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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오늘은 마가복음 8장 33절, 34절, 35절을 중심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겠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는 것과 그리고 3일 후에 부활하실 것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처음으로 밝히시는 장면이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제자들을 이끄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수 없는 단계를 통하여 그들이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하여서 더욱 많은 발전의 단계의 과정을 거치고 통과한 후에야
정말 깨끗한 환경과 깨끗한 청정 지역의 장소에 이 제자들만을 따로 선별하셔서 그곳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그리고 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것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만에 살아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 하셨고 그리고 33, 34, 35절에 바로 생각과 자아와 혼생명에 대한 아주 어렵고도 중요한 말씀을 우리들에게 계시로
암시해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장 34절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른다라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 주님을 따른다라고 하면은 아주 어려운 문제가
이렇게 대두되니까 이 사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여러분 사람과 함께 동행하는 것, 사람을 따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란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소유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라는 것은 발걸음을 그대로 그분의 행적을 쫓아 따라가는 삶의 길만이 아닌 그분과 함께 다님으로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얻고 주님을 소유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성경은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하나 되어 움직일 때 우리는 바로 예수님께서 바로 이 따르는 자들에게 보여주는 그 어떤 환경과 장소
어떤 사람들과의 만남의 체험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더 자세하게 알게 되고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바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되고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공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나 자신은 부인되어져야 되고 감춰져야 되고 드러나지 않아야 되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진 그 십자가의 짐을 지고 그분을 쫓아야만 되는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처해진 어떠한 아주 악화된 상황,
악화된 어떤 환경 큰 걸림돌이 되고 나에게 큰 짐이 되는 사람의 문제, 큰 어떤 억압되는 물질의 문제나 또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에게 다가오는 아주 무거운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보통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 보편적으로 90% 이상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님들이 이런 관념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라기 보다는 우리가 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삶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하여 우리의 생활에 십자가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참다운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는 세계를 통치하고 호령하였던 로마 제국 시대에서 아주 극악한 죄인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 후에 다가오는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그런 사형 집행 틀이 바로 십자가라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처음에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막중한 무게 때문에 아주 곤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리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는 한 6시간 달리셨는데 보통은 12시간 이상 심한 경우에는 하루 이틀 지나도 생명의 끈질김으로 인하여 쉽게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99% 정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무거운 짐이고 십자가 위에 달렸을 때의 그 가중되는 고통으로 인하여 십자가는 고통을 주기 위한 형벌이구나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러한 고통을 주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마지막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바로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였던 십자가 형벌 십자가의 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고통과 함께 반드시 죽음이라는 이 끝냄을 가지고 오게 하기 위해서 로마제국은 이러한
십자가의 형벌을 통해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우리가 진다라는 것은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가중되는 짐 때문에 곤욕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은 물론 고통과 함께 생명이 완전히 단절되어져서 생명을 끝장내는 것이 십자가를 진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을 받기 위한 형벌의 틀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 보다는 십자가는 고통과 함께 완전히 우리 자신을
끝내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라고 얘기하신 것을 보면 십자가가 고통의 문제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어떤 그런 것보다는 바로 끝낸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라는 말씀에 의하여 바로 우리 자신의 생명이 완전히 죽음이라는 것으로 끝내지는 것이다
라는 것으로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34절 말씀을 통해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뭘까요?
