 이름이 바로 푸난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부 학자의 경우엔 푸난과 첸라가 별도의 부족국가였으나 어떤 일로 이른 고대에 합병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자료에 따른 제각각의 해석이 여전히 분부하지만)
어쨌거나....... 필자가 보기에 참파왕국 보다도 약간 빠른 시기에 힌두교 부족국가인 첸라(Chenla)가 이미 있었고, 바다를 건너온 참파족의 많은 인원이 여기 첸라왕국으로 들어가 섞여 살았다. 그러고 나서 나짱의 참족이 북쪽의 비엣족(한나라. 오나라. 수나라)과 수백 년 동안 전쟁을 불사하면 참파왕국으로 성장해 쩐끼에우(Trà Kiệu. 호이안 근처)에 수도를 세우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 시점까지, 첸라왕국에 흡수된 참족들도 성장을 계속해 갔다. 장사를 통해 부를 일구었고 결혼동맹을 통해 왕국의 권력에 접근했으며 적어도 5세기 이전엔 첸라 왕국의 왕이 이들 참족의 후예에서 나왔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 하에서 이지만....... 첸라 역사의 후반기는 참족 출신의 왕들에 관한 이야기가 확실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결국 5세기 후반 이후의 역사는 참파왕국 역사나 첸라의 역사가 같은 가족(종족)간의 부족사로서, 이들 간에는 드러난 교류나 거래가 특별한 것이 없으며, 다툼이나 전쟁 또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느닷없이 몰려 온 해양세력(보르네오. 자바. 말레이반도)들이 장차 참파왕국을 도모 할 거점 바로 여기 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첸라 왕국을 콕 집어서 골랐던 것이다.
아마도 해양 세력의 입장에선....... 참파왕국인 도망쳐서 크게 성공한 자기 집 노비였다고 생각했다면, 첸라는 그 노비와 혼사를 시킨 참파의 처갓집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바와 수마트라 섬을 실질적으로 차지하고 지배하면서 동남아의 가장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던 사일 렌드라 (Sailendra) 왕조의 해군부대가 첸라 왕국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들은 이미 그동안 빈번하게 참파왕국의 해안을 습격한 해적질에 아주 능통한 집단이었다. 하지만 너무 자신만만했던 때문인지 그만 싸움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 앞에 끌려나온 해적 우두머리를 노려보던 젊고 야망에 가득 찼던 마히파티바르만(Mahipativarman) 첸라 왕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났음인지, ‘가서 내 말을 고스란히 너의 왕에게 전하라. 한 번 더 까불게 되면 부하들을 보내 너희 왕의 잘려진 목을 지금처럼 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라며 호통을 쳐서 포로를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포로는 걸음아 나살려라 죽어라 도망쳐서는 자신의 왕에게 고스란히 일러 바쳤다. 아니지. 역사를 통 털어 이런 상황에서 있는 고대로만 고해바치는 놈(?)은 절대 없었다. 붙잡힌 자신의 체면을 쬐끔이라도 되살리려면 부풀리고 확대재생산하고 연출까지 더해서 염장을 있는 대로 최대한 내질러야만 한다.
그런데 말이다. 일단 쌍욕(?)을 실컷 했으니 첸라의 마히파티바르만(Mahipativarman) 왕 입장에선 일단 속이 시원하고 신하들 앞에 권위가 팍팍 서는 것 까지는 좋았다고 하겠는데...... 그 욕을 고스란히 받아먹은 사일렌드라스(Sailendras)의 다라닌드라 (Dharanindra) 왕은 기분이 어땠을까? 부하가 전쟁에서 패해서 생겨난 일이니 어쩔 수없이 그냥 넘어가야 했을까? 아님 기가 팍 죽었을까?
또 그런데 말이다. 첸라 왕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비록 섬나라이기는 하지만 사일렌드라스 왕조의 역사서에 다라닌드라 왕은 장차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언급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까지 그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당시에 드넒은 서태평양 인근의 모든 바다에서는 이미 다라닌드라 (Dharanindra) 하면 언제나‘와이리와라위라마르다나(Wairiwarawiramardana)’라고 소문이 자자했었던 것이다. 이를 굳이 우리말로 뜻을 퍼 옮겨본다면 ‘용감한 적의 학살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다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음 이야기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오게 될까?
화딱지가 잔뜩 난 왕은 즉시 배에 올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바다를 건너 첸라의 영토를 급습하여 도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해일이 불어 닥치고 세찬 폭풍우가 첸라를 마구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용감한 학살자’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패기 하나만은 둘째가라면 서운했을 첸라의 왕이 군대를 수습하여 정면으로 박차고 나와 공격을 감행했는데 아뿔싸........... 이 공포의 정복자 앞에서는 그냥 한 주먹꺼리도 되지 못하고 풍비박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포로로 잡아다가 야단을 치고 교훈을 내리고 뭐...... 이런 것 하나도 없었다. 승리한 왕이 다가가 다짜고짜 한 칼에 패배한 왕의 목을 내리쳐 잘라버렸다. 잘려진 목은 죽은 자가 이미 내뱉은 말처럼 쟁반에 담아 자바 섬으로 가져가 버렸다. 죽은 왕의 후계자인 왕자와 귀족과 신하들을 잔뜩 잡아서 잘려진 왕의 목과 함께 자바 섬으로 끌고 갔다.
그럼 이제 첸라 왕국은 멸망한 것이냐? 실질적으로는 이때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첸라의 역사는 조금 더 이어져 내려가게 된다.
