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통
수필론에서 인용한 글을 옮겨 보겠다.
“문학은 작가의 자기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의미 공간을 지향해야 한다.. 독자와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다. 즉,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작가의 경험과 의미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 문학으로서 위상이 확보된다.”
“작가의 주관적 경험과 의미는 보편성을 확보해야 공감을 얻는다.”
수필은 작가 개인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작가가 부여한 의미가 독자와 소통이 일어나야 문학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은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 소통에 관한 여러 방식의 해석이 있지만 문학적 소통과 관련이 있을 만한 설명을 골라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수필을 쓸 때 염두에 두어야하리라고 것을 가져왔다.
소통은 동류의식을 느낄 때 일어난다. 나와 같은 편이다. 나와 생각이 같다, 라고 할 때 일어난다. 그렇다면 작가가 보여주는 의미를 독자가 나도 같이 생각한다고 할 때 이다.
‘나와 같은 편이다.’ 라는 말은 동류의식을 느낄 때 소통이 잘 일어난다는 뜻이다. 한국어로 수필을 쓰는 경우 대부분의 독자는 한국 사람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동류의식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수필작가는 모든 독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신재기 교수가 말하는 ‘보편성’이라는 말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같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선지 우리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때 깊은 검토 없이 독자도 공감하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가장 흔히 보는 내용이 ‘교시성’이라 하여 윤리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 내용은 같다고 하더라도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서 소통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텔레비전의 의학 드라마에서 과장 선생님이 젊은 의사를 나무라고 있었다.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을 해주어야지, 전문 의학 용어로 설명하면 어떻게 알아 들겠어.’ 다시 말하자면 상대방의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 소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을 해야 한다.
김남조 시인이 절상을 입고 피부봉합을 하려는 순간의 감정을 적은 글이다.
“늙거나 퇴락해버린 상처는 슬프다. 치유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얻기까지는 건강한 아픔이 살아 대결해야 한다. 마취나 진통의 방법은 감각을 둔화시킨다.
삶에 따르는 상흔은 여러 가지 이다.
그 청신한 것과 퇴락한 것. 그런데 어느 날 지혈(止血)의 때가 오고 진맥의 손이 어디를 만져도 아프지 않다. 아픔의 촉수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켰나?
갑자기 당황한다.
나의 불가피한 첫째로 기억의 동결이 덮쳐 와 내 기억을 한 꺼풀씩 얼려 버리는 일이다. 깨워서 눈뜨게 하기에도, 덥혀서 품속에 안기에도 그 시한이 지나고 말았다. 지난날의 긴장이 빠져나갔으며, 망각의 밀물이 내 땅을 휩쓸었다. 어떤 힘이 시키는 대로 밤에는 쉬이 자고 그 힘의 기상나팔이 울리면 깨어난다. 한데 행복하지 않다. 아프고 싶고, 슬프고 싶고, 고독하고 싶다. 아아, 그것들은 얼마나 살아 있는 일인가. 지난날의 교과서를 펴놓고 옛 습성을 복습하려 함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한국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언어로, 즉 자기만의 언어로 소통이 쉬이 일어날 수 있을까? 소통이 일어나야 문학성이 확보된다는 신재기의 말을 되씹어 보면 이 글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글이라고 할까?
수필에서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므로 앞으로도 몇 번 더 다루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