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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陰山)산맥은 내몽골 고원에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서쪽 랑산(狼山)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산해관(山海關)에서 발해(渤海)와 접한다. 동서의 길이는 약 1620 km에 달한다.
북경(北京) 중심부에서 60 km 북쪽에 거용관(居庸關)이 있다. 거용관(居庸關) 주변이 거용산(居庸山)인데 일명 군도산(軍都山)이다. 현대 지리학은 랑산(狼山)에서 거용산(居庸山)까지를 음산산맥(陰山山脈)이라 하고 거용산(居庸山)에서 산해관까지를 연산산맥(燕山山脈)이라 한다. 연산산맥은 동서 길이가 420 km이다.
연산산맥(燕山山脈)을 분리한 현대의 음산산맥(陰山山脈)은 거용관(居庸關)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바옌나오얼(巴彦淖尔, 파언뇨이) 시(市)에 위치한 랑산(狼山)까지 동서 1,200 km, 남북 50 ~ 100 km에 달한다. 높이 2,500 m ∼ 3,000 m이나 약 1,000 m 높이의 고원에 있기 때문에 비고(比高)는 1,500 ∼ 2,000 m이다. 음산산맥의 남쪽 사면은 산세가 가파르고 북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다.
사기(史記)에 기록된 음산(陰山)은 랑산(狼山)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산맥의 전체 구간을 지칭한다.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시황 26년(기원전 221년)에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秦)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임조(臨洮)에 이르고 (西至臨洮) 북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여 요새로 삼고 (北據河爲塞) 음산(陰山)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竝陰山至遼東)"라고 했다. 그 후 하남땅(河南地)에서 호(胡)를 몰아내고 이어서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내고(西北斥逐匈奴) 유중(楡中)에서 시작하여 황하(黃河)를 따라 동쪽으로 황하와 음산(陰山) 사이에 (自榆中竝河以東屬之陰山) 34개 성(城)을 쌓아 요새를 만들고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음산(陰山)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筑長城 起臨洮 竝陰山至遼東)
이 말은 음산(陰山) 산맥의 동쪽 끝이 요동(遼東)이며 요동(遼東)에서 장성이 끝난다는 뜻이다. 음산산맥은 난하(灤河)의 지류인 청룡하(靑龍河)의 동쪽 지역에서 끝난다. 이곳이 진시황 시대의 요동(遼東)으로 진시황이 건설한 장성의 동쪽 끝이며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 사기 진시황본기(史記 秦始皇本紀)
始皇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
시황 32년(기원전 215년), 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갔다. 연인(燕人) 노생(盧生)에게 선문(羨門)과 고서(高誓)⑪를 찾으라 시키고 갈석문(碣石門)에 글을 새겼다.
갈석산(碣石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다. 만리장성의 경로에 대한 사기(史記)의 기록이 이처럼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는 아래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대(明代)에 건설되었고 진시황이 건설한 만리장성은 그 북쪽에서 평양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주류학계가 사기(史記)의 기록을 무시하고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와 진서지리지(晉書地里志)에 기록된 한 줄의 문구(文句)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사기색은(史記索隱)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일어선 곳이다.' 라고 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사기(史記)의 주석서이며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713년 ~ 741년) 년간에 사마정(司馬貞)이 저술했다. 태강(太康)은 서진(西晉, 265 ~ 316) 무제(武帝)가 280년부터 289년까지 사용한 연호다.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280년대 서진(西晉)의 지방 행정조직을 기록한 책이다. 300년 무렵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저자 미상이고 원본이 망실되어 단편적인 대목이 여기저기 인용되어 전해 온다.