다라닌드라 (Dharanindra) 정복왕은 첸라를 완전 멸망시키는 대신에 자야바르만 1세라는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식민지 관리 감독관을 파견하여 첸라를 속국으로 삼는 형태의 지배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정부의 중심지가 바로 쁘레 노코르(현재의 사이공. Saigon)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 정복자에게는 여기 반도 끝자락의 왕국에 눌러 앉아 사는것 보다 바다 한가운데 자바나 보르네오 섬의 해상왕국에 거주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첸라의 왕세자와 왕족과 귀족들은 자바 섬에 볼모로 끌려가 인질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우리나라 고려사와 조선사에 왕세자들이 중국에 볼모로 끌려가고, 왕위의 승계 때마다 피바람을 몰고 왔던 것처럼)
이렇게 볼 때 첸라왕국(Chenla empire)이나 이어질 훗날의 크메르왕국(Khmer empire)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분명한 또 하나의 참파왕국(Charmpa empire) 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필자인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굳게 믿고 있다. 이를 모두 부인하기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위에 게재한 사진들은 크메르 왕국의 문화재와 생활문화를 담은 사진들이다.<이번 참파 이야기에 사용되는 모든 사진들은 오로지 이해와 설명을 위해 모두 구글 이미지를 통해서 퍼온 사진들임을 거듭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이미 익히 잘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앙코르와트 사원을 통해 힌두교 문화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우리들이 아닐까 느껴질 정도이다. '앙코르 모습들이 그냥 크메르하다'라고 해야할까? 어디서든 대충 저런 풍경이나 문화재와 인물 사진을 보면 대부분 우선 (앙코르와트)를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이 '힌두교 문화'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되고, 힌두교 문화의 주체들이 적어도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바로 '참족(Champa)' 이라는 사실까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이들의 문화는 모두 베트남의 역사와 박물관과 주로 중부지역에 흩어져 있는 참족 문화재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힌두교 문화와 베트남의 힌두교 문화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모두 동일한 문화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틀림없는 '참족(Champa)'이며 모두가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가만히 살펴 보라!!!
지금 당장 캄보디아에 산재해 있는 (크메르 제국의 문화재) 사진과 베트남에 흩어져 있는 (참파왕국의 문화재 사진)이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단정지었다가 혹여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인도차이나반도를 구분짓는 민족에 대한 견해는 다분히....... 지금의 국가들 국경선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고 보는 시선들도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비엣족의 나라(참파족은 과거 역사속에서만), 캄보디아는 크메르족의 나라, 태국은 타이족의 나라, 라오스는 약간의 혼합민족 성격을 띄고, 미얀바는 버마족의 국가 라고 보는 인식들 말이다. 어느 나라나 민족이 되었건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앞세우게 되면 일방적인 자기들만의 주장이 돋보이기 마련이고..... 흡사 이런 과열된 주장들은 주변의 너른 시선이나 공인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주장이 될 수 있다.
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민족주의 등장'을 지극히 경계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어디까지나 그냥 객관적이며 보편 타당한 상식선에서의 개인적 소견으로 이해를 해주셨으면 하고 바라본다."
"또 하나의 참파왕국 <크메르 제국>의 등장"
이러한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로 이 대목에서는 사일렌드라스 왕조의 정복왕 다라닌드라 (Dharanindra)에 의해서 자바섬으로 볼모로 끌려간 첸라왕국의 마지막 왕세자에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목숨이 살아있는 한 적어도 첸라왕국의 역사가 아직은 단절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아직 왕위에 정식으로 오르지 못했으므로 첸라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맥이 모두 끊긴 것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왕조의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허수아비 왕이 아니라, 비록 인질 상태라고는 하나 살아있는 왕자에게 아직은 분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왕자는 그리 오래지 않아 고난 끝에 끝내 왕위에 오르게 되며 역사는 그를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라고 적었다. 덧붙여 그는 가장 위대한 성군이자 용맹한 전사로 영원히 추앙받는 크메르왕국(Khmer empire)의 초대 왕이 되었다.
적왕이 휘두르는 칼날에 선왕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장면을 목격한 어린 왕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군다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적왕의 손에 강제로 끌려가 멀고 먼 적국의 수도에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인질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했을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기약 없는 인질생활을 겪어야 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이야기가 책이나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한 추측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결코 아니리라.
흔하게 역사 기록에 따르자면 대략 두 부류로 나뉜다. 복수에 눈이 멀어 날뛰다가 하루아침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와 공포에 빠져들어 자폐아가 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들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적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순응하면서 겨우 생명을 보전해 나가는 꼭두서니 인간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그 고난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은 다정한 친구와 같은 멘토(Mento)가 반드시 필요하다. 위대한 스승이나 천하무적 호위무사나 절대적인 어머니의 사랑 정도로는 그가 가진 왕자라는 고귀한 신분과 그가 책임져야 하는 국가와 백성에게까지 희망과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멘토는 스승과 좀 다르다. 멘토는 다정한 벗과도 좀 다르다. 어쩌면 멘토는 조금은 막연한 관심과 조언과 꾸준한 신뢰를 보여주고 보탬이 되어주는 존재라고 하겠다. 위기와 고난의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본인의 탁월한 재능과 용기와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위기 때마다 지혜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드러나지 않는 멘토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하여,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의 유배시절 그를 곁에서 보좌한 멘토에 대해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아낼 수가 없었다. 끝까지 그는 조용히 숨어서 미래의 성군을 노심초사 뒷바라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슬기로운 멘토를 만날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따라 사뭇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내가 익히 알고 기억하는 멘토 역할의 극과극의 대비되는 인물을 꼽자면 나는 이 두 사람을 꼽겠다.
천당에 해당하는 사람은 오스만 투르크의 재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술탄 메메트 2세의 멘토였던 할릴 파샤다.
