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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 전선과 베티고지,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1)
"사령관, 밥 먹고 회의 합시다. 배가 고파서 원... ."
중공군 5월공세시 '51.5.16에 주공을 중동부 전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인제 현리일대에서 종심 약 60KM의 돌파구를 대관령까지 형성하면서 하진부리-유촌리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보급거리 신장과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5월21일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신속하게 철수하도록 명령을 하달 하였다.
하지만 유엔군은 이미 공산군의 공격특성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 길게 작전수행할 능력이 되지않는다. 그래서 바로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문산-가평-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으로 진출토록 명령하였다.
적은 이시간 전부대에 모택동의 지시로 부상병을 이끌고 철수하도록 명령하지만 하진부리근처까지 진출했던 부대들이 쉽게 돌아서지 못하고 미군의 역습에 혼이 나고 있었다.
특히 동부지역의 제 3병단이 8,000여명의 부상병 호송을 제 180사단과 179사단에게 부여했는데 특히 180사단은 북한강을 건너 철수하면서 통신이 두절 되고 철수 속도는 느렸다.
전선에 비는 하늘이 무너진양 퍼붓고 천둥소리는 탄광에 앉아 있어도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
'51. 5. 29일에 부사령관 황학지는 팽덕회의 전보를 받고 급히 지휘소를 찾았다.
"이것좀 보게." 팽이 홍학지동지에게 전보 한 장을 꺼내 앞에 놓았다.
"이봐, 여태껏 한 번도 격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어."
전선에서 180사단이 연락 두절이다.
180사단은 북한강을 건너 북배산과 가덕산의 샛길로 접어둘어 철수 길을 걷고 있을 때 미군 대병력이 산속 비탈길을 따라 행군하는 모습을 보았다. 탱크들도 수없이 지나 가고 있다.
"야 , 모두들 산속으로 숨어라.'
"사단장 동지, 사단장 동지 적이 쌔까맣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야, 무전기도 꺼, 각개 약진으로 포위망을 뚫으라." 사단장 정기귀의 숨 너머가는 소리였다.
후퇴하는 180사단이 아군의 기동을 보고 포위 된 것으로 착각하여 벌어진 혼란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180사단은 무너져버렸다.
그래서 그 소식을 접한 팽덕회가 주요지휘관 회의를 소집한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지만 팽 사령관은 당장 중앙에 보고해야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제 60군 군단장인 위걸을 불러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이다.
"위걸, 당신 휘하의 180사단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포위당하고 주저앉았느냐고. 미군들이 지나가는 것만을 보고 겁을 먹다니. 밤은 우리 세상이야... ."
어색한 회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같은 부사령관인 나서 밥먹고 하자는 제안에 팽사ㅕㅇ관도 잠시 머뭇거리다 밥"을 먹으러 가시죠." 이렇게 해서 60군 군단장은 잠시 화를 비껴갔다.
우린 중공군 ,51.5.16~전투를 5월공세라 부르고 국군 3군단인 3사,9사가 무력화 된 것으로 결론 내고 있지만 중공군은 반대로 본인들이 애먹은 전투로 기록 되고 있다.
유엔군은 재 반격 작전(캔사스선으로 진출)으로 전환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 1군단은 임진강-영평 진격전을 감행하여 5월 20일 문산-포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캔사스선(38도선)상의 영평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1사단이 문산축선에, 미 제 1기병사단이 동도천 축선에, 그리고 미 제 25사단(배속:터키여단)이 포천 축선에 투이하여 3개 사단 병진 공격을 개시 하였다.
중서부 전선의 미 제 9군단도 좌 인접 미 제 1군단과 같이 5월 20일 가평 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을 점령한 후 화천을 점령할 목적으로 좌로부터 미 제 24사단, 국군 제 2사단, 국군 제 6사단, 미 제 7사단으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 10군단은 신속히 소양강 선으로 진출하여 적으 퇴로를 차단하고 저글 포위격멸함과 아울러 적의 증원을 저지 하기 위해 알몬드 중장은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 1해병연대 배속)은 한계-인제 도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양구를, 미 제2사단(배속 미 제 187공수연대, 국군 제7사단 제 3,5연대 배속)는 한계-간성도로 동쪽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 미 제3사단(국군 제 8,9사단 배속)은 운두령 점령에 이어 창촌을 점령하고 예비인 국군 5사단은ㄴ 하안홍리, 7사단은 유동에서 부대정비토록 하고 5월23일 공격을 개시 하였다.