태강지리지를 검증해 보자. 기원전 108년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 땅에 낙랑군 등 4군을 설치했다. 주류학계는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과 후한(後漢, 25년 ~ 220년) 시대에 유주(幽州)의 영역이 아래와 같다고 주장한다. 갈석산(碣石山)은 옛날에도 지금의 그 자리에 있었고 한대(漢代)에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서진(西晉) 무제(武帝)가 276년에 유주(幽州)에서 산해관 바깥 지역을 분리하여 평주(平州)를 신설했다. 창려군(昌黎郡), 요동국(遼東國), 현도군(玄菟郡), 대방군(帯方郡), 낙랑군(樂浪郡)이 평주에 속했다. 한서지리지는 낙랑군에 조선현 등 25개 현을 열거했는데 진서지리지는 낙랑군에 6개 현을 열거하고 낙랑군에서 분리한 대방군에 7개현을 열거했다. 사라진 12개 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주류학계는 낙랑군이 313년까지, 대방군은 314년까지 그 자리에 존속했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는 서진(西晉)의 유주(幽州)와 평주(平州)가 아래 지도와 같다고 주장한다. 전한(前漢) 시대의 25개 현(縣)이 서진(西晉)에서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합쳐 13개 현(縣)으로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西晉)의 낙랑군과 대방군의 영역은 오히려 한대(漢代)에 비하여 확장되어 있다.
갈석산(碣石山)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진황도(秦皇島) 시(市)에 속하는데 진시황 때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과 서진(西晉) 시대 내내 갈석산은 유주(幽州) 요서군에 속했고 서진(西晉)의 요서군은 산해관 안쪽이었다. 서진(西晉) 태강(太康 , 280년 ~ 289년) 년간에 갈석산이 낙랑군에 있다고 기록한 태강지리지는 명백한 오류인 것이다. 태강지리지의 기록이 맞다면 요서군이 낙랑군으로 바뀌어야 한다.
당나라(唐)에서 방현령(房玄齡), 저수량(褚遂良), 이연수(李延壽) 등 이십여 명의 학자가 공동 집필하여 648년에 진서(晉書)를 완성했다. 진서(晉書)는 서진(西晉, 265년 ~ 316년)과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의 역사서이다. 진서지리지(晉書 地里志)는 낙랑군 수성현 대목에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를 인용하면서 오류임이 분명한 갈석산을 삭제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平州 樂浪郡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평주(平州)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은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선 곳이다.
◇ 진서지리지(晉書地里志)
平州 , 按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菟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菟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평주(平州) , 우공(禹貢)에서는 기주(冀州)의 강역인데, 주나라(周)에서 유주(幽州)로 했으며 한나라(漢)에서는 우북평군(右北平郡)이 속했다. 후한(後漢) 말에 공손도(公孫度)가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고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차지하니 동이(東夷)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魏)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자리잡았고 요동군(遼東郡), 창려군(昌黎郡), 현도군(玄菟郡), 대방군(帯方郡), 낙랑군(樂浪郡) 등 5개 군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를 만들었고 후에 유주(幽州)에 합하였다.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를 두어 양평(襄平)에 자리잡았다. 함녕(咸寧) 2년(276년) 10월에 창려군(昌黎郡), 요동국(遼東國), 현도군(玄菟郡), 대방군(帯方郡), 낙랑군(樂浪郡) 등 다섯 군국(郡國)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낙랑군(樂浪郡), 한(漢)이 설치했다. 현은 6개,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朝鮮縣),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2) 둔유현(屯有縣).
3) 혼미현(渾彌縣).
4) 수성현(遂城縣),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선 곳이다.
5) 누방현(鏤方縣).
6) 사망현(駟望縣).
玄菟郡,
漢置. 統縣三, 戶三千二百. 髙句麗. 望平. 髙顯.
현도군(玄菟郡), 한(漢)이 설치했다. 현은 3개, 가구수는 3,200이다.
1) 고구려현(髙句麗縣).
2) 망평현(望平縣).
3) 고현현(髙顯縣).
帯方郡,
公孫度置, 統縣七, 戶四千九百. 帯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㝠.
대방군(帯方郡),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했다. 현은 7개, 가구수는 4,900이다.
1) 대방현(帯方縣).
2) 열구현(列口縣).
3) 남신현(南新縣).
4) 장잠현(長岑縣).
5) 제해현(提奚縣).
6) 함자현(含資縣).
7) 해명현(海㝠縣).
1910년에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은 조선의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이라고 주장하면서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와 진서지리지(晉書 地里志)를 근거로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했다.
산해관 서쪽에 갈석산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황해도 수안군에 제2의 갈석산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어느 산인지 지목하지 않았다.
