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연은 산서성 동부 태행산맥(태항산맥)끝에서 하북성 전역과 북경일대를 포함하여 요녕성 서부지역까지이다.
후연은 하북성 연경(북경) 동부지방과 동남부 천진에서 산동성 북부의 중산과 발해만일대를 말한다.
(북경에서 산동 중산으로 천도>서연점령 천도>북위에 의해 모용희때 산서성 대동시 용성으로 강제 이주)
서연은 하남성 서북부~ 산서성 최남단 지역을 말한다.
남연은 황하이남의 안휘성 지역을 말한다.
북연은 산서성 북부 대동시의 용성을 말한다.
(실크로드 교통로인 섬서서북 화현으로 옮겼다가 북위에의해 산서성 대동시 용성[평성/원북위]으로 다시 이주)
만주일대는 그야말로 황량한 곳으로 사람 살 곳이 못되었다.
이곳은 구려(舊麗)>이다.
황량한 구려지방에서 내몽골자치구서부 파단(단파)길림사막지방과 중원의 감숙성지방으로 이주해간다.
고구려의 성장과정은
구려(舊麗)>고원족(高源族)>구려(勾麗)>고려(高麗)>구려(句麗)>고구려(高句麗)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사람이 많은 비단길지역으로 이동해간다.
감숙성 중동부의 평양시,천수시는 고구려가 제6대 태조대왕때 일어서는 하서회랑지역으로,
평양시,천수시일대에서 일어서는 나라가 고구려이다.(비단길 오르도스지역)
19대 광개토대왕때는 서령시로 천도하여 섬서성북부,영하성회족자치구, 내몽고 중서부,
산서성 서부 일대를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광개토비문에 서령(庶寧)을 수도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문 실력 딸리는 사가들이 서민을 태평스럽게 만들었다며, 저차원적인 해석을하는 바람에
몰랐던 것일 뿐이다.
서령시(庶寧市)는 현재의 서령시(西寧市)다.
서쪽으로 천도하여 갔다고 해서 서령시(庶寧市)를 서령시(西寧市)로 다시 바꾼 것이었다.
서령은 중국 청해성 서령시로 승격되어 현재도 위치하고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는 산서성의 오르도스인 산서 서남부지역 여량시,임분시(임둔군),운성시의 하서주랑과,
진성시의 하서시랑을 장악하고 초원의 길 대중국무역을 독차지하였다.
그후 황하를 타고 발해만으로 들어가 산서성 동남부 낙랑군에서 이주해 간 발해만 대릉하의
최숭의 낙랑국을 장악하고 후에 고구려에 밀려 북발해만 요녕성 조양>심양으로 이주해간
최리 낙랑국을 다시 복속하고 고구려 영토로 삼는다.
복속된 낙랑국인들이 고구려인이 되어 북발해만 일대를 장악하고 후연과 대치한다.
하남백제(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는 고구려에 막혀 연경(북경)의 전연과 통상이 차단당했고,
전연 멸망후 들어서는 하북성의 북위와 남제와의 소통을 고구려가 차단하였다.
산서성 대동시 평성의 멸망한 대나라에서 일어선 탁발선비족 탁발규의 북위(北魏)는
하북성 북경일대로 들어가 점령한후,북위의 관중,강서,강동,관남진출로 분열하여
하남성 낙양으로 들어가 수도로 삼는다.(서위(우문태/우태)-섬서성 서안,
동위(고환/고태/구태-하남성 낙양)
후연이 멸망한후,
훗날 하북성일대의 북경지역에 남제(南濟)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남제인은 정주백제,양나라,북제,산동 제남백제,동영시의 동명부여 백제인들이
북위>북제(고양)>북주(우문각,우문호)에 밀려 북경으로 들어가 세운 나라이다.
감숙남부,섬서북부,영하성회족자치구,산서 서부의 고구려는 발해만일대를 장악하고
하남 제남 위례백제를 동서북으로 포위하고 장악하여 연경의 전연과 통상을 차단하였고,
백제는 감숙북부,내몽골자치구 파단길림사막지역에 있던 북월지,백잔,이잔,가야,왜세력과 동맹을 맺어
섬서,산서 고구려의 후방을 노렸다.