동해안의 국군 제 군단은 5월25일까지 하진부리 -대관령선에서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1단계로 매복산-가잔리-인구리를 연하는 선을 목표로 좌전방 산악지대에 수도사단, 우전방 동해안에 11사단으로 병진 공격 하고 국군 제3군단에서 배속이 전환된 국군 제3사단은 송계리에서 예비로 부대정비토록 하고 26일 06:00에 경강국도 변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무렵 미 제10군단의 진출이 더디게 되자 제8군사령관은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동해안의 요충지인 간성을 점령토록 하여 군던은 11사단은 설악산을 수도사단은 간성을 그리고 재편성을 완료한 제3산단 제18연대는 설악산 남쪽의 가라피-마산리 일대를 공격토록 하여 9일 여명을 기해 공격을 개시 하였다.
중서부 전선의 작전
미 8군사령관은 중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물리치고 공격작전에 합류하는 미 제 10군단을 위해 전투 정면을 재조정하여 미 제 1해병사단이 맡고 있는 홍천 지역을 미 제 9군단이 인수받아 미 제 7사단에 받아 미 7사는 홍천-춘천-화천 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화천저수지 서쪽지역을 점령케 한다. 국군 6사는 북한강 서쪽의 계관산-북배산-가덕산-지암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좌전방으로 진출하는 미 제 24사단은 국군 2사단의 엄호하에 청평-가평 도로를 따라 신속히 가평을 공격하고 국군 2사단은 제 24사의 엄호작전을 완수한후에 대보리로 진출하여 좌인접 미 제 1군단과 연결 토록 하였다.
'51. 5. 27일 07:00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 하였다.
이번 공격의 승패는 화천을 조기에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우익의 미 7사는 기계화부대로 도로를 따라 신속히 기동하기 위해 수색중대와 전차 1개소대, 공병 1개 분대로 "하젤"이라는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여 춘천을 정찰 후 복귀토록 하였다.
종격실따라 연대규모로 방어막을 친 중공군에 사단장이 신점리에서 포위되다.
하젤팀은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춘천을 향해 들어갔다.
물러나는 중공군은 맥없이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산모퉁이를 돌고돌며 화천방향으로 물러난다.
간간히 신점리-원창고개 고지군에서 저항은 하지만 목숨은 걸지않는 중공군이다.
미 제 7사단장 페랜바크 소장이 급한 성격에 차를 몰아 하젤을 만나러 들어가 신점리에서 그만 걸려들었다. 하지만 뒤로 가는 그들은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신점리는 지금의 구암교회가 있는 새술막 부근으로 오른쪽에는 할레루야 기도원이 인접에 있다.
"저기 철탑이 지나가는 곳에 올라가니 그저 발을 딛지못하게 하얗게 뼈다구가 쌓여 있어"
"아니 언제까지 그것이 남아 있었는지 아시나요?'
"내가 40살 먹던 해에도 올라가니 여기저기 있었으니까 한 40년전인가 그때까지 있었어요."
"혹시 그당시 사시던 곳이 어디셨나요, 이곳에 사셨습니까?"
"나는 논골에서 태어나 이곳에만 살아왔어요."
나는 2006년 6월에 정덕군과 준화군을 데리고 이곳 모래재를 탐사하러 왔다가 횡재를 했다. 지금이야 중앙고속도로가 뚫려 있지만 그 옛날에는 이 도로가 유일하게 홍천과 춘천을 연결하는 도로인데 단차로로 우마차가 주로 다녔다 한다.
하기야 일제강점기에 무슨 차량이 있었겠는가. 일본이 이곳의 아름들이 소나무를 빼내가려 길이 그래도 확장되었다. 조선 양반들은 이길을 걷고 아니면 말을 타고 넘고 하인들이 짚신신고 피 흘리며 걸었으리라~!