황해도 수안군에 제2의 갈석산이 있거나 없거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주장이 낭설이기는 마찬가지다.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은 평양에서 동남쪽으로 백 리 가량 떨어져 있다. 진시황이 사망하고 100년이 지나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을 설치했다. 조선의 도읍 왕험성과 낙랑군의 치소는 평양이라는 것이 천년 동안 정설로 통해 왔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도 동의했다. 진시황이 독립국이던 조선 땅에 장성을 건설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태강지리지와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 대목은 명백한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는 사료를 종합적으로 검증하지 않고 단편적인 문구에 매달려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다.
한나라(漢)와 조선의 국경이라고 사기(史記)에 기록된 패수(浿水)가 어느 강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사기(史記)가 편찬된 후 이천 년 동안 논란이 이어졌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浿水)라고 불렀기에 동시대 중국에서는 대동강이 사기(史記)에 기록된 패수(浿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한나라(漢)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浿水)는 압록강이고 대동강은 또다른 패수(浿水)라고 했다.
1913년 9월,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해운면(海雲面)에서 점제현(黏蟬縣) 신사비(神祠碑)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용강군은 대동강 하구(河口)의 북안(北岸)이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비석이 발견된 용강군이 낙랑군 점제현(黏蟬縣)이고 대동강 하구(河口)의 남안(南岸)으로 용강군과 마주보는 황해도 은율군(殷栗郡)은 낙랑군 열구현(列口縣)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열수(列水)는 대동강이고 한나라(漢)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浿水)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제자 이병도가 스승의 주장을 따랐고 광복 후 대한민국의 주류설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청천강 하구(河口)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점제현(黏蟬縣) 신사비(神祠碑)를 다른 곳에서 발견하고서 용강군 해운면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북경에서 구입하여 옮겨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행적에 수상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점제현 신사비(神祠碑)와 관계 없이 청천강 패수설은 오류라고 본다.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漢) 육군은 장성을 나와 패수를 향해 진격했는데 이는 패수가 장성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한군(漢軍)과 조선군은 패수 서쪽에서 여러 달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위의 그림처럼 만리장성이 패수에 붙어 있는 것은 사기의 기록과 어긋난다. 따라서 청천강이 패수이고 만리장성의 끝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압록강을 고조선의 패수로 보았는데 후세에 여러 사람이 이 학설을 따랐다. 그러나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된 한(漢)과 고조선의 전쟁 과정을 분석하면 압록강 패수설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고자 한다.
1981년 중국인 담기양(譚其驤)이 진서지리지에 만리장성의 기점(起点)으로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은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이며 장성의 동쪽 끝은 아래와 같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이 진나라(秦) 영토에 장성을 쌓을 당시 조선은 장성 바깥에 독립국으로 존재했고 한나라(漢)는 진나라(秦)의 영토를 물려 받았다. 진시황이 죽고 100년 후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그 곳에 진시황의 장성이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진시황이 조선 땅에 장성을 세웠다는 것이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궤변이다.
문제는 또 있다. 담기양(譚其驤)의 주장처럼 만리장성이 강서군에서 시작한다면 한나라(漢)와 조선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대동강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대동강 서쪽 땅은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의 영토에 속하게 되고 대동강 북안(北岸)에 있는 평양성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 이에 주류학계는 대동강 남안(南岸) 토성리(土城里)가 왕험성이라고 주장했다.
토성리(土城里)의 고분군(古墳群)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이 곳이 왕험성 및 낙랑군이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유물은 운반이 가능하므로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대동강이 패수라면 왕험성은 임진강변이나 한강변에 있어야 한다. 평안남도 강서군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주장은 평양성이나 토성리가 왕험성이라는 주장과 양립할 수 없다. 낙랑군 수성현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다는 기록은 애시당초 터무니 없는 낭설이다.
혹자는 갈석산이 위치한 난하(灤河)의 동쪽이 낙랑군이고 패수는 난하(灤河)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조백하(潮白河)를 패수라고 한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문헌고증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논쟁이다.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기원전 215년에 갈석산에 올랐다. 갈석산에서 동쪽으로 가서 임유관을 나와 다시 동쪽으로 가야 패수가 나오고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한참 더 가야 조선의 도읍 왕험성이 나온다.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왕험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 장성 안쪽에 패수와 왕험성과 낙랑군이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주류학계는 서진(西晉, 265 ~ 316) 시대에 낙랑군의 영역이 지금의 대동강 유역 평안도이고 대방군은 황해도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살펴보자.
