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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하느님이 비가 내리게 하신다면 하필 바다로 쏟아지게 하실 게 뭐람? 거긴 물이 무진장이잖아! 게툴리아는 목이 타서 죽는데 기껏 비를 내리신다는 것이 바다로 쏟아지게 하신다? 하느님도 섭리도 엉터리라고!”(「시편 강해」 148,10)
로마제국의 곡창으로 간주되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였지만 아우구스티노의 고향 타가스테(알제리의 수크아라스)는 사막에 가까워 그다지 비옥하지 못했고, 하느님의 섭리를 운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곧잘 조롱이 터져나오던 사회 분위기였다.
자치도시 타가스테의 공무원이던 부친 파트리치오는 바람을 피우면서도 되레 아내한테 큰소리치던 속물이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를 보이는 큰아들 아우구스티노를 대도시로 유학 보내려 가산을 털 만큼 깨인 사람이어서 주위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독실한 신자 아내의 열성으로 죽을 임시에 세례를 받는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오자마자 십자성호로 그음을 받았고, 그분의 소금으로 절여져 있던” 아우구스티노도 어려서 위장 폐색으로 신열이 높아 죽을 지경이 되어 세례를 받을 뻔했지만 금세 낫자 세례가 미뤄졌다. 어머니 모니카로서는 아들이 “아직 더 산다면 때가 더 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나 보다라는 게 아들의 회고다(「고백록」 제1권 11.17).
그래도 모니카는 서른 살 먹은 아들한테서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게 어머니 덕이지요.”(「참된 행복」 1.6)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치맛바람이 대단했다. 처자식만 데리고 출셋길을 찾아 몰래 로마로 떠나려는 아들을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매달렸다가 카르타고 선창에서 따돌림받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훗날 기어이 밀라노까지 쫓아가서 아들이 16년이나 데리고 살던 여자를 내쫓고 열두 살짜리 양갓집 규수와 약혼시키는 극성도 보였다.
“저의 갓난이 시절은 죽은 지 오래지만 저는 살아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당신께 고백합니다. 제가 기억도 못 하는 저의 시초와 갓난아기 시절을 들어 당신을 찬미하렵니다. 주님, 당신에게서 아니면 어디서 이런 생물이 나오겠습니까? 어느 누가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장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6.10)
세계와 인간을 ‘피조물’로 규정하여 ‘창조설’을 확립한 서구 사상가가 아우구스티노다. 애초에는 이렇게 자백한다. “주님, 제가 막상 드리려 하는 말이란 제가 어디로부터 이곳으로 왔는지 모른다는 것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면 어디로부터 이 죽을 생명, 아니면 산 죽음으로 왔는지 모릅니다”(6.7).
인간이 자기 출생을 두고 “파도치는 망망대해 같은 이 세상으로 우리를 제멋대로 내던진 것이 신이냐 자연이냐 필연이냐 우리 의지냐?”(「참된 행복」 1.1)는 의문을 곱씹다 얻어낸 답은 이렇다. “당신 자비가 저를 거두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빚으셨습니다. 부친에게서 또 모친 안에서 시간으로 저를 빚으셨습니다”(6.7). 운명이나 신들의 장난으로 ‘내던져진’ 인생보다 창조주의 손길로 역사의 한 시점에 ‘고이 놓인’ 인생이 훨씬 살 만하다.
존재의 첫 순간부터 하느님 손길로 보살핌 받았다는 안도감이 ‘찬미의 고백’을 빚어낸다. “사람 젖에서 오는 위안이 저를 거두어주기는 했으나 저의 어머니도 스스로 자기 젖가슴을 채운 것은 아니었고, 당신께서 그들을 통해서 갓난이 시절의 음식을 제게 베풀어오신 것입니다. 그때 제가 하던 짓이라곤 고작해야 젖을 빨고 기분 좋아서 순해지거나, 저의 몸뚱이가 언짢으면 우는 것밖에 더 없었습니다”(6.7).
“당신은 존재하시고, 하느님으로서 존재하시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주님으로서 존재하십니다”(6.9). ‘존재’가 하느님께 받은 가장 위대한 은총이고, 생명도 인식도 사랑도 존재의 그릇에 담기는 선물(그리스도교 ‘존재론’)이었다! “당신께서 설령 제가 어린애인 채였으면 하고 바라셨다 하더라도 저는 존재하고 있었고, 살아있었고, 지각하고 있었습니다”(20.31).
기우는 가세에 유학비를 챙겨 카르타고로 가자마자 여자와 동거하고 열여섯에 아들을 낳아 ‘아데오다투스’(하느님이 점지해 주신 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기른 경험은 ‘이노센스(innocens)’라는 화장품 이름을 재음미하게 한다.
“어린애가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터에 제 젖을 먹는 아기를 보고서는 새파래지면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젖가슴에서 풍부하게 솟아나 젖이 넉넉한데 그 아이와 운명을 못 나누겠다는 심보가 과연 무죄함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죄하다는 것은 지체들의 가냘픔이지 어린이들의 맘씨가 아닙니다.”
소년기에도 “놀기 좋아해서, 연극에서 본 것을 흉내 내려고 안달하면서 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짓말로 선생들과 부모님까지 속이곤 하였습니다. 부모님의 곳간과 식탁에서 훔쳐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놀이에서도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심에 속임수를 써 승리를 얻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다른 애의 속임수를 밝혀낼 경우에는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해댔는지, 제가 들켜서 욕을 들을 때는 얼마나 사납게 덤벼들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어디 어린아이의 무죄함입니까? 주님, 아닙니다. 당신께서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적에 겸손의 표로 인정하신 것은 어린 시절의 키뿐이었습니다”(19.30). 이 체험은 교부가 그리스도교에 ‘원죄론’을 심어놓는 계기가 된다.
“단검으로 최후를 결행한 디도를 두고 울던 시절”
소년기(제1권 8.13─20.31)가 오고 “글을 배우라고 학교에 들여보내졌는데 가엾게도 저는 글을 배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배우기에 조금이라도 굼뜨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교사들의 체벌은 “아담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수고와 고통”이라지만 마치 주리를 틀고 인두로 지지는, 순교자의 수난 같았는데 그렇게 해서 주입되는 게 고작 “출세해야 한다는 것,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에 종노릇하게 말솜씨 부리는 기술에 뛰어나야 한다는 것”(9.14)이었다! 산수나 암기과목에는 정떨어졌고, 그리스어에도 영 취미를 못 붙여 그는 그리스어를 모르는 유일한 교부로 남는다.
이 씁쓸한 경험은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타고난 기억력과 상상력을 살리자는 아우구스티노의 탁월한 교육철학을 낳는다. 훗날에 그가 집필한 자유학예(산술, 기하, 문법, 음악, 철학, 미학, 수사학) 교재들은 중세 내내 교과서로 쓰였고, 교리교육에서도 천 년 넘게 통용되던 교본들이 집필되며, 「그리스도교 교양」(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1988년)은 지금도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으로 연구되고 있다.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기해서 인용하는 명석한 두뇌, 활달한 기질, 인간과 자연의 삶에 적극적으로 말려드는 성격은 그를 라틴어에서는 은성기(殷盛期) 로마문학을 대표할 문장가로, 북아프리카 출신임에도 밀라노 황실 교수로 초빙되는 수사학자이자, ‘그리스도교 철학’의 창시자요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전대미문의 논쟁가로 성장시킨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심취하여 속세 문학에 몰두하던 소년시절은 훗날 많은 것을 회상케 한다. “자신을 가엾게 여길 줄 모르는 가엾은 인간보다 더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네아스를 사랑하다 죽어간 디도의 죽음을 통곡하면서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지 않다가 죽어가는 자기의 죽음은 통곡할 줄 모르는 인간보다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13.21)
‘인간 속습의 강물’이라 부르는 속세 문학과 예술이 유피테르를 비롯한 제신들의 외설적인 야담을 미화시키노라면 “얼마나 훌륭한 신인가! 하늘 신전들을 지고한 천둥으로 뒤흔드는 분이야. 그러니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그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래 난 했지. 그것도 기꺼이!”(16.26)라는 탕아들의 핑계로 실행된다.
청년 시절의 방탕으로 미루어 “욕정에 찬 상태에 있음으로써 당신 얼굴에서 멀어지는 것”(18.28)이고 “하느님은 비록 숨어계시고 드높이 침묵 중에 계시지만 불법한 욕정 위에다 맹목을 징벌로 뿌리시므로”(18.29) “도덕적 질서를 어긴 모든 영혼은 본인에게 자기 벌이 된다.”(12.19)는 조숙한 실존적 고백을 낳는다.
이렇게 ‘악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파괴한다.’는 명제는 「고백록」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2권] 내 나이 열여섯
세 번의 인간 사랑
아우구스티노는 생애 전반에 세 여인을 사랑했다. 셋 다 이름이 남겨지지 않았다. 첫 번째는 그가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자마자 동거를 시작하고 아들(아데오다투스)까지 낳아준 여자다. “그 시절 저는 한 여성을 두고 있었습니다. 합법적이라고 일컫는 혼인으로 알게 된 여자가 아니라 지각없이 이리저리 들뜬 제 정욕이 찾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하나뿐이었고 그녀에게는 침방의 신의를 지켰습니다”(4.2.2).
「고백록」 제2권을 펴면 “제 육신의 나이 열여섯 되던 그해에, 색욕의 광기가 제 위에서 홀(笏)을 쥐어 저는 그 앞에 완전히 두 손을 들어버렸습니다.”(2.4)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웃 마다우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카르타고로 대학공부를 떠나기 전 한 해를 허송하던 무렵이다.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곤 사랑하는 일과 사랑받는 일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모니카는 유난히 색정에 몰두하는 아들을 두고도 혹시 유부녀를 건드려 사달을 낼까만 염려했다. “젊은 혈기를 산 채로 잘라낼 수 없을 바에야, 굳이 부부 연이라는 테두리에 묶어둘까 하다가도 아내라는 족쇄 때문에 아들의 창창한 장래가 묶일까 두려웠다”(3.8).
훗날 아들이 밀라노 황실 교수가 되자 모니카는 아들이 16년 동안이나 “품어오던 여자를 결혼의 방해물이나 되듯이 옆구리에서 떼어내” 아프리카로 쫓아 보내고 열두 살짜리 양갓집 규수와 약혼을 시켰는데 아들은 그렇게 “청혼한 여자를 이태가 지나야 맞아들일 터였으므로, 그 미루어진 틈새를 못 참고 딴 여자를 두었다”(6.15.25). 이렇게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랑이 단 한 줄로 스쳐간다.
교회사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그리스도께로 회심할 적에도 마지막까지 족쇄가 되던 것은 사상적 고뇌가 아니었다! 밀라노 정원의 저 밤에 주저와 의혹의 모든 어둠을 순식간에 흩어버린 것은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라는 의미의 로마서 구절이었다(8.12.29).
