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아들의 사랑” 神の子の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 번 통독을 해보려고 할 때, 구약을 보면 창세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레위기나 신명기 같은 경우를 보면 좀
어렵잖아요. 참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럼 신약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어 봅니다만, 그 때 처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비가 바로 이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계보입니다.
길이는 짧아요. 그래봤자 한 장 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처음 읽는 분들한테는 이게 참 난감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에 보면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래요. 뭐 여기까지는 좋은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죠. 참 어려운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계보의 제목이 무엇이죠?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ダビデの子、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계보인 것입니다. 구약을 전혀 모르고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읽어보면, 이는 무슨 암호나 주문처럼 들리는 지루한 구절입니다만, 이러한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이는 대단히 큰
은혜가 됩니다.
정말 구약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쫙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신약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계보가
마침내는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져 있다는 놀라운 말씀이 바로 이 마태복음 1장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기록해놓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계보는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서 준비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다윗에서 요셉을 거쳐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예비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마태복음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아브라함과 다윗 이후에 계신 분이신가요?
누가복음 20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0장 41절~44절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が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人々は、キリストを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ですか。
ダビデ自身が詩篇の中で、こう言っています。『主は、私の主に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ですから、ダビデがキリストを主と呼んでいるのです。それなら、どうしてキリストがダビデの子なのでしょう。」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이 쓴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110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主は 私の主に言われた。 「あなたは 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 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이 구절은 예수님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때까지는 <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여기에 등장하는 <주>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처럼 이미 주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그 당시 이미 예수님은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59절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に向かって言った。「あなたはまだ五十歳になっていないのに、アブラハムを見たの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る前から、『わたしはある』なのです。」
すると彼らは、イエスに投げつけようと石を取った。しかし、イエスは身を隠して、宮から出て行かれた。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계보는 조금 이상해지지요. 즉, 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계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준비단계를 기록한 것이지,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안 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이 부분은 제가 몇 번이나 말씀
드려왔던 부분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 처음 등장하십니까.
요즘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떤 분의 설교를, 제가 얼마 전에 들어보았습니다만, 이 분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
3절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등장하는 빛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빛이 아니라, 이 빛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아멘! 그럽니다.
그래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을 예수님이라고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빛을 만드시게 되는데, 이 빛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뜻이 되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예수님 또한 이 온 세상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 처음 등장하십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이 등장하신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좀 여담입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순서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자, 창세기 1장 1절~3절 중에서 1절과 2절의 순서를 바꾸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地は茫漠として何もなく、闇が大水の面の上にあり、神の霊がその水の面を動いていた。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맨 처음에 혼돈한 상황,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고 빛을 만드십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굳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라고 하는 구절을 가장 처음에 넣으셨습니다.
이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 가장 처음에 예수님을 넣으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치밀한
의도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22장 21절에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즉, 이렇게 됨으로 인해서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도 예수님으로 끝나는 완전한 예수님의 책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이는 분명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만 끝났다고 하면 이는 예수님에 의한 구속사역의 50% 달성?
아닙니다. 0%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죄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죠. 전철을 탈 때, 돈을 내고 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출입구에 그 표를 찍었어요.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나요? 아닙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렇지요. 문이 열려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내고
표를 사고, 그 표를 개찰구에 찍 하고 댔다 하더라도, 문이 안 열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예수님께서 아무리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없다면 이는 구원으로
가는 출입문이 안 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이 있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다고 인정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정해주십니까. 그렇지요. 죄값이 충분히 치러졌는지 아닌지는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 내
아들이 고난을 받음으로 해서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의 죄가 해결되었다.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라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오히려 성탄절보다도 부활절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예수님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神は主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が、その御力によって私たちも、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십자가를 통한 제사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실 전적인 권한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받으시고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부활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 전에도 계셨고, 아브라함 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온 천하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잠시 오늘도 문제를 내볼까 합니다. 오늘은 연속해서 두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평소부터 성경을 얼마나 잘 읽고
계신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먼저 첫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얼마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올라가셨을까요.
1번 부활하시고 3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2번 부활하시고 1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3번 부활하시고 10일 이상 계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어떤 분은 부활하신 후에 곧바로 서둘러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무려 40일 동안이나 이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
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이 문제도 선택지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이 보기에는 물론 놀랐겠지요. 하지만 그
중에 용기 있는 제자 하나가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예수님! 하고 덥석 끌어 안으려 했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번 뜨겁게 끌어 안을 수 있었다.
2번 투명인간처럼 끌어 안을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께서 오해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꽤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아있던 구절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요,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イエスは彼女に「マリヤよ」と言われた。マリヤはふり返って、イエスにむかってヘブル語で「ラボニ」と言った。それは、先生という意味である。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さわってはいけない。わたしは、まだ父のみ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だから。ただ、わたしの兄弟たちの所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またあなたがたの父であって、わたしの神またあなたがたの神であられるかたのみもとへ上って行く』と、彼らに伝えなさい」。
자,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마리아가 랍오니……라고 하는데 이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랍비>보다도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이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셨다는 것,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 왠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만질 수가 없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읽어드린 성경은 개역한글, 그러니까 우리가 예전에 사용했던 성경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에는 어떻게 되어있냐 하면, 자, 개역개정판 요한복음 20장 17절만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すがりついていてはいけません。わたしはまだ父の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です。わたしの兄弟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であり、あなたがたの父である方、わたしの神であり、あなたがたの神である方のもとに上る』と伝えなさ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의 반가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만류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는 예수님을 끌어 안을 수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자, 단순히 생각해서 우리가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론 뭐, 사전에 동의가 있어야 하겠지요. 특히 이성간에는 사전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 만이 아니라
제3자의 동의까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끌어안았다가는 큰 일 나지요. 더구나 코로나가 난리를 치고 있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 가지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그런 복잡한 것이 아니라……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끌어 안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하냐 하면 뭐, 육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육체가 뭐예요. 예, 살과 뼈입니다.
자,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있었다면, 뜨겁게 끌어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없었다면
끌어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택지를 바꾸어보겠습니다. 1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있었다. 2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의심하시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38절~39절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なぜ取り乱しているのですか。どうして心に疑いを抱くのですか。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
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제 장차 오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거에 육신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은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 사람은 엘리야였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エノクは神とともに歩んだ。神が彼を取られたので、彼はいなくなった。
열왕기하 2장 11절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こうして、彼らがなお進みながら話していると、なんと、火の戦車と火の馬が現れ、この二人の間を分け隔て、エリヤは竜巻に乗って天へ上って行った。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위대한 선지자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데려가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우리가
에녹과 엘리야를 믿는다고 해봤자 우리의 죄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용서 받고 해결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누가 증언해주고 계십니까.
요한일서5장 5절~6절
“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世に勝つ者とはだれでしょう。イエスを神の御子と信じる者ではありませんか。
この方は、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た方、イエス・キリストです。水によるだけではなく、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ました。御霊はこのことを証しする方です。御霊
は真理だ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을 해주셨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예수님을 언제 직접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그것이 아니라면 장차 훗날에
천국에 가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언제라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이 사랑을 알게 되셨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바로 그 날,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를 가지신 예수님을, 우리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항상 함께 해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사랑의 예수님을,
뜨겁게 끌어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고통과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아무리 그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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