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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
서정과 지성이 조화된 모성과 인정의 곳간
- 정현주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은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잊고 있던 기억 저편의 모습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처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수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린 풍경화라 할 수 있다. 수필가 정현주 선생의 삶을 그린 풍경화가 나왔다. 인생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리움을 품고, 어딘가를 떠나는 풍경일 것이다. 자연과 역사의 흔적이 손짓하기를 기다려온 작가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남도의 자연을 찾아 서울을 벗어났고, 역사의 현장과 조우하기 위해 한반도를 곧잘 벗어나곤 했다. 그녀가 이렇게 좋은 수필집을 내어 놓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이 아내와 어미라는 자리를 홀가분하게 박차고 서정적 자아 상태에서 한 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낭만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주부로서의 여성은 떠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것이 한국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배려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주 여행을 한 결과로 인해서 수필의 소재를 많이 얻었던 게 사실이다. 각지로의 여행은 결국 작가에게 한 편의 수필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한 권의 멋진 에세이집을 남긴 셈이 되었다. 이번에 낸 처녀 수필집에 실린 글의 주된 현실적 공간은 여행지다. 외국에 근무했던 남편, 외국에 살고 있는 자녀 덕으로 정현주 선생은 동서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온갖 것의 유혹에 반응해 보고 싶은 여심은 간절한데 시간과 사회의 관습이 발목을 잡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보고 싶은 반도의 산야와 가고 싶은 이국 유적지들을 그리워해야만 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작가에게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데 큰 방해물이 없었던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정현주 선생은 제 1회 에세이문예 작가상을 받은 바 있어 이미 한국 수필문단에서 그 역량을 인정받은 작가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계간 <문예시대>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한국문단에 등단하여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 고급수필 창작에의 욕구와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본격 수필 전문지 계간 <에세이문예>로 재등단을 결행하기도 했다. 등단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수필을 써왔고, 가족문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2005년부터 에세이문예지에 연재수필 작가로 선정되어 ‘여행’에 관한 수필을 써서 호평을 받고 있다. 정하 선생의 수필에 호평이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수필에 대한 깊은 인식과 애정의 결과라 하겠다. 이런 문학에 대한 열정은 수필 작품 속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인정이 많고 마음씨가 고와 언제 어디서 보아도 미소를 품고 있는 모습이다. 더하여 역사에 대한 깊은 조예와 풍부한 독서력은 그녀의 작가적 저력을 키워주었다고 하겠다. 아름다운 서정과 아픈 서사, 따가운 풍자와 세태 비판이 녹아있는 그녀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II.
정현주의 수필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물줄기는 몇 갈래로 나뉘어져 흐를까? 이를 밝혀내는 일은 정현주의 수필세계를 바로 바라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하겠다. 정현주 수필세계는 한마디로 진솔함을 기저로 한 서정과 지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성과 인정의 곳간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때로는 지성과 예리한 인식을 기저로 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가하면서 비판의 메시지를 담는가 하면, 어떤 작품에서는 따스하면서도 인정스런 눈길로 자연을 품어 안는 서정적 경향을 띤다. 전자의 측면으로 보면, 사회 참여의 강한 의지와 지성적 용기를 드러내는 특징을 보이지만, 후자의 차원에서는 자연친화적인 세계가 초록 이미지의 축제를 열고 있다고 하겠다. 이 뿐만 아니다. 그녀 수필세계의 또 다른 한 축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는 인정의 미학이 구축되기 있기도 하다. 이처럼 서정과 인식 그리고 모성이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는 정하 선생의 수필세계는 순수와 지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