그 괴로운 체험 때문인지 독신의 수도자와 성직자로 늙어가던 생애 후반기에 아우구스티노는 성에 관해서 유난히 근엄했고, 결혼의 목적을 ‘자녀 출산’에만 국한하는가 하면, 심지어 성욕과 원죄를 동일시할 정도로 심한 청교도 윤리를 교회에 남겼다. 현대의 성문화나 근래의 ‘에로스 영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고향 친구들과 패 지어 돌아다니며 못된 짓을 저지르면서도 ‘악질이 못 되는 열등감’을 한탄하였다. “제 또래 사이에서 제가 덜 창피할까 되레 부끄러워하고, 그들이 자기네 파렴치한 짓을 그토록 자랑삼는 것을 듣거나, 추잡하면 할수록 그만큼 뽐내는 것을 보고서는, 또 색욕으로 저지른 소행을 해도 괜찮을뿐더러 제가 무죄할수록 못난이처럼 보이거나, 제가 순결하면 할수록 그만큼 얼간이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습니다”(3.7).
요새 중학교 ‘일진’들이 1700년 전 인물 아우구스티노와 통할 만한 얘기고 ‘공포의 중딩’들은 “방종한 자들의 유혹은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교부의 실토에도 깊이 공감할 게다.
배나무에서 무화과나무까지
유다인들이 인류사회에 끼친 사상적 공헌이 ‘죄(罪)에 대한 의식’이었다면 철학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우구스티노 사상은 ‘악(惡)의 형이상학’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평생을 두고 악의 문제를 천착한 계기가 열여섯 살에 저지른 ‘배 서리’였다면 믿어질까?(4.9)
“유희에 빠져 진지함의 절도를 넘어서서 갖가지 감정의 허랑방탕함 속으로 고삐가 풀린”(3.8) 타가스테 ‘일진’들이 밤이 이슥해 이웃집 배나무를 싹 털었다. 그러고서 그걸 자루에 담아다 돼지들에게 던져주었다!(4.9)
맛있게 먹자는 쾌락도, 팔아서 돈을 벌자는 이익도 아니고 그냥 재미로 저지를 악이 있다니! ‘악을 악으로 즐길 수 있다.’는 신기함이 그의 사색을 사로잡아 제2권 후반부 전체(4.9-10.18)를 할애한다. “오, 나의 도둑질, 내 나이 열여섯 살에 밤중에 저지른 나의 저 죄악이여, 가련한 내가 네 안에서 사랑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더냐?”(6.12)
불혹의 나이가 되어 그 시절의 치기 어린 장난을 회상하던 그에게 인간의 심각하게 비뚤어진 심연이 들여다보였다. “그 과일은 아름다웠습니다만 가엾게도 제 영혼은 열매 자체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저한테는 더 좋은 과일이 얼마든지 있었고 훔친 것들은 그냥 버렸습니다. 그저 도둑질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과일을 서리해서 그냥 버렸으니 제가 배불리 맛본 것은 오로지 악의(惡意)뿐이었고, 그 악의로 하는 도둑질이 재미있었습니다. 하느님, 지금 저는 도둑질에서 저를 재미있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실상 아무 멋도 없습니다”(6.12).
“저 순간 그 마음이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그저 악인이 되고 싶었고 제 악의의 원인은 악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악의가 추잡했고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자멸하기가 좋았고, 파렴치하게 무엇을 탐한 것이 아니라 파렴치 자체를 탐하는 영혼이었습니다”(4.9).
그의 고찰은 여기서 ‘악의 신비’로 넘어간다. “해서는 안 될 짓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니, 그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니, 과연 그럴 수가 있습니까?”(6.14)
인간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의 자유의지는 최고선에 동의하는 자유뿐임에도 그에 역행할 적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가 곧 선이다!’라는 초인(超人)사상이 깔려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의 본질은 오만인데, 문제는, “교만조차도 지고함을 본뜨는 무엇, 당신 홀로 만유 위에 지존하신 하느님을 본뜨려는 무엇”(6.13)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친다.
다만 그 모방은 하찮은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의 전능을 흉내 내는 음울한 모방, 비뚤어진 모방일 수밖에! “그러니까 당신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은 모조리 당신을 본뜨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저 도둑질에서 제가 좋아한 것은 무엇이며, 비록 못되게 또 비뚜로 본떴다고 할지라도 저의 주님을 어떤 방식으로 본떴다는 말입니까? 제가 능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으니까 속임수로라도 당신의 법에 대항해서 그 짓을 저지르고 싶었던 것입니까? 아둔하게 전능을 모방하고서는, 안될 짓을 하고서도 벌을 받지 않으니까, 포로가 되어서도 기형이나마 자유를 모방했다는 말입니까?”(6.14)
일찍이 낙원에서 인간을 유혹하던 악마의 음성,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리라.’(창세 3,5 참조)는 속삭임이 귓전을 울렸다. 악의 세력을 쳐부수는 대천사의 이름이 미카엘(Mi-ka’-el: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교부의 눈에 바로 그 모방에 구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본뜨고 있을지라도 그자들은 당신을 떠나서 갈 곳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6.14). 선행은 물론 저 모든 악행에서도 인간이 무의식으로 추구하는 바는 하느님이라는 절대 선, 절대 지평이었다! 죄악마저도 무구함을 동경하고 하느님 안에 안식을 찾는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다.
“누가 있어 이처럼 비비 꼬이고 얼키설키한 실타래를 풀어내겠습니까? 더럽습니다. 거들떠보기도 싫고 들여다보기도 싫습니다. 당신을 원합니다. 선량한 눈에 아름답고도 멋진 무구함이시여, 만족할 줄 모르는 만족감으로 당신을 원합니다”(10.18).
애초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신 조물이기에 감히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몸부림마저 대견해하시는 창조주! 그래서 타가스테 포도밭 옆집의 ‘배나무’에서 시작한 아우구스티노의 방황은(악의 문제를 두고 속고 속이는 마니교에 떨어져 8년의 긴 세월을 외돌기는 했지만) 밀라노 정원의 ‘무화과나무’ 밑에서 “집어라! 읽어라!”라는 동요로 끝을 본다. 낙원의 ‘선과 악을 아는’ 나무 밑에서 출발한 인류의 구세사가 골고타의 ‘십자 나무’ 밑에서 대단원을 보듯이!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3권] 아! 진리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저는 카르타고로 왔고 거기서는 죄스러운 애욕의 냄비가 사방에서 저를 달구고 튀겼습니다. 아직 사랑하지 못하던 터여서 그냥 사랑하기를 사랑할 뿐이었으며 영문 모를 허전함 때문에 오로지 사랑하기를 사랑하면서 사랑할 만한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고백록」 3.1.1).
철학사에서 누구보다 ‘마음의 논리’를 따라서 살았고, 그래서 현대 실존 철학의 원조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노. 그가 카르타고 극장의 연극에 몰입하고 특히나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심취하던 대목에서 「고백록」의 독자들은 알아본다, 호머의 주인공 율리시스처럼, 베르길리우스의 주인공 아이네이아스처럼, ‘운명이 지워준 소명’을 향해, 부단히 아른거리는 ‘절대 지평’을 향해 부단히 방황하며 난파하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한 지성인의 눈길을!
궁극적인 것, 불변하는 진리,‘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는’(13.36.51)안식을 찾아가는 여로에서 그는 머물던 땅(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도, 사랑하던 여인들도, 수사학 대가와 황실 교수직이라는 출세 가도도, 자기가 섭렵한 당대의 온갖 사상(마니교와 점성술, 아카데미아 회의론과 플라톤 철학)도 뒤로하고 “오로지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방랑자였다.
진리에 바치는 연가 「고백록」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 제국을 이룬 두 민족 아테네인과 로마인은 취향이 퍽 달랐다. 예를 하나 들자면, 두 도시 다 흥행을 좋아하여 해마다 5월이면 예선을 거친 작품으로 연극제를 열었는데 수상 작가의 작품들을 4부 연작으로 상연했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은 비극 작품 셋과 맛보기로 희극 하나를 공연했고, 로마인들은 비극을 감당 못해 비극 한 편과 희극 세 편을 상연했다.
워낙 실용적이고 구상적이던 로마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난해한 형식 논리와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을 아예 이해하지 못했고, ‘인생철학’에 해당하는 스토아에 겨우 호감을 보였다. 그들에게 언어란 ‘웅변’, 철학이란 ‘삶의 예술’(키케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열아홉 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혼자서 독해하던 로마인이 ‘철학 하며 살자!’는 요지로 쓴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읽고서 야심 찬 삶의 진로를 ‘진리 탐구’로 아예 바꿔 버렸으니 바로 아우구스티노다. 철학사는 후대에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일컫는 ‘헬레니즘’과 유다 그리스도교의 ‘헤브라이즘’을 서구 문명으로 한데 합류시킨 ‘양수리’(兩水里)로 그를 평가한다.
“키케로라는 사람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이 제 성정을 아주 바꾸어 놓았고 제 소원과 열망을 딴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까지 품어 왔던 저의 헛된 희망은 어느덧 모조리 시들해졌고, 저의 마음은 이제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는 욕구로 믿기지 않을 만큼 헐떡이기 시작했습니다”(3.4.7). 그는 인간이 본질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삼위일체론」 15.8)고 단정했다.
「성경」을 제외하고 「고백록」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 오는 까닭은 진리에 대한 그의 열정이 이 책에 담겨 있어서다. 「참된 종교」(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1988년)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인답게 강변한다, 철학은 자기 삶을 전부 내거는 무엇, 곧 ‘참된 종교’여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철학은 지성의 유희요 호기심에 불과하다고!
우리말로 처음 소개된 아우구스티노 전기 소설이 「구원(久遠)에의 불꽃」(조철웅 역, 가톨릭출판사, 1965년)이었듯이, 그에게 철학은 시뻘건 혓바닥을 넘실거리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보는 형광등의 밝고도 차가운 빛이 아니었다.
오, 진리여, 진리여! 저 사람들이 당신을 외칠 적에, 그렇게도 흔하게 그렇게도 다채롭게 당신을 소리 내어 드러낼 때 제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당신을 속으로 사무치게 그리워했습니까!”(3.6.10) 이렇게 고백하며 진리를 애당초 자기가 섬길 ‘하느님’으로 명명한다. “오, 영원한 진리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7.10.16).
그리고 오랜 사상적 방랑 뒤 나이 서른에 자기가 찾던 진리를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인격 신에게서 발견하고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독백」 1.1.5) 과연 이후 44년 동안 수도자, 성직자, 영성가,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는 이 언약을 남김없이 실천한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탄식이 있다. ‘진리의 연인’다운 철학적 유언이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10.27.38)
호리고 호리며 속고 속이던 마니교도 시절
저토록 결연하게 진리를 찾아 일평생 헌신하겠다던 젊은이가 마니교에 빠지다니! “9년이라는 세월, 곧 내 나이 열아홉부터 스물여덟까지 우리는 호리고 호리면서 갖가지 욕정에서 속고 속였습니다. 노골적으로는 자유 학예라고 일컫는 학문을 내세워, 남모르게는 종교라는 거짓 이름을 내세워, 저기서는 오만하고 여기서는 미신을 숭상하면서, 그리고 어디서든 허황하게 쏘다녔습니다”(4.1.1).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성토 문학에서만 흔적을 남겼던 마니교는 20세기에 투르키스탄의 투루판과 이집트의 파윰에서 마니교 고문서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초대 그리스도교에 영지주의 운동을 일으킨 ‘빛의 종교’로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니교의 요체는 이원론이다. 우주는 빛과 어둠, 선과 악 두 원리가 겨루는 투쟁의 대서사시로 묘사된다. 역사는 어쩌다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간 빛의 분자를 해방하는 구세사란다, 태초와 투쟁과 해방의 3막으로 된.
