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소풍날처럼 살고 싶다
김경선
언제부터인가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직장 다닐 때는 그것을 감추려 매달 머리를 염색해 세월의 흐름을 거역했다. 퇴직 후 허리끈이 느슨해지면서 두서너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머리카락 뿌리에서 올라오는 흰색이 길어짐에 따라 나이를 실감하며 삶을 되돌아보는 횟수가 많아졌다. 생을 다한 후 자식이나 지인들이 어떻게 평할까 걱정이 된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의 풍속에 사람이 죽으면 매장 후 유가족이나 지인들이 고인을 기리기 위해 묘비를 많이 세웠다. 비에는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출생일, 사망일 따위를 새긴다. 가끔은 살아 있을 때 묘비명을 미리 작성해 두는 이도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내 묘비에 눈을 그려라. 조국의 독립을 보고 말리라” 했다. 죽을 때까지 조국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투쟁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하다. 조병화 시인은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으로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묘비명을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고민해 봐야겠다. 여생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묘비를 세우는 경우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묘비명에 무엇을 써 놓을까 보다는 후대들이 어떤 사람으로 평할까. 어떻게 살았다고 인식할까 더 중요할 것만 같다. 돈 욕심만 부리다 죽는다면 ‘평생 돈·돈 하더니 결국 한 푼도 못 가져가는 걸 그렇게···.’ 할 것이고,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잔소리만 하다 명을 다하면 ‘그렇게 식구들을 들볶더니 저승 가서 심심해서 어쩔꼬’ 할 것이다. 또 죽은 다음 혼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살아 있을 때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보고 의미 있게 보내었더라면···.’ 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가장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식들이 아버지 계실 때와 같은 삶을 유지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의 빈자리로 부족함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했다. 경제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윤리·도덕·정서적으로는 안정되게 자라기를 원했다. 세상을 하직할 때 자식에게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 몫까지 다한 엄마였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저세상에서 남편을 만났을 때 ‘당신 몫까지 다하고 왔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남편이 이승을 하직하고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했다. 그동안 아들, 딸과 마음을 모아 열심히 살았다. 나는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자식들이 빗나가지 않게 다독였다. 때로는 닥치지도 않은 일에 가슴을 조이며 걱정과 고통으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애들은 학업에 충실하였고 건강하게 성장하여 나이 서른 후반이다. 제각기 직장을 얻어 자기 삶을 산다. “이젠 엄마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세요.” 노고를 생각하며 격려해 준다.
딸과 마트에 가는 길이다. 건널목 신호등이 빨간불이다. 딸이 나의 팔을 잡더니 “엄마, 차가 급정거하면서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하며 건널목 경계에 선 나를 잡아당긴다. 순간 ‘얘가 나를 판단이 흐린 늙은이 취급하는구나!’ 마음이 씁쓸하다. 길가에 정지한 승용차 차창으로 운전석에 흰머리가 쑥쑥 올라 온 여자가 비친다. 내 머리와 비슷하다.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동지애를 느낀다.
생이 끝나는 날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다. 천상병 시인은 하늘나라로 가는 날을 아름다운 세상에서 소풍 끝내는 날이라 했다. 인연 맺은 모든 사람이 “당신과 더불어 산 날이 아름다운 소풍날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수필문예》 제22집, 2023.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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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문예회 회원
대구수필문예대학 37기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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