서정이 물결치는 초록 이미지의 축제 공간이 베푸는 자연친화적 경향은 정현주 수필의 곳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수필 <남도의 봄>이란 작품은 녹색 봄꽃의 잔치를 인생과 결부시켜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수필의 문학화에 성공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그리움이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 작품은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진지한 안목이 봄꽃의 자태에서 그대로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피어오르고 백목련의 봉오리가 하얀 입술을 봉긋이 내밀 때쯤이면 어김없이 내 안의 세계에 잠재해 있던 방랑기가 발동을 한다. 먼 남녘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꽃 소식에 유혹되어 훌쩍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일상에 대한 잡다한 상념들을 떨쳐버리고 남도의 봄을 찾아 나선다. 3박 4일간의 여정은 꽃비가 되어 메말랐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리라 믿는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미라는 자리를 벗어 놓으니 새의 날개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 <남도의 봄>, 서두 부분 -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연의 내부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정현주의 문학은 이런 생명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이 작품은 남도를 여행하면서 가슴에 서리는 서정어린 정감을 수필화한 것이다. '꽃비가 되어 메말랐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리라 믿는다'라는 진술은 이번 여행의 목적이 여행이 아니라 본연의 순수성 회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꿈>이란 수필에서 작가로 하여금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변신해서 신명난 굿판을 벌려보고 싶다는 꿈을 말하면서도 그녀는 봄날 대자연이 기지개를 켜는 형상을 연상하고, 멀리 산골짜기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정서는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이는 자연과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인생의 무대가 바뀌고 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입고 있던 낡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직은 벙벙하여 남의 옷을 걸친 양 어색하지만, 또 다른 나의 인생길에 가슴이 설렌다. 인생 전반기를 무대 뒤편에서 이룬 꿈이라면, 이제 막 꿈꾸기 시작하는 새로운 꿈은 관중이 있는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펼쳐보려고 한다. 가당찮은 욕심일까. 비록 화려하지는 않을지언정 나만의 독특한 향기가 배어 있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감미로운 음률에 맞추어 한바탕 신명난 굿판을 벌려보고 싶다. 봄날 대자연이 기지개를 켜고 멀리 산골짜기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새로운 꿈>, 결말 부분 -
현실이 각박하여 여유를 즐기고 있지 못할 뿐,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원시의 오묘한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이 적지 않다. 작가는 수필 <새로운 꿈>에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수필에서 찾으면서도 자연의 품속에서 그 느낌을 만끽하고 있다. 관중이 있는 당당한 무대에 서리라는 당찬 각오를 자연이 켜는 기지개에 견주어 정서를 객관화할 줄 아는 작가이기에 그녀의 글은 향긋한 풀내음을 풍긴다. 눈과 귀를 열어 자연의 역동성을 확인함으로써 그녀는 자연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안길 곳임을 말해준다. 누구에게나 인간의 가슴 속에는 원시에 대한 향수가 서려 있다. 그 동안은 남편의 직장, 아이들의 양육 문제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숨죽여 살고 지냈지만, 그녀는 자연을 등진 환경이 마음의 평화를 주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연 속으로의 진입을 통해 새로 전개될 삶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정원은 사람의 정서를 살찌우며 심성을 맑게 해주는 마술사다. 많은 사람들이 환금가치와 생활의 편리함에 아파트를 선호한다. 그러나 구닥다리 같은 우리 부부는 집은 깃들어 살며 보살피는 대상이라 여기며, 작은 정원이 딸린 이 집에 유달리 애착을 갖고 있다. 사시사철 변하는 소박한 정원에 반해 살아 온 세월이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구석구석에 피어있는 꽃송이에서부터 발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까지 정겹지 않은 것이 없다.