빛과 선의 세계에는 ‘위대한 아버지’와 ‘위대한 어머니’와 ‘위대한 영’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어둠의 세력과 싸움을 벌인단다. 빛의 원리는 ‘원초 인간’과 ‘생명의 영’, 그리고 ‘제3 사절’을 차례로 우주에 파견하여 물질에 사로잡힌 빛의 분자를 구출하고 해방한다니 신구약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 귀에도 솔깃하였다.
일평생 자기가 저지르는 악의 탓을 누구에게 씌울지 고민하는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무릎을 치게 한 교리는 바로 이 ‘선악 이원론’이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본성이며 그래서 탓이 나에게 없다.”(5.10.18)는 속임수였다!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폐쇄적 밀교 의식이라는 의혹을 사 로마 제국에서 걸핏하면 추방령을 받는 집단이 교도들끼리는 서로 돕던 끈끈한 유대도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에 들었다. 사실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학원을 옮길 적에 손을 써 주었고, 로마에 가자마자 숙식을 마련하고 중병에 걸린 아우구스티노를 보살핀 사람도 부유한 마니교도 콘스탄티우스였다.
더구나 로마 시장 심마쿠스에게 줄을 대 밀라노 황실 교수직을 얻을 때도 그들의 후원을 입었다. 그의 특출한 언변을 밑천으로 황실에다 뛰어난 마니교도 한 명을 심어 놓으려는 계책이었으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이 종교사상의 허구를 깨닫는 날, 유럽에서 마니교를 결정적으로 타파할 인물을 후원하고 있었던 셈이다.
카르타고에서였다. 아들이 마니교에 빠져들었을뿐더러 명석한 두뇌와 지도력을 이용해서 많은 지인까지 마니교로 끌어들이는 짓을 보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어느 주교에게 찾아가 제발 아들을 설득해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자 “나도 한때 그랬소. 댁의 아들도 잔뜩 들떠 상당수 풋내기를 흔들어 놓고 있는 참이어서 아직 무엇을 배울 만한 사람이 아니오.” 하더란다.
그래도 울며불며 매달리는 모니카에게 그 주교가 짜증을 내면서 던진 한마디는 이랬다. “그만 가 보시오. 그렇게나 많은 눈물 바람을 받은 자식이 망할 리 없소!”(3.12.21)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4권] “내가 내 자신에게 커다란 수수께끼”
‘자네 뒤만 따라가노라면’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으뜸가는 행복으로 여기던 아우구스티노 곁에는 늘 친구들이 있었다. “육체적 쾌락이 제아무리 넘치더라도 친구들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던 기분 … 친구들만은 무작정 사랑했고 아울러 그들에게서 제가 무작정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6.16.26).
이러한 고백처럼, 그가 주고받은 서신 300여 편이 지금까지 간수될 정도다. “우정에는 이성으로도 확실하게 밝힐 수 없는 신비로운 무엇이 있었다”(「믿음의 유익」 10).
일평생 속을 터놓고 지낸 고향 친구 알리피우스가 가장 가까운 인물로 꼽힌다. 아우구스티노가 카르타고에서 여자와 동거하면서 훈장 노릇을 할 적에 그의 강의를 한 번 듣고는 부친의 엄청난 반대에도 당장 그의 문하생이 된다. 알리피우스를 황당한 점성술로 꾀고 마니교에 끌어들인 것도 아우구스티노였다. 여자에게 도통 흥미가 없으면서도 여자 없인 못 살겠다던 아우구스티노 말에 친구의 의리 때문에 호기심 삼아 자기도 결혼이라는 걸 해 볼까 한 이가 알리피우스다.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에서 다시 만난 알리피우스에게 아우구스티노가 묻는다. “자네처럼 지각 있는 사람이 내가 꾄다고 해서 왜 마니교에 빠져들었나?” 이 물음에 알리피우스가 답한다. “자네가 내 인생의 길잡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딴 사람을 못 만나리라는 예감도 들었어. 마니교는 늘 나를 찜찜하게 만들어. 내가 마니교도가 된 것은 자네를 믿기 때문이야. 자네가 설혹 길을 잘못 들어도 자네 뒤를 따라가노라면 기어이 나를 진리에다 데려다주리라 확신한다고. 자넨 그토록 진리를 갈구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무한 신뢰’로 아우구스티노가 밀라노로 가자 알리피우스는 로마의 관직을 사임하고 따라나섰다. 카시키아쿰의 은둔, 387년 부활절의 세례, 심지어 아프리카 귀향과 타가스테 수도원 생활도 함께한다. 아우구스티노와 비슷한 시기에 사제가 되고, 둘의 고향 타가스테의 주교가 된다. 그와의 우정은 제6권(7.11-16.26)에도 길게 묘사되어 있다.
‘하늘 사냥개’와 맞닥뜨리다
아우구스티노의 삶에 깊은 충격을 준 우정이 또 하나 나온다(4.7-8.13). 스물한 살에 잠시 고향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해에,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또래인 데다 청춘의 꽃으로 함께 피어오르던” 벗을 만났다. “제 일생의 모든 환락 가운데서 가장 달콤한 우정”(4.7)이라고 회고한다.
로마인들은 친구를 ‘자기 영혼의 반쪽’이라고 했다. 그러던 우정이 겨우 한 해를 다 못 채웠는데 하느님께서 이승에서 거두어 가셨다! 제4권 전반부는 사랑 하는 벗과 사별한 아픔을 하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고전 문학에서 빼어난 ‘우정론’으로 꼽힌다.
“그때 제 마음은 크나큰 고통으로 암울했으며 어디를 둘러보아도 죽음뿐이었습니다. 고향은 그야말로 형극이요 아버지의 집은 기괴한 불행이었으며, 그와 함께했던 모든 것이 그가 사라짐으로써 거대한 고문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를 간직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미워졌습니다”(4.9).
벗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평안도 없고 분별도 없이, 갈기갈기 찢기고 선혈을 흘리는 영혼을 끌고 다녔으며, 영혼 둘 곳을 찾아내지 못하던”(7.12)나날에서 아우구스티노로서는 “자기가 자기에게 커다란 수수께끼”(4.9)가 되고 만다.
하느님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안달을 하는”(1.1.1)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 “인간을 인간답게 사랑할 줄 모르는 광기, 인간사에 절도(節度)없이 안달하는 어리석음”(7.12)을 문득 체득한다.
인간에게 지상 사물은 ‘사용하는’(uti) 대상이고 하느님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향유할’(frui)대상이기에 “무릇 사멸하는 사물들에 대한 우애에 사로잡힌 마음은 모두 불행하고, 사랑하던 것을 잃고 나면 비참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도 이미 그것으로 비참한 법”(6.11)임을 감 잡는다.
이치는 분명했다.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저 모든 것으로 저의 영혼이 당신을 찬미하게 하시되, 사랑으로 그것들에게 끈끈하게 들러붙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은 가던 곳을 향해서 가게 마련이고, 가던 곳이란 비존재를 향해서입니다. 영혼은 그런 사물 안에 존재하고 싶어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물들 안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들에는 안주할 만한 ‘어디’라고 할 것이 없으니 머물러서지 않는데도 말입니다”(10.15).
이처럼 인간은 ‘절대 지평’(絶對地平)을 눈앞에 두고 부단히 그 지평선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 운명인지, 친구 잃은 참담한 슬픔과 비통에서 섬뜩함을 느끼고 그 정체를, 당신에게서 달아나는 “도망자들의 등 뒤를 바싹 쫓으시는 복수의 하느님의 묘한 솜씨”(4.7)라 불렀다!
그분 말씀이 폐부에 박혀 있어서 어디로나 그분께 포위되어 있다는 실감(8.1.1), 영국의 현대 시인 프랜시스 톰슨이 묘사한 ‘하늘 사냥개’의 콧김을 목덜미에 느끼고 막다른 골목에서 주저앉는 항복! 훗날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아우구스티노 수도 가족’을 이루는 영성 생활의 초석이 이 항복이다(8.13-12.19).
‘탈출기 형이상학’
이런 사색은 평생 백 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아우구스티노의 첫 작품( “제가 저 서책을 쓴 때는 스물예닐곱 하던 나이였습니다.”)「아름다움과 적합함」에 흔적을 남긴다. 교부의 생전에도 이미 유실되어 찾아낼 길 없어 아쉬웠는지, 제4권 후반부(13.20-16.31)에서 대강 줄거리를 더듬어낸다. 지상의 사물과 타인이 우리에게 풍기는 매력을 ‘아름다움’(pulchrum)이라 부른다면, 자기들을 있게 만드신 분을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적합함’(aptum)에 인간더러 눈뜨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예술’(15.24)이었다!
“사람의 영혼이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당신 아닌 딴 곳에 매달린다면, 고통과 마주치게 됩니다. 비록 아름다운 것들에 매달리더라도 당신 밖에서 또 자기 밖에서라면 그렇게 됩니다. 당신께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한 그 아름다운 사물들이란 도대체 아무 존재도 아닐 것입니다”(10.15).
저 예술이 사랑하는 벗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그를 가르쳤다, 오감에 파악되는 경치도, 가락도, 향기도, 잔치와 쾌락도 ‘존재’라는 그릇에 담겨야만 진선미임을! ‘현존’과 ‘부재’의 엄청난 차이를! 결국 ‘문제는 있느냐, 없느냐?’ 임을!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안아서 키워 본 아들, 그 다정한 벗들도 “생성하면서는 존재하기를 시작하고, 완성에 이르려고 존재를 지향하는데, 존재하려고 그만큼 빨리 성장할수록 비존재를 향해서도 그만큼 서둘러 가는 것임을!”(10.15) 그것이 사물의 한도임을! 그 한도를 간파하는 지성은 이미 그 한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인간이란 그 자체가 ‘실로 위대한 심연’임을!(14.22)
하늘과 땅이 외친다, 자기들은 만들어졌다고. “우리가 존재함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는 우리는 없었다!”(11.4.6)이래서 세계를 선하신 창조주의 선한 피조물(esse creatum)로 규정하는 ‘창조론’이 서구 세계를 장악한다.
“주님, 아름다우신 당신께서 저것들을 만드셨습니다. 저것들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존재하십니다. 저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11.4.6).
따라서 우리 피조물이 하느님께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존재’(esse)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왜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소개하셨는지 알아듣게 해 주었다.
하느님 외 모든 존재가 비존재를 향하여 소멸하는 까닭은,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니, 결국 하느님만 ‘최고로 존재하시는 분’(summe esse), ‘참으로 존재하시는 분’(vere esse)이시다. 훗날 ‘탈출기 형이상학’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도교 존재론의 가닥이 잡혔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5권] “달려가거라! 내가 안고 오리라”
‘엄지 공주’ 하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하느님께서 만드신 하와는 키가 얼마나 될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제기한 우스개다( 「죄의 결과들과 용서, 그리고 유아 세례에 관하여」 1.38.68). 길어야 십 몇 센티였을 갈비뼈로는 기껏 ‘엄지 공주’나 나왔을 법한데, 하느님께서 얼마나 솜씨를 부리셨기에 아담이 ‘아, 드디어 나타났다!’며 하와를 얼싸안으면서 하느님께 ‘엄지척!’을 했을까?