자기를 제거하는 것이죠. 예 어떤 사람이 나를 때릴 때 느닷없이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 반응하게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한 곧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자기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 때려! 나에게 왜 손을 대서 나를 아프게 해 라고 반응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포기하지 아니했다라는 것을 드러
냄으로 말미암아 나를 부인하지 아니했다라고 우리가 유추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한다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제거하여 포기하는 것입니다.제거하여 포기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죽음이라는 것을 통하여 끝장내야만 포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도록 자기가 그 고통을 감수하고 고통을 수용하고 용납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이 나에게 가중되어지는 그것을 완전히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 나 자신이 포기하는 것 그 자체 포기하는 것은
끝장내지 아니하면 나 자신이 끝내지지 아니하면 포기되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는 바로 이 고통을 주기 위한 것보다는
나 자신을 끝장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러한 나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어떤 생각들을 통해서 자아가 형성되고 자아가 우리 혼 생명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것을 우리 생활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문제가 바로 십자가를 지고 내
자신이 끝내지는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이렇게 우리가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이 부인하고라는 이 말씀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나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옛 창조 안에 속해 있던 바로 아담 안에 속해 있는 모든 옛 피조물,
옛 사람 육에 속한 것들, 옛 자아에 속한 것들, 죄에 속한 그러한 모든 것들인 나 자신이 끝내짐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러한 삶이 바로 이 끝냄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삶이라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물론 가중되어지는 고통과 함께 바로 말할 수 없는 곤욕스러움이 찾아 오지만
우리가 나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는 나 자신이 없어지고 없어진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나타나게 되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것을
우리의 바로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서 적용하는 문제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우리 부인이 저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해서 아주 속상합니다.
또는 우리 남편은 아주 저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큰 무거운 짐입니다라고 이렇게 말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말을 할 때 우리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살아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아내로부터 다가오는 것들 또는 남편으로부터 다가오는 것들 또는 자식들로부터 다가오는
그런 것들이 고통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어떤 천연적인 관념에서 나온 상태로서의 남편으로서의 직임 또는 아내로서의 직임을 하려고 해서 외형적으로
선한 남편 또는 외형적으로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하는 그런 남편과 그런 아내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끝내심을 통하여 나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시고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부인되어져서 나 자신이
포기되어 제거되어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 안에 임재하신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바로 그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실제적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삶을 통하여 온전하고도 부합되고 합당한 부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이끄시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나 되어서 그분이 하는 일을 함께 공동적으로 참여하고 또 그분과 함께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그러한 어떤 환경과 장소와 또는 영적 체험과
경험들을 우리의 지식으로 갖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들이 베드로 선생님처럼 천부 아버지의 계시가 자기 것이 되고
그 계시를 통해서 더욱더 견고한 지식이 이렇게 생성되게 돼서 바로 그런 체험들을 통해서 굳건한 반석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하나 되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소유하는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곤욕스러운 삶을 사시고 고통 가운데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당하셨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끝내시는 죽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신 그 자신의 혼생명을 내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성취하기 위해서 혼생명을 내놓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라고 혼이 떠나시는 일을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끝내심을 우리의 삶에 하나 되어 적용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내신 것을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라고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함께 달려서 완전히 자신의 혼 생명을 포기하여 죽음에까지 내놓는 그러한 삶이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이 이것을 내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다라고 얘기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못 박히셔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고 십자가에 또 6시간 달리시고
긴 그러한 시간을 통해서 바로 자신의 혼 생명을 끝내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한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비밀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두 비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우리에게 고통만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가중되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반드시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자아와 혼 생명 그 모두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죄악 된 본성 때문에 범죄 한 일을 하게 된 그 범죄자를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죽여 끝내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십자가의 그 잔을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을
