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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은 한국만이 가진 국가기념일 이다 출3:7-8,6:6-8 시33:12
내일이면 광복 77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77년전만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때가 되어 우리나라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해방되기 35년 전 조선은 어떻게 멸망했었는가? 조선 스스로는 국방력의 약화로 무너져가는 나라를 일본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취지하에 1905년, 일본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자 충정공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면서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하였던 것이 일제의 침략에 격렬히 저항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과 합병하면서 이나라는 단군이래 주권을 빼앗긴 일본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빼앗자 조선사람들의 정신에서 혼을 빼고자 놀라운 일들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된 한성신보 초대사장을 지낸 낭인 출신 아다치 겐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인 동화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배일(排日)자료를 공급하는 기념물”이라면서 산성과 옛 사찰 등을 보면 ‘여기서 왜구를 격파했다느니 하는 배일자료가 새겨져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기념물을 제거하는 것이 민심통일과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숭례문은 ‘타도 1순위’가 됐다.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아예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동을 건 자가 바로 당시 한성신보 사장이자 일본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였다. ‘숭례문 철거반대’를 외친 나카이의 주장은 ‘포격파괴’를 주장하던 하세가와에게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라면서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숭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으니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하세가와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개선장군처럼 통과해서 서울을 함락한 숭례문”이라는 이야기에 뜻을 굽혔다(나카이의 <조선회고록>, 당업연구회출판사, 1915년). 흥인지문 역시 가토 기요마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없어질 뻔 했던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이 오늘날 한류의 원산지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한류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까다로운 단어다. 좁게는 K-pop. 드라마, 한식 등 한국 문화 콘텐츠의 해외수출 그 자체가 한류라 불린다. 유통업계는 화장품과 의류, 외식 브랜드를 ‘한류의 첨병’이라 한다. 오늘날 한류로 이름을 알린 것은 당연히 K-pap인 방탄소년단(BTS)이라 할 수 있다. 국내와 아시아를 넘어 K팝의 진입 장벽이 높았던 미국, 유럽에서도 인기를 끌며 진정한 ‘글로벌 스타’로 특히 이들은 세계 최대 음악시장으로 꼽히는 미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빌보드 차트에서 정상에 올라서며 K팝을 팝 주류 시장에 안착시켰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음악 시장이고, 빌보드는 전 세계 음악의 흐름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여기서 1등을 했다는 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한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지난 수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현지 팬들을 사로잡을 차별화된 전략, 완성도 높은 음악 등이 합을 이뤄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방탄소년단은 데뷔 이래 최초로 노랫말을 영어로만 구성해 소화했는데, 이는 비영어권 가수로서 한계를 벗어던지고 현지 대중에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한 전략으로 영어 가사를 선보이며 과감한 선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K팝의 글로벌화에 큰 영향을 줬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K팝이 글로벌 신한류 확산이 한국여행객 증가에 일등 공신 역할을 담당하는 가운데 특히 글로벌 K팝 팬 10명 중 9명은 향후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K팝으로 시작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차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글로벌 K팝 팬들은 K팝 외에도 △한국음식(82.7%) △한국드라마(79.1%) △한국어와 한글(63.8%) △한국뷰티(63.7%)에 관심 있다고 답했다.
K-팝에서 시작한 한류 열풍이 한류의 또 다른 분야인 K-편의점 식품 업계까지 이르고 있다. K-편의점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몽골 등지에서 수백 개의 점포가 운영되고 있으며, 편의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일본의 경쟁사까지 제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해외진출 초기부터 공격적으로 점포를 확장해 나간 K-편의점은 이제 새로운 한류 트렌드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권 국가에서 K-편의점은 한류를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의 위상을 갖는다. K-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등장한 다양한 K-푸드를 만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류 콘텐츠에 더욱 몰입할 수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 많은 현지인들이 K-편의점을 통해 한국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여행 대리만족을 얻고 있다.