- <정원>, 전개 부분 -
작가는 정원을 가꾸면서 인생을 반추하기를 즐긴다.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성찰에 있다. 남들은 환금 가치와 생활의 편리에 따라 아파트를 선호하지만, 작가는 ‘집’을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깃들어 살며 보살피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물신주의에 대한 거부는 정원을 가꾸며 생활하는 자연친화적 태도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흐름은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한다. 다만 그 상황에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의 고통에서 더 큰 고통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시기에 맞는 새로운 의욕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정현주는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녀는 정원의 건강한 생명력을 보면서 인생의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고 싶어 한다. 자연의 모든 물상에는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삶의 환희와 생명력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오묘함을 깨닫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며 아픔의 늪을 헤매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삶, 그 무엇을 힘껏 치닫는 생명력이 번득이는 봄꽃의 싱그러운 축제 속에서 작가는 추억을 마신다. 그림 한 점을 감상하면서 풀어내는 차분한 묘사와 사색은 포근한 여인의 따사로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무척 아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권태감이 밀려들 때면 벽에 걸린 그림을 마주하고 앉는다. 푸른 숲과 옥색의 계곡물과 화려한 꽃들의 조화는, 마치 금강산에 오르기라도 한 듯 이내 시들해진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준다. 어디 그뿐이랴. 금강산 여행 때처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 다니는 감시 요원도 없으니 자유롭기 한량없어, 온갖 상상의 나래는 그칠 줄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예쁜 꽃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소녀가 된 듯 수풀 속을 사뿐사뿐 거닐며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골짜기 사이로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 속에 휩싸여 몽환의 세계로 빠져들 때도 있다.
- <진경산수화 한 점> 전개 부분 -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자연을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여 동행을 이루는 일이다. 산과 들을 자기 주변으로 끌어들여 함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은 저마다 집 안 한 모퉁이에 작은 화단을 만들기도 하고, 산 속 깊은 곳에 머물고 싶은 욕망 때문에 화초를 기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 곧 자연이다. <진경산수화 한 점>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연과 동행이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의 귀의, 참다운 인간미의 회복이다. 새 생명의 기지개와 만나며 희망의 기대감을 갖는 작가의 전도에는 밝은 빛만 가득하다. 자연 속에서 서정적 자아 상태로 몽환적 세계로 빠져들 수 있기에 이런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생태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묘미는 동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에서 작가가 펼치는 상상의 나래를 엿보는 데 있다.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자하는 건 자연 속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가는 여행을 통해서 이미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깨달았다고 보겠다. 이처럼 정현주의 수필세계의 한 축에는 자연친화적 서정의 푸른 축제가 항상 열리고 있다. 선생은 꽃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에 자기 삶을 대입시켜 승화를 시도한 사람이다. 풀꽃처럼 여린 여심에 정감어린 시선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초록 이미지의 축제가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안식을 안겨주기에 자연 서정을 기반으로 축조된 그의 수필들은 하나같이 감동을 준다.
정하 선생의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적 자책감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으로 구축되기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정현주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특히 수필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단점 등을 애써 감춰버리거나 미화시킬 때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 작품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수필 독자들이 수필을 통해 만나려는 사람은 빈틈없이 완벽하고 단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처럼 부족한 면도 있고 단점도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의 모습을 엿보게 됨으로써 오히려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성찰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글맛이요, 손맛이다. 이 작품은 딸을 다치게 했다는 자책감에서 평생을 아프게 살아온 자신의 심경이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고 있다. 딸에 대한 진한 애정이 수놓아져 있다.
멀리 외국에 나가 있는 딸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왔다. 눈의 소중함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을 곁들였다. 아울러 끝까지 치료를 잘 하라는 당부에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아직도 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고 있을 멍 자국을 건드리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린것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부모의 불찰을 무슨 말로 변명할 수가 있겠는가. 가슴 속에 굳어져 있는 단단한 돌덩이를 매달고 살아간다.
- <지워지지 않는 흔적>, 결말 부분 -
정현주 선생은 솔직한 사람이다. 그녀는 인간 사이를 강물처럼 흐르는 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하려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녀의 글에서 유난히 촉촉한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주체자의 의지만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은 우리들의 기대와 희망과는 무관하게 전개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은 시작된다. 위 글은 남편이 파푸아뉴기니 건설 현장에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두 살 된 딸아이가 대여섯 계단 아래 정원으로 떨어졌던 사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지만, 어린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부모의 불찰로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어미의 고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게 엮은 글이다. 작가는 그 고통을 단단한 돌덩이로 구체화하였다. 아픔의 크기를 물화해서 표현함으로써 작가적 저력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레이저 수술을 받는 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다 못해 ‘석고대죄’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임을 수필을 통해 딸에게 전하고자 한다. 부모이기에 겪는 안타까운 순간을 긴박감 넘치는 문체로 잘 펼쳐나가고 있다. <초행길> 역시 부모로서의 인정이 솔직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어디를 가도 자식 걱정은 식을 줄 모른다.