비슷한 우스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천상에서 자문 회의가 열렸다. 진흙으로 손수 빚으신 사람에게 콧김을 불어넣으시면서 하느님께서 “당신들에게 있는 자유 의지를 나눠 줄 것인가?” 하고 물으시자 천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더란다. “그놈들은 오직 그것을 어떤 짐승보다 더욱 짐승답게 사는 데만 써먹을 것입니다”(괴테, 「파우스트」). 천사들의 극구 만류에도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느님께서는 자신만만하셨는지 아우구스티노에게도, “달려가거라! 내가 안고 오리라. 내가 데려오리라. 거기서 내가 안고 오리라!”(6.16.26) 하시더란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하느님께 드리는 말투는 좀 분에 넘치게까지 들린다. “도망쳤습니다. 지켜보시는 당신을 안 보겠다고 도망쳤고, 스스로 눈멀어 당신께 거역하겠다고 도망쳤습니다. … 악인들이 불안하면 떠나가고 당신께로부터 도망치게 놓아두십시오. 당신의 얼굴을 피해 달아난다면 과연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5.2.2)
“당신 앞에서 숨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5권은 “내 하느님 얼굴 앞에서 내 나이 스물아홉 살이던 그 해를 두고” 아뢰는 말씀이다. ‘모든 만남은 모험’이라지만, 아우구스티노의 두 만남, 곧 카르타고에서 마니교 성직자 파우스투스 주교와의 만남(383년)과 이태 뒤 밀라노에서 가톨릭 주교 암브로시오와의 만남이 앞뒤에 그려져 있다.
그 만남을 거쳐서 주님 앞으로 끌려오던 행로를 더듬으면서 은총 앞에서 사람이 저항해 본들 소용없다던 자포자기가 퍽 솔직하기까지 하다. “닫힌 마음이라고 당신 눈이 꿰뚫어 보지 못할 리 없고, 인간들의 완고함도 당신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불쌍히 여기시든 벌을 내리시든 반드시 그 완고함을 풀어 버리시며, 당신의 열기 앞에서 숨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5.1.1).
두뇌가 명석한 데다 많은 지식인을 손쉽게 끌어들이던 아우구스티노더러 제발 마니교 ‘간선자’ 반열에 오르라고 거듭 요청하는데도, 마니가 남겼다는 몇몇 교리의 떨떠름한 구석들 때문에 망설이던 그에게, 신도들은 고명하신 파우스투스 주교님만 오면 모든 의혹이 구름처럼 걷히리라며 소매를 붙들었다. 과연 그가 카르타고에 왔다. 첫눈에는 “토론을 벌이는 그자의 동작과 열정에 맛을 들이고, 기막히게 어울리고 유창한 어휘에 반했지만”(5.6.11) “악마의 커다란 올가미로서 많은 사람이 감언이설로 그 올가미에 걸려들고 있음”(5.3.3)을 간파했다.
파우스투스의 호탕한 성격, 자기 무식을 솔직히 인정하고서 도리어 아우구스티노에게 자유 학예를 배우는 겸허함에는 끌렸지만,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과일이나 배춧속을 먹어 주면 식물에 갇힌 ‘빛의 조각’ 또는 ‘신의 조각’들이 해방된다는 믿음 따위로 음식이나 가려 먹고 온갖 금기를 내세우며 개인의 해탈이나 찾는 ‘사사로운’ 종교심이 환멸감을 주었다.
아무튼 “어떻든 마니의 서한들을 연구하던 공부도 꺾였고, 그 종파에 정진하겠다고 마음먹어 왔던 제 모든 노력이, 그 사람을 알고 나서부터는, 모조리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처럼 다수 사람에게 죽음의 올가미가 되어 왔던 파우스투스라는 인물이, 내가 그동안 사로잡혀 있던 내 올가미를 점차 느슨하게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5.7.13). 그로부터 10여 년 뒤(391년) 가톨릭 사제가 된 교부는 「파우스투스 반박」을 비롯하여 무려 아홉 권의 마니교 반박서를 집필하여 서로마 제국에 퍼지던 이 영지주의를 아예 뿌리 뽑다시피 한다.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파우스투스에게 절망하고서도 마니교에서 아주 떨어져 나가겠다는 마음은 못 먹었다. “이미 몸담은 곳보다 더 나은 곳을 찾아내지 못하는 마당에, 정말 더 낫다고 택할 만한 무엇이 밝히 드러나지 않는 한, 그냥 그대로 눌러앉는 것으로 만족하겠다.”(5.7.13)는 ‘양다리 걸치기’였다.
로마에 학원을 차리라면서 카르타고를 탈출하게 돕고, 희망의 땅 로마에서 중병이 들어 저승 문턱까지 간 그를 병간호해 주며 거둬 주고, 급기야는 밀라노 황실 교수직까지 알선해 준 마니교와 굳이 손을 끊을 필요가 없었다. 교부는 훗날에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8.7.17)라는 문구로 당시의 심경을 자백한다.
그러한 지적 기만은 자기 인간성에도 회의를 품게 하고, 사상적으로도 “인간이 과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뜨린다. “그 무렵 아카데미아 학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나머지 철학자들보다 더 현명한 철학자였다는 생각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두고 의심해야 한다고 간주하였고, 인간에 의해서 여하한 진리도 파악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5.10.19).
당시의 정신적 고뇌는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라는 명제로 정리되었고, 개심 직후 집필한 여덟 편의 ‘철학적 대화 편’에서도 첫 작품 「아카데미아 학파 반박」(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16년)으로 간행된다.
당대 제국 최고의 웅변가요 정치가이던 로마 시장 심마쿠스(340-402년)가 마니교도이자 회의론자인 아우구스티노를 황실에 수사학 교수로 추천한 데는(384년) 저의가 있었다. 자기 정적 암브로시오(340-397년)가 가톨릭 주교로서 장악하고 있던 밀라노에서 조상 전래의 종교를 복원하려던 운동에 젊은 웅변가의 머리와 언변이 쓸모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너희를 지고 간다”
여하튼 암브로시오 주교는 아프리카 출신의 수사학자를 친절히 맞아 주었다. 아우구스티노는 호기심에 틈틈이 주교의 설교를 들으러 다닌다. “그의 언변이 과연 자기 명성에 걸맞은 것인지 아니면 세평에 오르던 것보다 더하거나 덜 유창한지 한번 가늠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내용에는 흥미를 두지 않고 되레 경멸하는 태도로 임하였으며, 연설의 맛만 즐기고 있었습니다”(5.13.23).
그러다 심경에 변화가 온다.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서 참이 아니고, 입술에서 나오는 신호가 다듬어지지 않고 소리난다고 해서 거짓이 아님을 배워 갔고”(5.6.10), “그가 유창하게 말하던 것을 받아들이기로 내가 마음을 열기에 이르자 그가 진실하게 말하던 내용도 똑같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5.14.24).
“당신께서는 당신 섭리의 은근한 비밀로 나를 움직이고 계셨고, 정직하지 못한 제 오류를 제 눈앞으로 벌써 돌려놓으심으로써 내가 보고서 미워하게 하셨습니다”(5.6.11).
애초에 “제게는 가톨릭이 패했다고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아직 승자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5.14.24)라며 유보하는 태도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던 아카데미아 학파의 방식을 따라, 만사를 의심하고 만사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마니교도들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내 “당분간 부모가 나에게 당부했던 가톨릭교회에서 예비 신자로 있기로 작정하는”(5.14.25) 지경에 이른다.
그런 결심에 이르기까지 자식을 위해 낮이고 밤이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하느님의 자비를 마치 하느님께서 발부하신 채무 증서나 되듯이 늘 하느님께 꺼내 보이는’ 어머니의 ‘몰염치한’ 기도(?) 덕분임을 모르지 않는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이사 46,4)는 말씀대로, 개인이든 전 인류든 구원의 역사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다시 만드시는 당신의 손길”(5.7.13), 곧 ‘생산자 책임’을 절감하시는 창조주의 ‘리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은총의 박사’다운 결론이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6권] 아우구스티노의 ‘정치적 사랑’ - ‘세상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 사랑’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
「고백록」 제6권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자기가 세 여인에게 기울였던 애정(12.21-21.25), 친구 알리피우스에게 쏟았던 우정(7.11-11.20)을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회상한다. 그는 황실 교수로 채용되자마자, 퇴임 뒤 조그만 속주의 총독 자리 하나쯤은 돌아오려니 하는 기대에서, “특히 모친이 일을 꾸미는 바람에”라는 핑계로, 자기 나이 서른에 “결혼 적령에서 두 살가량이 모자란” 열 살짜리 양갓집 규수와 약혼을 한다(13.23).
그러고서 아들까지 낳아 주고 15년간이나 “품어 오던 여자를 결혼의 방해물이나 되듯이 옆구리에서 떼어 내” 아프리카로 쫓아 보낸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에게 매여 있던 제 마음은 찢어지고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는 감상이나, 떠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알지 않겠노라고 하느님께 맹세하더라.”며 자존심을 챙기는 말마디는 좀 치졸하게 들린다. 하지만 쫓겨난 여자가 남긴 공백, 두 살 모자란 약혼녀가 적령을 채우는 그 “틈새를 못 참고 딴 여자를 두었습니다.”(15.25)는 고백은 솔직하기까지 하다.
먼 옛날 고향에서 치기 어린 우정을 나누다 갑자기 사별한, 이름 없는 친구에게 쏟은 격정적인 파토스(4.4.7-4.12.19)와는 달리 알리피우스의 우정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진리 탐구의 여정과 타가스테 수도 생활, 둘 다 주교로서 사목 활동을 함께한다. 여하튼 “친구들만은 무작정 사랑했고 아울러 그들에게서 제가 무작정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6.16.26)는 고백 그대로다.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아우구스티노는 치열하게 사랑하였다. 여성에 대한 애욕이든 친구에 대한 우애든 학문에 대한 집념이든, 인간 실존의 중심(重心), 곧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한 발현이었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자리로 기웁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갑니다”(13.9.10).
이 말은 ‘인간은 사랑이다.’라는 아우구스티노의 인간 정의에서 온다. 논변은 간결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참조)라는 신약의 전제에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이다.’(창세 1,27 참조)라는 구약의 명제를 대입하면, 모습은 원형과 비슷하므로, ‘인간은 사랑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 사랑’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
20세기에 아우구스티노의 정치 철학이 간직한 ‘정치적 사랑’을 맨 처음 간파한 사상가는 독일의 한나 아렌트다. 1500년 전 아우구스티노가 ‘국민’을 정의하여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한데 뭉친 이성적 존재들”( 「신국론」 19.24)이라고 한 말에서 영감을 얻어 아렌트는 ‘세상 사랑’(amor mundi)이라고 용어를 만들었다(1929년도 학위 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노’). 사랑은 다른 사람과 연대를 만들어 가고, 사회 의식과 종교적 성숙에 따라 그 연대가 혈연에서 동포애로, 조국애로, 인류애로 확대되는 까닭이다.