이와 함께 K-드라마, K-팝 등 한류로 유명세를 탄 식품들의 인기가 뜨겁다. 매체에 등장하는 한국 즉석식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듯 높은가 하면, 현지 문화에 맞춰 새롭게 개발한 제품도 관심을 받고 있다. 기업의 단순한 해외진출을 넘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까지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K-편의점이 현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내면서 이는 K-편의점 역시 한류가 뻗어나가는 창구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최근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하락장에서 견조한 실적을 내며 연일 주가 최고점 행렬을 이어가는 산업 분야가 있으니 ‘K-방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국내 방위산업(방산)계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졌고 안보 위기가 고조돼 세계 여러 나라가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최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가 우리 나라에서 무기를 다량으로 수입한다는 보도가 K-방산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7월 27일 마리우스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한화디펜스, 현대로템 측과 각각 FA-50 경공격기, K9 자주포, K2 전차 등 한국산 무기 구입에 관한 기본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3대 무기체계의 수출액은 10조 원에 이른다. 향후 10년 동안 3차에 걸쳐 진행될 수출계획이 모두 성사되면 그 규모는 최대 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방산 수출 역사상 가장 큰 액수다. 그러니 폴란드 ‘잭팟’을 터뜨린 국내 방산업체들의 주가는 고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방산 수출은 이제 본격적인 시작 단계로, 이제까지 시장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방산업체에 폴란드 수출은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이번에 폴란드가 도입하고자 하는 무기는 K2 전차 1000대, K9 자주포 672대, 보병전투차 최대 1400대, FA-50 경전투기 48대 등으로 막대한 물량이다. 한국 방산 수출 사상 한꺼번에 이렇게 다양한 무기를 대량으로 수출한 건 전무하다.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UAE)와 맺은 지대공 요격미사일 천궁-Ⅱ 수출계약의 경우 35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4조2000억원) 규모로 단일 국산 무기 수출로는 사상 최대였는데 이번 폴란드 수출 금액은 UAE의 2배를 훌쩍 넘는 최소 1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역대 최대 규모다.
미국의 민간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가 지난해 1월 발표한 군사력 평가지수 보고서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138개국 중 6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한민국이 강대국들 속 비교적 높은 위치에 랭크되었던 해당 보고서는 당시 국내외 언론사들의 시선을 끌었다. 대한민국은 2016년 이후 5년간 전 세계에서 9번째로 많은 양의 무기를 수출하며 전 세계 수출량의 2.7%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국기연)은 ‘2021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서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분석 자료를 보면 “한국의 2016~20년 무기 수출이 2011~15년 대비 210% 증가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k-팝, k-푸드, k-편의점, k-방산등 한류를 일으킨 적은 이제까지 없던 일로 전세계가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탈북자 김태산 전 북한 체코대사의 글-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국민인가?라는 장문에서 그가 말하기를 분별력이 없는 멍청한 사람들을 가리켜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운을 띄우면서 똥과 된장조차도 가려 못 보는 한국인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나는 북한에서 한국인들은 자원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그것도 북한의 항시적인 도발속에서 저렇게 빨리 발전된 나라를 세운 국민이니 응당 정치적 각성도 높고 애국심과 단결력 또한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실망이 크다고 하면서 명백히 말하건대 앞으로 북한이 따라 배워야 할 것은 오직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뿐이라고 하였다.
현재 국민들의 정치적 인식정도는 매우 낮고 애국심과 단결력 따위는 전혀 없다고 한다면 나를 비난할 분들도 있겠지만 자유에 맡긴다. 미안하지만 한국 국민들은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 같다. 특히 애국자와 반역자를 구분못하는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첫째 한국인들은 북한 간첩에게 속아서 자신들을 공산독재에서 구원해준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쫓아낸 부끄러운 국민이라고 했다.
둘째 좌파들에게 속아서 자신들을 가난에서 구제해주고 국가 발전의 기틀을 세워준 박정희 대통령 가족 전부를 매장시킨 매정한 국민이다.
