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즘나무 이연희
가까운 영천으로 하루 여행길에 올랐다. 임고서원을 거쳐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임고초등학교에 갔다. 큰 버즘나무 여러 그루가 학교 운동장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40m 넘는 나무가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처럼 둥치도 엄청났다. 수령이 학교 역사와 비슷하다는데 어마어마하게 큰 키가 과연 100년 만에 이 정도 자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한다. 미끄럼틀 옆에도 정글짐 곁에도 나무는 풍성한 자태를 뽐내며 버티고 있었다. 연초록빛 초등학생과 거대한 고목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버즘나무는 멋없이 키만 삐죽하게 크는 나무가 아니다. 보기 좋게 가지가 옆으로 벌어지는 특성을 보이는 나무라고 한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가지가 절로 부러져 지나치게 옆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조절한다고 한다. 부러진 가지로 인해 상처 난 껍질은 안으로 오므려서 자력으로 매끄럽게 성형한다니 자연의 신비가 놀랍기만 하다. 대부분 나무들이 원래부터 그런 모양이었던 것처럼 가지 부러진 표시가 나지 않게 매끈하게 아물었다.
버즘나무는 속을 적당히 비우고 포기해야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한 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에서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뿐 아니라 노철학자의 가르침까지 느껴진다. 이런 것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과연 나무보다 나은 게 무엇이 있나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람처럼 ‘나 잘 났다’고 으스대지 않고 말없이 우뚝 선 나무의 가르침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버즘나무의 속성을 알고 보니 신비감과 경외감이 느껴져 나무가 존경스럽다.
버즘나무는 심오한 철학자이며 성형외과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알아서 성형과 자가 치료까지 한다. 아문 곳이 매끄럽게 마무리되어 젊은 여인네 가슴 같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갈 뻔했다.
텅 빈 시골 학교 운동장에 서니 여러 생각에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렸다. 봄방학이라 빈 학교인데도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편안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종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언제부턴가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간질간질 가슴도 간지러워진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서 그런가. 지나온 육십여 년 너머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버즘나무만 보며 왜 나의 지나온 세월이 생각나고 눈물이 나오는지.
어릴 때 할머니 집에서 잠시 자란 적이 있다. 떠나간 엄마가 보고 싶어 구석에서 울었다. 아버지한테 다리에 줄이 생기도록 혼이 났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 이후로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고 살았다. 그때 집 앞 냇가에 버즘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해거름에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넘어가는 해를 보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할머니도 나를 보듬어 안고 같이 우셨다.
"우야꼬. 우야꼬. 불쌍해서 우야꼬."
결코 지워지지 않는, 지울 수 없는 아련한 아픈 기억이다. 그 이후부터 버즘나무만 보면 외롭고 슬퍼지며 울고 싶었다.
자라면서 속을 터놓을 사람이 주위에 없어 정서적으로 굶주렸다. 특이한 환경에 곪아 터지고 문드러지는 속을 혼자 삭이게 되었다. 내 속을 그대로 내어놓으면 집안의 평화가 깨어지니 스스로 삭여야만 했다. 치유가 잘 된 버즘나무 둥치처럼 내 상처를 혼자서 매끄럽게 아우르고 살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이 결혼 후 지금까지 평탄한 길만 걸어 온 삶은 아니었다. 에움길도 있었고 가풀막도 거쳐 온 삶이었다. 적당하게 포기하고 비운 덕분에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생해 본 적이 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속내도 모르고 참 기가 찬다. 엄마의 속 썩음이 바탕이 되어 반듯하게 클 수 있었다는 자식들이 있고 속이 뭉그러지고 비웠기에 겨우 지금에 이르렀는데.
버즘나무처럼 적당히 비우고 버리며 포기할 줄 알고 스스로 치유하면 우리 삶이 좀 더 고운 빛이 아닐까? 어른 서넛이 겨우 감싸는 커다란 버즘나무를 보며 삶의 지혜를 다시 한 번 더 배운다.
첫댓글 후반부에 갑자기 멜로로 넘어가네요. 나도 괜히 엄마가 보고싶어 지잖아요. 마음의 고생, 겪어본 사람만 알죠. 그래도 참하게 자랐잖아요. 그럼 됐죠 뭐!
감동적인 글 읽으면서 저도 코끝이 찡해졌어요 ~참하게 잘 쓰셨네요,연희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