이루어드리고 성취하기 위해서 그 십자가의 잔인 죽음을 앞에 놓고 정말 생사의 길에 있어서 아버지와 밤새 깊은 기도로서
대화를 나누시고 또 관원들에게 잡혀간 후에는 그 관원들과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고문당하고 고초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온 몸과 마음이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녹초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인류의 무게를 담고 있고 그 누구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시고 가시다가 중간에 잠깐 구레뇨사람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넘겨주신 것은 그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영광의 삶의 부분을 우리에게 선물로 나눠주기 위해서 구레뇨 시몬을 통한 교회 안에 성도로 대표되고 있는
시몬에게 그 짐을 맡기신 것을 잠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그 골고다 언덕의 그 행로를 십자가를 먼저 지시는 것을 먼저 하신 다음에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 박혀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 생명을 끝내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는 그분께서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그다음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자신이 혼 생명을 이렇게 끝내셨는데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됩니다.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그다음에 날마다 매일매일의 시간을 통해서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 부합된 온전한 삶을 사는 모습이라고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라는 것은 우리의 그러한 자아나 자신의 인격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아와 우리의 어떤 천연적인
생명과 우리의 옛 사람 모두 옛 피조물 육에 속한 어떤 것, 그 옛 창조 안에 있었던 그것들,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죄악된 본성들을 끝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 아래 머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하고 완전히 우리 자신을 혼 생명을 끝냄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려 먼저 죽고
그리고 매일매일의 삶에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이 제자들이 외형적인 방법으로만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마주하고 주님을 보며 복음 전파를 통하여 말씀을 가르침 받고 그리고 외형적인 방법으로만 그분을 따랐지만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이후로부터는 이 제자들이 내적인 방법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따릅니까? 예 부활을 통하여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이 만지고 접촉하고 보는 어떤 외형적인 방법으로 주님이
나타나셨지만 부활을 통하여서는 영의 몸을 주님께서 취하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생명 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말씀에 부활 안에서 우리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 임재하셔서 내주하셔서 영 안에 거하시는
디모데 후서 4장 22절 말씀이죠. 우리라는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 안에 거하시는 생명 주는 영이 되시기 위하여 부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디모데후서: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그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영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때부터 영 안에서
그분을 따르게 된다라고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쭉 이렇게 25절까지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8장 마가복음 8장 33절에서는 생각에 대해서, 34절에는 자아에 대해서, 35절에는 혼생명에 대해서 계시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특별히 35절에서 보면은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이 생명은 뭡니까?그 생명은 육체가 아닙니다.
그 생명은 영도 아닙니다. 그 생명은 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혼이 자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제 혼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혼생명을 잃으면 버리면
구원하리라라고 얘기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는 생각에 대해서
34절에 자아에 대해서
35절은 혼생명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는데요.
이 생각과 이 자아와 혼생명 이 모든 것은 같은 말 같은 동의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방법이 이렇게 마치 여러분 양파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실것 같은데요.
양파 바깥에는 땅 색깔 황토색 색깔이 이렇게 있고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것이 이렇게 돌출되어서 나중에 아주 중심 부분에
보면 아주 이상한 형체의 그런 모양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죠. 우리 자신의 인격인 그 혼 우리 자신은 바로 혼인 것입니다.
혼이 바로 나 자신의 생명인 것입니다.
이 혼 생명이 사실은 우리의 자아이고 우리의 자아가 다름 아닌 혼 생명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의 혼입니다.
그런데 이 혼이 살아있기 때문에 혼 생명이라고 우리가 얘기하는 것이죠.
나라는 존재는 뭡니까? 예 혼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생명을 가진 혼 생명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너는 누구야 너가 누굽니까 당신은 누굽니까라고 물어볼 때
그 당신은 누구냐라는 것에 대답이 바로 생명을 가진 혼 생명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이 33절, 34절, 35절에서 이 용어가 각자 다른 형태로 생각으로, 자아로, 혼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의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외형적으로 드러나서 나타나는 표현이 우리 자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우리 자아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아는 바로 우리 혼 생명의 실제적인 나타남인 체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혼 생명은 우리 자아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나타나져서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고 구체적으로 살아
나타나지게 되고, 그럼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생각과 어떤 우리의 관념, 우리의 뜻, 우리의 사상들, 이러한 정신적인
어떤 생각과 사상과 관념들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자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늘에 속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지 땅에 속한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망인 것입니다.