문재인 정부시대에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과 교육감 지방 단체장들 중에서 친북, 친중이 아닌 자가 누군가? 이게 과연 정치적 안목과 애국심이 있는 국민인가? 대선전까지만 하여도 윤석열 바람이 불면 “와”하고 따라갔다가 지금은 대통령 취임 100일도 안되어서 윤대통령의 여론조사를 보면 30% 안되는 것을 보는 것이 그가 한 말이 그냥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인들은 하늘이 내려 준 인복은 다 차버리고 마지막엔 쓰레기들만 끌어안고 지도자가 없다고 한탄만 한다. 자업자득이다. 솔직히 저들 중에 대한민국을 맡길 자가 누군가? 바보 국민이 바보 대통령을 만든다. 잘 알 듯이 오늘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만든 자가 김대중이 아닌가? 그가 준 수조원을 가지고 북한이 핵무장한 것을 모르는 자들은 없을 것이며 얼마전 퇴임한 문재인은 주사파로 평창올림픽 때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을 신영복이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문재인이 공산당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신영복은 1968년 북한노동당의 직접지령으로 남한에 남파된 간첩에 의해 만들어진 "통일혁명당"에 가입하였고, 통혁당은 결정적 계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다 일망퇴진된 간첩단 사건에 깊게 연루되었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무기징역 그리고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88년에 "전향서"를 쓰고 출옥하였던 자를 존경한다고 한 자가 문재인이 공개선언하였다면 그가 간첩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제발 애국하는 심정으로 올바른 정치적 안목 좀 키우고 역적들에게 부화뇌동 당하여 자신들을 살려준 대통령은 내쫓고 나중에는 정권까지 넘긴 당신들 중 누구라 할 것없이 더러운 정치 야망꾼들을 빨아대며 애국자인척 하지말고 정신들을 좀 차리라는 탈북자 김태산 전 북한 체코대사의 글이 마음을 찡하게 한다. 금년 77번째 맞이하는 8.15 광복절은 과거 35년 동안 일본 식민지로 어둠에 있다가 빛을 되찾은 날이다.
1. 해방과 건국을 포함한 8.15 광복절의 유래
77번째 8.15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아직도 8.15를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로만 알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광복절-건국절’ 논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김구와 이승만이다.
1948년 4월 김구는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38선을 넘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49년 6월 안두희에게 암살당한다. 김구 암살을 둘러 싼 배경이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그의 행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얼뜻 들으면 누가 통일정부를 원치 않겠는가? 그러나 김구는 당시 치안과 행정과 정치가 일사분란하게 이룩한 북한 김일성의 의지대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가는 것을 간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암살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행적을 보인 인물이 이승만이다. 1946년 이승만은 당시로 보면 ‘ 일제 패망 이후 미소가 신탁통치하는 조건에서 남북 두 개 정부 수립은 어쩔 수 없었고, 정부를 미군이 주둔하는 38선 이남에서 선거를 치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다. 역사적 필연이었으며 당시 우매한 대중의 의사를 거슬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이승만이 ‘참다운 선각자’, ‘고독한 영웅’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이로 인해 미군정이 끝나면서 정국의 혼란중에도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5000년 만에 역사적인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을 선출했고 이어서 이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후 1948년 5월 30일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처음으로 국회에서 만났을 때 기도로 시작하였다는 것이 당시 제헌국회 기록물에 나온다.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하나님께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다. 1948년 5월 30일 대통령 이승만은 이윤영 의원(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대통령이 말하자 이윤영의원은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 기도문이 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하나님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기도를 한 후 국회에서 처음으로 헌법과 국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도 안되는 때에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었겠는가?
당시 2차 대전 후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지만 우리나라처럼 대통령과 국회가 먼저 하나님께 일어나 기도하면서 국가운영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 있었다고 국회속기록에는 기록물로 남아 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국회의원 총선거와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선출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드디어 해방된 날인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의 건국을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으므로 8월15일은 해방된 날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일인데 주사파인 문재인은 이 나라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자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상해 임시정부수립일인 1919년 4월 22일을 건국일로 발표하며 올해가 건국102주년이라고 미친소리를 하니 한마디로 나는 주사파라는 것을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건국을 하려면 땅과 국민과 주권이 있어야 국가를 건국하는 것인데 임시정부 때 주권은 일본이 갖고 있는데 어떻게 1919년도에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문재인 머릿속에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국가헌법을 훼손하는 대통령을 가졌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매년 맞이하는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아울러 건국을 포함하는 우리만이 갖는 고유한 광복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8.15가 해방과 독립을 어우르는 광복절이 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독립기념일이란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이 독립기념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획득한 해방된 날이지만 우리나라는 해방과 동시 미소의 신탁통치가 끝난 후 국민총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이 법을 제정한 후 광복절이 된 8.15기념일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건국기념을 아우른 것이다. 