유년시절 메메트 2세는 용맹스럽고 똑똑하고 고집스러운 장래가 촉망되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후보였다. 다만 성격이 급하고 포악하며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모진 성격으로 인해 아버지 무라트 2세 술탄의 노여움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는 점심 때 닭고기를 뜯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닭다리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황태자는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몸종을 의심했다. 하지만 몸종은 끝까지 닭다리를 먹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분노한 황태자는 군사를 불러 몸종의 배를 가르도록 명령했다. 배를 갈라 조사해 보면 거짓인지 아닌지 알지 않겠느냐는 확신에 차서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배를 갈랐으나 닭고기는 나오지 않았고 몸종은 그만 죽어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 술탄은 분노했고, 황태자의 지위를 박탈했고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 버렸다. 포악한 아들이 술탄에 오르면 오스만 제국은 틀림없이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에 그를 술탄 후보에서 제명시켜 버린 것이다. 유배지에서 분노를 사그라트리지 못하고 사고만 치고 있는 메메트에게 최고 귀족이었던 하릴 파샤가 찾아왔다. 그는 훌륭한 술탄이 되고 제국을 다스리자면 메메트 같은 성정의 탁월한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술탄은 무엇이든 빼앗을 수 있고 차지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죽이고 살릴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술탄만의 고유 권한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지위는 술탄이 아니라 후계자 후보일 뿐이다. 아직은 당신의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참고 노력하고 기다리면서 보다 훌륭한 술탄이 되기 위하여 공부하고 깨닫고 준비하면서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이다. 이 고난의 시간을 현명하게 극복한 다음에, 바야흐로 당신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그때는 당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무엇이든지 다 해도 되는 술탄의 시간이 고스란히 모두 당신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다음날부터 메메트 2세는 완전히 180도 달라진 완전 다른 인간으로 변모한다. 온순해지고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말을 끝까지 공손하게 경청하고 하인과 노예들에게까지 공손한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책을 읽고 명상에 잠기며 술과 노래를 끊었다. 시간이 지나서는 명문가와 덕망이 높은 신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대화를 통해 제국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백성들의 칭송이 따라다니며 울려 퍼졌다.
이젠 아버지 무라트 2세 술탄으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미래를 맡길 인재는 역시나 메메트 2세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변모한 아들은 유래에 없는 성군(成君)의 지질을 가진 훌륭한 인재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술탄은 메메트 2세를 불러들이고 술탄의 자리를 양위했다. 무라트 2세는 후진으로 물러난 것이다. 술탄의 지위에 오른 메메트는 멘토 할릴 파샤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리고 치세를 펼쳐나갔다.
아버지 무라트 2세가 사망했다. 그러자 술탄 메메트 2세는 재상 할릴 파샤를 체포했고 끝내는 사형에 처해 버렸다. 그리고는 본래의 유년시절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당신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야. 나는 그 가르침을 오랜 시간동안 참고 견디며 모두 이행했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야.'
이제 자신은 진짜 술탄이 되었으며 진짜 술탄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라고 판단했다. 멘토의 가르침대로 이 시간을 기다리며 인내의 시간을 어제까지 견뎌왔던 것이다. 그것은 절대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부터를 위해 어제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고 희생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끝내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고, 이슬람 세계를 위한 정복전쟁을 벌여 발칸반도로 진출해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심장부까지 진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만약에 할릴 파샤가 그의 멘토가 되지 못했다면....... 메메트는 술탄이 되지 못했고 세계사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옥에 떨어진 멘토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제갈 양(諸葛亮)’을 나는 주저 없이 꼽겠다. 제갈공명은 후한시대 촉나라의 재상으로 ‘천기를 읽으며 귀신을 부리고 모든 병법에 통달하니 능히 세상을 다스릴만한 인재로서 손색이 없다’라고 평가받는 희대의 천재라고 불릴만한 인물이다. 유비가 삼고초려를 자처하며 모셔 온 제갈공명은 유비가 임종을 앞두고 ‘만약 내 아들 유선이 나라를 다스릴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판단되시면, 차라리 재상께서 이 나라를 맡아주십시오’ 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인물 중의 인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희대의 천재는 유선의 됨됨이와 앞날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끝내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왕의 자리는 한시적일 뿐이며, 충과 효를 앞세우는 유교주의 세상은 영원할 것이라는 천기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리 유비의 당부가 있었다 치더라고 서열이 분명한 황손을 내치고 신하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불충이며 반역을 저지른 역적으로 영원이 악명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덜떨어진 자질이 매우 부족한 황손이지만 끝까지 그를 위해 헌신한다면 승패를 떠나 영원히 충신의 반열에 으뜸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공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끝내 그는 후자를 택했다.
결국 제갈공명은 유선(漢 懷帝 劉禪)의 멘토로 남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멘토가 천기를 읽고 귀신을 부리고 신묘한 조화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병법에 천재이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놈(?)이 한심을 넘어 맹추에다가 방탕하고 오만불손하고 주색잡기에만 혈안인 시전잡배만도 못하다면 말이다. 그 유선이라 놈이 딱 그 모양새였다. 어쩌다 보니 혈통이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점을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완전히 무늬뿐인 허접한 황손이었던 것이다.
천하의 제갈공명도 유선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제갈공명의 한계였고 촉나라의 저주받은 운명이었다. 애초에 장판교 싸움에서 백만이나 되는 조조군의 진영을 혈혈단신으로 휩쓸고 다니면서 ‘조자룡이 낡은 창을 마치 하늘이 내려 준 신창을 쓰듯이 적진을 휩쓸고 다녔다’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내면서 까지 전진 한복판에서 구해내온 핏덩이가 바로 거랑말코 유선이었으니....... 혹여, 그때 조자룡의 상상초월 용맹함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유선은 전쟁터에 버려진 고아 내지는 없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제갈양이 촉나라를 이어 받았던가 다른 황제를 옹립했을 것이고 전쟁 판도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제갈공명은 하늘을 놀래 키고 감동시킬 정도의 불세출의 천재였지만..... 멘토로서는 빵점이었다.(내 주관적 생각 안에서는 말이다)
이번 사진들은 베트남 중부 영토인 호이안 인근의 참파왕국 수도였던 고대도시 트라키우(Trà Kiệu)에 실재했던 참파왕국 사람과 문화재 풍경이다. 그 핵심은 참족의 종교적 성지인 힌두교 사원지역 미선 유적지(My Son Sanctuary) 풍경들이다.
