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들을 상대로 사회생활의 자세를 성찰하는 강연을 할 때, 가끔 우리의 종교 생활을 재고(再考)하고 반성하자는 취지로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종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합하면, 남북의 인구를 합한 수보다 많다고 합니다. 몇 년에 한 차례씩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면서 인구조사를 하는데, 이때도 거의 두 사람 가운데 한 명꼴로 자신이 종교 생활을 한다고 답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부처님이 중생의 구제를 가르친다는 것은 믿는다고 밝히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든 자비의 불심이든 그것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많으면,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그런대로 살 만한 세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자체로 천국이나 극락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흔적이나 표지만큼은 여기저기서 흔하게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토록 격렬한 싸움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우리 사회를 점잖게는 ‘경쟁사회’라고 합니다.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사회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게 됩니다. 하나는 그 경쟁이 ‘사생(死生)’이 걸린 문제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된 규칙’ 따위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의 뜻으로 사용할 때는 ‘공생과 상생의 공영’은 꿈도 꾸지 말라는 협박(?)이 되고, 뒤의 뜻으로 사용할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 앞서야 한다는 교훈(?)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무한’ 경쟁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이라면, 우리의 종교 생활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불자(佛者)가 부처님을 닮으려 하지 않았거나, 또는 닮으려 했으나 그 기세가 미미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이라면 닮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인 스스로 그리스도와 부처님을 닮는 삶이 그렇게 무력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종교인으로서 예수님과 부처님을 닮으려 했으나,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거나 잘못 닮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말은 종교 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 한다는 뜻이고, 잘못 닮고 있다는 말은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선, 종교 생활과 사회생활은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서로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나’라는 한 인격체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생활하는 ‘나’와 사회생활 하는 ‘나’가 서로 다른 인격체일 수 없습니다. 서양말 ‘religion’의 어원은 하늘과 땅을 다시 잇는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우리말 종교의 종(宗)도 ‘일의 근원, 근본, 우두머리, 가장 뛰어난 것’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 보면, 서양말이든 우리말이든 종교 생활은 사회생활의 바탕이 되어 그것을 완성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독립된 별개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종교인이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몰라도, 종교인이 종교 생활과 사회생활이 별개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심지어 그렇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기부정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 곧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부처님께서 ‘중생의 구제’를 가르치셨다는 상식적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세 가지 정도의 소홀함이 떠오릅니다.
첫째, ‘인류’ 또는 ‘중생’에 관한 종교인들의 소홀함입니다. ‘나’의 구원과 구제에 관한 지나친 관심과 몰두는 구원과 구제의 ‘공동체성’을 소홀히 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개개의 종교인으로서 이웃을 향한 책임이나 사랑, 또는 자비의 마음은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공동체 사회의 질서나 제도, 골격의 건전함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불의하고 건전치 못한 제도와 질서를 이용하면서까지 ‘나’의 기쁨과 행복을 찾으며, 누리게 된 그 기쁨과 행복을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심 덕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둘째, 실재와 현실의 ‘역사성’에 관한 종교인들의 소홀함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이니 영이니 정신이니 하면서 지나치게 영성을 강조한 나머지, 불완전함과 결핍이 확장되고 있는 구체적 역사의 무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합니다. 마음의 공허와 갈망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실제 굶주림과 목마름이 가벼워질 수는 없습니다.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와 영적이며 정신적인 문제 사이의 관계는 마치 물을 담을 그릇과 그릇을 채울 물 사이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셋째는 현세에 관한 종교인들의 소홀함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종교는 현세의 삶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바탕이 되며 완성하는 길을 안내합니다. 아무리 하느님 나라든 극락이든 내세의 삶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적지라 하더라도, 그 경로들은 현세의 삶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을 향해 매일 발걸음을 내딛는 지상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관상(觀想)’의 정신을 가다듬으려 합니다.
박동호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당동성당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