그러므로 1948년 이전인 1946년과 1947년의 8.15 행사의 공식명칭이 "해방 기념식"이었던 것을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8.15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한 표현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8.15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국회에 제출된 초안의 명칭이 "독립 기념일"에서 "광복절"로 수정되어 통과된 것은 해방과 건국을 아우른 절기로서의 "빛(光)을 되찾(復)"는 광복절을 제정한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인으로서 "광복"이란 의미를 다른 차원에서 한번 더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광복"이란 단어인 "잃었던 빛을 회복하다"라는 말속에는 그 어떤 단어에서 맛볼 수 없는 훨씬 포괄적이고 심오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실로 오랜 세월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의 해방의 감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둠에서 빛을 되찾은 광복의 의미와 상통하는 바이며 신앙적인 면에서도 신사참배의 강요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사건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제정 사건으로 보다 더 주도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겨진 것처럼 대한민국의 해방과 이후 3년 후에 건국을 볼 때 분명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주도하신 역사의 한 페이지이라고 생각된다. 실로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들 중 "해방"이나 "독립" 그리고 "건국"대신에 우리나라처럼 "광복"이란 표현을 쓰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면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복 곧 빛의 회복은 곧 참빛으로 오신 주님의 구원의 복이 아닌가!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해방과 건국이 지금껏 "광복"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와 사명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과제와 사명은 북녘 동포들을 비롯하여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고 저들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라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의 해방이 내용상으론 반쪽의 독립이 되었으나 이미 해방을 통해 광복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건국이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한 광복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해방 후 이 땅에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에서 보수 진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데 그 기원을 한번 되짚어 봐야 하겠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즉 해방에서 건국까지 3년의 역사적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한번 재조명해 본다면 당시 남한에서 백성들을 선동하는 정치가들로는 공산당에 뿌리를 둔 박헌영과 여운형이 가장 앞서 갔었고 그리고 그들보다 한발 늦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승만과 마지막으로 남북한을 통일하겠다는 김구 등이 있었지만 해방직후 미군정이 오기 전 남한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세력은 여운형과 박헌영이 주도하는 좌익정치세력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해방된 8월 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하기 전 9월 초까지 우리나라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다. 당시 해외에 있던 지도자들 중 상해에 있던 김구나 미국에 있던 이승만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기까지는 두 달 이상 소요되었는데 이 틈을 타 국내에 있던 박헌영(북한 총리겸 외무상)과 여운형은 1945년 9월6일 오후 7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건국준비위훤회(건준) 주최로 전국대표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여운형 임시의장 주재로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는 새로운 정부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조직하고, 이승만, 김구, 김원봉, 조만식 등 해외와 이북에 있는 정치지도자까지 망라한 55명의 전국인민위원을 선출해 발표했는데 리더는 박헌영이었다. 명분은 미군과 협의할 ‘정부 형태의 집결체’였지만 실상은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남로당을 조직한 박헌영이 일본인 명의의 적산과 토지 등을 강제 몰수하여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고 국민들을 선동하자 남한국민의 78%가 남로당을 지지하여 대한민국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조선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갈 뻔 했다. 당시 국내 정국의 주도권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한 여운형과 박헌영에게 있었다. 박헌영은 1925년부터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으며 해방후에는 남로당을 창당한 뼈속까지 공산주의 사상으로 꽉 들어찬 자로 이미 1945년 8월 18일에는 일제강점기 때 해산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조선인민공화국’수립을 주도했다. 