발해만에서 고구려에 의해 복속된 낙랑국인은 북발해만의 대련반도 심양지역으로 밀려났던
낙랑,남옥저,해말갈,동예와 연합하여 북발해만의 고구려를 협공하였으나 패하고 반도로 밀려난다.
하남성 정주 한성백제,산동 제남 위례백제가 이들과 협공해서 발해만일대를 장악한 고구려를
협공했으나 실패한다.
광개토때 감숙남부,섬서,산서고구려의 실크로드무역을 위해 북방에 있던 백잔,이잔,가야,왜세력은
전투에서 패하고 동진하여 내몽골동부,요녕성,길림성 집안일대로 달아난다.
그리고 집안현 통구현 일대에서 고구려군 1만2천여명을 죽이고 압록강을 넘어 반도로 들어간다.
백잔,이잔,가야,왜세력은 광개토비문을 유추해보면 약4~5만이 싸우다 죽는 것으로 나온다.
[광개토 전사]
가족들이 안전하게 압록강을 도강할수있도록 막으려다 많이 희생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낙랑,말갈,남옥저,동예연합군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낙랑은 평안도,말갈,남옥저는 함경북도,함경남도 북부,동예는 원래 살았던 함경남도 지역으로 밀려나고,
해말갈은 압록강하구 단동(안동)지방에 자리잡는다.
낙랑은 다시 고구려에 밀려 평양지방을 빼앗기고 해주일대로 남하한다.
그러자 근초고왕이 북진하여 제후로 넣게 되는데 고국원왕이 해주 안악일대를 장악하고
안악궁을 건설하게 되면서 낙랑은 강원도지방으로 들어가서 동낙랑인이 되고,
함남지방으로 달아난 낙랑은 말갈낙랑인이 된다.
일부는 신라로 투항하여 들어가고 나머지는 백제로 들어왔다가 익산연립마한(하한)과
나주~사천의 침미다례로 남하한다.
해말갈인들만 현재 단동지방에서 중국인들로 살고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단동(안동)지방을 점령하고 제후로 두고 다스린 지역이었다.
대련반도 안산지방에 머물렀던 북옥저는 사할린지방으로 밀려났다.
사천성 촉의 후예였던 환온의 아들 환현일파가 동진에서 손은(孫恩)과 노순(盧循)의 반란을 틈타
이들을 제압하고 동진황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다가 북위출신 유유에게 진압당하고
유유가 남송(유송)을 건국하자,비수대전의 주역인 강소서북,안휘동남부의 양하사씨 사안,사현장군 가문 일행,
그리고 황족일가 친척과 함께 대련반도 요녕성 조양시>심양시 옛 낙랑국 자리로 들어가
낙랑에 남아있던 세력을 누르고 후동진국을 세운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에 대항하다 밀려 반도 해주로 들어와 이주했던 낙랑국을 다시 복속한다.
그후 낙랑인이 더 많아지자 후동진 국왕 동수가 낙랑왕을 자처하며 해주 낙랑국을 이끌었다.
이때 근초고왕이 올라가 낙랑국왕이었던 동수는 백제 제후로 떨어지고
근초고왕은 동진국 연호였던 태화를 4년간 사용하게된다.
이것은 동진황제를 눌렀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후 고국원왕이 안악을 점령하게 되자 낙랑국인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많은 수가 백제, 하한[익산연립마한], 전나국 마한연맹체, 침미다례로 이주하여 남하하여 들어오게 된다.
고국원왕 사유는 근구수태자가 이끄는 부대의 화살을 맞고 죽는다.
북발해만 일대와 대련반도를 장악한 고구려가 훗날 연개소문때 살아남아
천리장성을 쌓고 당과 저항하는 곳이다.
수당시대때 산서성 서부, 섬서성 북부, 영하성회족자치구, 감숙성일대를 빼앗긴다.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180~200여명을 죽이고 관련 귀족 가족 2천여명을 학살하면서,
산서성 서부,섬서성 북부,영하성회족자치구,감숙성, 청해성 서령일대와 영북지방인 내몽골자치구를 상실한다.