그러다 저 산에서 아니면 원창고개 좌우측의 금병산과 대룡산에 산적들이 진을 치고 있다 내려와 사방을 막고서서 가지고 있는 것 내려놓고 가라하면 다 내려놓고 가야 했단다.
그래서 신세가 망가지면 이곳 삼거리에 하나 둘 모여 막걸리 한잔에 신세타령하고 그도 산으로 들어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재미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술을 주니 산주요, 하늘에서 내려와 술을 주니 천주요,
땅에서 솟아나 술을 주니 지주라네.
여기 오늘 옷고름 잡아주고 손으로 받치듯이 가슴을 풀면 여인주라~~!"
아무리 전쟁터요 산적들이 득실거렸다는 동네라도 인생이 숨쉬고 사는 법이란다. 그곳에는 술이 있고 풍악이 있고 여인이 있고 남자가 있단다.
구수한 아저씨를 만나 우리는 어느 막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나는 논골 바람골 고개로 들어가 426m 무명고지를 올랐다. 두 젊은 청년들을 금요일이라 일찍 멀고 먼 속초로 가족곁으로 보낸후 아저씨의 제보에 따라 오늘은 이 고지에서 모래재로 내려서 다시 우측의 수용골 뒤산 407m 무명고지를 탐사해야 했다.
산같은 산이 아니라 평지같은 구릉이 올망졸망하게 흩어져 보이는 산만한 느낌의 정상에는 이미 화전을 했는지 특별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6월의 태양은 8월처럼 뜨겁고 길이 화전을 일구어서인지 없다. 새로 잡목이 나고 고라니가 다녀 만들어진 길을 내가 얌체처럼 걷고 있다.
중공군은 미군 비행기 무서워 낮에는 산속에 숨어서 다니고 밤에는 민가에서 잠잔다.
마을안에는 군자리라 하는데 몇가구 없는 동네에 마을회관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에 들러 다른 사람을 만나 보았다. 그렇게 나이든 사람이 없고 대부분 6.25전쟁 당시에 어렸던 분들이 몇몇 있어 모두를 만나 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답은 없었다. 대부분 중공군하고 집에서 잠을 잤는데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않았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전쟁이긴 했지만 이곳에는 북한군도 오지도 않고 본적도 없단다.
산 정상에서 남쪽으로는 춘천 시 공설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춘천 남산면 광판리도 갈골에서 군들로 넘어서면 바로였다. 이 광판리는 중공군 지휘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로 동서남북으로 길이 나있고 산들이 400m안팍의 고지군으로 둘러쌓여 있다.
남쪽으로는 홍천강이 흐르고 바로 지평리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부푼 기대감으로 산을 뒤졌지만 별 소득은 얻지 못하고 모래재로 내려서 수용골로 가려 우회전을 하려는데 연세 많은 분이 버스 주차장에 서 계시다.
"잘 오셨네, 저기 언덕 좌측길 일대에 6사단이 죽어서 묻혔어요!."
성함이 이씨인 할아버지는 올해 나이 82세다.
조상이 대대로 수용골에 살아왔다고 하신다. 군대는 중공군과 함께하고 중공군이 가면서 끝났다고 하신다. 뭔 말씀인지 이해가 어려워 물어 보았다.
"어르신, 탈영병은 아니지요?"
"그렇지, 어떻게 보면 탈영병이지." 하지만 군대는 기피안하고 학병 제대란다.
도대체 농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다시 말씀이 이어졌다.
"내가 22에 전장이 났어요. 전쟁이 터졌는지 이 산골에 뭐로 알겠어요. 그런데 갑작스레 군인이 집으로 들어와 당시 살아계시던 어머니에게 밥을 달라고 해서 주었어요. 국군 6사단 군인인데 원창고개에서 지금 북한군과 아군이 전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2일째 밥을 먹지못하고 씻지도 못했다며 우리 보고도 빨리 짐싸서 피난가라는거예요."