전국인민대표자대회 다음 날 서울 시내에는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제하야’란 전단이 뿌려졌다. 우익진영은 즉각 ‘한민당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를 배격하는 내용의 결의문으로 대응했고 우파인사들은 9월 7일 해외의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해 ‘인공’에 맞섰다. 그러자 좌익진영은 9월 11일 정오 동대문 경성운동장에서 건준 주최로 대규모 인공 수립을 지지하는 ‘인민대회’를 개최했는데 사실상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해방 후 첫 대규모 집회였다. 조선인민 공화국의 실제 대표는 남로당을 조직한 박헌영이었는데 그는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분배를 약속하면서 남한국민의 78%가 남로당을 지지하여 대한민국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조선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갈 뻔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후 박헌영의 남로당이 일으킨 사건이 제주 4.3사건, 여수반란사건과 대구폭동사건이며 그 맥이 유지되는 것이 오늘날 민노총에서 나온 정당과 민노총이다. 김구선생도 해방후에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분간못하고 무조건 민족이란 이념에 빠져 남북을 오가며 협상을 했지만 끝내는 북한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국내 정치세력은 ‘인공’을 지지하는 좌익과 중경 임시정부 지지를 표방한 우익진영으로 양분된 것이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씨앗이 되었다고 본다면 틀림없다. 1946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서울에 수립된 미군정은 ‘인공’ 선포에 초기부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9월 13일 미군정 정보부장은 “현재 조선 내에는 미군정부 이외에는 여하한 정부도 있을 수 없다”며 “조선인민공화국 운운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뜻을 비공식적으로 밝혔다. 10월 18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여운형을 불러 “1국내에 2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으니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는 군정청이 유일한 정부인즉 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해소함이 마땅하니 즉시 해소하고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권고 공문’을 전달했다. 하지 사령관의 최종 입장이 나오면서 좌파진영의 ‘인공’ 수립 시도는 허망하게 종막을 고했다. 여기 까지 오는 동안 남한은 하마터면 조선인민 공화국이 될 뻔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후 남한의 대표적인 좌파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박헌영은 공산당 활동과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북한의 김일성과 여섯 차례 비밀회동을 가졌었는데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0월 이후 그가 북한으로 월북할 때까지 김일성과 비밀회담에서는 남북의 좌익들이 공동보조를 취하자는 투쟁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서 주로 논의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나온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운동과 토지무상분배의 전략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1946년 2월 이북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3월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이남에서도 인민위원회 정권창출, 토지개혁 실시의 구호가 등장함으로써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비밀회동에서 논의한 대책을 서울로 와서 이북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찬탁), 토지개혁으로 전국민에게 무상분배등을 내기에 이르렀다. 1946년 7월 박헌영의 평양방문 때는 노동자·농민들의 단결 아래 총파업을 진행한다는 전술로 조선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주도하자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되면서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박헌영을 북으로 불러들이게 되였다. 역사는 이나라가 해방되자 마자 남로당이 전국정당이 되었으며 하마터면 여윤형과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울 뻔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진보라는 것은 이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문재인 정부는 주사파정부로 주사파라는 것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사모한다는 말로 해방 후 남로당의 씨앗이 이 땅에 뿌려졌던 것이 지금은 결실이 되어 이 나라는 다시한번 위기를 맞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도 막아 주셨듯이 이번에도 윤석렬을 대통령으로 세우면서 이 나라를 지켜주셨다고 생각한다. 지난 문재인정부는 중국과 북한에는 무조건 굴종하고 일본과는 무조건 각을 세우는 반일 프레임으로 국민들에게 반일 감정을 넣고자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하여 일제 강점기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배상판결 승소결정으로 한일관계가 해방이후 최악의 사태를 맞게 했다. 대법원이 배상판결 승소결정이 내렸더라도 일본정부가 협조하지 않은 이상 이 사안에 대해 해결실마리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해방된지 70여년이 지나서 이나라 국민이 반일을 외치고 일제상품을 불매하고 일본으로 여행안가는 것이 마치 애국자처럼 선동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반일운동을 통해 한일관계를 불통으로 막은 것이다. 강제징용자들의 노임 소송을 대법원이 승소판결 내리면서 생긴 일인데 법적으로 보면 소송사건의 소멸시효는 3년 안에 소송을 할 수 있는데 이번 강제징용배상판결에 대한 소송은 해방을 기준으로 하면 73년전 사건이며 한일청구권보상을 기준으로 하면 56년전 사건을 대법원이 강제징용한 노동자들 배상을 승소 결정하면서 벌어졌으니 문재인 한사람의 무능함이 한일관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실 대일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북한의 핵무기인데 핵무기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는 있는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을 때 피어오르는 버섯 구름이 만들어 지면서 핵무기가 세상에 드러났다.