그후 광개토때 구축해놨던 북발해만 대련반도의 요녕성 개주시 안시성 등이 살아남아
대련반도 남단 비사성에서 (양만춘)등이 당에 저항하다가, 안승의 후고구려가 검모잠등과
산서성 진성시 궁모성을 수도로 삼고 요동성 등에서 저항하다가 반도 평양성의 보장왕을 구원하기 위해
북발해만으로 이동하여 신요동 신성에서 저항하다, 거란, 해족 당연합군을 물리친 신라군의 도움을 받고
신라군을 따라가는 것을 거부한 검모장 장군을 죽이며 반도로 들어와 당군 축출 전쟁이었던 신라의 매소성전투 참전 대가로
안승이 익산 보덕국을 세워 재기를 노렸으나, 신라의 이간책으로 대문의 난이 발생하여 고구려가 완전 멸망하였다.
안승은 금성으로 들어가 소판,이찬 벼슬에 만족해야만 하였다.
보장왕은 전쟁책임이 없어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에서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해졌다가, 영주인 영하성회족자치구로
고구려인 수십만이 잡혀가게 되는데, 이때 속말갈,불열,호실,안거골,백산,백똘등 6부족이 함께 끌려간다.
보장왕의 후원으로 고구려 재건 부흥운동을 벌이려다 발각되어, 보장왕은 산서성 양주(양천시 공주)로
유배되어 실패하고 만다.
이때 영주에서 탈출한 고구려유민과 말갈 6부족 유민은 동만주로 달아나
대걸중상의 후고구려와 합류하고 후일 길림성 집안시 대조영의 동모산 발해인이 되었다.
안승은 익산 금마의 보덕국 왕성이 불타자,
신라로 투항하여 금성으로 들어가버리고, 남은 사람들은 익산 금마, 왕궁, 익산 영등동일대와
완주 삼례, 군산 영흥동일대로 달아나 고구려의 흔적은 사라진다.
익산 왕궁터에 가면 궁터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백제 무왕이후 세워지는 왕궁터와 유사하기 때문에,
혼란을 빚고 있다.
그당시 만주북방은 거의 세력이 미미하여 비어있는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구려 말기 최대인구 380만명)
고구려와 연나라가 사실상 각축전을 벌이다가 탁발규의 위나라가 성장하여 북조를 거머쥐었으나,
산서성 대동시 평성에서 북위로 성장한 후에는 황하이남으로 진출하여 문명화되어버려 세력이 약해졌다.
탁발십익건의 대나라는 내몽고자치구 포두시 파언탑랍(바옌타라)에서 일어나 산서성 대동시 용성(평성)으로 들어갔다가,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하고 멸망한 대나라에서 탁발규가 북위를 건국한 후
관중으로 남하하여 서안과 낙양(수도)을 점령하면서 고구려,연나라와 각축전을 벌인다.
전연이 전진의 부견에게 망하고 후연은 전진의 속국으로 들어갔다가 전진의 부견이
중원 통일하려다가 동진 장수 사현에게 패하자 분열하여
모용수가 전진의 부견을 배신하고 후연을 건국한다.
후연이 먼저 멸망하자 북조는 북위와 고구려 2강 구조로 재편되었다.
북위인은 동위(고환)와 서위(우문태)로 나눠지다가 북제(고양), 북주(우문각,우문호)로 성장한 다음
양견이 북주에서 외척으로 있다가 우문각,우문호가 서안을 비운 사이에 황족 친일족 등
북위 출신 황족 수백명을 모조리 참살하고 중원을 흡수한다.
북주를 건식하고 나서 북주왕으로 있다가 세운 나라가 수나라다.
그런 후에 고구려를 치는 것이다.
대륙의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도 수나라에 흡수되어버린다.
마지막 동이족국가인 정주 한성백제의 후신 정나라와 양나라후신 진패선의 진나라도
수나라에 멸망하여 반도로 들어왔다.
"진"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곳이 진패선의 진나라 후예들이 세운 지명이다.
대표적인 곳이 진천이다.
섞인 곳은 진양이다.
진나라의 전신이 양나라인데 양주,남양주,양평,안양,안산,안성,수원(남양)...등이
이들의 후예들이 세운 지명이다.