이 풍경들을 다시 한 번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풍경 사진들과 비교해 살펴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라는 국가 영역만 다를 뿐 과연 무엇이 다른가?
고대 크메르 왕국의 힌두문화 역시 참족의 문화였던 것이다.
사일렌드라스(Sailendras)의 정복왕에게 끌려 자바섬에서 인질 생활을 시작하게 된 어린 왕자의 시련은 이후로 어떻게 펼쳐졌을까? 적국의 왕자 신분에다가 인질상태였기에 본국 첸라의 정치상황에 따라 언제 어떻게 죽음이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생활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훌륭한 멘토가 곁에 있었다. 하여 그에게는 이 암울한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첸라로 살아 돌아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펼칠 매래를 기약하면서 남모르게 준비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왕자는 본래 건장한 신체로 태어났으나 인질 생활이 길어지는 동안에 깡마르고 허약하며 고분고분한 내성적인 유약한 청소년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힌두교 경전을 읽거나 명상에 잠기는 것을 생활의 전부로만 여기는 태도였다. 짬이나면 노예들을 도와 꽃밭을 가꾸고 시녀들과 함께 자바의 궁중무용을 연습했다. 도무지 사내다운 낌새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변했다. 하지만, 자바 왕국의 모든 행사에 반듯이 참여하였고, 왕실의 행사에는 빠짐없이 찾아가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왕실 사원을 찾아다니며 사일렌드라스 왕조의 번영을 위해 힌두신에게 제를 올릴 정도였다. 가히 인질에서 적국의 신하로 체질 변화를 감행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복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 얼마나 신통한 모습이었겠는가?
하지만, 보여 지는 것이 모두 전부는 아니었다. 어린 왕자에게는 훌륭한 멘토가 있었으니 말이다. 멘토는 왕자에게 남성다움이나 분노하는 눈빛이나 자존심까지 모두 철저하게 감출 것을 부탁했다. 적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처음부터의 목적이었다. 나약하고 별들어 보이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채 어떻게든 정복왕이나 왕국의 신하들에게 한심하고 쓸모 없지만 살려두고 보기에 흡족한 인형 같은 존재로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남의 시선을 피해 첸라 왕국의 역사를 공부했고, 대륙(중국)에서 흘러 들어온 서책들과 병서를 읽었다. 고국 첸라의 정황을 넘어 적국 사일렌드라스 왕국의 내부사정은 물론 참파왕국과 주변 국가들의 정세 흐름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어린 왕자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자신과 첸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난의 시간을 헤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일렌드라스(Sailendras) 왕국의 다라닌드라 (Dharanindra) 정복왕에게도 서서히 한 시대가 저무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 누구라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복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스리 마하라자 사마라그라위라 (Sri Maharaja Samaragrawira)가 새로운 자바와 수마트라의 왕으로 즉위하였지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위대한 왕들의 후계자들은 하나 같이 왕으로서의 격(?)이 급격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왕조의 위세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으며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첸라 왕국 전역에서도 지방 호족들 간의 내분이 전쟁으로 번져가기 시작하였으나 허수아비 정부로서는 전혀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새로운 왕은 고심 끝에 첸라의 자야바르만 1세를 파면하게 새로운 새로운 위정자를 내세워 첸라의 내분을 수습하고자 하였는데, 그대 많은 사람들이 유약한 계집처럼 고부고분해진 볼모로 잡혀와 있던 어린 왕자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격렬한 찬반 여론이 들끓었으나 결국......... 이미 세뇌되다시피 하여 허수아비로 전락한 어린왕자야 말로 첸라의 허수아비 위정자로 딱 들어맞는다는 결론을 내려 그를 인질생활에서 풀어주어 본국 첸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병약한 어린왕자는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인드라푸라(Indrapura)의 사원에서 성대한 의식과 함께 첸라 왕국의 새로운 국왕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로 정식 등극하게 되었다.
이쯤에선 한 가지 지명에 대해 꼭 집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아니면 여러 오해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야바르만 2세의 즉위식에 등장하는 (인드라푸라)라는 지명에 대해 말이다. 인도에도, 베트남 지역 참파왕국에도, 그리고 지금 크메르 왕국에도 모두 (인드라푸라)라는 지명을 가진 도시들이 등장한다. 다 다른 곳을 가리킨다.
인드라푸라(Indrapura)는 ‘인드라의 도시’라는 뜻인데 인드라는 힌두교의 천신, 즉 하늘을 지배하는 신이다. 이런 종교적 의미를 힌두교만이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도 똑같이 받아들이던 상황이라, 여러 왕국에서 같은 이름의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도시가 신성하고 중요한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자야바르만 2세의 즉위식에 등장하는 (인드라푸라)의 사원은 시엠립의 앙코르와트 영역에 속해있는 신성한 지역이다. 그러니까 앙코르와트 사원 지역(수도)이 건설되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 신성한 사원이 건설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원의 현재 이름은...... 앙코르와트에서 일몰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꼽히고 있는 ‘프놈 바껭(Phnom Bakheng) 사원’이 바로 그 장소이다. 이곳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씨엠립 국제공황 위로 내려앉는 일몰 풍경이 그야말로 압권이다.(물론 조상님들 은덕이 있어야만 겨우 볼 수 있겠지만)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전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흑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로마를 대리석으로 새롭게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었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자야바르만 2세 왕도 이렇게 적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변방의 약소국 첸라(Chenla)를 위대한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으로 만들었고, 찬란한 앙코르 시대(Seat of the Khmer Empire)의 초석을 다져서 후손에게 물려주었다’라고 말이다.
자야바르만 2세는 즉위하자마자 첸라 왕국 전역으로 순례 길을 떠났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원들을 찾아다니며 힌두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비록 치열하게 내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에게는 첸라 왕국의 정통성을 간직한 유일한 군주라는 명목이 분명하게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지역의 호족들이 연이어 찾아왔고 그들을 설득해 왕국에 귀속하도록 만들어 나갔다. 설득에 부응하는 호족은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귀속해 온 연합군을 이끌어 정복해 나갔다. 그는 충분히 이미 준비된 왕이었다. 논공행상이 매우 확실하고 분명했던 것이다. 대의에 벗어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응징해 나갔다.