영에 속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영생이라고 로마서 8장 6절에 기록이 되어있죠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관념을 통해서 표현되고 우리의 생각이 바로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닌 땅에
속한 사람의 일에 생각이 두어지고 기울어질 때 우리의 생각은 막 활동하여서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붙잡는데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 죽지 마소서 그리하면 안 됩니다 라고 심하게 예수님을 꾸중하는 장면이 육에 속한 생각인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육신에 둔 이 생각을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사망이고 바로 그 생각이 베드로의 육에 있게 될 때 그것은 바로 사단이라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귀중하고도 아주 중요한 계시를 해준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주어질 때 우리의 생각이 베드로처럼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붙잡았을 때 사단과 하나가 된 베드로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바로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사단과 동일시된 베드로를 향해서 그렇게 주님께서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엄하게 교정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포기하고 혼 생명을 이렇게 내놓고 끝장냄으로 말미암아 혼 생명을 절대
구원하면 안 된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혼생명을 구원하고 싶어하죠. 혼 생명을 구원해야 안위가 있고
편안이 있고 행복이 있고 뭔가 만족이 있고 충족함이 있기 때문에 보통 1000명 중에 999명은 혼 생명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혼 생명을 절대 구원하지 말라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혼 생명을 구원하면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로마서 8장 6절에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라고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베드로는 그때 예수님 죽지 마소서 그런 생각을 왜 하십니까 이건 잘못된 생각이 분명합니다 라고 자신의
생각을 육에 두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관하여 그가 그릇된 악한 생각들을 표현했을 때 그 베드로의 생각은 자신의
육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 생명을 구원하는 대신에 반드시 그것을 우리는 잃어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 생명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을 살리는 일이고 혼 생명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 생명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실제로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 생각과 자아와 혼 생명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내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느냐 아니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느냐 아니면 땅에 속한 것, 아니면 하늘에 속한 것, 어떤 것에 내가 기울어지고 있느냐가 바로 우리 생각이 활동하여서
그것이 자아로 나타나고 그 자아가 그 혼 생명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우리 자아의 표현이고 그러니까 자아는 숨겨진 것이라면 생각을 통해서 이 속에 있는 자아가
은밀히 감춰져 있는 자아가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에요. 생각을 통해서 감춰진 자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우리 자아의 표현이고 우리 자아도 또 깊이 감춰져 있는 아주 은밀하게 가장 깊숙한 중심 부분에
감춰지고 있는 그 혼 생명을 보여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가 우리 혼 생명의 구체적으로 체현되어지고 살아
나타나지는 바로 자아를 통해서 우리 혼 생명을 들여다볼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처음의 생각과 어떤 사상 관념을 통해서 표현된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땅에 속한 일! 사람의 일! 아니면 하늘에 속한 일! 하나님의 일!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치우쳐지고 기울어진 그런 방향과 루트를 통해서 나 자신의 자아가 표현할 기회를 붙잡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혼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혼으로 하여금 바로 고통 대신에 그 즐거움과 만족과 기쁨과 아주 어떤 쾌락적인 어떤 것들을 소유하게 하는 것
이라고 바꿔서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혼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자기가 좋고 편하고 기쁘고 만족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혼 생명을 버리면은 괴롭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요. 그것 때문에 피해가 있습니다. 만족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생명은 나 자신의 그 혼 생명을 통해 나타난 그런 것들을 통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하게 하지만 오는
왕국시대에서 바로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합되고도 참다운 그런 교회 생활을 통하여서는 혼생명이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고통을 받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 생명으로 하여금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 때 바로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즐거움을 포기하고
즐거움을 제거하는 고통을 받게 되지만 오는 왕국 시대에서는 우리 자신들에게 혼 생명으로 하여금 너무나 만족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상대적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시다.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간을 맞추고 우리가 인생을 살고 모든 것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삽시다라는
이런 얘기를 하지만 바로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가 아니라 내가 아닌
복음을 위하여 내가 아닌 주님을 위하여 라는 그런 표어로 바꾸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더 이상 내가 아닌 복음을 위하여 라는 이 말이 필요한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삽시다 라는 얘기는 주님을 위하여
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고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그것이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각을 통하여 나타난 자아를 통해서 혼생명의 자아가 우리 혼생명의 체현이죠.