경기인의 선조를 말한다.
원래 정주시 한성백제가 동위(東魏)를 세운 고환(高桓)의 아들 고양에게 점령되자,
양(梁)나라로 대거 피난을 가서 정착한다.
고양은 양나라 수도 하남성 개봉시(카이펑)를 점령하고 북제(北濟)를 건국한다.
그후 서위(西魏)를 세운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우문호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양나라/진(陳)나라를 위협한다.
양나라인이 반도 경기도로 이주하고,양나라를 이어받은 진패선의 진나라는
수나라의 양견에게 멸망하자 반도로 이주해 오게 되는 것이었다.
수양견은 마지막 동이족국가인 진나라와 하남성 정주시 한성백제의 후신인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가히 중원에서 천하통일을 이루었노라고 자랑하였다."
그리고 북조의 마지막 강자였던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는 것이다.
몽고제국 팽창기때 뭉케황제가 수도로 삼는 곳도 하남성 개봉시[카이펑]이다.
뭉케는 이곳을 수도로 삼아 대도라 칭하였다.
이곳이 원래 옛양(梁)나라였기때문이었다.
양나라의 수도는 하북성 안양시로 옮겨가게 된다.
(梁)이 대들보량이란 뜻이며 대량(大梁)이 들어서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몽고의 수도 대도는 대량에서 나온것이고 양(梁)나라 자리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원나라 후신 북원이 멸망할때도 경기 연천 출신의 기황후이후 몰락한다.]^^
고구려는 해마다 양나라, 진나라에게 조공물을 바치며 살았다.
고구려의 조공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너무 흔히 자주 나온다.
굴욕적이라고 할만큼 양나라, 북제, 북주, 진나라에 조공물을 바쳤다.
알고보니 양나라,진나라는 동이족 순수혈 국가였고,
북제,북주는 부여족이 혼혈화된 반동이족 국가였던것이다.
북제를 세운 고환이 시조이며 태조로써 고태이다. 중국은 구태로 불렀다.
북주를 세운 우문태가 시조이며 태조로써 우태였다.
고구려 멸망후 황하이남 하남성 남부지역으로 고구려 왕족과 귀족,전사가족 5만여명의 엘리트층이 분리되어
끌려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훗날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치청천국,아들인 이납의 후제나라,
이사고>이사도로 이어지는 치청천국>후제는 강동9주를 차지하고 당현종을 양귀비와함께 파천케 만들고,
발해만에서 서안, 낙양으로 들어가는 황하강을 통제하고 발해,신라무역을 독점하였으며,
양자강의 대운하를 손에 넣고 큰 세력을 떨쳤다.
9주는 강서,강중,강동,산동지역을 평정함으로써 중원의 심장부를 차지한 것이었다.
북경에서 일어난 고구려 유민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맹위를 떨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군 2만명을 차출하여 안록산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투입하자,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부대에 들어가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그런데 이정기는 안록산을 완전 토벌하지 않는다.
같은 고구려 유민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토벌하는 척하면서 고구려 유민군 2만을 이끌고 산동성 등주로 들어가 점령한다.
이때 당나라에 불만이 많았던 당나라군 2만명이 이정기를 따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발해 2대 무왕인 대무예는 산동반도로 출격하여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하고,
돌아간지 얼마 안되어 산동반도가 비게 되자,
이정기는 안록산을 완전 토벌하지않고 중원 하남성에서 비어있는 산동반도로 동진하여
고구려 유민군2만, 당군2만을 이끌고 산동성 등주로 입성한다.
대중국무역을 하기위해 발해인들이 진출하여 상업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납이 이들을 기반으로 후제나라를 세우고 9주를 평정하며 당현종을 파천케 만들었던 것이다.
훗날 강소성의 회수전투에서 패함으로서 세력이 쇠퇴되어 이사도에 이르러
대운하를 봉쇄하였다가 후제는 4대에 이르러 멸망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가.......