"아니 전쟁이 터졌는지도 몰랐다는게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순진한 나의 질문이다.
"지금이야 TV다 뭐다해서 집집이 다있지만 그당시에 우리 동네에 라디오 한 대도 없었어요."
"아군 탄박스 메고 고개위로 올라 군인들에게 넘겨주고, 북한군따라 박격포탄 지고 보급품지고 저 고개를 넘어 홍천지나 원주까지 갔다왔어요."
"아, 그러니까 처음에는 국군을 도와 주었는데 바로 인민군이 들어오고 그러다 얼마있어 인민군 통제를 받아 그들의 보급대역활을 좀 했다는 이야기시죠?. 그러면 중공군도 함께 했을거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한산이씨인데 종손집안의 외동아들이었다.
하지만 산골에 살다보니 무슨 문화혜택이라곤 모르고 농사 짓고 산에서 나무하고 그걸 춘천이나 홍천 읍내에 갔다 팔고 하는 평범한 농부집이었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몰라도 한양가서 공부한다는 형이 들어왔는데 곧 해방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 일본이 물러갔다.
그렇다고 동네 삶이 뭐 변한 것은 없었다. 또 얼마 지나니 동네사람들을 모이라 해서 나갔더니 노동자 농민들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온다며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어 의좋게 살아가야 한다고 했단다.
알고보니 그 당시도 좌파의 박헌영이 유명했는데 그 세력들 이었다.
그런데 정말 전쟁이 나고 지금 북한군이 저기 원창고개일대에 와 있다고 하니 참 이거 피난을 가자니 그렇고 않가자니 그렇고 난감해 하는데 벌써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면서 국군은 언제인지 모르게 떠나 가 버렸다. 그리고 바로 북한군이 들어와 피난갈 여지가 없었다 한다.
그런데 집밖으로 나가 모래재로 나가보니 군인들이 죽어서 길 옆에 뒹굴고 있다.
마크를 보니 6사단이었다. 어떻게 바로 묻어줄 수도 없고 자칫 잘못하면 치안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해야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 치안대에 알렸다. 냄새가 나서 가보니 군인들이 여러명 죽어 있다고 말이다.
살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사실 서로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막난이 빨갱이는 없었단다.
동네 어른들이 삽들고 괭이들고 나가서 멀리 갈 수는 없고 길 옆에 다 묻었는데 아마 10여군데는 된다고 한다. 그러니 죽은 숫자는 10여 명이 최소한 된다고 한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탐문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 춘천에 볼일 있어 간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3시경에 온다고 하니 어떻게 하나 기다려야지. " 네 알겠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난 다시 수용골 앞산에 올랐다. 생각보다 개인호가 별로 없었다. 산을 탐사하는도중에 한 사람을 만났다. 나이는 나처럼 50이 되어 보였다.
"혹시 연세가 얼마신지... ."
"무슨 연세까지는 아닙니다. 58세 입니다."
"이곳에 전쟁이 많이 있었다고 해서 올라왔는데 별로 탄피나 개인호등이 없네요."
"전쟁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어딘지는 잘 모르는데 저기 금병산에 가보셨나요?"
"아닙니다. 이제 갈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그 금병산에 가면 지금도 철모도 있고 수류탄도 있고 M1탄피나 파편이 많이 있어요."
"군대에 갔다 왔습니까?"
"현역으로그 7사단에서 제대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교통호나 개인호 흔적을 찾는 것입니다. 그곳에 전사자 유해가 남아 있을 수 있거든요."
"여기는 별로 없어요, 오히려 저쪽 새로난 도로 위 여우바위골에 가면 조금 능선을 따라 남아 있는데 누가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
시간이 2시를 넘고 있었다. 난 인사를 하고 수용골 입구 정류장으로 내려갔다.
도착했더니 벌써 할아버지가 와 계셨다.
"여기 이자리에 3명 묻어 있어요"
"여기는 1명인데 계급이 장교라고 하던데."
저쪽 길에 부상당하여 걷지 못하고 있다 출혈로 격국 죽었다 한다. 결국 길을 따라 산쪽으로 5군데의 제보지역을 확인했다. 올라서니 정신병원인가 국립춘천병원이 있었다.