후한말(後漢末) 189년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군 태수로 부임한 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고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신설했다. 204년에 공손도가 죽고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뒤를 이었으며 228년에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이 승계했다. 주류학계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이 아래와 같다고 주장한다.
290년에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三國志)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위서 명제기(魏書 明帝紀)
靑龍元年 十二月,公孫淵斬送孫權所遣使張彌、許晏首,以淵爲大司馬樂浪公。
청룡 원년(233년) 12월, 공손연은 손권이 보낸 사신 장미와 허안의 머리를 베어 위나라(魏)로 보냈다. 이에 공손연을 대사마 낙랑공에 임명했다.
◇ 오서 손권전(吳書 孫權傳)
가화(嘉禾) 원년(232년) 3월 장군 주하, 교위 배잠을 바다 건너 요동으로 파견했다. 가을 9월 위나라 장수 전예가 요격하여 성산에서 주하를 죽였다. 겨울 10월, 魏나라 요동태수 공손연(公孫淵)이 교위(校尉) 숙서(宿舒)와 낭중령(閬中令) 손종(孫宗)을 (吳나라 황제 손권에게) 보내 번(藩)이라 칭하고 아울러 모피와 준마를 바치니 손권은 매우 기뻐하고 공손연에게 작위를 주었다. 2년(233년) 봄 정월, 손권이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지금 요동태수연왕(燕王 ; 공손연)은 오랫동안 魏나라의 핍박을 받고 멀리 한쪽에 떨어져 있어 비록 마음은 우리 나라에 있어도 그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다. 이제 천명에 따라 멀리서 사신 두 명을 보내왔다. 그가 올린 글에 충성스런 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짐이 이것을 얻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으리오. (233년) 3월에 숙서와 손종을 돌려보내고, 태상 장미(張彌), 집금오 허안(許晏), 장군 하달(賀達) 등을 시켜 병사 1만 명을 인솔하고 금은보화와 구석(九錫)의 물품을 갖추어 배에 실어 공손연에게 주도록 하라." 승상 고옹 이하 오나라 조정의 대신들 모두가 공손연은 아직 믿을 만하지 못한데 총애와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니, 관리와 병사 수백 명으로 숙서와 손종을 호송하는 것이 옳다고 간언했으나 손권은 끝내 듣지 않았다. 과연 공손연은 장미 등의 목을 베어 그들의 머리를 위나라로 보내고 병사와 물자를 몰수했다. 손권은 대노하여 직접 공손연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상서복야 설종(薛綜) 등이 간절히 간하여 그만두었다.
嘉禾元年 三月,遣將軍周賀、校尉裴潛乘海之遼東。秋九月,魏將田豫要擊,斬賀於成山。冬十月,魏遼東太守公孫淵遣校尉宿舒、閬中令孫綜稱藩於權,幷獻貂馬。權大悅,加淵爵位. 二年春正月,詔曰:今使持節督幽州領青州牧遼東太守燕王,久脅賊虜,隔在一方,雖乃心於國,其路靡緣。今因天命,遠遣二使,款誠顯露,章表殷勤,朕之得此,何喜如之 , 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舉朝大臣,自丞相雍已下皆諫,以為淵未可信,而寵待太厚,但可遣吏兵數百護送舒、綜,權終不聽。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 尚書僕射薛綜等切諫乃止
배송지(裵松之, 372 ~ 451)가 429년에 삼국지 주석의 집필에 착수하여 수년 만에 완성하였다. 위의 기록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 배송지(裵松之)의 주석