서기 430년, 영원한 도성 로마가 고트족 장수 알라리크에게 점령당하고 약탈당하자 로마 제국의 지성계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노는 인류사를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인간의 두 의지가 합작으로 전개하는 구세사의 지평에서 바라보면서 「신국론」(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04년)을 집필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이 사사로이 그리고 집단으로 발휘하는 모든 욕망을 ‘사랑’으로 환원시킨다. 그 사랑의 성격이 선하거나 악한지에 따라 ‘지상 도성’과 ‘하느님 도성’으로 갈라진다고, 사랑의 성격은 ‘사랑의 질서’에 따라 정해진다고,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힌 상태가 곧 평화라고 역설하였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 「신국론」 14.28).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지상의 도성’과 ‘하느님의 도성’이 갈라지는 기반을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과 ‘사회적인 사랑’(amor socialis)이라고 하였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 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아래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 「창세기 축자 해석」 11.15.20).
엉뚱한 서품식 두 차례
우리가 읽는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노가 387년 부활절에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스티아 항구에서 모친 모니카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리를 발견하고서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독백」 1.1.5)라고 선언한 이후의 여생은 ‘하느님 사랑’에서 동기를 얻어 ‘세상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파란만장한 투쟁이 된다.
오랜 정신적 방황을 마치고 고향 타가스테의 생가에서 지인들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오로지 진리 탐구와 수덕에 매진하던 3년여 세월은 목가적 행복이었다. 도회지를 피하여 시골에 은둔한 까닭은 그 인물만큼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은 자칫 신도들에게 붙들려 반강제로 사제직이나 주교직에 서품될 우려에서였다. 밀라노 집정관이던 암브로시오도 밀라노 교회가 주교를 선출하지 못하고 표류하자 이를 감독하러 들렀다가 신도들의 호선으로 그만 주교에 뽑혀 입교와 사제품과 주교품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으니까.
아우구스티노가 타가스테에 정착한 지 3년 뒤 한 사업가에게서 수도원 입회 문제를 상의드리겠으니 도회지로 와 주십사 하는 편지를 받고서, 80km 떨어진 히포로 간 적이 있다. 이리저리 뜸을 들이던 사업가는 히포에 온 김에 대성당도 둘러보자고 제안해서 둘이는 성당에 갔다. 성당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문이 잠기고 아우구스티노는 장정들 손에 번쩍 들려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성당을 가득 메운 채 기다리던 신도들의 갈채와 환성 속에 아우구스티노는 그만 사제로 서품되고 말았다. 391년의 일이다(포시디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5장, 이연학 · 최원오 역주, 분도출판사, 2008년).
4년 뒤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히포의 늙은 주교 발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주교가 공석이 된 교구 사람들이 히포에 나타나 서성거리면 아우구스티노 사제를 수도원 깊숙이 숨겨 놓곤 했다. 그를 납치해 자기네 주교로 삼아 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395년 6월 발레리우스는 인근 주교들을 히포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아프리카 수석 주교 메갈리우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갈리우스가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 사제를 제단 앞에다 무릎을 꿇리고는 동료 주교들과 함께 손을 얹어 주교품을 줘 버렸다. 본인이 울고 불며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8장).
그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노의 생애 후반은 히포의 주교로서 무너져 가는 로마제국의 악취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가톨릭 윤리를 정립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분주한 투쟁으로 점철된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7권] 사랑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
“찬미하는 사람의 고백이거나 뉘우치는 사람의 고백이거나”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을 왜 썼을까? 그리스 문학가든 로마 정치인이든 자서전을 쓸 때는 설화에 가까운 영웅담들,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간들을 싣고서 ‘자기선전’이라는 수사학적 허세를 부리기 마련이었다. 바오로 사도 이후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이 교부는 생애 전반부를 담담하게 들려주면서 하느님과 독자들 앞에 자비와 동정을 비는 참회를 써내려 간다.
395년에 히포의 주교로 서품된 아우구스티노가 북아프리카 교회를 결딴내다시피 한 도나투스파 이단에 정면으로 맞서자 “저자가 도대체 누구야?”라는 인신공격이 쏟아져 나왔다. 새 주교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다. “저의 선업을 두고는 안도의 한숨을, 저의 악업을 두고는 탄식의 한숨을 쉬면 좋겠습니다. 저의 선업은 당신의 업적이자 당신의 선물이며, 저의 악업은 저의 죄악이자 당신의 심판입니다”(10.4.5). “그토록 많은 제 죄의 질병에서 제가 누구 덕분에 빠져나왔는지 보았다면 자기가 그 많은 죄의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음이 바로 그분 덕분임을 발견하겠기에 말입니다.”(2.7.15)라는 기대에서였다.
「성경의 시편」,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으로 한국 가톨릭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번역문을 남긴 시인 최민순 신부님이 우리가 읽어 온 이 책에 ‘님 기림’이라는 부제를 단 것은 참으로 멋진 재치였다. 실상 책 전체에 자기를 지성적 오류와 도덕적 죄악에서 해방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드리는 ‘찬미의 고백’과 ‘지은 죄의 고백’, 그리고 후반부의 창조론에 드러나는 ‘신앙의 고백’ 셋이 촘촘히 엇갈려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과장된 ‘자아 성취록’과는 판이하게도 세계 문학사에서 이 책은 자기 죄악의 체험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거쳐 한 지성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참회자가 회중 앞에서 땅에 엎드려 바치는 시편 51(50)편 ‘미세레레’에 버금가는 공개 보속이다. 또한 신비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써 내려가는 짝사랑의 연서”(O’Donnell)이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아는 사람들과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고백록」의 13권 가운데 딱 중간에 자리 잡은 제7권을 읽는 독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아우구스티노에게 드디어 손을 쓰시기로 작정하신 기미가 엿보인다. 본인도 “당신의 오른손이 진즉부터 제게 닿아 있었고 진창에서 저를 끄집어내어 씻어 주실 작정임”(6.16.26)을 예감한 참이다.
384년 가을, 북아프리카 출신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황실 수사학 교수로 출세해서 밀라노에 와 있었다. 모친과 아이엄마와 식솔들도 바다 건너 쫓아왔다. “그러는 동안 못되고 삿된 저의 청춘은 죽어 버렸고 어느새 장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허영으로 추해졌습니다.”(7.1.1)라고 자백하지만, 진리를 찾아가던 구도의 길에 드디어 세 단계 ‘회심’이 일어난다.
첫 번째는 마니교 선악 이원론을 빙자하여 자기가 무슨 못된 짓을 저질러도 우주를 지배하는 악의 원리에서 비롯하지 자기 탓이 아니라는 자기기만이 깨어지는 ‘도덕적 회심’(제6권)이다.
두 번째는 세상에는 물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회의론에 휘말리다 신플라톤 철학의 서적들을 접하면서 하느님 같은 영적인 존재도 있음을 수긍하고 그리스도라는 중개자의 필요를 인정하는 ‘철학적 회심’(제7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진리에 평생을 헌신하겠노라 선언하는 ‘종교적 회심’(제8권)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합류하는 ‘양수리’(兩水里)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고대의 플라톤과 근대의 칸트와 더불어 ‘근원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로 꼽은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적 회심’이 제7권에서 ‘진리를 향한 상승의 길’(7.9.13?21.27)이라는 제목으로 치밀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사변적 득도와 실존적 구원은 구도자의 정신 자세 곧 겸손과 오만으로 좌우된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오만한 지성, 그것은 “자기가 만든 우상의 신전, 당신께 가증스러운 신전”(7.14.20)일 따름이다. “당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는 점과, 당신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실 만큼 겸손의 길을 통해서 당신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에게 드러났다는 사실”(7.9.13)이 가슴에 와닿았다.
밀라노 지성인들을 사로잡던,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읽고 난 감회를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신께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안아주시고 저의 눈을 감겨 주셔서 더 이상 헛것을 보지 않게 하신 다음에는 저도 깜빡 제게서 놓여났고 그러다 깨어나 당신 품에서 눈을 떴습니다”(7.14.20).
“또 놀랍게도 어느덧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하느님을 향유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당신께 사로잡혀 가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아 저의 중력에 눌려 당신께로부터 떨어져 나가곤 하였으며 … 저 중력이란 곧 육욕의 습관이었습니다”(7.17.23).
이어서 교부는 철학과 종교의 차이, 사변적 추정과 신앙적 고백의 거리에 눈뜬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아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아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가 얼마나 거리가 먼지, 행복을 주는 고향으로 데려가는 길을 감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살기에 이르는 것 사이에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분간하게 만드셨습니다”(7.20.26).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에는 “경건심의 얼굴도, 고백의 눈물도, 당신께 드리는 희생 제사도, 괴로워하는 영도, 부서지고 꺾인 마음도 없었습니다”(7.21.27). 역사상 최초의 실존주의자에게 참된 철학이란 여생을 오롯이 바칠 만한 ‘참된 종교’여야 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
그럼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의 안광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알까?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훈계대로 인간 내면에 들어가 의식과 기억을 분석하면서 진리를 찾아가는 사다리를 그가 찾아낸 것도 밀라노에서였다. 진리를 찾아서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에게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자신을 초월할 때 그대가 초월하는 바는 추론하는 영혼임을! 그러니 이성을 비춰 주는 원초적 광명이 빛나고 있는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라”( 「참된 종교」 39.72, 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1988년).
들에 핀 무수한 화초를 보면서 사람은 ‘꽃’이 무엇인지 뽑아내서 알아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설’(抽象說)이다. 그런가 하면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說)도 있다. 곧 손에 들고 코로 냄새 맡는 꽃이든 사진이나 기억으로 떠올리는 꽃이든 색색의 식물을 ‘꽃’이라고 알아보는 까닭은, 우리 영혼이 육체로 귀양 오기 전에 전생에서 ‘꽃’이라는 이념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한걸음 나아가 ‘꽃은 아름답다.’라는 진선미의 판단이 어디서 올지 궁금했다.
“천상 물체든 지상 물체든 물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대체 무엇이 제 앞에 현전(現前)하기에, 제가 가변적인 사물들을 두고서 ‘이것은 이래야 되고, 저것은 저래야 된다.’고 판단하거나 말하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따지게 되었습니다. … 저는 가변적인 저의 지성 위에 진리의 영원, 불변하고 참된 영원을 발견했습니다”(7.17.23).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는 시편(36,10)의 말씀대로, 인간이 사물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확실함을 알아보는 빛은 위에서 쏟아져 내리며, 그 빛 자체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시라는 깨달음이 아우구스티노의 인식론인 ‘조명설’(照明說)이다.
“저는 제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당신의 이끄심으로 저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는데 … 제 영혼의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 영혼의 눈 바로 그 위에, 저의 지성 위에 불변하는 빛을. … 그 빛이 저를 만들었으므로 제 위였고 그 빛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제가 그 아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이 그를 압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7.10.16).