1941.12.7 일요일 일본은 미군 함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2000명의 장병을 사망케 하고 수많은 함정과 항공기들을 파괴하였던 것이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처음에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전쟁후반기에는 드디어 미국은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 투하하여 사망자만 히로시마에서는 90,000-166,000명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자는 60,000-80,000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사망자의 절반은 원폭투하 당일에 집계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차 피해의 후폭풍으로 건물의 무너져 죽은 사람도 많았고 원폭 후유증도 대를 이어가면서 발생한다는 것이므로 너무 무서운 무기라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에 목숨걸고 있는데 이는 핵무기의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맞서야 할 우리나라 국군통수권자인 문재인은 적 앞에서는 우리만 무장해제를 시켜놓고 당장이라도 북한이 공격해 온다면 한미일 관계가 중요한데 일본과 맞장이라도 뜰 것처럼 국민을 선동하는 것이야 말로 결코 국익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 주사파정부가 국가의 품격을 파괴하는 것은 어디 그 뿐이겠는가? 2020년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광복회장인 김원웅은 경축 기념사에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찬란한 우리 민족의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것은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존재하는 친일파인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와 결탁했다고 했다. 역사가 증언하듯이 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이었지 어찌 그를 친일이라고 하는가? 김원웅은 이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애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 뿐"이라고 언급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방된지도 모르는 망나니가 이나라의 광복회장이라니 그를 임명한 문재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그가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것이 문재인 정부의 실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8.15해방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명해 봅시다.
3. 8.15 해방은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대한민국을 영어로 코레아로 부르며 이 코레아를 히브리어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란 뜻이므로 대한민국 즉 코레아란 말 속에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77년전 1945년 8월15일은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35년간 나라없는 설움과 고통에서 해방되었던 것도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대동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위해 총받이로 죽어갔고 일반사람들은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죽는 날까지 노동했고 젊은 여자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짐승같은 삶을 보냈고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절망과 배고픔으로 지쳐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에서 누가 왜 1945년 8월15일 갑자기 우리나라에게 해방을 주었을까? 물론 독립을 위해서 독립군도 있었고 임시정부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독립군이나 임시정부의 힘으로 나라를 찾은 것이 결코 아니라고 저는 단언하건데 우리가 해방을 한 것은 오직 우리민족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한일합방 후 온국민이 나라 잃은 절망과 분노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미국을 통해 선교사들을 보내주셔서 무지한 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복음을 들은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찾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여년 동안 종살이 하다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을 때 교회는 나라를 잃어버린 분노와 슬픔을 토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교회로 나온 사람들은 출애굽말씀을 들으면서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중에서 부르짖었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들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니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내가 그들의 속박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고 내가 뻗은 팔과 큰 심판들로 너희를 구속하리라는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소망이 넘쳐났을까? 출애굽 이야기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었던 그런 이야기다.
히브리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할 때 그 백성들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 벽돌 찍어 성을 쌓는데 전 생애를 바치면서 또 육체적 학대를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 노예생활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 하였을까?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지도자로 보내사 그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였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나라 교회와 성도들도 해방전까지는 적어도 10년 동안은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1938. 2 조선총독부는 매월1일을 애국일로 지정해놓고 예배전에 국민의례 먼저 시작한 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국민의례를 시작했을 때는 강단에서 종을 치면서 애국예배를 시작했던 것인데 국민의례란 예배 전에 일장기에 경례하고, 동쪽을 향해 황궁요배를 하고, 국가(기미가요)를 부른 후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게 후 예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노예같은 삶에서 자유스럽게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기 때문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미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신 것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해방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시간적 간격은 크지만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되기 전만 하여도 일본이 미국에게 이렇게 패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했어요. 왜냐하면 중일전쟁에서도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또 대동아전쟁에서도 일본은 버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닥치는 대로 먹어버렸으며 또 마지막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은 미군 함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2000명의 장병을 사망케 하고 수많은 함정과 항공기들을 파괴하였던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처음에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 투하를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나라 잃어버린 설움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는 것은 마치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출애굽기 3장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출3:7)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그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내가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을 듣고 자신의 백성들을 노예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듯이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45년 8월 15일 해방도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에 대한 응답은 여러군데 있습니다.