당초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과 함께 양평(공손연의 도읍)에 도착한 관속과 종자가 사백여 명에 달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장미, 허안을 도모하고자 먼저 그들 무리를 요동군의 여러 현(縣)에 나누어 두고, 중간급 사신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및 관리와 병사 60명을 현도군(玄菟郡)에 두었다. 현도군은 요동군 북쪽에 있고 서로 2백리 떨어져 있다. (현도)태수 왕찬(王贊)은 2백 호(戶)와 또한 삼사백 명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진단(秦旦) 등은 민가에 머물며 먹고 마시는 것을 여기에 의존했다. 40여 일이 지나 진단이 황강 등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우리가 멀리 와서 국명(國命)을 욕되게 하고 이곳에 버려졌으니 이미 죽은 것과 어찌 다를 바 있겠소? 이제 이 군(郡)의 형세(形勢)를 보니 심히 미약하오. 만약 (우리가) 마음을 합해 어느 날 성곽을 불태우고 그 우두머리와 관리들을 죽여 나라를 위해 설욕한다면 그 연후에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족히 여한이 없을 것이오. 구차하게 살아남아 오래도록 죄수가 되는 것과 비교해 어떠하오?” 하니 황강 등이 이를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몰래 서로 약속하여 8월 19일 밤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날 낮에 부중(部中)의 장송(張松)이 이를 고하니 왕찬이 곧바로 사졸들을 모으고 성문을 닫았다.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등은 모두 성을 넘어 달아났다. 당시 장군(張羣)의 무릎에 종기가 발병해 일행을 잘 뒤따르지 못하자 두덕(杜德)이 늘 그를 부축하여 함께 갔다. 험한 산골짜기로 육칠백리 길을 가 상처가 더욱 심해져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풀숲에 누워 서로 지켜보며 비통해하며 흐느꼈다. 장군(張羣)이 말했다, “내가 불행히 상처가 심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소. 경들이 속히 길을 나아가면 도착할 곳이 있으리라 믿소. 헛되이 서로 지키다 깊은 골짜기에서 함께 죽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소?” 두덕(杜德)이 말하기를 “만 리를 떠돌며 생사를 함께 했으니 차마 내버릴 수 없소.” 그리고는 진단(秦旦), 황강(黃疆)을 떠밀어 앞서 가도록 하고는 두덕 자신은 홀로 남아 장군(張羣)을 지키며 과일과 나물을 따서 먹었다. 진단, 황강이 헤어진지 며칠만에 구려(句驪)에 도착해서, (손권이) 구려왕(句驪王) 궁(宮, 東川王, 재위 227~248)과 그 나라의 주부(主簿)에게 내린 조령을 밝히고 사여품이 있었으나 요동의 공손연에게 빼앗겼다고 속여서 말했다. 궁(宮) 등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조령을 받들고 사람을 시켜 진단(秦旦) 등을 따라가서 장군(張羣), 두덕(杜德)을 맞아 오라 명했다. 그 해(234년)에 궁(宮)이 조의(皂衣) 25명을 보내 진단 등을 호송해 (오나라로) 돌려보내고 표문(表文)을 올리며 칭신(稱臣)하고 초피(貂皮,담비가죽) 천 매(枚), 할계피(鶡雞皮) 10구(具)를 바쳤다. (鶡雞皮, 할계 가죽. 산해경 곽박 주에 ‘할계는 꿩을 닮았고 몸집이 크고 푸른색이며 모각(毛角)이 있는데 적과 싸울 때는 죽어서야 멈춘다’ 고 했다). 진단 등이 손권을 만나자 슬프면서도 기뻐하며 스스로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손권이 이들을 의롭게 여겨 모두 교위(校尉)로 임명했다. 1년 뒤(235년) 사자(使者)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보내 궁(宮)을 선우(單于)로 삼고 의물(衣物)과 진귀한 보물을 사여했다. 진순(陳恂)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한 뒤 먼저 교위 진봉(陳奉)을 보내 궁(宮)을 만나게 했다. 그런데 궁(宮)이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의 풍지(諷旨, 애둘러서 넌지시 권하는 교지)를 받았는데 오나라 사자를 붙잡아 공을 세우라는 내용이었다. 진봉(陳奉)이 이를 듣고 (안평구로) 되돌아가자 궁(宮)이 주부(主簿) 착자(笮咨), 대고(帶固) 등을 보내 안평(安平)으로 나가게 하여 사굉(謝宏)과 서로 만났다. 사굉이 곧바로 이들 30여 명을 묶어서 볼모로 삼았다. 그러자 궁(宮)이 사죄하고 말(馬) 수백 필을 바치니, 사굉이 착자, 대고를 풀어주고 조서와 사여품을 지니고 가서 궁(宮)에게 전하게 했다. 이때 사굉의 배가 작아 말 수백 필을 다 싣지 못하고 80 필만 싣고 돌아왔다.