그리스인들은 ‘알면 사랑한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말을 뒤집어 ‘사랑하면 안다.’고 한다. 사랑하면 진리를 알고 하느님을 알고 사람을, 특히 한숨에 젖고 눈물 흘리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알아본다! 19세기에 이르면 이는 마르크스의 입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면’ 진실을 안다는, ‘사회적 사랑’으로 바뀔 한마디였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8권] 하느님의 승부욕
1981년 5월 13일 바티칸 광장에서 두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상으로 1년 넘게 사경을 헤매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병상에서 ‘어째서 세상에 악이 있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보다 다음과 같은 의문에 더 시달렸다. “세상에서 인간에게 고통이 오고 있는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하여 묻지 않고 하느님께 묻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 9항). 인류사에서 이를 가장 심각하게 천착한 아우구스티노가 평생을 두고 씨름하여 얻어 낸 몇 가닥 해답은 이렇다.
첫째, “악은 인간에서 유래하였다, 그것도 개인적 집단적 의지에서!” 이 해답이 우리 귀에 아무리 억울하게 들리더라도 한 가지는 가능해졌다, 적어도 인류의 개인적 집단적 노력으로 악을 청산하는 일이! 선과 더불어 악이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라면 인간은 무슨 수로도 악을 이기지 못한다. 단, 넘어지기야 제멋대로지만 무릎이 까지고 갈비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으면 자기 힘만으로 못 일어난다. 넘어진 자는 구세주라는 분의 덕을 봐야 한다는 ‘은총론’이다.
둘째, 온갖 과일나무가 밀림을 이루는 낙원에서 딱 한 그루만 따 먹지 말라는 금령은 왜 내리셨을까? 따 먹지 말라고 말리실수록 걸음마를 하고 목말을 탈 줄 안다면 기어이 그 나무를 서리해 먹고서 모조리 울타리 밖으로 내뺄 게 뻔한데.
어려서 배 서리를 해 본 심보(제2권)로 미루어, 교부가 어림잡은 풀이는 이렇다. 선과 악은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피조물은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며 성삼위께서 머리를 짜서 지어 내신 종족이 “하느님을 거슬러 하느님을 본뜨는”(2.6.14) 짓이 참 대견키만 하셨으리라.
달려가거라! 내가 안고 데려오리라!”(6.16.26) 하시는 하느님의 자신감! 인간에게 그 위험한 자유 의지를 주시고 세상에 악이 창궐하게 허락하신 모험심! 「고백록」 제8권에 이르면 아우구스티노가 자기 삶에서 얻어 낸 세 번째 답이 나온다.
소박한 서민 라틴어로 옮겨진 불가타 성경을 펼치자마자 코웃음 치며 내던지던(3.5.9) 젊은 시절의 호기와 달리,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 구절들도 ‘변호의 여지가 있다.’고 보이고, 마니교도로서 자기가 능멸하던 가톨릭 교리도 ‘함부로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니 ‘아하, 가톨릭에도 나름대로 논변가들이 있구나!’ 하였단다.
또 암브로시오가 「나봇 이야기」(최원오 역주, 분도출판사, 2012년)에서처럼, 사회 불의를 과감하게 손가락질하거나, 이단 논쟁의 와중에 유스티나 황후가 밀라노 포르키아나 성당을 아리우스파에 인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서 농성하여 명령을 철회하게 만든다든지(9.7.15),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테살로니카 양민들을 학살하자 황제의 성당 입장을 저지하고 속죄를 하게 만드는(390년) 결단에서 복음에 담긴 ‘사회적 사랑’을 파악하였다.
그 무렵의 심경은 이렇게 쓰여 있다. “저로 말하자면 속세에서 제가 해 오던 바가 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정욕마저도 평소처럼 타오르지도 않은 데다, 명예나 돈에 대한 희망으로 속세의 저토록 무거운 종살이를 견뎌 내는 일이 제게 무척 짐이 되던 참이었습니다. 다만 아직 여자에게만은 단단히 묶여 있었습니다. … 귀한 보석을 저는 이미 발견했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보석을 사야 했건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습니다”(8.1.2).
그를 번뇌케 하는 것은 이제 논리적 사변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요구하는 ‘실존의 문제’였음을 “제가 간절히 바라던 바는 당신께 관해서 더욱 확실해지는 것보다는 당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것이었습니다.”(8.1.1)라고 실토한다.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금방은 말고”
“저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놓았던, 성애의 욕망이란 사슬과 속세 업무의 예속으로부터 당신께서 저를 어떻게 풀어 주셨는지 얘기하겠습니다”(8.6.13). 먼저 그는 암브로시오가 ‘멘토’(인생 길잡이)로 삼아 왔다고 소문난 심플리키아누스라는 노인을 찾아갔다. 암브로시오 주교가 죽자 고령에 그 주교직을 계승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인은 그 젊은 카르타고인의 영혼 속에 몰아치는 노도 광풍이 그리스도교 사상사에 얼마나 위대한 화재를 일으킬지 꿰뚫어 보았다.
노인은 빅토리노라는 인물의 일화를 들려주며 아우구스티노가 가야 할 길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당대 제국 최고의 웅변가로서 그리스도교를 냉소하고 조상 전래의 이교 문화를 재건하는 데 혼신을 다하던 지성인 빅토리노가 돌연히 가톨릭교회로 입교한 실화(8.2.3-4.9)였다.
그 얘기를 듣고 나오던 아우구스티노는 속으로 “저도 불현듯 그를 본받아야겠다는 열망이 불타올랐습니다.”(8.5.10) 하면서도, 천둥벌거숭이 인간들에게 자비를 한없이 투자하시다 외아들마저 서슴없이 담보로 내놓으시는 ‘하느님의 승부욕’을 간파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이기에, 절망한 영혼의 구원을 두고, 더 큰 위험에서 구출된 영혼의 구원을 두고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까?”(8.3.6)“적이 어떤 사람을 더 철저히 장악하고 있고 그 어떤 사람을 내세워 더 많은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터에 그 어떤 사람이 패하고 만다면 적의 패배가 그만큼 큰 법인가요?”(8.4.9)
이런 힐문에는 신자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들고 다마스쿠스로 달려가던 사울을 걷어찬 발길이 머지않아 자기한테 떨어지리라는 예감을 담고 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그런 심경을 짐작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에제 36,22).
뒤이어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 안토니오의 생애를 읽었고, 지인 폰티키아누스가 찾아와 황실 근위대 무관 둘이 최근 갑자기 출세 가도를 포기하고 밀라노 교외의 수도원에 은둔해 버린 사건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신의 달콤한 권태감이 한스럽기만 했다.
“저는 묶인 채, 그것도 딴 사람의 쇠사슬이 아니고 쇠사슬이 된 제 의지에 묶인 채였습니다. 그렇게 거꾸로 뒤집힌 의지에서 육욕이 생겼고, 육욕을 섬기는 가운데 습관이 생겼고, 습관에 저항하지 않다보니 당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의지가 저희끼리 맞부딪치고 어긋나며 저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 놓았습니다”(8.5.10).
아우구스티노가 회심 직전 불만스럽고 죄스러운 처지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서도 한사코 미적거리던 심경은 현실 인간으로서 ‘하고 싶다와 할 수 있다’(velle et posse)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실감케 하고, 인간이라는 심연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율법과 하느님의 율법의 투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미세레레 시편’으로 읽혀 오고 있다.
입으로는 “주님, 어서 하십시오! 몰아세우십시오!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타오르게 만드시고 끌어당겨 주십시오! 달구어 주시고 애무해 주십시오!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치닫게 해 주십시오!”(8.4.9)라고 호소하면서, 내심의 기도는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8.7.17)였다.
주님께서 기도를 당장 들어주실까 두려웠단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잠꼬대처럼 느릿한 말로 ‘금방’, ‘예, 금방’, ‘조금만 놔두십시오.’였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금방 또 금방’은 아예 대중이 없었고 ‘조금만 놔두십시오.’는 오래도 갔습니다’”(8.5.12).
“집어라, 읽어라!”
그러다 그날이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하늘 사냥개’한테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음을 절감했다. “저의 가련함을 저 깊은 밑바닥에서 통째로 끄집어내더니 제 마음의 눈앞에다 턱하니 쌓아놓았습니다. 그러자 거대한 폭풍이 일어 거대한 눈물의 소나기를 싣고 왔습니다”(8.12.28). “저는 얼빠진 듯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한없이 끓어오르는 분개심에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8.8.19).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 주저앉았고 제 눈의 강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당신께 부르짖었습니다. ‘도대체 주님, 언제까지 입니까? 주님, 언제까지 끝끝내 진노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접함을 끝장내지 않으십니까?’”(8.12.28)아마 난생처음 진정으로 ‘살려 주십쇼!’ 하고 외쳤다.
그리고 “난데없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집어 들었습니다. 폈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제 눈이 가서 꽂힌 첫 대목 :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 더 읽을 마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홀연히 흩어져 버렸습니다”(8.12.29).
서기 386년 초가을 밀라노 정원의 어느 날 밤, 그에게 돈오의 경지를 열어 준 ‘홀연히’라는 한 마디는 이후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 신학과 은총론을 푸는 열쇠가 된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9권] 아우구스티노의 사모곡
“그대처럼 훌륭한 자식을 낳으신 정숙한 모친이 / 이곳에 재를 남기셨으니, 아우구스티노여, / 그대 공덕이 남긴 또 하나 빛살이어라. / 사제로서 평화의 막중한 천상 율법을 수호하며 / 그대는 맡겨진 중생을 도덕으로 제도하느니 / 그대가 이루는 위업이 두 분에게 영광의 화관을 둘러 드릴수록 / 온갖 덕성을 갖추신 어머니, 아드님을 두고 더욱 행복해하시리니.”
지금 오스티아 안티카의 ‘아우레아 성녀 성당’ 오른쪽 경당의 벽에는 1945년에 발굴된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미 크게 명망을 떨치는 히포의 사제 아우구스티노의 모친 무덤에 바수스라는 정치가(408년에 로마 집정관을 지냈다.)가 새긴 비문이다. 아우구스티노가 사제품을 받은 해가 391년(주교품을 받은 해는 395년)이니까, 모니카가 세상을 떠난 해(387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워진 것이다.
열댓 번 넘게 비문을 읽을 적마다 필자는 교회사의 현장 하나를 목격하는 감동을 느끼곤 했다. 오스티아에 매장되어 있던 모니카의 유해는 1430년 로마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으로 옮겨졌다. 아들 명의의 성당에 안치된 모니카의 석관 옆에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어머니들의 자식 걱정과 불효를 하소연하는 편지가 무수히 쌓인다.
“아, 주님, 저는 당신의 종, 당신의 종이자 당신 여종의 아들입니다.”(9.1.1)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고백록」 제9권 후반부(8.17-13.37)는 고대 서양 문학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사모곡이다. 하느님의 가없는 자비를 고스란히 체현하기에, ‘엄마’라는 이름은 모든 잘못을 용서받는 꿈이 아니던가?
“저 여종은 몸으로 저를 이 현세의 빛 속으로 빚어 주고 마음으로는 제가 영원한 빛 속으로 태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제가 얘기하려는 것은 제게 베푼 그이의 은혜가 아니라 그이에게 베푸신 당신의 은혜입니다”(9.8.17).