그 혼 생명을 완전히 끝장냄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과 우리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내가 아닌 주님을
위하여 더 이상 내가 아닌 복음을 위하여 라는 표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아닌 복음이 되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될 때 그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와 온전한 복음을 위해서 살 수가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라는 말은 바로 내가 끝내지 않고 그 과정 속에서 고통은 비록 감수하고
체험한다 할지라도 온전한 주님과 하나 되어 나타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순전하고도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그리스도 내가 아닌 복음을 위하여 이런 삶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나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것이 참다운 고백의 내용입니다. 더 이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와야
된다 라는 놀라운 이러한 복음의 계시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 늘 우리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 영이라는 존재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적 존재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소가 되셔서 내 안에서 생명이 되시고,
내 안에서 본성이 되셔서 내 삶의 생명과 내 삶의 본질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만을 주의할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만을 먹고 그리스도만을 마시며 그리스도만을 호흡하며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길 원하기 위해서는 혼 생명을 잃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혼 생명을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혼 생명을 포기할 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아주 큰 아픔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육신은 이것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라는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살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살 수가 있고 복음을 위하여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라는 존재 안에 살아계셔서 하나 되어 움직일 때 실제적이고 실행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38절까지의 놀라운 우리가 삶을 부인하고 혼 생명을 잃어버리는 이러한 생명의 길을 가게
하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부활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의 삶을 같이 하나 되어 움직여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이 생명에 대한
계시 말씀이라는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통하여 이런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와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사도 베드로 선생님과 같은 사람, 사도 요한 선생님 같은 사람, 빌립 집사와 같은
사람, 스데반 집사와 같은 사람, 사도 바울 선생님과 같은 삶을 산 자들이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혼 생명을 내버린 자들, 잃어버린 자들, 아주 그냥 스스로 자원해서 그것을 끊어버린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이 계시로 점점점 높은 계시의 단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데리고 가셔서 점점 높은 곳으로 이렇게 인도하셨던
주님께서는 급기야 9장 1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바로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이 권능이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격과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해 주시고, 그리고 나서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계시한 후에
그리고 더 높은 계시 속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9장 1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는데 너희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의 권능이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9장 2절부터 13절까지 주님이
변화선상에서 바로 헬몬산 기슭이죠.헬몬산 기슭에서 변형되심을 통하여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 성취 되었죠? 9장1절에 분명히 그렇게 써 있죠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12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3명은 주님이 변형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이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게 된 이것이 말씀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분이 이 헬몬산 기슭에서 변형된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명의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실제적으로 봄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이 변형되심을 통하여 성취된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 북쪽의 맨 경계선 위에 있는 바로 헬몬산 기슭에서의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주님의 그 변형된 모습에 영광의 주님의 이 변형된 모습은 다름 아닌 왕국의 임하심이었습니다.
왕국은 무엇이죠? 바로 그 변형을 통하여 왕국에 임함으로 말미암아 3명의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게 됐죠.
그리스도가 이런 방식으로 확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생명이신 왕국이 생명의 씨로서 하늘의
유전자로서 뿌려졌던 것입니다.
바로 갈릴리 바다에서 취해진 4명의 제자에게 이 생명의 씨로서 뿌려지고 또 다른 제자들까지 만나셔서 이 생명의 씨를
말씀을 가르치실 때 뿌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실 때 병자들을 고칠 때 아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뿌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뿌려짐을 통하여 일정한 때가 되어서 물론 여기에서는 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까지 포함한 그때부터 3년 반
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바로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 서 이 생명의 씨가 발전 단계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정말 이것이
나타나는 일들이 이렇게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생명의 씨가 완전히 발아가 돼서 실제적으로 눈에 볼 수 있도록 이 생명의 씨가 영광안에서 나타날 때까지 자라고
성장하고 또 발전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됨으로 말미암아 이 씨가 비로써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왕국인 것입니다. 이 왕국이 완전히 나타날 때에는 아직 도래는 하지 않았지만 왕국에 나타남을 갖고 오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미리 사전에 예표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왕국의 임함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적인 나타남이면서
또한 예표이기도 하고 예표이면서 실제적인 나타남인 자신의 변형을 통하여 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12명 제자 중에
3명의 제자에게 왕국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실제적으로 전시하신 것이 변형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영광의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것은 사실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나타남이었다라는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러한 교제의 말씀을 통해서 이 왕국의 나타남과 천국의 출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더욱더 깊은 교제의 시간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어렵고 난해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계시 속으로 제자들을 이끌어가시기 위하여 12제자 중에 선별된 자라고, 성장하고, 발전 단계의