初, 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眾,置遼東諸縣,以中便秦旦,張群,杜德,黄疆,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玄莬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太守王贊領户二百,兼重可三四百人。旦等皆舍於民家,仰其飲食。積四十許日,旦與疆等議曰. 「吾人遠辱國命,自棄於此,與死亡何異?今觀此郡,形勢甚弱。若一旦同心,焚燒城郭,殺其長吏,為國報恥,然么後伏死,足以無恨。孰與偷生苟活長為囚虜乎?」疆等然之。於是陰相約結,當用八月十九日夜發。其日中時,為部中张松所告,贊便會七眾閉城門。旦,群,德,疆等皆踰城得走。時群病疸創著膝,不及輩旅,德常扶接與俱,崎嶇山谷。行六七百里,創益困,不復能前,臥草中,相守悲泣。群曰。「吾不幸創甚,死亡無日,卿諸人宜速進道,冀有所達。空相守,俱死於窮谷之中,何益也?」 德曰: 「萬里流離,死生共之,不忍相委。」於是推旦,疆使前,德獨留守群,捕菜果食之。旦,疆别數日,得達句驪王官,因宣詔於句驪王宮及其主簿,詔言有賜為遼東所攻奪。宮等大喜,即受詔,命便人隨旦還迎群,德。其年,宮遣皂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板,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閒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賓。恂等到安平口,先遣校尉陳奉前見宫,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以市固等出安平,舆宏相見。宏即縛得三十餘人質之,宮於是謝罪,上馬數百匹。宏乃遣咨,固三年詔書賜物與宫。是時宏船小,載馬八十匹而還
◇삼국사기 동천왕본기
東川王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동천왕 10년(236년) 봄 2월 오왕 손권은 고구려에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동천왕은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7월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위(魏)나라에 보냈다.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232년 3월 : 오왕(吳王) 손권이 주하(周賀)와 배잠(裴潛)을 요동태수 공손연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2) 232년 10월 : 요동태수 공손연이 오나라(吳)에 사신을 보냈다.
3) 233년 1월 : 손권이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 사백여 명의 사절단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공손연(公孫淵)이 그들 무리를 요동군의 여러 현(縣)에 나누어 두고, 중간급 사신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및 관리와 병사 60명을 현도군(玄菟郡)에 두었다.
4) 233년 12월 : 공손연은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의 머리를 베어 위나라(魏)로 보냈다.
234년 8월 19일 :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이 현도성을 탈출했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넘어 고구려에 도착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은 그들을 호송하여 오나라(吳) 수도 건업(建業)으로 데려다 주었다.
5) 235년 : 오나라 사절단이 고구려 안평(安平)에 도착했는데 오나라 사신이 소동을 일으켰다. 동천왕이 말 수백 필을 선물하여 소동을 수습했는데 오나라 사절단이 타고 온 배에 공간이 부족해서 80필만 싣고 돌아갔다.
6) 236년 2월 : 손권이 고구려에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7) 236년 7월 : 동천왕은 호위(胡衛)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위(魏)나라에 보냈다.
고구려 사절단이 234년에 오(吳)나라 수도 건업(지금의 남경)까지 해상으로 왕래했고 235년과 236년에 오(吳)나라 사절단이 고구려를 방문했다. 고구려의 항구는 안평인데 압록강 하구다. 주류학계는 이같은 기록을 감추고 압록강 하구는 안평이 아니라 서안평이며 미천왕이 311년에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가 비로소 바다에 접했다고 주장한다.