내분은 모두 진압되었고, 이제 병약해 보이던 왕세자는 온데간데없고 기골이 장대한 용맹하고 현명한 위대한 성군의 자질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자야바르만 2세만이 돋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서기 802년 자야바르만 2세는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칭하면서 첸라왕국(Chenla Empire)이란 국호를 버림과 동시에 자바와 수마트라의 사일렌드라스(Sailendras) 왕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였음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의 등장을 선포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새로운 힌두교 왕국 '크메르 제국(Khmer Empire)' 새롭게 등장을 했던 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등장과 부상은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 그야말로 한바탕 거대한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삼국지) 혹은 (5국지) 아니면 동남아판 (춘추전국시대)를 불러 온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크메르 제국의 광풍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북쪽으로 중국의 원남성 일대 국경까지에서 남쪽으로 말레이시아 반도의 상당부분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8할 정도가 그야말로 삽시간에 크메르 제국에 점령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 시작은 바다 건너 자바섬까지 볼모로 잡혀갔던 어린왕자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크메르 제국 (Khmer Empire)’과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이 손을 맞잡고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을까?
그들은 모두 함께 험준한 바다를 헤쳐서 반도에 들어왔던 도래인(渡來人) 참족(Champa)의 후예들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그랬을까?
아니다.
결론은 전혀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그들의 뿌리(핏줄)은 같았지만 출발부터가 모두 달랐다.
이제까지의 여정이 달랐고 앞날에 대한 기대가 모두 제각각으로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이해조차도 모두 달랐다.
더하여.......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럼 이들의 미래는 장차 어떻게 되는 것일까?
크메르 제국이 부남이나 첸라 왕국 등을 흡수하면서 등장했다고 보는 시선과, 첸라가 주변 소국들을 흡수 병합하면서 왕국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시선 사이에는 보기에 따라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또는 전혀 다른 해석이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첸라 왕조의 연장선상에서 자야바르만 2세의 통치 기간 안에서 제국으로서의 이름과 위상이 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크메르 제국이 또 하나의 참파왕국이냐 아니면 별도의 혼합 민족이 세운 다민족 제국이냐의 차이가 충분히 생겨날 수 있겠다. 나의 주관적 견해는 후자이며, 첸라 왕국 중기나 후기의 어느 순간부터 참파 족이 왕국의 지배층으로 성장했으며 크메르 제국을 탄생시킨 자야바르만 2세의 경우에는 분명 참파의 핏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눈부시게 급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급성장이나 몽골제국의 유럽 침공만큼이나 영토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에는 동남쪽으로 중국과의 실제 국경인 원난성에 이르렀기에 비엣족은 겨우 하노이 부근에만 영역이 한정되었으며, 남쪽으로 참파왕국의 영역을 차지했거나 심하게 압박해 들어갔다. 북쪽으로는 버마족의 미얀마를 한참이나 산악지역으로 몰아냈을 정도로 강성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봉신국으로 거느렸을 정도였다.
이렇게 크메르 제국의 시작이자 토대를 다져놓은 자야바르만 2세는 수도를 한참이나 내륙의 북부에 해당하는 마헨드라파르바타로 옮겼으니 톤레샵 호수 인근으로 올라간 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급성장과 영토 확장에 대하여 참파왕국은 심각한 위기상황임을 직시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접촉을 통해 그들은 같은 도래인이며 힌두교도이며 비슷한 생활 문화를 갖춘 참파라는 공통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이미 그들은 철전지 원수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참파(Champa)라는 민족적 혈통의 시작에서부터 이미 핏줄속에 내재된 아주 특별한 유전인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최소단위의 부족(가족)만이 보호하고 공존해야하는 유일한 전부라라는 의식이 있다. 나머지는 모두가 정적이다. 이따금 필요에 의해서 묵인하며 공존할 수는 있지만, 언제든 틀어지면 그 순간부터 영원한 적(원수)의 관계로 전락하며 극한의 긴장과 대치 속에 부족의 명맥을 유지하며 내려왔던 그...... 유독 심하고 특별한 유전인자가 그들의 혈맥 속에는 항상 잔재해 있었던 것이다.
아주 특별한 그 유전인자에 대해서는 이 기나긴 이야기의 말미에 <참파족의 시조를 찾아서>편에서 보다 자세하고 쉽게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이 그러했으며, 그 특별함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영토 확장과 압박에 위기를 느낀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은 방어를 위해 수도를 다시 옮기게 된다. 호이안 북쪽의 내륙에 고대도시 트라 끼에우(Trà Kiệu)를 세웠으나 수나라의 침공에 점령당하면서 수도를 요새로 탈바꿈 시키고 내성을 쌓아 심하푸라(Simhapura)를 다시 건설했으며, 이때부터 참파왕국의 수도를 심하푸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하지만 호이안의 중심으로 국제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심하푸라가 외부 세력들에게 너무 많이 드러났고, 크메르의 확장에 위기감을 느낀 참파는 부랴부랴 인근 내륙의 지형조건이 방어에 보다 더 유리한 지역으로 수도를 옮겨 인드라푸라(Indrapur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서기 875년부터 982년까지 현재의 호이안 북쪽 동 드엉(Dong Duong) 마을 주변의 숲속에 당시 참파왕국의 수도였던 인드라푸라가 건재했고, 현재는 잔해들만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미선 유적지가 가까운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크메르왕국의 북동진에 대비해 옮긴 수도였으나, 정작은 훗날 국토회복 전쟁에 나선 비엣족(베트남인)의 침략으로 점령당하면서 급하게 수도를 남쪽 비자야(Vijaya)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비엣족의 베트남왕국은 이 지역을 새로운 이름인 꽝남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꽝(Quang)은 ‘확장’을 의미하고, 남(Nam)은 ‘남쪽’을 가리키니 ‘남쪽으로의 확장’이란, 배엣족이 참파족을 몰아내고 베트남 영토 전체를 회복하여 비엣족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첫 시작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비엣족 입장에서는 인드라푸라 첨령이 국토회복 전쟁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마침내 서기 889년 크메르왕국의 야소바르만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참파왕국을 침공했다. 하지만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크메르의 침공에 대비해 온 인드라바르만 2세의 군대에 전쟁에서 패해 돌아갔다.