그렇게나 속을 썩이던 아들이 “집어라, 읽어라!”라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저 밀라노 정원에서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제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습니다.”(8.12.29)라는 신비 체험을 한다. 그 뒤 모니카와 아우구스티노 모자는 이미 “당신께서는 저희 심장에 당신 사랑으로 화살을 쏘아 맞히셨고, 당신 말씀이 오장육부에 박힌 채로 고스란히 지고 가는 중”(9.2.3)이었다. 그렇게 밀라노에서, 알프스의 산자락 카시키아쿰에서, 그리고 오스티아에서 바싹 아들 곁에 보낸 세월은 모니카에게 꿈같기만 했다.
이 행복은 이러한 회고로 남겨졌다. “주님, 마지막에는 그이가 당신 안에서 영면하기 전에 저희 모두가 당신 세례의 은총을 받고서 한데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이는 저희 모두를 마치 자기가 낳은 것처럼 거두었고, 또 마치 자기가 저희 모두에게서 태어난 것처럼 저희 모두를 섬겼습니다”(9.9.22).
고향 타가스테로 함께 귀향하던 길에 하필 내전이 일어나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뱃길이 끊겨 일행은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반년 넘게 머물게 된다. 거기서 모친 모니카는 죽음을 맞는다. 하느님께 오롯이 헌신하려는 아우구스티노에게서 ‘마지막 사슬’이 풀려나는 장면이다.
교부의 단 하나 혈육, 아데오다투스의 죽음도 실려 있다. 교부의 철학 교본 가운데 가장 난해한 언어 철학서 「교사론」의 대담 상대가 될 만큼 “아이의 대단한 재능이 두렵기까지 한” 까닭은 자기가 걸었던 파란만장을 따라 걷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생명을 당신께서는 일찍 지상에서 거두어 가셨으니 차라리 저는 마음 놓고 그 아이를 떠올리면서 그의 소년기도 청년기도 어른으로서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9.6.14)라고 실토한다.
평범한 성녀
아들을 그리스도교에 입문시키려는 집념과 눈물과 기도를 제외하면, 「고백록」에 묘사되는 모니카의 언행은 평범하기까지 하다. 그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그렇다.
처녀 시절 술 곳간 심부름을 하다 한 모금 두 모금이 잔술로 늘어 계집종한테서 ‘모주망태’라는 욕설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9.8.18). 남편 파트리키우스의 횡포와 손찌검을 집 밖에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9.9.19-21). 어린 아우구스티노가 중병에 들자 서둘러 세례를 준비시키더니만 병이 금세 낫자 세례를 미뤄 버리는데 그 핑계가 “아직 더 산다면 때가 더 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었다(1.11.17). 유학하다 일시 귀향한 아들이 온갖 염문을 뿌리는데도 모친의 유일한 걱정은 동네 유부녀를 건드려 사달이 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2.3.7). 서둘러 장가를 들이자니 “아내라는 족쇄 때문에” 아들의 출셋길이 묶일지 망설였다(2.3.8).
서른아홉에 과부가 되어서인지 큰아들에 대한 애착이 유달랐던 모니카는 카르타고에서 훈장질하던 아들이 로마로 떠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따라가겠다고 한사코 덤빈다. “엄마, 저 안 떠나요. 저기 키프리아누스 경당에서 기도하고 계셔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올게요.” 이렇게 말하고선 밤새 훌쩍 떠나 버린 아들의 “속임수와 매정함을 실컷 원망했으면서도”(5.8.15) ‘아양에 가까운 말투’(아들이 남긴 표현)를 접을 줄을 몰랐다. “마지막 병상에서 드리는 시중을 두고 효자라고 불렀고, 아들이 자기한테 쏘아붙이거나 무례한 소리를 그 입에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9.12.30).
아들이 밀라노로 가서 황실 교수로 출세하자 16년이나 아들을 수발하면서 손주까지 낳아 준 여자를 기어이 쫓아내고, 서른세 살 아들을 열 살짜리 양갓집 규수한테 약혼시키는 극성은 비록 아들 후광으로 성녀로 추앙을 받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도 든다.
단 신심만은 대단했다. 성깔 사나운 “남편의 이승살이 마지막에 그를 교회에 인도하여 세례받게 하였다”(9.9.22). 똑똑하다던 아들이 마니교에 빠지자 한 번만 아들을 만나 타일러 달라고 어느 주교에게 하도 조르는 바람에 “그렇게나 많은 눈물 바람을 받은 자식이 망할 리 없소.”라는 짜증도 들어야 했다(3.12.21). 아들 사정이면 “하느님의 자비를 마치 하느님이 발부하신 채무 증서나 되듯이 하느님께 마구 꺼내 보이는” 몰염치로 보면 전형적인 ‘엄마’였다.
여하튼 “극진한 충정을 다해서 날마다 흘리는 내 어머니의 눈물에 내가 멸망하지 않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아들도 인정한 이상, 모친에 대한 아들의 다음과 같은 총평은 로마인 묘비명에 흔히 쓰는 어투였다. “그이는 한 남편의 충실한 아내였고, 어버이에게 은덕의 보답을 하였고, 자기 집안을 경건하게 건사하였고, 선행으로 평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당신에게서 멀어져 간다고 느낄 때마다 산고를 다시 겪다시피 하며 그들을 길렀습니다”(9.9.22).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아들한테 걸던 소원이 다 이루어지자 모니카는 휘적휘적 이승을 서둘러 떠난다. “당신 눈에 저를 살아 있게 하려고 저를 두고 여러 해를 울었던 어머니”(9.12.33)와의 대화는 퍽 소탈하다. “아들아, 나로 말하면 이승살이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다 채워진 마당에 여기서 아직도 뭘 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9.10.26).
여관집 창가에서 모자가 겪은 신비 체험은 부럽기까지 하다(9.10.23-26). 신비 체험이 있은 지 겨우 닷새쯤 지나 모니카는 열병으로 몸져눕는다. 모니카는 묏자리에 유난히 마음을 썼고, 남편 옆에 묻힐 터도 장만해 둔 터였다.
“너희 어미를 여기다 묻는구나. … 이 몸이야 아무 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 오직 한 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9.11.27-28).
구구절절 모친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깃든 사모곡은 “그렇게 병석에 누운 지 아흐레 되던 날, 그이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9.11.28)라는 말마디로 끝난다.
모친을 오스티아에 묻은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는 간절하다. “그이가 구원의 물로 세례받은 뒤에 그 많은 햇수 동안 혹시라도 진 빚이 있거든 당신께서도 그이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 주님, 탕감해 주십시오. 비오니 탕감해 주십시오. 저의 어머니를 데리고 법정에 들지 마십시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9.13.35). 그리고 당부한다. “글로써 제가 섬기는 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때면 당신 제단에서 당신 여종 모니카를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9.13.37).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10권] 인간,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존재
밀라노 회심으로 「고백록」은 정점을 지났고 아우구스티노의 여울졌던 감정은 고요한 흐름으로 바뀐다. 그 뒤 10여 년이 흐르고 히포의 신자들은 자기네 주교한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져 왔다. “당신의 과거는 그랬다 치고 지금의 당신은 어떤 심경이오?” 그래서 「고백록」 제10권은 세태를 관찰하고, 자기 정신을 분석하며,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하느님을 탐구해 온 한 인간의 여정을 돌이켜 “진리시여, 어디인들 당신께서 저와 함께 걷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까?”(10.40.65)라고 차분히 말씀드리는 글이다.
“제가 누구였던가를 두고서가 아니라 제가 아직도 누군지를 두고 고백을 하는 이 시점에서 제가 누구인지, 이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10.3.4). 당신께서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바를 제 안에서 발견하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께서 마음 아파하라고 가르치시는 바를 제 안에서 발견하고 아파했으면 좋겠습니다”(10.4.5).
나이 든 독자가 「고백록」 제10권 후반부(28.39─39.64)를 읽노라면 젊어서 읽었을 「준주성범」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요한 사도가 경고한 삼중의 욕망,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속의 야심”을 어떻게 이겨 내는 중인지 참 솔직하고 세세하게 풀어 낸다. 그래도 가장 힘든 것은 학자의 호기심과 성직자의 명예욕이더라는 자백은 온전한 정화에 이르는 “오직 한 가닥 희망, 하나의 믿음, 하나의 든든한 언약은 당신의 자비뿐입니다.”(10.32.48)라는 탄식으로 끝맺는다.
무척이나 하느님을 탐하는’ 인간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동시대 코르넬리우스 얀센이 가톨릭에 퍼뜨린 염세주의는 원죄론, 예정설, ‘믿음으로만’ 또는 ‘은총으로만’ 같은 표어를 아우구스티노의 저술에서 끄집어냈다. 이 때문에 교부는 인간 신체와 성생활, 인간 존엄성과 자유 의지, 인생의 현세적 차원과 역사적 사명에 관해 비관론을 퍼뜨렸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고백록」 제10권의 전반부(6.8-27.38)를 새겨 읽는 독자라면 그의 사상이 참으로 현실감 있는 인간론일뿐더러 아마도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 예찬론’이라는 견해에도 공감하리라 본다.
아우구스티노의 평생 작업은 하느님을 알고 인간을 알아 가는 탐구였다. 인간이 참으로 위대한 ‘수수께끼’(4.4.9)이자 바닥없는 ‘심연’(4.14.22)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죽을 운명을 메고 다니며, 자기 죄의 증거와 당신께서 오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그 증거를 짊어지고 다니면서도”(1.1.1) ‘하느님 더구나 삼위일체를 닮았고’, ‘하느님을 파악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으로 채워지기까지는 만족을 모르고 마냥 행복을 추구하는’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다.
“존재하는 무엇이든지 당신 없이는 존재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을 담기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까?”(1.2.2)라는 물음이 거기서 나오고,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존재’(homo capax Dei)라는 인간 정의를 아우구스티노가 철학사에 남겼다. 세계를 ‘피조물’로 정립하면서 「고백록」 첫 구절부터, “사람 곧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1.1.1)라면서 말이다.
인간이란 하느님에게서 오고(작용인), 하느님께 향하는(목적인)존재임을 알아보았다. 그럼 왜 “우리 마음은 애초부터 안달하며 존재를 시작하였을까?”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 애초부터 무한한 선, 영원한 삶, 절대 행복을 탐할 만큼 야심에 찬 까닭이 무엇일까? “당신께서는 온갖 탈법한 저의 쾌락에다 쓰디쓴 거리낌을 뿌리시면서 제가 거리낌이 들지 않는 쾌락을 찾아 나서게 만드셨습니다”(2.2.4). 이러한 원망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하찮은 행복에마저 초를 치시고, 죄와 타락, 유한성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드시는 연유가 무엇일까?
모친과 함께 겪은 오스티아의 신비 체험(9.10.23-26)은 “인간은 무척이나 하느님을 탐한다.”( 「서간」 137.3.12)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먼저 주위를 둘러보고 삼라만상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세계라는 덩어리에게 저의 하느님에 관해서 묻자 제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다. 오히려 그분이 나를 만드셨다.’ 바다와 심연, 생혼이 있는 길짐승들에게 물었으나 ‘우리는 너의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 위에서 찾아라.’ 하늘, 태양, 달과 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도 네가 찾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10.6.9). 이런 대답을 듣고 “나는 바로 내 영혼을 통해 그분께로 올라가겠다, 내 영혼의 머리 위에 계시는 분을!”(10.7.11)이라고 다짐하며 “이성적 영혼 위에 있는 불변의 본성이 곧 하느님”( 「참된 종교」 31.57)이라는 신념이 생겼다.