(시 50:15)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하셨고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이와 같은 약속된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8.15 광복절도 이스라엘 출애굽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도 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한 것이 출애굽을 출발한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될 수 있으며 해방된지 3년 후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준비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하나님께서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모세를 예비하신 것과 같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예비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전세계가 K-팝, K-푸드, K-편의점, K-방산같은 한국이라면 무조건 좋하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분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또 독재자라는 이름으로 그를 잘못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승만 대통령을 잠시 살펴보자. 정말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국민의 78%정도가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옹호했었다고 한다. 이미 1925년부터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고 왜정시대 때 공산주의에 동의하는 것이 곧 반일운동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이다. 1946년 미군정이 8000명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에 찬성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고 자유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속에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해방당시 가장 귀에 편하게 들었던 정치이념은 놀랍게도 사회주의.공산주의였다. 거기에 김구같은 민족지도자도 국가가 남북으로 분단되어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좌우 합작 정부수립 즉 북한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이승만 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이러한 국내외 정서속에서 나홀로 반공을 외쳤던 용감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은 모스크바에서 직접 공산주의를 목도한 이승만은 국민을 보호하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공산주의에 반대해야 한다면서 여러 친공세력과 맞섰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국제정세를 보는 눈과 올바른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제라는 굴레속에 살아야 했던 국민에게 역사상 자유선거권을 부여하고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을 단행해 국민에게 땅을 유상으로 분배하고 교육을 시킴으로써 일부 계층만 갖고 있던 특권을 전국민에게 나누어 준 장본인이 이승만이다. 공적만 놓고 보면 건국의 아버지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라는 좌파들은 이승만을 냉혹한 독재자로만 선전한다. 그들은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인물이라고 폄훼한다. 또 박헌영이가 주도한 좌파세력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제주 4.3사건이나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강제 진압한 것을 두고 대규모 민간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라는 비난도 한다. 이승만의 삶속에 공과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과가 있다고 공까지 묻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역사책속에서 이승만의 공은 사라진듯하다. 불과 반세기만에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이라고 입에 오르기만 해도 친미 친일 주의자로 매도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승만을 부정하는 것은 곧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깍아내릴수록 김일성이 만든 북한만이 돋보이는 것이다. 현대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을 독재정부라고 표현한 말이 13회 나오는데 3대 세습국가인 북한을 독재국가로 지칭한 교과서는 한군데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초.중.고 역사교과서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체제라는 것을 인식시키며 공산주의를 미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정도로 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유언을 알리고자 한다. 마지막 삶을 하와이에서 보내면서 마지막이 오면서 기도와도 같은 그의 유언에는 남은 가족이 아닌 대한민국에 대한 걱정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민족을 위해서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소서.
정말로 이러한 지도자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요? 우리가 조선인민공화국이 아닌 대한민국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누구 때문인지 알기나 한가요?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건국지도자로 보내주셨기에 해방 후 5년만에 일어난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은 남한을 침략해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하였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6.25전쟁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확실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세워졌고 이를 뒷받침하고자 한미동맹을 체결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이나라 국민 모두는 알아야 될 줄 믿습니다. 한미동맹을 체결안했으면 주사파들이 득세한 이나라는 이미 조선인민 공화국이 되기에 충분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나라는 6.25전쟁 후에도 여러번 위기가 왔을 때 마다 막아 주신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북한군의 만행을 잊으셨나요?
1968년에는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에 침투시켰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전두환대통령때는 부총리등 16명의 장차관이 순직한 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등 북한은 지금까지 수십 차례의 도발을 저질렀다. 2010년 3월26일엔 백령도 해상에서 일어난 천안함이 침몰로 승조원 46명이 전사하고 2010년 10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나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77년 동안 남북이 분단되어 북한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과 일본압제보다 더 무서운 북한의 공산주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요즘 같이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북한과 중국이 우리나라를 위협하려는 이 때에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8.15 해방보다 더 큰 은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5.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섭리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에서 해방된지 3일째 되는 날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앞에는 홍해와 뒤에는 애굽군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셨고 애굽군대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셨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출6:7) 내가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주신 것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출19:6) 또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말들이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만민 가운데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주신 것도 우리만을 위한 해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대한민국이 열방을 향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선교하는 국가로 세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택하신 것입니다(벧전2:9).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만 주신 것이 아니라, 4만 교회와 8백만 성도로 부흥하게 해주셨습니다. 대한민국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빛입니다(마5:14상). 우리 모두 세상의 빛답게 모든 족속과 나라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과 이제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8.15 해방을 주신 것도 대한민국을 하나님 백성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애국가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어느 나라가 또 있을까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나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민족이나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다(시33:12)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나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에게까지도 축복을 약속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이 바로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히6:14)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늘날 .K-팝이나 K-문화, K-방산을 통해 전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K-교회가 세계를 향해 다시 오실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