크메르 제국의 성장은 북쪽의 비엣족이 중국에 저항하면서 세운 레 왕조(Lê Dynasty)에게도 점차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참파를 몰아내고 베트남 왕국을 세우기 이전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비엣족의 왕국들을 몰아서 다이 비엣(Đại Cồ Việt)으로 부르게 되었고, 필자도 이제부터는 ‘비엣족의 왕국’ 이라는 용어 대신 ‘다이 비엣(Đại Cồ Việt)’ 이라고 불러 사용해야만 하겠다.
어쨌거나 이미 크메르와 한바탕 전쟁을 치룬 후의 다소 어수선한 참파왕국은 다이 비엣에게 하나의 좋은 호기가 아니었겠는가? 다이 비엣의 레호안(Lê Hoàn) 왕이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며 남하하여 참파왕국의 북쪽 경계선을 허물어트리고 참족 왕 파라메스바라바르만 1세(Paramesvaravarman)를 공격해 살해한다.(982년) 이어 그는 수도 인드라푸라에 침입하여 점령하고 약탈한다. 이에 참파는 허겁지겁 400리(186km)를 후퇴하여 비자야(Vijaya)로 수도를 옮겨 수습에 나섰다.
다이 비엣(베트남)에 의한 베트남 영토 회복전쟁이 본격적인 확전일로에 접어들었을 때, 늘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이 레 왕조 안에서 심각하게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말았다. 환관이 왕과 왕족을 죽이고 전권을 휘두르는 지경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참족 토벌 사령관으로 파견된 루 케 통(Lưu Kế Tông, 재위 983-68)이 그 혼란을 틈 타 스스로 왕에 올라 중부의 참족에게 빼앗은 땅을 차지하고 말았다. 심지어 송나라(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을 새로운 참족의 왕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루 케 통이 무질서하게 전권을 마구 휘두르며 철권통치를 일삼자 많은 참족들이 이때 탈출하여 북쪽으로 올라가 하이난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루 케 통이 죽자 권력을 차지한 세력들은 하리바르만 2세라는 허수아비 참족 왕을 세우고 전횡을 일삼다가, 다시 남하하는 다이 비엣(Dai Viet)에 의해서 역사속으로 사자지고 말았다. 이 시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어서, 이들을 참파 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다이 비엣 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잠시 등장한 위성 세력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까보다.
이후의 역사는 다시 참파와 다이 비엣, 참파와 크메르, 크메르와 다이 비엣의 삼파전으로 되돌아가게 되니까 말이다.
거기에 더하여 참파는 참파 안에서, 다이 비엣은 또 다이 비엣 안에서, 크메르는 또 크메르 안에서 왕위 계승과 권력찬탈을 노리는 참혹한 내전이 계속해서 벌어지게 된다. 제국의 흥망사 뒷면엔 항상 그렇게 어두운 내부의 권력암투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하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크메르 제국(Khmer Empire)과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과 다이비엣(Dai Viet) 왕국 사이에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삼국지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거기에다가 곧 서쪽 반대지역에서는 수코타이 왕국이 생겨나고 이는 또다시 야유타야 왕국(태국)과 라오스로 발전하게 되는 란쌍(Lan Xang) 왕국으로 새롭게 인도차이나반도에 등장하게 된다. 3국의 각축장이 5국으로 확대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레 왕조 시기에 기선을 제압한 다이비엣은 그 여세를 몰아 참파를 공격하여 허겁지겁 물러간 새로운 수도 비자야(Vijaya) 까지 정복한다. 멸망을 목전에 둔 참파는 곧바로 크메르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다이비엣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야만 했던 크메르는 군비에 박차를 가하여 다이비엣을 압박했다. 결국 다이비엣은 참파의 항복을 받아내고, 매년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받은 다음 일단 철수를 한다. 1차 참파 정복 전쟁을 이 정도에서 마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전성기에 들어간 크메르 왕국의 수야바르만 2세는 나날이 강성해지는 다이비엣을 견제하기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고는 다이비엣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다이비엣이 거절하자 그길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그러면서 과거의 도움을 생각해 참파로 하여 베트남 정벌에 함께 참여해 주기를 청했다. 그런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부 수습이 급했던 참파가 요리조리 상황만 살피고 있을 뿐 적극적 참전을 마냥 미루기만 했다.
전쟁은 벌어졌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유독 험준한 지역인 다이비엣 침공은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거기에 배후 세력인 중국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은가. 더하여 길어진 원정을 영토의 반대쪽에 등장한 수코타이 왕국이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을 하고 있었다. 결국 크메르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철군을 한 후에 군대를 보내 이번엔 수코타이 왕국을 거세게 몰아붙여서 국경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호전적이었던 수야바르만 2세는 가만히 들어앉아 내정이나 다스릴 왕이 아니었다. 다이비엣 침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지난날의 은공을 져버리고 협력을 고사했던 참파가 몹시도 얄미워진 것이다. 수야바르만 2세는 이번엔 군대를 몰고 참파왕국의 수도 비자야를 쳐들어갔다. 수도 비자야를 점령하고 참파왕 자야인드바르만 3세를 살해했다.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식민통치를 하겠다면서 수야바르만 2세는 위풍당당하게 크메르 왕국으로 돌아갔다. 선왕이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는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아버지에 이어 보위에 오른 자야하리바르만 1세는 허수아비 왕을 처단하고 크메르왕에게 복수전을 선언한다. 수야바르만 2세는 후환을 끊겠다면서 다시 군대를 몰고 참파 원정에 나서긴 했는데....... 자야하리바르만 1세는 아버지와 사뭇 달랐다. 그는 전선을 최대한 넓히고 장기전을 철저하게 대비해 왔던 것이다. 크메르 제국의 정규군이 모두 참파와의 전쟁터에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군대를 함부로 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만 진퇴양난의 지경에 스스로 빠진 꼴이 되어 버렸다.
