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역로(交易路)의 개척역사
BC 2세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 장군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장건은 10여 년간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흉노 여자와 결혼도 하고 자녀도 있었지만 결국 탈출하여 이 지역의 자세한 지리와 풍습을 기록하여 한무제(漢武帝)에게 바침으로 후일 흉노 토벌의 큰 공을 세운다.
장건(張騫)장군 동상 / 양관(陽關) 봉수대
그 이후, 이곳에 국경의 관문인 양관(陽關)을 설치하고 주변 여러 나라와 문물을 교역하는 루트를 개설했으며 대상(隊商)들을 보호하여 실크로드를 있게 한 실질적인 개척자(開拓者)로 알려져 있다.
중국 서쪽 관문인 양관(陽關)은 글자 그대로 뜨거운 햇볕(陽)으로 가득 찬 불모(不毛)의 땅으로 이곳을 나서면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사막(Takla Makan Desert)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4> 오손공주(烏孫公主) 비수가(悲愁歌)
오손국(烏孫國)은 서역 지방에 할거하던 투르크(Turk) 계의 유목민족으로, 한때 그 세력이 천산(天山)산맥 북쪽의 이르츠크 호수로부터 일리(Ili)강 유역의 분지(盆地)까지 이르렀을 만큼 강대했다.
전한(前漢) 당시,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匈奴)는 오손보다 강했는데 자주 한(漢)나라를 침범했다. 한고조 유방(劉邦) 이래 6대 황제 경제(景帝)에 이르기까지 줄곧 펼쳐 왔던 흉노에 대한 화친 정책을 강공책으로 바꾼 무제(武帝)는, 오손국(烏孫國)과 함께 흉노를 협공할 계획을 세우고 장건(張騫)을 사신(使臣)으로 보내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10년 후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무제의 형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인 세군(細君)을 공주라 속여 늙은 오손의 왕에게 시집을 보낸다. 그 덕분에 흉노는 한나라와 오손의 협공을 견디다 못해 한층 더 북방으로 밀려났으며, 서역 50여 나라가 한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되었고, 한나라는 이민족의 이반을 막기 위해 쿠차(龜玆)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었다.
세군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사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이다.
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세군/細君>
吾家嫁我兮天一方(오가가아혜천일방)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끝이어라
遠托異國兮烏孫王(원탁이국혜오손왕) 머나먼 타국에 몸을 맡기니 오손왕이로다.
窮廬爲室兮旃爲墻(궁려위실혜전위장) 천막이 집이 되고 모전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漿(이육위식혜락위장) 고기가 밥이 되고 양젖이 국이 되었네
居常土思兮心內傷(거상토사혜심내상) 살면서 항상 고향 그리워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願爲黃鵠兮歸故鄕(원위황곡혜귀고향) 황곡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旃(전)-모전<장막> ♣황곡(黃鵠)-누런 고니<세군(細君)을 일명 황곡(黃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를 전해 들은 한무제(漢武帝)도 세군(細君)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세군에게 선물을 보낸다.
수년이 지나 노령(老齡)이 된 오손왕은 오손(烏孫)의 풍습에 따라 세군을 자기 손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풍습이었지만 세군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군은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귀국하게 해 달라고 무제에게 부탁했으나 무제는 끝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세군은 오손왕의 손자인 손잠(孫岑)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다.
이처럼 한나라를 흉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 공신인 세군(細君)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 속에 살다가 늙어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