이정기(치청천국)가 하남성에서 동진하여 산동을 접수한후 세력을 키워
이납(후제나라)이 다시 하남, 섬서성의 낙양, 서안으로 쳐들어가 당현종이
양귀비와함께 파천하게 만들었듯이,
광개토태왕도 만주에서 출격하는 것이 아니라, 실크로드,초원의길 교통로 장악전쟁에 뛰어들기 위해
선대가 이미 감숙성 일대로 들어가 장악한 것을 감숙성 평양시,청해성 서령시에서 세력을 키워
서진, 동진, 양나라,백잔,이잔,가야, 왜,백제,신라를 따라 서에서 동쪽으로 동진해오면서 평정하는 것이다.
실크로드 ,초원의 길 문물을 지속적으로 팔아먹을 국가와 민족을 따라 서진,동진,양나라망인,백잔,이잔,가야,왜,
백제,신라를 따라 반도로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광개토비문은 북동쪽을 향해 세웠고, 광개토무덤은 비문 서남쪽에 세워져 있으며,
무덤 북동쪽의 비문을 향해 세워져 있다.
이말은 정복지를 향해 세웠다는 확실한 반증이다.
집안시 통구현에는 1만2천여기의 무덤군이 존재한다.
그곳은 백잔,이잔,가야,왜세력이 달아나 격돌을 벌인 1차대격전지였고, 비문은 그곳에서 세워진다.
포로를 동원하여 세운 것이다.
고구려 무덤군은 동예족, 백잔, 이잔, 가야, 왜세력의 포로들을 동원하여 세운다.
연나라 포로들도 동원한다.
단지 고구려양식으로 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삼국고분 양식이 골고루 등장하는 것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은
연개소문은 영웅이 아니라 감숙성,섬서성,내몽골중서부,산서성일대를 상실케 한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고구려 영류태왕 고건무와 신료 200여명,그들의 귀족관련 가족 2천여명을 학살하면서,
중원 북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수양견,수양광,당태종 이세민,당고종 이치에게 침공명분을 주어,
중원 북방을 상실케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광개토때 확보해놓은 북발해만 일대는 장악하지 못하였다.
안시성(요녕성 개주시)을 포위하고 굴복시키려다가 실패하고 청해, 섬서, 감숙성으로 돌아간다.
그후 연개소문이 죽자 빠르게 중원 북방을 상실하게 된다.
고구려는 살아 남아있는 북발해만으로 옮겨 대련반도 최남단 비사성에서부터 남북으로 천리장성을 쌓고 대항한다.
그래서 오녀산성 등 북으로 올라갈수록 급히 임시적으로 돌로 쌓은 산성들이 발견되는 이유이다.
그동안 중국에 강경대응한 연개소문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고 있었는데,
진실을 제대로 알고나니 엄청 씁쓸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p/s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천리장성을 쌓은 민족이 만리장성도 쌓은 민족이었던 것이다.^^
만리장성 산서동부 태행산맥에서 산서성중부까지는 진한(辰韓)의 후신국인 진국(晉國 bc323)에서 쌓고,
진성 2군을 차지한 백제의 동성왕때부터 산서중부에서 섬서성 동부지역까지 쌓는다.
그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섬서성 유림시 유림관부터 감숙성 란주시 가욕관, 돈황시 안서현 옥문관(위먼관/위만관)까지
쌓게 되는 것이다.
중국은 명나라때 하북서부~산서동부의 태항산맥(태행산맥/구 연산산맥)에서 요녕성서부 산해관까지
명장성을 쌓은 이력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절강성 소주 출신인 진시황의 진(秦)나라는 강소성 남경을 점령하고 천도한후,
실크로드 오르도스 종착지인 하서시랑(산서성 진성시 진평성, 고평시 고평성)을 장악하고 흉노침입을 막기 위해
기원전 213년 산서성 서부에서 섬서성 중부의 유림시까지 2년간 쌓다가 210년에 멸망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산서성, 섬서성에 존재하는 병마용갱은 진시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진한의 후신국인 진국의 유물이다.
병마용갱의 기원은 사마천의 사기,고구려 을파소의 참전계경에도 나오듯이,
여와가 7일간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창조이야기를 듣고 생명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한 흔적이며
자신의 분신을 넣어 사후영생을 빌어 보려한 진한인들의 노력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사마천의 출생지가 섬서성 한성시(韓城市)이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韓城(한성)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곳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