길을 잘못 들어서 생긴 긴장과 공포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아갈 무렵이다. 부모로서의 초행길을 걷는 딸과 사위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초행길에서 우리가 겪은 황당한 일처럼 그들도 무수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처음 가는 길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망설이지 않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산 설고 물 선 곳에서 벌어진 초행길의 해프닝은 밋밋한 여행길에 감칠맛을 더해주었다. 초행길의 진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늘 가던 익숙한 길이 주는 미각은 단조로움뿐이다. 프로스트의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가지 않는 길을 떠나며 설레임에 가슴 조이는 불안이나 긴장감은 삶의 양념 역할을 하지 않겠는가. 이국 땅 국립공원 스모키 산 속에서 새내기엄마아빠로서 초행길을 나서는 딸과 사위 앞에 실크로드 같은 순한 길만 펼쳐졌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 <초행길>, 결말 부분 -
초행길은 어른이나 아이 누구나에게 두렵게 느껴진다. 한국도 아닌 이국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면 미로에 빠지기 십상이다. 위 작품은 초행길에서 벌어진 실수를 딸아이의 신혼살이와 상관화시켜 풀어낸 까닭으로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했다. 부모는 실수를 해서 불안해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만은 위기에 처하여도 용감하게 난국을 헤쳐 나갔으면 좋겠다는 한국의 강한 어머니 상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어 감동을 준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프로스트의 시를 예로 들어, 마음먹기 따라서 삶의 무늬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묘파하고 있다. 설득을 위한 적정한 인용이었다.
시간 순서대로 짜여질 수밖에 없는 이런 스토리 중심의 글은 자칫 독자들에게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 이런 글일수록 치밀한 구성과 주제화 전략이 필요하다. 작품의 앞부분에 전개예고를 하고, 복선을 깔아 처음부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 한마디로 일상적 사건이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되어야 감동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런 사실을 알았을까. 전개부 첫 단락에 주제 구체화를 위한 전략을 잘 세웠다. 이를테면 역마살이 끼었지만, 이번만은 여행길이 내키지 않는다는 진술에 바로 이어지는 ‘딸아이의 출산’에 대한 걱정을 놓아 전개부를 암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제 암시화와 복선 장치의 활용을 통해 작가는 초행길의 문제 발생을 예고하고, 이것을 결혼해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딸아이의 입장과 결부시켰다. 바람직한 문학화 전략이다.
이 수필의 가치는 바로 상관화 작업의 소산이라 하겠다. 뒤에 이어지는 작품 <낙엽을 태우며>도 상관화 원리를 통해 정서의 객관화가 비교적 잘 이루어진 수필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누군가의 말도, 지금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어렵기만 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한으로 남을 뿐이다.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는 진술에서 보듯 그녀는 아버지를 더욱 효성스럽게 섬기지 못한 데 대해 가슴 아파한다. 이렇게 그녀는 여리고 정 깊은 심성을 가졌다.
그토록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꽃이 스러지고 이제 한 줄기 실낱같은 연기로 피어오르고 있다. 마지막 혼신을 불사르고 잦아드는 저 불꽃은 생을 마치고 떠나야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최후의 순간을 예고하는 것이리라. 두고 가는 인연에 대한 미련이 오죽할까. 또한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길이 야속하기만 하다.
- <낙엽을 태우며>, 전개 부분 -
이 작품은 작가가 연례행사처럼 낙엽을 태우면서 병마로 고통스럽게 간 아버지를 추도하는 글이다. 자식에게 죽는 순간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자 입원을 거부하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바람직한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효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자식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를 반성적 성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애환을 어찌 위 인용문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절제된 감정으로 비통하게 그지없는 슬픔을 잘 다스려 서글픈 정조를 아프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공감을 자아낸다. 인간적 향기가 묻어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낙엽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불꽃의 세심한 관찰을 통해 반짝하며 가고 마는 인간사의 허망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신변 소재가 문학수필로 승화된 이유다.
