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눈꺼풀
-이병일의 「라부여관」 읽기
여행은 행장을 꾸리고 걷는 길에서 몸을 통과한 풍경들이 그리는 궤적의 이미지다: 이병일
나의 피난처는 라부여관,
그런데 레바논의 백향목이 왜 생각날까
익힌 것은 깊고 잊힌 것은 춥겠지,
욕심은 나를 깨우고 잠들게 하고
핏줄보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우게 하고
총, 칼, 활이 내 관자놀이를 겨누게 한다
고흐, 까마귀 울음으로 칼을 갈아
귓등을 긋고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왜 피로 죄와 믿음을 씻으려 하는지
오늘 수염으로 가득한 나의 얼굴은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다시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온다
왜 죄는 눈꺼풀이 없을까
나의 탄식소리로 말미암아
인중에 괸 침묵도 일렁거릴 것만 같다
격리와 고립은 한몸 같은데
얼음구멍같이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찔끔, 코피가 흘러나온다
라부여관, 신기하게도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았다
나는 종교도 없이 신앙심을 갖고 싶었다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진다
- 이병일, 「라부여관」 ( 『애지』 2024 겨울)
이병일의 첫 청소년 산문집 『처음 가는 마음』에는 녹명정신이 녹아 있다. 먹이를 찾은 사슴이 배고픈 동료의 허기를 함께 달래기 위해 우는 녹명은 혼자만 잘 사는 법에 익숙한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배려의 울음소리다. 다른 목숨의 안위를 돌아보는 녹명(鹿鳴)은 경쟁과 갈등으로 반목하는 인간에게 ‘이타주의’라는 공명음의 경종을 울린다. 제 각각 살아나갈 방도를 찾는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녹명’은 이병일 시세계의 중심이다.
이병일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일’이 ‘시’라고 정의한다. 내적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어야 귀가 열린다고(「나를 위로해주는 것들」) 생각한 것이다. 이병일은 상생의 내적 아름다움으로 타인과 자신의 조화로운 안부를 중시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밀한 자아로부터 우러나오는 시인의 목소리는 방대한 타자를 지향해간다. 따라서 시적 화자인 시인의 말은 우리 모두의 말로 확장될 수 있다.
지금 시인은 ‘라부여관’을 피난처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재난을 피해 옮겨간 「라부여관」에는 되려 욕심, 피, 돈, 죄 같은 시어들이 우글댄다. 욕심은 자신을 “깨우고 잠들게 하”고, “핏줄보다 돈”이 우선이게 할 뿐 아니라, “적과 싸우게 하”고 심지어 “총, 칼, 활” 같은 무기로 자신의 관자놀이까지 겨누게 하는 무소불위의 존재로 군림한다고 고백한다. 피난처로 합당해보이지 않는 라부여관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핏줄, 피, 새 피, 코피 등의 시어는 부패한 욕망에 대한 묵시론적 고발처럼 불안과 분노, 죄의식 등을 떠올리게 한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부터 탄생한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 태어나는 게 죄이며 형벌인 인간은 신에게서 버림받은 존재임을 시지프스의 모습으로 증명한다. 누구든 욕심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인간 삶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질 자체인 욕망은(스피노자: Spinoza, 『에티카:Ethica』) 상생이나 녹명정신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킨다. 『죄와 벌』의 고리대금업자인 노파 ‘알료나’가 ‘로스콜리니코프’에게 살해를 당하는 모습은 탐욕이 얼마나 큰 고통을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듯, 감각적인 욕망에 집착하면 주요 갈등의 매개체가 되어 죄와 벌을 유발하게 된다. 그래서 ‘욕심’에 휘둘리는 자신이 안타까워 신발을 벗어둔 채 달의 핏자국을 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나무는 나무를」).