크메르의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던 다이비엣이 남침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더하여 수코타이 왕국을 대신해 들어선 반대편의 아유타이 왕국(태국)이 크메르 제국과의 일전을 서두르고 있는 상황까지 도래했다.
수야바르만 2세는 서둘러 참파와의 전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참파의 자야하리바르만 1세는 요지부동 싸울 생각이 없었다.
전투를 독려하면서 전선의 이곳저곳을 죽어라 혼자 뛰어다니던 수야바르만 2세가 그만........ 전쟁터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갑자기 죽어버렸다.
크메르 군대는 우왕좌왕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참파의 군대가 몰아쳤다. 톤레샵 호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참파가 대승을 거두고 당시의 크레르 왕을 죽여 이전의 복수를 했다. 뒤이어 이번엔 참파왕국의 군대가 크메르제국의 수도 앙코르를 점령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약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참파왕국의 전선을 비워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 전선 너머에 이 모든 광경을 다이비엣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다가 살아난 참파왕국의 통쾌한 복수였고, 크메르 제국이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수야바르만 2세의 뒤를 이은 아들이 별로 신통치 못해서 크메르 제국은 한동안 쇠락하고 말게 된다.
크메르 제국에 신의 은총이 내렸다.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하는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이미 성군의 채비를 갖춘 왕이었다. 다이비엣을 견제하면서 참파족 출신의 왕족을 보내 참파왕국으로 쳐들어가 수도 비자야를 다시 점령하였고 참파왕을 체포해 앙코르로 압송했다. 파견한 참족 왕족이 새로운 참파왕에 올라 참파왕국을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이들이 훗날 변심하여 자신들의 참파왕국으로 독립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로서 참파왕국의 정통성을 확보한 참파왕조는 끝을 맺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정통참파가 아니라 크메르 제국에서 긴급 수혈한 참족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영토 확장은 물론 내치에도 힘써서 인도차이나반도의 대부분이 크메르 영토가 되어버리다시피 되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뭐니 뭐니 해도 자야바르만 7세의 최고 업적은 바로 새로운 수도로 앙코르 톰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앙코르와트가 인구 100만의 매머드급 도시로 불가사의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는 크메르제국의 종교를 힌두교에서 불교국가로 바꾸어버렸다. 앙코르톰은 로마 이후로 역사에 신기원을 이루는 당시로는 초현대적 도시였다. 성벽도시 앙코르 톰의 위용은 지금 앙코르와트에 가서 보면 실로 어마어마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 사원 유적지가 실제로 100만의 인구가 거주하던 도시 공간이었던 셈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거대도시 앙코르 톰은 물론 바이욘 사원과 따 프롬(안젤리나 졸리 주연 영화의 배경)과 프레아 칸을 비롯한 초대형 사원건축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나간다. 모든 사원에 불상을 설치하여 크메르 제국은 이제 힌두교 국가에서 대승불교 국가로 변해가게 되었다. 하여 지금 앙코르와트를 세계 불교 문화재 목록에 올라있게 되었다.
자야바르만 7세라는 걸출한 성군 이후로 거듭 즉위하는 후계 왕들의 수준이 혁혁하게 떨어졌다. 결과로 크메르 왕국은 차차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에 발맞추어 참파왕국의 어용 왕조 역시 끊임없이 왕위 계승에서 비롯되는 암투와 내분으로 같은 비운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들 국가의 급격한 쇠락은 북쪽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다이비엣에게는 그야말로 호기였다. 아울러 북쪽의 새로운 왕조 아유타이 왕국(태국)에게도 엄청난 호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대륙의 한복판(중원)에도 피바람이 불어서 몽골이 거대 중원(중국)을 통일해 버리고 무한대의 세력 확장 펼쳐나간 것이다.
몽고의 쿠빌라이 칸은 북쪽의 국경(중국과의 국경) 지역을 통해 맞닿아있게 된 크메르 제국에게 항복과 조공을 요청하였고 크메르가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세계 대제국을 추구하는 몽골 입장에서는 세계 도처에 전선이 너무나 넓게 형성되어 있어서, 이곳처럼 어느 한 곳을 치기 위하여 정예군을 빼올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몽골의 위세를 앞세워 압박을 가하고 스스로 항복하여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확보하는 방법의 정복전쟁을 벌이고자 했다. 몽골 장군 소게투가 군대를 이끌고 몰려오자 크메르 왕국은 잽싸게 항복으로 작전을 바꾸고 조공을 받치면서 자주권 확보를 보장받는 선에서 전화를 피했다. 하지만 내친 김에 이곳을 향했던 소게투는 이번엔 대월(다이비엣)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고 안정세에 접어들었던 다이비엣(베트남)은 항복 대신에 전쟁을 선택했다. 이미 오랫동안 중국(몽골)의 지배와 침략에 대한 대응책을 완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북쪽에서의 정벌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소게투는 남쪽의 참파왕국에게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여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참파왕조가 이를 거부하였다. 참파 정벌이 먼저라고 판단한 몽골의 소게투는 아라비아 출신 수군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통해 우선 참파왕국을 정벌하겠다고 쳐들어온다. 하지만 이 지역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경험해 본 몽골군으로써도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수시로 불어오는 태풍으로 인해서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는 해군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겨우 살아남은 군대가 육지에 상륙하기는 했으나...... 이곳의 지형이 온통 정글과 습지이다 보니 몽골의 주력부대인 기마병이 쓸모가 전혀 없게 되었다. 말을 달릴 길이 전혀 없으며 정글로 달아난 적을 도저히 따라가거나 찾아낼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에 온갖 독충이 들끓고 풍토병에 병사들이 쓰러져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살아남은 극소수의 군사들만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몽골 전쟁사에서 하주 희귀한 상황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참파왕국과 크메르왕국이 몽골의 퇴각을 지켜보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전력 손실이 전혀 없었던 하노이의 다이비엣(베트남)이 전력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몰아닥쳤다. 참파의 수도 비자야를 탈환하고도 계속 남진을 감행했다. 참파는 비자야를 버렸고 허겁지겁 더 남쪽으로 달아나 처음 도래인들이 상륙했던 카우타라(Kauthara. 현 나짱)까지 물러났으면서도 안심을 하지 못하고, 한참 더 남쪽인 판두랑가(Panduranga. 나짱과 무이네 중간쯤)까지 도망가서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판두랑가를 참파왕국의 마지막 거점으로 삼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영토는 까우타라와 판두랑가 지역이 전부인 소규모 부족국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나짱 인근까지 거세게 참파를 몰아 부친 다이비엣은 전선을 재정비하고 참파의 완전정복 계획을 중단하고 일단 물러가기로 했다. 북쪽의 중국(당시 몽골)의 전황과 내륙의 크메르왕국 전황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이때부터 후에(Hue. 과거의 상림현)를 다이비엣의 수도로 새롭게 건설한다.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이번엔 전면적인 크메르왕국 정벌을 계획하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겨버렸다.