병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래 지켜봐야 했던 정현주 선생에게 뜨거운 불길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마는 과정이 아픔으로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 문단의 ‘두고 가는 인연에 대한 미련’,이라는 어구와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의 대구 처리는 이 글의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그 길이 야속하기만 하다’는 마지막 문장은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서러운 심사를 간결한 문학어로 처리한 대목에서 작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현상의 추상성을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구체화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흔적들로 인해 정현주 선생의 글은 실감과 함께 상상력을 주면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격정의 순간에도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수필의 소재를 ‘생활’과 ‘자연’에서만 찾으려 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1930년대적 환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소재의 빈곤과 작가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뿐이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폭넓은 소재를 통하여 그 작품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지성인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지성인이란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수필가도 지성인이기 때문에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정현주 선생의 수필이 이루는 작품 세계의 한 축에는 예리한 현실인식이 투과된 역사의식과 세태 비판이 자리 잡고 있어 평자를 안도하게 했다. 왜냐하면 진정 작가라면 시대를 보는 눈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의 수필적 특성은 제1회 에세이문예 작가상을 안겨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작가상 부문의 경우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이다가 최종 낙점된 작가는 서울에서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하면서 에세이문예지 연재를 집필하고 있는 정현주 씨였다. 다섯 작품 중 두 작품 <트로이 목마>와 <다뉴브강의 잔물결>은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작품성이 충분했다. 이 작품들은 생각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격론 없이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정현주 씨는 생활의 여유를 만끽하여 다양한 문화와 역사 속으로 들어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주목할 만한 기행수필을 발표해온 작가다. 그 까닭으로 이미 수필작단의 주목을 받아온 터였다.
- <에세이문예 작가상 심사평>에서 -
에세이문예 작가상은 본격수필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는 고급문예지인 에세이문예에서 주는 상인만큼 이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수필문학의 틀을 제시하여 수필가의 창작 역량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가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는 정현주 선생의 작품이 섬세한 언어적 감수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직조된 데에다가 역사를 재해석해 가는 작가의 상상력과 분석력이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주부로서 전통적인 여성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작가로서의 인식에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그녀의 수필에 신선함을 드높이는 강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당선작인 <트로이목마>는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역사의식, 그리고 참신한 해석력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개성 있는 자연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여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였다.
터키에 대한 별다른 지식 없이 막연한 동경심으로 출발한 여행이 엄청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고대 문명은 설렘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그곳은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였다. 장구한 역사의 현장을 접하며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짜릿한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인 터키는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문화유산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곳에는 가는 곳마다 신화와 인류사의 흔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기원전이라는 역사가 실제로 존재했던 시간들이었음을 곳곳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터키를 여행하는 것은, 다양한 문명을 만나기 위해 과거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리라.
- <토로이목마> 결말 부분 -
이 작품 역시 배경은 여행지다. 정현주 수필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것은 대부분 자연의 터와 유적이 있는 도시다. 단순히 풍광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으로 역사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 데서 정현주 기행수필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터키를 여행하는 것은, 다양한 문명을 만나기 위해 과거의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리라.”는 결말부 문장은 그녀의 기행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표라 하겠다. 이 작품이 주는 매력은 트로이라는 제재를 통해 문명의 흥망성쇠를 재단했다는 데 있다. 기행의 결과가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제재를 주제 의미화로 활용하는 작가의 세심한 주제화 전략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그대로 주제 의미화로 이어지게 하는 수법이 고차원이라는 점이다. 미국 인디언들의 비극적 삶의 원인을 진단한 <뉴올리언스>는 작가의 예리한 비판적 안목이 크게 두드러진 작품이다.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었다고 하자. 그러나 위기 발생에 대한 늑장 대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뉴올리언스가 아닌 다른 도시였어도 과연 그랬을까. 세계인의 눈과 귀는 온통 그곳으로 향해있다. 아름다운 풍광과 고유한 정취가 배어있는 뉴올리언스의 거리 구석구석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폐허 더미에서 음악의 향기로 가득한 재즈의 본향으로 되살아날 날은 언제쯤일까.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앞에 미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에 드러난 국민적 치부가 그들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빼앗았기 때문이리라.
