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노>로 연기대상을 거머쥔 장혁이 수상 후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다. 과거의 인연과 피곤한 인생사와 역사에 휩쓸려온 그가 이번엔 <마이더스>에서 돈의 욕망에 떠밀려 가기로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캐릭터와 장혁이 추구하는 것은 평범함이다.
장혁이 우리에게 백마 탄 왕자님이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배우로서 그의 이름값을 미루어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명랑 소녀 성공기>를 통해 그는 시청률 40%대 배우가 되었고, 마니아 취향의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동시간대 1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혁을 두고 열광적인 배우 앓이를 하지는 않았다. 그로 하여금 KBS 연기대상 최고의 영예를 거머쥐게 한 <추노>를 통해서도,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는 민초들의 한 서린 삶과 ‘대길’이라는 인물에 열광하고 장혁을 매력적인 배우로 여기더라도 그를 밸런타인데이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1위로 꼽지는 않는다(물론 유부남이라는 것이 그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는 ‘왕자님’과 묘하게 어긋난다. <추노>는 말할 것도 없고, <타짜>의 고니나 <불한당>의 권오준은 거리 위가 어울리는 역할임이 확실하고, 부잣집 도련님이나 의사 역할조차 상처와 고독으로 얼룩진 아웃사이더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안소니만 왕자란 법은 없고, 거친 테리우스의 해바라기 사랑도 여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지 않던가? 만약 장혁이 <시크릿 가든>을 본래 결정대로 연기했더라면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테리우스가 될 법도 했던 이 배우는 여자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멜로 배우로 머무르지 않고 남자들 세계 중심으로, 혹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도 아니면 인간 본성의 한복판으로 달려들어 스토리를 타고 함께 뛰어내리는 걸 선택했다. 다음 작품으로 선택한 드라마 <마이더스>에서도 역시 ‘돈’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내달리는 한 사내의 복잡다단한 인생을 연기한다. 욕망과 야망의 벼랑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의 “<추노>와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마이더스>의 캐릭터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평범한 삶의 행복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쉽게 획득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한 평범한 삶을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 그래서 그 삶으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인물에 연민을 많이 가지게 돼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인생이 휩쓸려가는 그런 사람들 말이죠. <고맙습니다> <불한당> <타짜> 그리고 <학교>의 역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메이저다, 마이너다 하는 느낌을 가진 배우는 분명히 아니지만, 마이너 성향의 캐릭터에 끌리는 건 확실해요.” “사실 <추노>를 선택할 때도 좋은 배역이 하나 더 있었어요. <그린호넷>의 주걸륜씨 배역 오디션 기회도 있었고 감독과 화상통화하면서 최종까지 올라갔었어요. 하지만 <추노>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했고, 어쩐지 <그린호넷>의 기회는 외계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적이지 않은 느낌이었거든요.”
재미있게도 할리우드의 레드카펫을 밟는 대신 조선시대의 추노꾼을 연기하며 한국에 발을 디딘 그의 결정은 ‘평범함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신기루 같은 할리우드의 배역 하나에 연연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연민을 느끼게 되는 가깝고 뜨거운 이대길이라는 강하고도 연약한 사내를 위해 몸을 살랐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역할은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역이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최대치가 여옥의 품에서 죽어가며 ‘이제 쉬고 싶다, 여옥이 내 옆에 있냐’고 해요. 그게 제겐 따뜻한 죽음으로 느껴졌어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도 이대길과 비슷했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편안하게 쉴 수 있다는 점도 그랬고요.” “그래요. 제게 <추노>는 참 중요한 순간의 중요한 영화였어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운 좋게 할리우드에 가는 것보다는 배역과 작품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추노>를 한 것이 제게 더 많은 것을 준 것 같아요. 허기가 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어떤 음식 앞에서도 맛있게 수저를 들 수 없는 거잖아요. 어려서부터 서른 중?후반이 되면 훨씬 내가 할 수 있는 배역도 많고, 더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서른다섯, 대길이라는 캐릭터를 만나서 제 삶의 중요한 점을 하나 찍게 된 거죠.”