북쪽의 신흥강국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Empire)가 전광석화처럼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의 배후를 침략한 것이다. 크메르는 참파와 다이비엣과의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수코타이 왕국에서 독립한 아유타야의 신흥 전력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유타야는 파죽지세로 몰아닥쳐 너무나 손쉽고 급작스럽게 수도 앙코르로 들이닥쳤다. 앙코르와트를 점령한 아유타야는 무자비한 학살과 철저한 약탈을 감행한다. 전승기념 노획물로 모든 불상의 머리 부분을 자르고 사원의 신성한 동물 조각상의 꼬리 부분을 모두 잘라서 가지고 갔다. 덕분에 앙코르와트를 가보면 모든 불상과 조각상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잘려나가고 없다. 반면에 태국의 아유타야 유적지에 가면 사방에 목이 잘린 부처님 머리 조각상들이 지천에 나뒹굴고, 심지어 아유타이 문화재의 랜드마크처럼 나무뿌리에 엉켜있는 부처님 두상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아유타이에 나뒹구는 머리조각상들을 모두 수거해서 앙코르와트로 가져가면........ 맞추다 보면 무척이나 많이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앙코르와트를 완전 점령하고 약탈한 아유타이 군대가 국경을 넘어 철수하고 있던 상황에서 한 장군이 왕에게 건의하기를 ‘왕이시여. 앙코르를 점령하고 파괴만 약탈을 하고 서둘러 귀국하는 것은 나중에 엄청난 후환이 될 수 있습니다. 앙코르의 인구가 100만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참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반감으로 군대를 일으킨다면 머지않아 수십만의 군대로 성장할 것입니다. 뻔한 후환을 남겨두고 작은 승리해 취해 서둘러 군대를 물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돌아가서 건장한 사내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오고 앙코르의 사람들을 뿔뿔히 흩어 놓아야만 합니다.’라는 것이었다.
충분히 공감한 왕은 즉시 군대를 되돌려 국경을 넘어 앙코르로 재차 진군을 감행했다.
그런데 아뿔싸!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에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불과 며칠 만에 인구 100만의 도시가 텅 비워진 것이다. 모세가 애굽을 탈출할 때 준비만도 꽤나 여러 날 걸렸었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이 거대도시가 텅 빈 것이다. 사방 어디에도 이들이 이주해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유타니 군대는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실제로 역사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일대 미스테리 사건으로 남아있다. 마츄피추의 원주민이 모조리 사라진 것과 함께 고고학계에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후로 살아남은 크메르 사람들은 하나 둘 프놈펜으로 모여들었고 마지막 수도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크메르 제국은 흐지부지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근현대사에 이르러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전쟁에 휩쓸려 프랑스 식민지 역사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로 참파왕국 또한 점차 다이비엣의 남하에 남쪽 끝의 메콩강 하류로 밀려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참파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1.600년의 참파 역사가 끝난 것)
참파왕국을 기어코 몰아 낸 다이비엣 역시 크메르 제국과 별반 다를것이 전혀 없게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아유타이는 크메르 제국의 쇠락과 반대로 꾸준히 성장하며 그 공백을 채워가는 듯하였으나, 이 아유타이의 역사에서 북쪽으로 미얀마(버마족)이 떨어져 나가게 되고, 크메르 북부의 지역에 라오스(참족을 비롯해 아유타이족과 다이비엣족과 버마족이 혼재하는)라는 새로운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바로 오늘날의 인도차이나 반도 모습인 것이다.
한없이 길어질 것만 같은 어떤 불안함에 이쯤에서 과감한 생략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 증폭과 탐구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고 생각해보면서 이쯤에서 일단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 이야기를 서둘러 마무리하기로 한다. 해서 부득이 (힌두교와 불교 문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차후로 미루어야만 하겠다.
하지만, 글의 서두에서 약속했던 <참파족의 시조>와 영화 <무지개 전사(Warriors of the Rainbow: Seediq Bale)>와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까지는 곧 이어서 분명하게 소견을 피력해 볼 생각이다.
영화를 먼저 소개해 보고 이어서........ 참파족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베트남에 참족이 상륙하는 과정까지를 살짝 들여다 볼 생각이다.
참 재미없는 지루한 이야기를 일어부시고 관심 가져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더 부단히 노력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드리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으로 감사 인사에 대신하고자 한다.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