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배의 자리에 오시고 지금까지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이제 말씀을 설교 말씀을 듣는 시간 이루신 여러분은 마음에 우리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사한 마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실 수 있는 그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후 셋째 주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령 강림이 우리가 아는 성탄절이나 또 부활절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오신 성령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고 또 그가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그 일을 계속 이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말씀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입니다. 한번 같이 말해보겠습니다. 시작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이 제목에 우리가 궁금한 것이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연약함이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도우신다고 하면 어떻게 도우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대답을 찾아보기 원하는 질문인데, 이것에 대한 성경이 주는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상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의 삶과 신앙에 있어 교회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기로 시작하는 성경이 가리키는 바이고, 또 복음을 담고 있는 로마서가 우리에게 알려주신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려주는 바가 그렇습니다.
어떤 세상인가요? 간단하게 말할 수 없지만 질병과 재난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또한 치유와 회복이 있고 전쟁이 있고 싸움이 있지만 또한 평화와 화목이 있는 곳, 고통과 슬픔이 있지만 동시에 또한 기쁨과 환희가 있는 곳, 선과 악이 함께하는 곳, 생명과 죽음이 함께하는 곳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이에요.
이 그림을 우리가 몇 번 보았는데 우리가 세상을 알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신앙의 삶에 주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봤는데 이런 그림을 보면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무엇인지 또 생각을 하게 하는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속한 가정 그리고 나 자신의 인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을 통해서 볼 때 세상과 달리 내 마음과 우리 가정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까는 세상이 복잡 사상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이 세상과 달리 내 마음과 내 가정에 우리 가정에는 일치와 사랑과 질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안에 몸과 마음의 일치가 있게 하고 평화, 질서가 있는 삶을 원하지 그것이 조금 더 안하면 가정이 그렇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세상과 달리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어렵지만 당연히 일치와 사랑과 질서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실패한 인생도 다시 일어나고 무너진 가정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큰 사랑이 충만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세상처럼 세상에 있는 복잡한 문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세상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문제를 이기게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고,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가정이 우리가 속한 나라가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피조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조물 보통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죠. 피조물 그런데 특별히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자연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그냥 단순히 자연이라고 하지 않고 창조물이라고 하죠.
피조물이라고 하고 영어로 하면 크리에이션이에요. 크리에이션은 영어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창조하는 것과 또 이렇게 창조의 결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뜻으로 보면 우리 사람도 인간도 다 포함하여 창조 세계 전체, 지구뿐만 아니라 지구가 속한 태양계 이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본문에서는 오늘 로마서 8장의 본문에서는 인간을 뺀 사람을 뺀 나머지 피조세계를 가리켜요. 그래서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숲과 사막, 그리고 새와 동물, 나무와 꽃, 풀 이런 자연 세상을 가리킵니다.
피조물 이 세상이 빛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두워집니다. 또 그 안에서 그 빛으로 사는 생명들은 생명들은 또 사라집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인간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빛은 그 안에 생명을 갖추신 하나님이에요. 오늘 우리가 찬양하듯이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생명의 빛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자연이 연결이 되어 있어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사람이 갖는 독특한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져서 사람의 세상에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 모두가 살고 있는 그 세상 자연 세상에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사람과 자연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피조물이 탄식한다. 피조물이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 말씀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탄식 고통 이것은 피해야 하는 것을 당해서 받는 고통과 탄식이 아니라 아기를 출산하는 산모의 경우처럼 무엇인가를 기 위해서 하는 노력에 수반되는 신음과 고통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지금 힘을 써서 내는 신음과 갖는 고통이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얻으려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 나라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 알듯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특별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연을 더 좋은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또한 그곳을 정말로 더 나쁘게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으로 인해서 세상이 더 좋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더 나빠졌고 더 나빠지는 부분도 많다. 누가요? 누구로 인해서 동물들이 아니고 새들이 아니고 고기들이 아니고 인간으로 인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의학, 과학 기술의 발전, 인간 수명과 인간 수의 증가에서 찾습니다. 이거 틀린 말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보면 1800년대까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수가 10억 명 원빌리언이 안 됐다고 하네요. 그 후에 1800년부터 지금까지 이르면서 200년이 지나면서 6배가 늘어났고 현재 전 세계의 사람 수는 70억 명이라고 해요. 세븐 빌리언이라고 하죠. 이 지구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어려워 보이는 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학자들은 인구 억제 정책을 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세상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할 때 인구 증가보다 과학의 발전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 말하지 않고 성경에서만 말하면 사람의 마음과 태도, 특별히 자연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지구의 자연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도울 수 있는 한계점이 있는 것이죠. 리밋이 있는 거죠.
그런데 지금 전문가들은 그런 면에서 현실이 암울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지금의 상황에 이르기 전에 훨씬 더 전에 기록된 말씀이에요. 로마서 이 말씀은 2천년 전 그러니까 지금보다 인구가 7배는 훨씬 더 적은 그것보다도 더 적은 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인간으로 인해서 지구가 위기에 처하지 않은 상황이죠.
그런데 그러한 지금의 위기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사람이 듣고 생각해야 할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고대한다. 그때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의인화된 표현이지만 담고 있는 뜻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는데 짧게 말하면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영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을 함께 겪으며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라 오늘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사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행하는 사람, 그런 자들을 지배하는 힘이 있지 세력이 있죠. 그 세력 아래 있는 상태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했다 또는 썩어짐의 종노릇함에 있다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인데 그다음에 있을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른 이에게로 다른 사람에게로 오고 다른 세력에게로 다른 주인에게로 속하는 것이 바로 이 피조물 이 세상이 고대하고 기대하고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받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만이 아닙니다. 성령에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는 자들, 곧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탄식하며 양자 됨 곧 몸의 속량을 기대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몸의 성량, 몸의 구속이라는 말인데, 예수를 우리가 믿고 영접하여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죠. 그러면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상태에서 영적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이전에는 몸은 살아있었지만 영은 죽었던 때라면 이제는 몸은 여전히 몸은 몸은 살아있지만 영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영까지 살아난 상태예요.
그런데 이 몸은 아직 온전함에 이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도 아직 온전하지 않은 상태가 이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면 곤고한 사람이 처한 상태니까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학은 행하는 상태, 입으로 생각으로 몸으로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오호라 난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본문이 말하는 우리의 연약함이 있어요. 이 부분을 잘 보세요. 이 연약함은 다른 사람의 그 사람들의 그들의 연약함이 아니고 우리의 나의 연약함입니다. 믿음이 없는 죄인의 연약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 저와 여러분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갖는 연약함입니다.
그 안에 아직 죄의 세력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것을 행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게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다 연약합니다. 우리가 다 연약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의 형제 자매를 바라볼 때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영적인 시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연약할 때 그때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성령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께서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신 주시기로 약속한 보혜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보내신 진리의 영입니다. 그가 오셔서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고 또 세상을 책망하시고 그의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만, 오늘 말씀처럼 성령은 또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한 방식이 된다는 겁니다.
생각해 볼까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른다. 언제가 그런가요? 제가 적어온 내용을 보자면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싫어하는 악을 행할 때 일이 생각대로 결심한 대로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었는데,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때,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이 변하지 않을 때, 아무리 기도해도 관계가 좋아지지 않을 때, 사방으로 우겨쌈을 받아서 피할 곳이 없을 때, 주변에서 세상에서 비루함이 높아지고 악인들이 횡횡할 때 눈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러한 때에 성령께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탄식의 소리를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 옆에 앉은 그 사람을 위해서, 세상 그림에 같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교회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고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 각 사람의 깊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