라부여관은 고흐(Vincent van Gogh)가 1890년 5월말부터 밀밭에서 총을 맞고 들어와 7월 29일 사망하기까지 70여일 머무른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있는 파리 시골 마을의 여관이다. 이 여관은 고흐가 죽기 전 거의 매일 한 작품씩 완성한 70여점의 그림으로 소외된 자신을 달래고 예술혼을 불태운 상징적 장소이다. 또한 고흐에게 이곳은 예술적 승화를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현실이며, 삶과 죽음을 위로받은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이다.
화자는 왜 자신의 피난처를 ‘라부여관’으로 정한 걸까? 죽음 직전 라부여관에서 머문 두 달이 고흐에게는 가장 안락한 시간이었던 것처럼 화자도 세속의 욕망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안에 들어앉아 평온한 자유를 즐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화자는 ‘피난처’로 단정 지은 라부여관에서 레바논의 영광과 비극의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있는 ‘백향목’을 생각한다. 욕망에 찌든 화자의 마음을 레바논 민주화 혁명의 기백을 가진 백향목에 비춰보는 모습에서 결연함이 느껴진다.
화자는 귀를 자른 고흐가 죄와 믿음을 피로 씻으려고 했던 이유와 그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난다고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유아론적 세계의 한계에 갇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은 결핍을 채우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자유를 추구하지만 스스로를 구속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구운몽』의 ‘성진’이 마음의 바탕을 잃어버린 채 부귀영화의 욕망에 사로잡힌 것처럼.
고흐가 라부여관에서 그린 70여점의 그림 중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마지막 작품 중 하나다. 이 그림은 고흐 생의 마지막 시기를 반영하는 불안과 절망의 내면 갈등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죽음과 내면적 갈등을 드러내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계속 변화시키고 있다. 죄의식에 빠진 화자의 얼굴은 수염으로 가득한 고흐 얼굴이 되었다가, ‘까마귀가 나는 밀밭’ 에 등장하는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가 되었다가 결국엔 밀밭이 된다. 고흐에게 이 그림은 고뇌를 극복하고 피워낸 아름다운 예술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적 주체는 고흐를 상징하는 오브제들과 자아동일화가 이루어지는 그때서야 “다시 새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오는 힘을 얻는 것이다.
죄는 지은만큼 받게 되는 인과응보의 산물이다. 화자는 죄는 왜 “눈꺼풀이 없”는지 반문한다. 눈꺼풀은 눈알을 보호하고 눈을 움직일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눈꺼풀이 없는 죄는 눈을 감을 수 없을 테고, 감을 수 없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죄는 보호받을 수 없는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화자는 눈꺼풀도 없는 죄를 지으며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종교적 관점이나 순자의 성악설을 보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에 탄식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때로 자신을 버리기도 하고, 눈꺼풀이 없는 죄를 짓기도 하고, 자유를 추구하면서 스스로를 구속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로 살아간다.
화자는 욕심에 찌든 자신을 극복하고 타락한 영혼을 새로운 정신으로 정화하기 위한 내면 성찰을 멈추지 않는다. 라부여관에는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운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을 들으며 종교 없이도 신 앞에 두 손 모으는 화자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시적 주체는 인간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영혼이 정화되고 죄를 짓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카타르시스가 발생한다(피타고라스: Pythagoras)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신앙심을 갖고 싶다고 토로하는 화자는 고해성사를 하고 회개하면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진다고 믿는 맑은 성정을 가지고 있다.
버리고 떠나 있기, 마음 비우기, 놓아두고 있기(마이스터 엑하르트“ M.Eckhart)를 실천하는 삶은 참된 인간 삶을 회복하여 온전히 자유로워진다. 물질적·정신적 욕망은 떨치기 쉽지 않은 유혹이다. 고통을 환대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한 세사르 바예호처럼 자신의 욕망을 넘어서는 초인(위버멘쉬)이 된다면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 녹명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땐, 캄캄한 세상이 스스로 자신을 환하게 밝힌 표정으로 성큼 다가올지도.
첫댓글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시와 평설에 머물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