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
33: 12-14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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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을 다 보내면서 이 한 달은 나라를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호국의 달이라고 하여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 걸맞도록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함을 알아야 하겠는데, 실제적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이며 귀한 나라인가를 미처 모르고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나라는 나라를 잃었을 때라야 귀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일제 치하에 우리가 나라 잃은 설음을 얼마나 경험했습니까?
나라의 힘이 약해졌을 때 중국에게 얼마나 치욕적인 일을 당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 하겠는데... 하는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나라의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할 대통령과 내각 장관들이, 그리고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튼튼하게 자기 구실을 다해 주어야 할 터인데...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현실적인 많은 장애와 어려움들이 하나 둘이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는 불안정하고, 경제는 불투명하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들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면서 나라가 편해져야 하겠는데... 하는 생각을 다시 가져 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I will give you rest 라고 했습니다.
여기 <rest>란 말에는 쉼, 안식, 평안이란 뜻이 포함된 말입니다.
'내가 네게 쉼을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내가란 말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어야 그것이 참된 쉼입니다.
주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요즘 인생 자체의 쉼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라도, 개인도 하나님이 쉼을 주어야 참 평안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배경을 보면 이러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 산에 올라 있는 동안 산아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백성들은 요즘말로 촛불 시위를 했습니다.
모두 아론에게 나와서 우리를 인도하던 모세는 이제 사라졌으니, 우리를 인도해 갈 신을 만들자고 하여 금송아지를 부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금송아지 앞에 절을 하면서 우리를 인도해 갈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것을 목격하는 순간 하나님께 나가서 통탄하는 말로, 아뢰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내가 이 백성을 이곳까지 인도해 냈습니까? 이제 이 백성을 이끌어 낸 것은 하나님 당신이 아니십니까? 날 보고 어쩌라고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하였습니까? 라고 자탄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언약의 말씀입니까?
1. 우리가 사는 세상은 편한 날이 별로 없습니다.
하루에 벌어지는 자살, 폭력, 사기, 등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질병과 전쟁과 테러는 끊일 사이 없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슬픔을 보십시오.
저는 이번에 김선일씨 죽음을 보면서, 6.25를 연상해 보았습니다.
김선일씨도 그렇게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처럼 6.25때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죽창으로, 몽둥이로, 총검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지난번 국내 순교지를 돌아보면서 염광 교회에 가보니 공산주의자들이 대나무 죽창으로 마을 사람들을 찔러 죽였고,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목에다 바윗돌을 매어 바다에 빠뜨려 죽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 뿐이겠습니까?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문제를 앉고 개인이던 가정이던, 국가이던 편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이 요즘 당하는 고통스러움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과학 기술이 발달되면 사람들은 편한 세상이 될 줄 알았습니다.
더욱이 산업사회 이후에 사람들은 대량생산으로 인하여 더 없이 편한 세상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불란서의 어거스트 콩트(August Comt) 같은 사람은 '종교는 태고시대의 미신적 소산물로서 이성이 발달한 과학시대가 되면 종교는 자취를 감추어 버릴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종교 없이 사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모습이 되어 갑니까?
과학이 발달하면 모두 종교 없이도 살 수 있는 편안한 세상이 될 줄 알았는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요즘 각 나라들의 출입국 절차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서로를 의심과 불신으로 편치 못한지 알 수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려고 하면 왜 보안 검색을 그토록 해야 합니까?
평화를 제일 많이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 공항에서 그토록 까다롭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불안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나가던 길손이 누구인지 몰라도 하룻밤을 재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으레 아침밥은 해 먹여서 보냈습니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인심이었고, 이런 것이 백의 민족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서로를 불신하고 집을 지으면 울타리를 높이 두르고 가시철망을 치고, 감시 카메라를 달고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불안하기 때문에, 편치 못하기에 그런 일들을 하는 줄 압니다.
2. 나의 잘못이 아닌 경우에서 편치 못할 때도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나와서 우리를 인도하던 모세도 없어졌으니, 이제 우리를 인도해 갈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하여 그 앞에서 절하며 가증한 일을 벌렸습니다.
이것이 다수의 여론이었습니다.
우둔한 백성들의 행위였습니다.
형 아론까지도 군중들의 여론에 떠밀려 그들과 동조해 버렸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기가 막히고 고독감에 빠졌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니이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뜻 있는 소리들이 소외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도리어 우둔한 백성들처럼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볼 때, 그 중에는 분명히 저것은 아닌데... 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탄식의 신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서는 낙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찰해 보면,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낙심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과 약속은 그런 가운데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하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편해지려면 하나님이 함께 해 주어야 합니다.
고난과 실망 중에 부르짖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문제에서 해결은 누가 나와 함께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어야 삶이 편해지는 것을 모르고, 자기를 편안케 해줄 수 있는 것은 물질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나를 더 큰 욕망으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내 마음을 편케 해 주지는 못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소출이 많아도 내 곡식을 어디에 쌓을꼬 하고, 더 큰 창고 지을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물질이 자기의 영혼을 편케 할 줄 알았던 것이 어리석다
고 하였습니다.
'야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을 부르면 이 것이 다 뉘것이 되겠느냐?' 고 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참된 쉼이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도리어 더 걱정 근심 불안으로 이끌어 갑니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염려함으로 너희 키를 한자나 크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또 사람들은 '사람' 에게 기대를 합니다.
그 사람과만 있으면 편하게 될 것 같아서 사랑이란 것도 해 봅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고 재난이 닥치고 병들어 고통의 문제들이 쌓일 때, 사람처럼 싫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요즘 사람이 싫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피하여 이웃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편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절망하는 모세에게 하였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들려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이 두 마디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일, 하나님이 함께 가는 길, 하나님이 함께 돌보는 일, 거기에 참된 평안 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편케 해 주어야지 아무리 사람이 스스로 편케 하려고 해도 편해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이 약속을 하는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신앙의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40일 동안 시내 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지내던 모세에게 한 말처럼, 오늘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이 두 마디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지금 역경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낙심 중에 있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