‘기억’, 하느님을 만나 뵙는 지성소
인간은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분석함으로써만 하느님을 인식한다. 무한하고 영원하며 절대 존재인 분이 창조한 영혼이기에, ‘무한’과 ‘영원’과 ‘절대’의 잔상이 영혼에 새겨져 있으리라는 직감이다.
제10권 전반부에서는 이 기억을 분석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다리를 찾아낸다. ‘기억’이라면 그에게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말하는 ‘지성’ 자체를 가리키기도,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맞닿아 있는 ‘존재의 뿌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기억의 위력, 바닥 모르고 한정이 없는 그 다면성, 바로 이것이 영혼이고 바로 이것이 나 자신입니다”(10.17.26).
진선미의 여러 가지 경험을 두고서 긍정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또한 기억이다. “그것들이 언급될 적에 ‘그렇다. 참말이다.’는 말을 제가 했는데, 이미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어디서 혹은 어째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까?”(10.10.17)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교리를 사변적으로 확립한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16년)도 ‘기억’을 매개로 한다. 삼위일체 신비는 사후에도 영원히 탐구해야 할 대상일 텐데 무슨 수로 이 교리에 접근할지 궁리하던 교부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인간의 ‘기억’을 분석하여 모습의 원형인 하느님의 ‘구조’를 추정해 보겠다고 나섰다. ‘기억하는 나’, ‘기억되는 나’, ‘그 사이에 오가는 내 기억’이 온전히 하나면서도 구분이 되더라는 착상이다.
“기억의 저 능력은 참 크기도 합니다. 너무 큽니다. 광활하고 무량한 지밀입니다. 과연 누가 그 밑바닥에까지 이른 적 있습니까? 엄연히 제 정신의 능력이고 제 본성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 자신마저도 저를 전부 못 차지합니다”(10.8.15).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뵙는 지성소가 기억이라는 이 심연이었다. “어디서 당신을 만나 뵐 수 있습니까? 제 기억 밖에서 당신을 뵙는다면 당신을 제가 기억 못 한다는 말입니다. 또 당신을 제가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당신을 만나 뵙겠습니까?”(10.17.26)
현대 천문학 개념으로 130억 년의 지름을 가진 우주도 인간 의식 속에서는 한낱 동그라미일 뿐 지성은 그 동그라미 바깥에 서서 바라본다. 무량하고 영원한 하느님마저도 개념상으로는 동그라미에 가두고서 신학을 편다. 그래서 교부는 다짐한다. “저는 기억이라고 불리는 저의 이 힘마저 통과해 넘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저의 영혼을 통해서 당신께로, 까마득하게 멀리 제 위에 머무시는 당신께로 오르면서 기억이라 불리는 저의 이 힘마저 통과해 넘겠습니다”(10.17.26).
사람이 사물을 사유하면서 자기가 인식 주체로서 지금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데 교부는 인간 의식이 모든 인식 대상을 부단히 초월하면서 절대 지평을 향해 시선을 확대시키는 어떤 추동력을 ‘기억’이라고 부른다(10.22.32-23.34).
“제가 당신을 배워 알게 된 그것으로부터 당신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진리를 찾아 만난 곳에서 진리 자체이신 저의 하느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배워 알았을 그것으로부터 당신은 저의 기억 속에 머물러 계시며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을 두고 기쁨을 느낄 적마다 거기서 당신을 만나 뵙습니다”(10.24.35).
이처럼 난해한 인식론적 사색을 개진하면서도 한때 자력 구원과 진리 터득을 자신하던 지성인이 지금은 소박한 그리스도교 신자요 설교가로 돌아와 있음을 끝기도가 잘 보여 준다. “좋으신 아버지, 당신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 외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셨고 저희 불경한 자들을 위해서 그를 넘겨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저 외아드님,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10.43.69-70).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11, 12, 13권] 아우구스티노의 우주 찬가
인간은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많이 읽혀 온 「고백록」의 전반부(제1-10권)는 자기 생애 전반을 회상하면서 “고백실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였다. 이 책의 후반부(제11-13권)는 우주 한곳에다 “당신께서는 저를 지으셨고” 그 광활한 공간에서도 “저를 당신께서는 잊지 않으셨음”(13.1.1)을 두고, 이렇게 외치는 ‘우주 찬가’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11.1.1).
그래서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1,1,1), 고백록」 제11권은 이런 기도로 시작한다. 곧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구절의 절반, 곧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문구를 놓고, “태초에 어떻게 하늘과 땅을 만드셨는지 듣고 싶고 또 알아듣고 싶습니다.”
(11.3.5). 제12권에서는 저 구절의 나머지 절반,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구를 성찰한다. 제13권은 「창세기」 첫 대목(1,1-2,4)을 주교가 신자들과 함께 읽어 내려가는 ‘영적 독서’라고 하겠다.
철학적 성찰에 가까운 제11권에서는 ‘태초에’가 시간의 시초라기보다 존재의 시원을 가리킨다고, ‘하느님의 말씀 곧 성자 안에서’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말씀이 “태초이시니 저희가 방랑하다가 돌아갈 적에는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태초이시고 … 이 태초에서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8.10-9.11).
제12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고서 ‘하늘’은 천사라는 영적 피조물을 의미하고, ‘땅’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제일 질료’(第一 質料)라고 부르던 것이며, 이것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을 역설한다. 교부의 창조 신학은 응당 삼위일체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보십시오, 저의 하느님, 여기서 삼위일체이신 당신께서 어렴풋이 제게 나타나십니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저희 지혜이신 분의 ‘태초’ 안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께서는 당신 아드님 안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영이 물 위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삼위일체이신 저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13.5.6).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뭘 하시고
「창세기」에 따라 인간을 ‘피조물’로 규정하고 그리스도교 ‘창조 신학’을 완성한 교부가 아우구스티노다. 이 책 말고도 「마니교 반박 창세기 해설」(388년), 「창세기 문자적 해설 미완성 작품」(393년), 「창세기 문자적 해설」(401년)을 집필하였다.
하늘과 땅이 있고, 자기들은 만들어졌다고 외칩니다. 하늘과 땅은 자기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고 외칩니다. ‘우리가 존재함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는 우리는 없었으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생겨날 수 있는 것처럼 되고 만다’”(11.4.6).
이교도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세상은 ‘일자’(一者)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된 무엇도 아니고, 타락한 물질이 응결되어 던져진 우연도 아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합의하고 당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만들어 하나뿐인 지구에 고이 가져다 놓으신 조물이다.
하지만 창조론에는 갖가지 시비가 따라붙게 마련. “어떻게 창조하셨느냐?”는 물음에는 “말씀으로!”라고 답한다. “당신께서는 그것들을 대체 어떻게 만드십니까? 하느님, 하늘과 땅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생겨났고 당신 말씀으로 그것들을 만드신 것입니다”(11.5.7). “뭘 갖고 만드셨느냐?”고 힐문하면 ‘그냥 말씀만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당신께서 생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 생겨납니다. 당신께서는 오로지 말씀을 하시면서 만드십니다”(11.7.9).
“그래도 뭔가 재료가 있었을 게 아니냐?”고 따지면 “아무것도 없이, 다시 말해서 무(無)로부터”라고 대답한다. 창조주이신 만큼 영원히 존재하던 재료(물질)로 세상을 빚어 만들었으리라는 이원론을 배척한다. “당신께서는 무엇을 만드셨는데 무로부터 만드셨습니다. 당신 외에 무엇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저것들을 만드실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께서 존재하셨고, 다른 것은 무였으니, 그 무로부터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12.7.7).
그럼 “무엇 때문에 만드셨느냐?”는 장난기에는, 뭔가 아쉬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착하셔서 만드셨다는 답이 나온다. “당신에게는 당신께서 선(善)이신데, 저런 것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든, 또는 무형한 것으로 남아 있든, 당신의 선에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하여 그것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당신 충만한 선하심에서 만드신 터에 말입니다”(13.4.5).
“세상을 언제 만드셨느냐?”는 물음에는 못된 저변이 깔려 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더냐? 피조물을 조성하려는 의지, 전에는 한 번도 조성한 일이 없는 것을 조성하려는 새로운 의지라는 것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하느님이 영원하시다는 말인가? 하느님의 의지는 그분의 실체에 속할 테고, 그 실체에 전에 없던 무엇이 발생하였다면 그 실체가 정말 영원하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만일 피조물이 존재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의지가 영원하다면, 피조물 또한 왜 영원하지 않다는 말인가?”(11.10.12)
여기서 아우구스티노의 철학 사상에서 가장 난해한 시간론(時間論)이 나오는데 그런 공부는 철학도들에게 넘길 만하다. 요컨대, 시간은 피조물과 함께 창조되었고, 피조물이 있기 ‘전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뭘 하시고 계셨더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하느님, 당신께서 모든 세기의 제작자요 조물주이신데, 당신께서 모든 시간의 작동자이신데, 시간 그 자체도 당신께서 만드셨고, 따라서 당신께서 시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였는데, 당신께서 그때는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말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그때는’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11.13.15). 시간 자체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고 시간은 유한한 사물이 갖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그것도 인간의 의식에서만 감지되는!
해넘이가 없는 안식일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마지막 제13권에서 ‘6일 창조’의 피조물들이 영성생활에 어떻게 해당하는지 풀이하면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도, 천사와 영혼에도, 모든 미물에게도 실존의 중심(重心)은저 ‘심연의 물 위를 감돌던’ 하느님의 영, 곧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당신 선물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 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선한 의지가 저희를 그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니 그곳에 영원히 머무는 일 외에 저희가 바라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13.9.10).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듯이, 시간도 영원의 한 조각이듯이, “당신을 찬미함으로써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하기”(1.1.1) 마련이다. 따라서 각자가 올리는 ‘찬미의 고백’은 ‘하느님의 오늘’ 곧 ‘저녁이 없고 해넘이도 없는 안식일’이라야 끝을 본다. “당신께서 지금 저희 안에서 일하시듯, 그때도 당신께서 저희 안에서 쉬실 것입니다. 저 일들이 저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당신의 것이듯이, 저 때는 그 안식이 저희를 통해서 이뤄지는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나 일하시고 언제나 쉬십니다”(13.37.52).
그러니까 ‘자아’와 ‘하느님’이라는 두 과녁을 두고 일평생 탐구하던 교부, 죽음의 침상에서 “멍청하게도 나는 다 알아듣고 싶었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아우구스티노가 저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깨달았음 직한 바가 「고백록」 마지막 장(13.38.53)에 기술되어 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저희가 보는 것은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합니다. 또 저희는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밖으로 보고 그것들이 좋기 때문에 안으로 봅니다. 그 대신 당신께서는 그것들이 만들어져야 하리라고 보시자마자 바로 만들어져 있음을 보셨습니다. 어느 인간이 이런 깨달음을 인간에게 베풀어 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천사에게 베풀어 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인간에게 베풀어 주겠습니까?”
* 성염 요한 보스코 -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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