과정을 통과하여서 어느 정도 부합된 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이렇게 이 12 제자와 함께 이끄신 가운데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장 2절에 뭐라고 기록돼 있냐 하면은 엿새 뒤에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3명을 12제자 가운데 3명만을
따로 또 분별하고 구별하고 취해서 그들을 높은 산으로 계시가 아주 깊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계시는 아무나
아버지의 이 계시가 없이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청정 지역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의 높은 산인 헬몬산 기슭에서
자신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주님의 변형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나 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주님을 볼 수도 없고 알아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셔서 변형됨으로 말미암아 8장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처음으로 밝히신 뒤에 6일 후에 발생되었기 때문에 지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간 이 높은 산은 바로 이 가이사라 빌립보 지역의 경계선 위에 지역인 북쪽 지역인 헬모산 기슭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높은 산으로 점점 이끄셔서 하늘에 속한 가장 높은 계시인 바로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의 왕국의 능력으로 임하는 것에 대한
것을 차근차근 낮은 수준의 단계 계시부터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또 교회에 대해서 계시해 주시고 또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으로 밝혀주시고 인자라는 것을 또 알려주신 다음에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밝혀주시고, 그리고 나서 지금 이러한 일들을 9장 2절부터 13절에서 산위에서 변형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 답답해하고 막 갈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계시를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환경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떠나야 됩니다. 종교적인 환경은 뭡니까? 전통이 있습니다. 유대 옛 종교가 있어요.거기에는 누룩의 냄새가 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을 공간적인 어떤 요소나 자리가 없고 그리고 깨끗하지 못합니다.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름도 없고 안개도 없고 깨끗한 환경인 청정한 공해가 전혀 없는 청정 지역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의 헬몬산 높은 산 위로 이끄셔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곳에 데리고 가시어서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변형되신 그리스도의 그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그 놀라운 영광의 이상을 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땅에 속한 수준의 사람으로는 전혀 인식할 수 없고 깨우칠 수 없는 것이기에 아주 높은 최상의 그 하늘에 속한
그 계시를 맛보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 위에 올라 이끌어지는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12 제자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훈련시키고 가르치신 다음에 그들 중에서도 가장 잘 성장하여 발전 단계를 거쳐서 어느 정도
부합되고 통과된 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이끄셔서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자신의 하나님의 왕국의
능력으로 임하는 주님의 변형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때 마가복음 9장4절을 통하여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서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었죠.
9: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예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된 것은 뭡니까?
이들이 등장된 것은 바로 대환란 때의 두 증인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보존되어지지 아니하면 안 되었기 때문에
계시록 11장 3절부터 4절 말씀입니다.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1: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11: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이들은 대환란 때 두증인으로서 나타날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별하셔서 보존시키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대표하는 자였고,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이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 완전한 두증인 구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성 요소라고 요한복음 5장 39절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누가복음 24장 44절에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도 있죠.
누가복음: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고린도전서: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구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자 나타났던
누가복음 9장 31절 말씀이죠.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그래서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구약 성경에 있어서 특이한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죽음과 또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이렇게 셋째 하늘은 아닐지라도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할 그런 곳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시고 열왕기하 2장 11절에
그리고 모세는 죽었습니다.하나님께서 그의 몸을 감췄습니다.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신명기 34장 5절 6절에 모세의 죽은 몸을 감추셔서 사람들이 찾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 속에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일들을 행하셨고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4: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당했습니다.
그 하늘은 주님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3층천 셋째 하늘은 아닐지라도 어딘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인 신약 경륜을 나타내는
어떤 그 시점까지 주님께서 보존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이 두 가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모세와 엘리야가 드디어 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있는 제자들 앞에 변형된 모습으로 바로 높은 산인 헬몬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안배하시고
보존하시고 이렇게 행하셨던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서 12명 제자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의 영적 성숙함이 어느 정도 부합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오는 하나님의 왕국이 권능과 능력으로 임하는 그 왕국을 미리 맛본 자가 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더욱더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예수님과 함께 찾아오는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주님의 변형을 봤을 때 사실은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천년 왕국의 아주 축소판을 미리 사전에 우리도 또한 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세와 엘리야는 어느 시대 사람이죠? 신약시대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으로서 구약의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라면 신약의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자가 그 12제자 중에
3명 높은 산으로 높은 발전의 단계의 과정을 통과해서 부름받아 세움을 받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신약의
성도의 대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도인 모세와 엘리야와 신약의 성도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5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모세는 구약의 성도로서 죽은 자였죠.
