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사무 7,1-5.8ㄷ-12.14ㄱ.16; 로마 16,25-27; 루카 1,26-38
+ 찬미 예수님
간밤에 눈이 많이 왔네요. 길도 미끄럽고 날씨도 궂은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드디어 대림 제4주일이 되었습니다. 대림초 네 개에 불이 다 들어왔네요. 그러잖아도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은데, 12월 들어서서는 마치 KTX를 탄 것처럼 가속이 더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셨나요?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인데요, 무척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돌판을 모신 계약의 궤를, 마침내 다윗이 모셔왔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겼던 하느님의 계약 궤를 되찾아 올 때 다윗은 얼마나 기뻤던지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은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가 천막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성전을 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통하여, 성전을 짓는 것은 다윗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다윗에게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도, 그 뒤를 잇는 왕들도 하느님께 끝까지 충실하지 못했고, 결국 다윗 왕조는 끊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요, 첫째,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거나, 둘째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의 왕좌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왕조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시고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므로 당연히 두 번째가 맞겠지요.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고 그를 ‘다윗의 후손’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윗의 후손’이 누구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1독서의 말씀으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뒤, 가브리엘 천사는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갑니다. 그 처녀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은 ‘나자렛’이었는데, 이는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유래했습니다. ‘네체르’는 ‘가지’ 혹은 ‘새싹’을 의미하는데요,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는 이사야서(11장)의 말씀과 연관이 됩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독서에서 다윗은 계약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지으려다가 후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는데, 루카 복음은 성모님을 ‘새로운 성전’으로, 또한 ‘계약의 궤’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루카 복음이 이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는 지난주 평일 미사 강론 때 말씀드렸는데요, 궁금하신 분은 우리 본당 다음 카페에 올라 있는 지난주 수요일과 목요일 강론을 참조하셔도 좋겠습니다.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신 아기는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이시기에 성모님은 ‘새로운 성전’이 되시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셨기에, 하느님 말씀을 모신 ‘계약의 궤’가 되십니다. 우리 또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며 주님의 참다운 성전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가 40일 피정을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피정 중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표현했는데, 저는 피정 막바지에 이르도록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제게 오세요”라는 기도를 반복하게 되었는데, 피정을 지도하시던 수녀님께서는 그것도 욕심이고 집착이기 때문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안 오셔도 됩니다…. 하지만 안 바쁘시면 좀 오세요.” 예수님더러 제 안에 오시라는 마음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겠더라고요. 며칠간 씨름을 하다가 기도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뭔데 예수님더러 오라 마라 하는가?”
원래 윗사람이 아랫사람더러 오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자꾸만 예수님께 ‘오시라 마시라’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 정말로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한 달 가까이 기도해 온 것이 수포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씀드리는 일이라 마음이 무척 아플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정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말씀 뒤에 저도 모르게 “왜냐하면 이미 와 계시니까요.”라는 말씀이 뒤따라 나왔습니다. 그러자 제 온 마음이 예수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아는데, 그리고 성체를 통해 매일 내 안에 오시는데 왜 굳이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에, 주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려 하기에,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오고 계신 그분을 마중 나가고 있는지를 되묻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채비를 마치셨고,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시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평과 반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기쁨에 찬 순종의 역사를 시작하신 성모님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또는 외면해 왔던 의외의 소식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이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릴 때,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