◇ 三國志魏書 公孫淵列傳
景初元年 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淵遂發兵逆, 於遼隧,與儉等戰。儉等不利而還。淵遂自立為燕王,置百官有司……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삼국지위서 공손연열전
위(魏)나라 경초(景初)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황제의 새서(璽書 : 옥새 찍힌 문서)로 공손연(公孫淵)을 불렀다. 공손연은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했고 요대(遼隧)에서 관구검과 싸웠다. 관구검 등이 불리해서 돌아왔다. 공손연은 자립해서 연왕(燕王)이 되어 백관(百官)과 유사(有司)를 설치했다. ....경초(景初) 2년(238년) 봄 태위 사마선왕(司馬宣王)①을 보내 공손연을 정벌하게 했다. 6월에 군이 요동에 이르자 공손연이 장군 비연(卑衍), 양조(楊祚) 등에게 보병과 기병 수 만 명을 주어 요대(遼隧)에 주둔시키고 이십여 리에 참호를 둘러쌌다. 사마선왕의 군사가 도착하자 공손연이 비연에게 역습해서 싸우라고 명했다. 사마선왕은 장군 호준(胡遵)등을 보내 격파했다. 선왕(宣王)은 포위망을 파라고 명령하고 군사를 이끌고 동남쪽을 향해 가다가 급히 동북쪽 양평(襄平)②으로 갔다. 비연(卑衍) 등은 양평에 수비가 없는 것이 두려워서 밤에 도주했다. 군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이르자 공손연은 비연 등을 다시 보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지만 다시 공격해서 대파했다. 마침내 군사가 성에 진격하여 참호로 둘러쌌다. 때마침 큰비가 삼십여 일 내렸다. 요수(遼水)의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선박으로 요수 하구(河口)를 거쳐 성 아래에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土山)과 수노(脩櫓)③를 세우고 화살과 돌을 성안으로 연달아 발사하자 공손연이 궁박하고 급해졌다. 식량이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죽은 자가 무척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투항했다. 8월 병인일 밤에 길이가 수십 장(丈)인 큰 유성이 수산(首山) 동북에서 양평성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에 공손연 무리가 궤멸하자 그 아들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騎)를 이끌고 포위를 뚫고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군이 급하게 추격하여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父子)의 목을 베었다. 성을 깨트리고 상국(相國)이하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고 요동군,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을 모두 평정했다.
① 사마선왕(司馬宣王) : 사마왕(司馬王) , 선왕(宣王) , 선제(宣帝)와 같으며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킨다.
② 양평(襄平) : 안사고의 한서주(漢書注)에 따르면 지금의 요양(遼陽)이다.
③ 수노(脩櫓) : 망루에서 화살과 돌을 발사하는 공성(攻城) 수레.
◇ 삼국지위서동이전 고구려전
景初二年,太尉司馬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경초 2년(238)에 태위(太尉) 사마왕(司馬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했다. 궁(宮)④이 주부와 대가와 군사 수천 명을 보내 도왔다.
④ 궁(宮) :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
◇ 진서 선제기(晉書 宣帝紀)
景初二年, 帥牛金、胡遵等步騎四萬, 發自京都. 遂進師, 經孤竹, 越碣石, 次于遼水. 文懿攻南圍突出,帝縱兵擊敗之,斬于梁水之上星墜之所。既入城,立兩標以別新舊焉。男子年十五已上七千餘人皆殺之,以為京觀。偽公卿已下皆伏誅,戮其將軍畢盛等二千餘人
경초 2년(238년), 장수 우금, 호준 등과 보병과 기병 4만이 경도(京都 : 낙양)를 출발했다.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 갈석산(碣石山)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공손연이 포위망의 남쪽을 공격하여 돌파하고 탈출하자 선제(宣帝)는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격파하고 유성이 떨어진 곳 양수(梁水)⑤에서 공손연을 참수했다. 양평성에 입성해서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나누고 15세 이상 남자 칠천여 명을 모두 죽여 경관(京觀)⑥을 만들었다. 가짜 공경 이하 관리를 모두 죽이고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죽였다.
⑤ 양수(梁水) : 지금의 태자하(太子河)
⑥ 경관(京觀) : 무공(武功) 및 전과(戰果)를 과시하기 위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적의 시체를 쌓아 놓고 흙으로 덮은 큰 무덤.
238년에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하고 요동군,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을 모두 평정했다는 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하 유역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다면 사마의가 고구려 영토를 통과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했다는 것인데 그런 기록은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천왕은 247년에 환도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므로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 시대에 낙랑군은 요하 유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당시의 형세는 아래와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동천왕 사후에도 서진(西晉, 265년 ~ 316년)이 대동강 유역을 지배한 사실이 없으니 태강지리지와 진서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의 위치가 대동강 유역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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