모세는 죽음을 당한 구약의 성도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모세는 죽음을 이미 경험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나타나실 때에 모세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성도 중에 죽은 자 중에 한 사람으로
있었지만 부활한 자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모세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라고요? 구약의 성도 중에 하나로서 부활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 자는 누굽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산 자로서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는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본
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까지 포함한 이 네 사람은 죽음을 맛보고
부활한 모세와 달리 이들은 죽음을 전혀 맛보지 아니한 살아있는 자들로서 휴거된 자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엘리아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가 구약의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자들로서의 휴거된 자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아주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큽니다.구약의 사람이지만 모든 살아있는 자들로서 휴거된 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엘리야,베드로 , 야고보,요한 구약의 성도 중에 하나로서 죽었으나 부활한 자를 상징하는 것이 모세라는
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 베드로는 너무나 감격하고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 기쁘고 정신이 아마 완전히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자기 선조들이 그렇게 존중을 하고
그렇게 정말 높였던 엘리야 선지자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라고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마치 모세와 엘리야를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왕국이 능력으로 임할 때 변형된 주님과 함께 동등한 수준에
놓았다라는 것은 얼마나 베드로가 영적으로 깜깜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었는지를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그리스도와 절대 동등되거나 함께 그 반열에 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율법과 선지자를 그리스도와
바로 동등한 반열에 서게하기 위해서 그러한 초막 셋을 짓도록 하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신성한 경륜을 완전히 거스르고
심지어는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부 아버지께서는 바로 즉각적으로 이 모세와 엘리야를 사라지게 하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신성한 경륜 안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그냥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나타내는 도구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 뿐이지 그분과 일원 반푼어치도 동등한 수준에 놓아져서는 안 될 인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약 성경에서는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 7절에서는 즉각적으로 바로 천부 아버지께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거기서 바로 그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르기를 선생님 우리가 여기 너무나 좋은데요. 장막 셋을 짓고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소서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즉각적으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와서 이르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누가 말씀하시죠? 천부 아버지 아들을 율법과 선지자의 그 모세와 엘리야의
동일한 수준의 올려놓어진 것을 이 천부 아버지께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고 이것은 천부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이 천부 아버지께서는 아들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천부 아버지의 즉각적인 선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라는 이 말씀은 두 번째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바로 이 하늘에서 이 똑같은 구름 속에 소리가 나서 말씀 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첫 번째로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고 나오실 때 첫 번째로 주어진 말씀이
이 두 번째 사건을 통해서 천부 아버지 하나님께서 동일한 것을 선포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공개적인 공생애 사역을 하기 위한 이 천부 아버지의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선포였다면
이 두 번째 천부 아버지께로부터 선포된 똑같은 말씀은 다가오는 왕국을 예표하는 바로 변형안에 있는 아들을
변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천부 아버지께서 똑같은 그 음성을 두 번째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들리게
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 명의 제자들에게 7절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분의 아들에게서 나오는 말씀만을 들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 안에서 이제 이 신약 시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에게서 이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이나 선지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라고 성경은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서 문득 둘러보니 이 소리가 분명히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는데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 뿐이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자신들이 유대교 종교를 믿으면서 하나님 외에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존중하고 경외하였던 그런 모세와 엘리야를 붙들어 두기 위해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만이 아니라
12 제자의 생각이었었고, 그 당시에 유대 백성들의 생각이었고,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생각도 이와 같이 모세와
엘리아를 붙잡아두기 위한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이렇게 차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율법과 선지자인 모세와 이 신언자들의 그러한 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우리 은연중에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완전히 제거시키기 위하여 모세와 엘리야를 즉각적으로 취하여 데리고 가시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셨다라고 8절에서 그들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자기들과 함께한
예수님 외에는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왜냐하면 남겨놓으면 그들도 역시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동등한 수준에 남아있게
