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요즈음 아침엔 온도가 10도 밑으로 떨어질 만큼 서늘하다.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고 나서게끔 한다. 바로 한 달여 전까지 겪었던 불더위가 어느덧 먼 추억으로 느껴질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정시보다 20여분 전 서울대공원역에 닿으니 승열을 비롯해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역사 안에서 진을 치고 있다. 함께 밖으로 나가자마자 공원과 주변의 각양각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올해 가장 아름다운 산행이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코스를 택하도록 만든 덕현이 나타난다. 경기도 화성에 자리 잡았던 방대한 목장의 50년 가까운 운영을 접고 부인과 함께 지난 달 초에 과천으로 이사 온 순수한 자연인 그를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정시에 병현을 제외한 12명이 공원둘레길로 걸음을 옮긴다. 매번 늦는 원식과 아주 오랜만에 나타나지만 역시 시간관념이 결여된 학성을 챙기기 위해 병현을 남겨두었다.
비록 70을 지나 덕현 부부와 연을 이어오고 있지만 항상 존경과 고마움을 갖고 있다. 혼란스럽고 각박한 우리 사회를 힘없고 이름 모를 민초들의 선행이 밝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바로 덕현이가 어머님으로 부르는 장모님인 문숙여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분이다. 2015년 92세로 영면하셨지만 살아생전에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고려대학교와 고대 병원에 기부한 큰 손이었다. 문여사님의 고귀한 기여는 바다낚시 도중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막내아들로부터 시작된다. 1976년 고대 농대에 입학해 다음 해에 숨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보내고 애타게 울던 어머니는 그를 기리기 위한 일을 찾아 나서며 결코 좌절치 않는 삶을 열어간다. 북한 신의주에서 최고의 갑부의 딸로 태어나 625때 남하해 부산을 거쳐 인천에 정착해 운수업과 약국을 통해 거대한 부를 일군다.
막내아들이 죽기 전 그를 위해 인천에 마련한 목장이 바로 덕현이가 운영했던 홍원목장의 전신이다. 목장을 제대로 운영할 사람을 찾던 문여사님이 덕현의 서울농대 은사의 추천을 받아 품에 안으면서 목장은 번창하기 시작한다. 워낙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한 덕현을 문여사님이 둘째 딸 배필로 1978년에 맞아들인다. 다음 해 화성의 홍원목장으로 새롭게 문을 연다. 아울러 문여사님은 막내아들 이름의 장학회를 설립해 고대생들을 돕는다. 지금은 문숙재단에서 장학금을 관리하고 있지만 400여명이 혜택을 받았다. 2014년에는 고대병원에 7층 연면적 2,300평의 문숙의학관을 설립 기증해 의학연구에 매진케 하고 있다. 고대병원의 명예전당엔 문여사님과 덕현이가 최고의 기부자들의 일원으로 등재되어있다. 엄청난 재산을 기부했지만 문여사님은 검소하게 살았고 생을 마치고 만들어진 묘도 마음을 숙연케 할 정도로 소박하다. 목장 낮은 야산의 전망이 뛰어난 능선에 먼저 떠난 남편과 합장되어 있는 묘는 아주 조그만 비석과 상석만으로 구성되어 고인들의 숭고한 삶의 흔적을 떠올리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위대한 어머님의 품에서 자란 덕현이 성공적인 삶을 이끈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천성적인 진솔함과 어떤 난관이라도 굴하지 않는 인내로 헤쳐나간 점이 우리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거대한 농장을 혼자 운영하며 겪은 육체적 고통은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했다. 지금도 발은 만성적 인대손상으로 망가져 있고 손톱과 손가락 마디는 깨져있고 뒤틀려있다. 가족 외에 그를 지탱하게 만들어 준 건 순하고 순한 눈이 큰 젖소들과 짙은 고독의 숲에서 듣던 클래식 음악이다. 농장의 바쁜 일정 중에도 덕현은 부인과 함께 클래식 음악회를 찾아 다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소인의 부부도 간혹 초청받아 귀를 넓히고 있다. 덕현은 우리가 가장 자랑할 만한 친구이고 동성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공원둘레길에 들어서니 줄지어 나타나는 밝고 진한 색채로 물든 나뭇잎들의 아름다움이 발길을 자주 멈추게 한다. 간혹 가을바람에 떨어져 휘날리는 낙엽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만추의 풍광에 흠뻑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시작점에 닿는다. 뒤쳐져 출발한 세 명도 다른 코스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1시가 다 되어 근처에 있는 오리고기 집에서 향연을 벌이며 우정의 날개를 활짝 펼친다. 고맙게도 덕현이 모든 식대를 지불한다. 그가 사는 아파트 근처의 카페에서 이야기꽃을 피워나가며 작별의 시간을 잡아매두려고 안간 힘을 써본다. 나중에 합세를 한 광후와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마지못해 일어서니 3시로 달리고 있다.
함께한 친구들: 권충국, 김종하, 김순화, 김승열, 박병현, 박재진, 방건영, 서광후, 서규석, 신덕현, 이승권, 이원식, 이재묵, 정학성, 정한성, 최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