그가 평범함과 현재의 가치, 인간에 대한 연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트렌디한 요즘 친구들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뭉툭하고 촌스럽다. 어차피 모국어도 아닌데 영어도 능수능란하게 하는 척하고, 할리우드의 환경에서 한번 뒹굴어도 보고, 조금은 영악하게, 지름길로 가도 된다. 하지만 그는 식물 같은 말쑥한 꽃미남이 되기보다 동물 같은 사내 녀석의 의리를 꾸역꾸역 지켜나간다. 그는 사소한 일이라도 절대로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지 않다. 눈빛은 그 역시 외롭고 그 역시 아픈 상처가 있다고 말하지만, 친구 등을 토닥이며 위로할 뿐 위로를 갈구할 것 같지 않다. 그는 내 여자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차라리 스스로의 아픔을 택할 사람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책임감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거칠거칠한 사내다. “아무래도 장남이라서 그런가 봐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장남이셨고, 왠지 모르게 세습되는 게 있어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볼 수 있었던 게 1년에 보름 정도뿐이었어요. 아내와 자식들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도 함께 돌봐야 했던 아버지는 당시 외국 건설 붐 속에 수당이 더 많이 나오는 중동 국가로 일을 하러 가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걸 바라보면서 눈물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속으로는 눈물이 참 많은데 참는 게 익숙해졌어요. 지금도 저한테 돈을 쓰는 것보다는 친구, 가족에게 돈을 쓰는 게 훨씬 편하고요.”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추노>에서 대길의 오열 장면이 떠오른 건. 쌓아두고 쌓아둔 남자들의 눈물이 한 순간에 폭발하면 멈출 수가 없다. 거친 사내의 말랑한 심장 속에 숨어 있던 어린 소년은 그렇게 터져 나왔다. “어렸을 때 꿈은 선생님이었어요. 아니면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 일상적인 생활에서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직업,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 이유는 하나였어요. 6시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래서일까.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인 장혁은 싱글인 장혁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어쩐지 어린 시절부터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처럼 누군가를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정말, 결혼만 하면 행복해지는 사주를 가진 사람이 따로 있다면, 장혁이 그런 이임에 틀림없다. 제대 이후 오랜 연애 기간을 거친 연상의 아내와 결혼한 그는 이후 차곡차곡, 무리수를 두지 않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왔다. “확실히 일상에서의 행복을 느껴요. 결혼해서 좋아 보인다는 말, 그거 참 듣기 좋고요. 하지만 제가 최근 얻게 된 것들이 단순히 결혼의 운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들어맞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일과 사생활은 정확하게 분리해 가는 편이에요.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공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버지가 절대 집에는 일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으신 것처럼, 저도 일은 일터에 두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해요. 맞아요. 저는 취향은 마이너인데 행동 방향은 지극히 모범생적인 구석이 있어요.”
장혁의 2010년이 <추노>로 시작해 12월 31일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추노>로 끝났다면, 2011년은 더욱 바빠질 태세다. 드라마 <마이더스> 말고도 영화 <의뢰인>이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하정우, 박휘순과 함께 연기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키를 쥐고 있는, 용의자 역을 맡았다. 그동안 영화판에서의 존재감이 드라마에서만큼 못했다면, 남자들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이 마초적인 영화가 그의 장점을 훨씬 더 부각해시킬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나이가 한 살 더 들었으니까, 더 깊이 있는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이고. “나이가 드는 건 참 멋진 일이에요. 제가 그 깊이를 표현할 수 없어 할 수 없는 역들을 하나둘씩 해낼 수 있다는 거니까. 젊음이 아쉽지 않아요. 배우가 되어서 가장 좋은 건 제 젊음이 하나둘, 어디에 저장되어 있다는 거예요. 20대 때 제가 찍은 영화들을 돌려 보며 저의 몰랐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그는 판타지 속의 백마 탄 왕자는 아닐지언정, 나의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야말로 순수한 열정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종류의 ‘사랑’을 주고받았던 그 젊음의 설렘이 그에게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서다. 비록 철든 남자의 성숙함을 담아내되 소년 같은 풋내와 순수함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그가 세련된 방식으로 다가온다면 어쩐지 서운할 것 같다. 남들보다 깊은 과거를 눈에 담아내지 않는 장혁은 상상하기 어려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