하여서 붙잡아두기 위해서 계속 노력할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즉각적으로 그 모세와 엘리야를 데리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있지 않게 됐던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그림자요 예언이고 참실제가 아니었다라는 것을 천부 아버지께서 지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신언자들의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는 참 선지자인 그리스도이신 실제이신
그분이 오기까지만 잠시 필요한 존재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림자요 예언이고 실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인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더 이상 옆에 있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사라지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 생명의 큰 빛이 오게 되면 그동안에 깜깜한 어둠에 불을 밝히고 있었던 호롱불 또는 햇불, 등불 이런 것들이
해가 떠오르는 그 순간에 그동안 켜놨던 그 모든 불들은 꺼지고 사라지고 제거돼야만 하는 것처럼 실제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동안의 그림자와 예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필요했지만 실제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림자와
예언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어서 예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신약시대에 있어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천부 아버지의 계시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를 통하여 왜 실제했냐 하면 시내산에서 받은 10계명, 그러한 율례와 법도,
율법이 하나님의 그 인격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넣어주는 일을 모세가
한 것처럼 이 신약 시대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 안으로 생명의 법을 넣어주는 오늘날의 모세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넣어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그리고 믿는 이들 안에서 하나님을 말해내는
오늘날의 엘리야 신언자 선지자와 같은 참 실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믿는 사람들 안으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생명의 법을 넣어주는 오늘날의 참 모세이시고, 또 신언자인 엘리야는 무엇을 했죠? 하나님을 위해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그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그 하시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입을 통해서 토로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고 자신의 그 믿는 자들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말해내는 오늘날의 참 엘리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모세이시고 참 엘리야 그 참 모세와 엘리야가 왔기 때문에 그림자요 예언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또 실제가 아닌 그들은 신약에 더 이상 남아 있어서는 안 됐기 때문에 사라져 버려야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하고도 영원한 경륜에 속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때는 모세도 없습니다. 엘리야도 없습니다.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로 대표된 율법이나 엘리야로 대표된 신언자 선지자가 아닌 우리는 신약 시대에 오직 실제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그 말씀을 들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에 2절부터 13절까지 산위에서 변형되시는 모습 통하여 천년 왕국의 축소판인 3명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리고 그 3명의 제자를 통해서 또 얘기들이 또 전해졌겠죠. 나머지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 나타나면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전달되어진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마가복음 9장 9절에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이제 내려왔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사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 때까지는 그들이 본 것들을 아무에게도 절대 말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변형되고 영광을 받으신 이 예수님에 대한 이상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자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자꾸 이끌림을 당하여서 정말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인자가 누구신지 죽음과
부활의 계시를 맛본 다음에 그리고 변화 선상에서의 하나님의 이 왕국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그 변형 되셔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이상은 부활 안에 있는 자가 아니면 누구도 깨달을 수 없다라는 것을 가리키고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시점이 얼마 안 남았지만 그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본 것을 이르지 말라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자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9장 10절에 그들이 그 말씀을 자기들끼리 간직하며 서로에게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더라 이렇게 말을 들었을 때도 이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바로 이 생명 주신 영이 오시기까지는
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까지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이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120명의 문도에게 이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불로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그때로부터 이 베드로와 사도들이 강력하게 부활의 예수님을 간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후 베드로와 그 제자들의 전파의 중심 내용의 그 주제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을 보면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일의 증인들입니다라고 그리스도의 이 부활이 베드로와 그 제자들의 복음 전파의 주제요 요점이요
중심 내용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바로 이 오순절 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제자들에게 임하여서 생명 주신 영이 능력으로 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이 큰 불 같은 능력으로 임하게 되었을 때 그들 모두는 부활이 그전에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서
그렇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그 부분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돼서 그 부활 안에 있는 자신들을 통해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복음 전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로 전파의 중심 내용으로 삼고 예수의 부활만을 이렇게 증거하고 강조하고 선포하며 다닌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여기까지 하고 이어서 계속 말씀의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