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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74)/종
제목 : 정의를 세우는 하나님의 종
성경 : 사 42:1~9
찬송 : 84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712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 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 42: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 42: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재판정에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만이 참신이심을 공표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그가 택하신 종을 통해 온 세상에 정의의 통치를 펼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호와의 종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음은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사역이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일지라도 창조주 여호와께서 친히 손잡아 주시고 보호하실 것이기에 낙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전에 선포하셨던 일을 성취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종을 통해 계획하신 새 일도 반드시 성취하시고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1~2절)
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사 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첫 번째 ‘종의 노래’로 알려진 본문은 ‘보라’(헨)는 표현으로 새로운 장면을 소개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종’을 소개하는데 어떻게 소개합니까?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내가 택한 사람”이라고 소개함으로써 그와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여호와는 종에게 ‘나의 영’, 즉 여호와의 영을 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이방에 ‘정의’(미쉬파트)를 베푸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41:8~9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나의 종’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지칭한 것임을 고려한다면(42:19; 43:10), 본문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나의 종’의 모습과 이스라엘을 동일하게 보기 힘듭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불린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모두 이스라엘의 대표로 언약의 주인공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해 49:3; 50:10; 52:13절에서도 여호와의 종을 여호와의 사명을 감당하는 개인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11:2~4절에서 여호와의 영을 언급하고 동사 ‘사파트’를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메시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종합하면 본문에서 언급하는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모습을 대표할 개인이자 메시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 12:18~21절에서 본문 1~4절을 인용하여 예수님께 적용한 것이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나의 종’은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절).
마 12: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요1:14).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독생하신 아들입니다(마 3:1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셨습니다(요 3:34).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10:10).
그리스도는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소리를 높이거나 과시하지 않습니다(2절). 그분은 겸손하게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눅 2:7; 마 21:5).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상 통치자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막 10:45). 세상의 군왕들은 정복하고 군림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겸손과 온유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을 기억합시다.
정의를 시행하실 종(3~4절)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 42: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본문에서 소개하는 여호와의 종은 무엇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통치자입니다(1, 3~4절). 이사야서에서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데크)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메시아 통치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16:5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사 32:1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여호와의 종은 정의로 통치하되 결코 강요와 압제가 아닌 겸손과 온유와 진리로 다스립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상한 갈대’란 쪼개져서 반쯤 부러진 상태를 뜻하며, ‘꺼져 가는’이란 말은 아주 약하게 타고 있어서 마치 꺼질 듯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 즉 자신에게는 이제 더 이상 소망과 소생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상한 부위를 치료해 주시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며 산 소망이 있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친히 대속 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고 부유한 자들보다는 오히려 약한 자들을 위해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정의로 통치하되 결코 강요와 압제가 아닌 겸손과 온유와 진리로 다스립니다. 동사 ‘쇠하다’(카하)와 ‘낙담하다’(리치즈)는 그의 사역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정의를 세워 땅 끝에 있는 ‘섬들’조차 ‘그의 교훈’을 앙망할 때까지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과 같습니다. 갈대란 그 자체로 이미 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갈대가 심각한 상처를 입어 언제 바람에 무너질지 알 수 없습니다. 상한 갈대는 죄로 인해 이미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인류를 말합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상하고 깨어진 인생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고치고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데 지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열정적으로 세우십니다. 섬들에 비유되는 모든 열방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소망이 되심을 기억합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5~9절)
1~4절에서 여호와의 종을 3인칭으로 언급하며 그 사명을 소개했다면, 5~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종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구조적으로는 5절과 8~9절이 덮개(inclusio)를 이루어 6~7절의 내용을 강조합니다.
사 42: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여호와께서 자신을 하늘과 땅 위의 모든 인생들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면서, 여호와의 종의 사역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땅에서 나오는 모든 소산물을 인간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창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또한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들이 땅 위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호흡’을 주셨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영을 주셔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다른 영적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참조, 창 1:26-27; 5:1; 9:6).
이와 같이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밝힘으로써 인간에게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여호와는 그의 종에게 ‘공의로 불렀다’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를 ‘공의로’ 부르셨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바른 여호와의 뜻에 근거하여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공의로 불렀다’는 표현은 고레스에게도 사용되기 때문에(41:2; 45:13) 고레스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종을 공의로 부르신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는 또한 그의 손을 ‘잡아 주시고’ 그를 ‘보호’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4절에서 여호와의 종이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집약한 표현입니다. 이들 두 가지 표현이 모두 이방에 대한 사명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지만, 49:6,8절에서 두 표현이 구분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백성’을 이스라엘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여호와의 종의 사명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언약의 회복을 성취하는 것이고(49:8), 이방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구원의 빛을 비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49:6; 60:3).
7절의 어둠에 대한 표현들은 (눈먼 자, 흑암) 여호와의 종이 이방에 대해 받은 사명 ‘이방의 빛’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동시에 ‘눈먼 자’, ‘감옥’이 42:18~19절에도 등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7절의 내용이 여호와의 종이 받은 ‘백성의 언약’으로서의 사명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여호와의 종의 사역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는 근거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밝히신 이름 ‘여호와’는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초월자를 의미하지만 또한 친히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그 여호와가 그의 종의 사역을 성취하심은 여호와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백성이 바벨론에 나라를 잃고 포로로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벨론의 우상의 우월성으로 비쳐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는 그의 종의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이 참 하나님임을 드러내셔서 홀로 그에게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 선언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이미 ‘이전 일’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여호와의 종을 통해 이루실 ‘새 일’을 알리시는 데에도 그것들을 확실히 성취하시리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 약속하신 여호와의 종은 결국 우리의 메시아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가 기뻐하시는 자이신 그리스도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왕이었습니다. 그는 낮고 천한 곳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하여 자기를 들어 내지 않으셨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순종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압제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을 불러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벧전 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현실은 전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자기의 영광과 유익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서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오직 우리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