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연거푸 넷을 낳은 뒤에 드디어 아들 둘을 낳은 경험이다. 외동아들인 내가 아내에게 딸만 넷을 낳게 하자 고모님이 브레이크 걸었다. 친정 조카가 아들이 없다고 무당을 불러 굿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손을 번창시켜야 한다고 조르는 상황이다. 내가 그런 미신은 믿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뿌리쳤다. 곧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 염려 놓으시라고 달랬다. 고모 마음이 고맙기는 해도 내 고집을 끝내 꺾지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막내딸 낳은 지 2년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또 2년을 지나서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다시 2년 지나가니 또 아기가 생겼다고 걱정하는 아내가 나는 좋았다. 시청에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니 아내가 환자처럼 드러누운 자세로 말했다. 오늘 당신 몰래 병원에 가서 아기를 지웠다고 죄인처럼 실토했다. 속으로는 성난 주먹 불끈 쥐고 실망했다. 그러나 7명의 자식 교육이 걱정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아내 말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슬그머니 하늘만 쳐다본다. 초등학교밖에 못 한 나와 같은 자식은 만들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음은 그런 불행 없도록 주의를 주고 더 낳아도 대학 공부시킬 자신감 이야기로 안심케 했다.
새마을사업과 통일벼재배 지도로 업무가 바빠 눈코 닦을 겨를조차 없는 나날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출근해야 했고, 서류 정리는 야간 시간을 이용하던 시절이다. 가정일은 모두 아내가 책임지고 부업인 농사일도 아내가 도맡아 했다. 다행히 노동력 구하기 쉬워서 농사는 유지되었다. 월급 받고 농사 수익으로 자식 교육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하루는 퇴근하여 늦게 도착하니 아내가 눈물을 짜고 있었다. 마치 막내딸 낳았을 때처럼 우는 광경이다. 이제 생각하면 딸이 보배인 줄도 모르고 또 그때 생각인가 했다.
또 두 번째 병원 가서 아기를 지웠다고 용서하라고 한다. 기가 차고 맥이 탁 풀어지는 심정이었으나 도리 없었다. 그래 내가 욕심을 너무 부린 듯하니 나를 도로 용서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딸만 넷 낳는 연속이다가 늦게 아들만 연속이리니 궁금했다. 간호사가 친척이라 지운 아이도 아들이라는 후문이다. 딸만 낳았을 때 이웃 소문으로 아들 못 만드는 남자로 난처하게 퍼졌다. 부끄럽기도 했고 남자구실 못하는 사람처럼 인식될까 무서웠다. 결과론은 아들 둘이 태어나서 나의 면모를 지켜주었던 행운이다.
지나온 일을 분석해 보니 딸만 낳은 원인이 나의 정자 염색체 관련이었다. 남자 염색체는 X가 아닌 Y로 통신강의록 생물 시간에 배웠다. 배란 기회의 랑데부에서 Y염색체는 알칼리성 부족 환경에는 XX로 된다는 확률이다. 남자가 늘 식물성 음식만 먹으면 산성 체질 배란 결합 시에 Y염색체가 열성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XY가 아닌 XX염색체 우수로 딸만 생긴 듯하다. 나는 청년 시기 고기보다 식물성 음식을 더 즐기고 좋아했다. 어릴 때 고기 먹으면 두드러기 때문에 고통을 심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공무원으로 출근하면 점심은 늘 짜장면이다. 사무실 앞 짜장면 식당이 고기 점 겸업이라 돼지고기도 아끼지 않고 듬뿍 넣는 가계다. 매일 먹은 돼지고기 맛이 구미에 맞았다. 처음에는 두드러기 현상이 가볍게 나타나다 멈추고 괜찮아졌다. 두드러기도 내성 증가에는 힘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매일 먹는 음식이 고기로 바뀌기 시작한 일로 알칼리성 체질변화가 온 모양이다. 딸만 내리 넷을 낳다 식단을 바꾸니 아들만 넷 생기게 한 듯하다. 요즘은 생각하니 딸이 보배로 경험하는 세월이다. 딸이 소원이면 반대의 식단을 짜면 될 일이다. (글 : 박용 20251015 인류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