- <뉴올리언스>, 결말 부분 -
이 작품은 해일로 폐허가 된 흑인 도시 ‘뉴올리언스’에 얽힌 유래를 풀어가면서 미국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는 수필이다. 작가는 이 수필을 통해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온기의 총체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 도시 빈민의 슬픈 인생에 연민을 나타내는 작가의 가슴에 휴머니즘이 녹아 흐른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고 있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에,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은 소중한 것이다.
세계 평화란 미명 하에 자행되고 있는 전쟁과 내정 간섭이 지구촌 사람들을 테러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문화란 상대적인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재단되는 강대국의 횡포를 더 이상 지구촌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될 것이다. 힘센 이웃나라가 우리나라 땅 독도를 넘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체로키 인디언의 역사는 어쩐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체로키 인디언들은 오늘도 조상들의 넋이 배어 있는 전통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영혼을 달래고 있으리라. 오열하는 듯한 구슬픈 음조는 수 만년 세월 속에 녹아 있는 조상들의 숨결이 아니던가.
- <인디언>, 결말 부분 -
정현주 선생은 항상 약자의 입장에 서고자 한다. 이 작품 ‘<인디언>의 ’인디언‘은 핍박받는 자의 상징이다. 그녀는 세계 평화란 미행 하에 자행되고 있는 강대국 미국의 횡포에 대한 분노를 ’인디언‘을 제재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수필의 최대 관심은 인간애의 정신을 그리는 일이다. 그래서 수필을 일러 가슴에 넘치는 사랑을 기록하는 작업이라고도 한다. 정하 선생은 체로키 인디언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진 자와 권력자의 오만과 횡포를 고발하며, 상대적으로 가치가 평가되어야 할 문화가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에 매몰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의 시각으로 지켜본다. 인디언 문화의 보전 가치를 설파하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하겠다. 이 수필의 전개부에서 작가는 고향을 잃은 인디언들의 아픔에 더 접근하기 위해 자신도 수몰민임을 밝히고 있다. 버림받은 자, 억압 속에서도 순수를 지켜가려는 순박한 인디언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내면서 체로키 인디언의 슬픈 역사를 추적하는 모습에서 작가다움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정하 선생의 휴머니티가 가득 배어있는 글이다. 이로써 정하 선생은 작품 속에 비판의 눈길을 놓음으로써 투철한 문학정신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III.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보다 충실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생활 속에서 인정을 흘리고, 비평적 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정현주 선생은 등단은 일천하지만, 기행 수필 창작에 대한 탁월한 작법을 바탕으로 기행문을 문학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하겠다. 우리 수필이 바로 설 수 있는 길은 문학수필의 발견이며, 본격수필론의 정립이다. 그녀는 여성 수필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는 사회의식의 결핍을 비판적 지성으로 보완하고 있기에 우리 수필을 한 단계 업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다루었던 수필들이 자연 친화와 모성적 인간애 그리고 비판적 안목을 보여주었다면, 본고에서 다루지 못한 여러 편의 수필들은 삶의 지향점을 향해 묵묵하게 걸어가는 생활인의 자세와 인생의 정점에서 지나간 세월을 성찰의 자세로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를 풍경화로 그려낸 것들이다. 이들 작품은 나름대로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드러낸 수필로서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인 결핍으로 인한 고통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을 본고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부딪치고 체득되어지는 여러 가지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외면하지 못해서 정현주 선생은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투입시켜 주제의식으로 잘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손자를 본 인생의 새로운 기점에서 허전하고도 고독한 영혼의 갈증을 수필로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수필적 삶의 실천을 통해 관객이 있는 인생이란 무대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작가정신은 다음 작품집을 기대하게 한다. 앞으로의 정현주 수필은 사회의식의 형이상학적 기반 위에 인간적 향기가 더해질 것이다. 좋은 수필을 위한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우리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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