덤바우쪽 야산에 인삼밭이 있는데 그 인삼밭 바로 언저리에 2곳이 있고 능선위로 올라섰다. 능선을 따라 산소가 몇군데 있는데 그 주변에 3곳을 알려 주었다. 1곳은 찾지 못했다.
"우리가 계획에 반영하여 꼭 발굴토록 하겠습니다."
실제 교통호는 없는데 개인호가 생각보다 많았고 매장되었다고 하는 곳은 함몰된 모습등 흔적이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다 듣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2~3개월을 지나는데 하루는 집집마다 있는 것을 전수 조사하러 치안대란 놈들이 다니는데 대부분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붙여먹고 사는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완장을 차고 무슨 총을 한자루씩 질질 끌고 다니는 꼴들이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사실 이곳에서는 뭐 있었다던 인민재판같은 것은 보질 못했다 한다.
대부분 겨우 밥먹고 사는 동네니 뭐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갑짜기 모이라 하더니 밤에 불을 꺼라, 불빛을 보이지마라, 어디갈때는 알리고 가라등 통제가 가해지기 시작했다. 논밭에서는 알곡을 셈하여 가을걷이 때 세금으로 가져간다고 난리다.
"병석아, 안되겠다. 산속으로 숨어라." 할아버지의 간절한 말씀이다.
"저놈들 하는 짓이 곧 무슨 요절이 날 것 같다."
"하루는 모이라해서 나갔더니 등짐을 지고 안내팩을 따라 밤내 걸었다. 원주 어디였다."
"옳지. 이때 도망쳐 숨어들어야 집에도 탈이 없겠지."
할아버지는 새벽에 돌아 오는데 여름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홍천강이 범람하여 하얀 물줄기가 다 보였다. 그래서 그 악천후를 이용하여 봉명리로 들어가 연엽산으로 올랐다.
저 멀리 원창저수지가 보인다. 연엽산은 850m나 되는 높은 산인데 올라서면 분지처럼 주변이 아름답다 한다. "그래, 여기서 숨어 지내자." 저기 서쪽으로 내려가면 수용골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돌아오지않는 자식을 내놓으라는 폭언과 으름장에 결국 아버지가 몇번인가 야간 보급대에 끌려나가 문경까지 갔다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에 그들의 주력이 남아있을리는 없다. 얼마를 숨어살며 간간히 집에서 산에다 갔다놓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을 붙들고 울었다."
잘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밥을 굶고 산것은 아니지만 막무가내로 살지않은 덕택에 척진 사람이 없어서 버틸 수 있었단다.
그러더니 갑짜기 인민군들이 북으로 올라가고 홍천쪽에서도 올라오는 북한군대열이 많아졌다. 뭔가 아군이 몰고 올라오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집근처까지 내려 왔는데 동네에 들어온 인민군은 다 떠났다 한다. 얼마만인지 집으로 들어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붙들고 울었단다.
곧바로 뒤로간 아군이 앞으로 간다. 동네에도 군인들이 찾아들고 경찰도 왔다 간다.
하지만 할아버지집에서 밥을 먹고간 군인은 오지않했다. 당연히 부대가 다르니 그럴 수 있지만 약간은 서운도 하고 살았는지 궁금도 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자는 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한다. 3대 독자인 할아버지는 군에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 어머니의 반대로 제2국민역으로 당장 군대에는 가지않했다.
곧 통일이 된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국군이 추운 겨울날 남쪽으로 내려간다. 중공군이 온다고 한다.
이번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남고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먼저 원주로 갔는데 다시 걸어서 간 곳이 풍기인가 인삼이 많이 난다는 곳으로 갔단다. 죽령을 넘어 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지 죽령고개가 피난민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단양을 거처 기차가 빙글빙글 돌아 올라간다는 곳으로 해서 지게 지고 머리이고 내려가는데 그때까지도 기차길 옆에 죽어있는 사람인지 군인인지 수없이 보았단다.
여름이 다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동네는 모두 불타버리고 다행히도 집이 타지않고 있어 잠은 잘 수가 있었지만 나머지 광이며 화장실이 다 타버려 그말 그대로 쑥밭이 된 상태였다고 한다.
동네에 소며 돼지며 개 한마리도 다 잡아가 버렸고 그 가난한 동네에 들어와 있으면서 의용군으로 보급대원으로 옆집 누구가 가고 누구는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죽었다는등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이후 할아버지는 군대에 들어가 행정부서에서 근무하다 제대하였다.
하루에 38,000명이 투항하다.
미 제9군단은 야포공격과 공중공격으로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중공군의 철수제대는 큰 혼란에 빠져 들었다.
이에 따라 미 제7사단의 제17연대가 춘천으로 진출하고 가평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 제21연대도 지암리에서 제17연대와 연결하기 위해 도로를 따라 계속 공격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같은 시간대에 북한강 북쪽의 가평-춘천 사이의 산악지대로 공격하여 계관산-북배산을 연하는 고지군을 공격하고 제19연대는 우회기동으로 북배산 후방으로 진출하여 적의 토로를 차단토록 하여 지암리에 3개사단의 연대들이 지암리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우리 속에 중공군은 포위되고 무질서하게 퇴로를 탈출하는 중공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하루에 무려 38,000명이 아군에 투항하였다.
계관산-북배산-가덕산- 몽덕산-홍적고개에서 국군 6사단이 싸우다
이곳은 초기 전투때는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에 밀리어 내려가고 1.4후퇴시는 국군 제5사단과 2사단이 전투하며 밀려난 곳이다.
더욱이 '51.4월에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단이 와해되는 수모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곳은 4차례의 큰 전투가 산악지역에서 벌여진 전사자가 많은 곳이다.
무더기로 나온 백자동 유해 36구
북배산(867m)은 남쪽으로 내려서면 싸리재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퇴골고개를 내려서서 춘천 서상리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가덕산(858m)을 지나 납실고개 몽덕산(695m), 홍적고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작은 멱골을 지나 목동 소법리에 이르는 요충지다.
나는 이 가덕산을 5회 탐사를 하고 전사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려 노력했다. 물론 현재 모습은 정상에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고 장축길이가 약 200m 곱하기 50m 크기로 긴 운동장처럼 되어 있고 주변에 교통호가 완전히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계관산으로부터 시작해서 매봉 화악산에 이르는 약 18km의 능선에 개인호가 약 2,000여개, 교통호는 약 12km거리에 이른다.
화악산에서 석룡산-도마치고개-도마치봉-백운산-광덕산-하오고개-복주산-수피령고개-대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어디든지 전투 흔적이 남아 있다.
전사에는 크게 어필이 안되고 있는 광덕산과 몽덕산에서 사실 화악산이나 도마치봉 북배산보다 더 많은 전사자를 발굴 했고 우리 전사는 상해봉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이 전투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2사단이 했지 6사단은 4월 사창리전투에 그저 밀려 내려갔다고 한다.
2사단은 중공군 5월공세를 봉쇄하고 재 반격작전으로 올라 올 때 광덕산을 점령하기 위해 그리고 복주산을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본인이 직접 참전 했다고 한다.
반면 6사단 참전용사는 4월전투시 지금 15사단이 있는 명월리에서 다목리로 진출하려다 실내고개 일대 능선에 매복된 중공군의 기습으로 육단리 잠곡리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바로 퇴각하고 말았다 하니 전사의 어느 부분인가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그당시의 흔적이란 다 사라지고 몇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었다.
너무도 많은 지역주민들의 제보가 있고 살아있는 6사단 용사님들도 많은 증언을 하고 있지만 지형의 변하에 매장된 곳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나는 명지산(1252m)에 올라 명지산-귀목고개-연인산에 이르는 구간의 개인호 실태를 조사하러 '07년도에 이곳에 올라섰다.
한여름이라 덥기도 하지만 혼자서 이곳에 올라 녹음이 우거진 여름산을 걷는다는 것이쉽지는 않다.
전사에는 '51.1.4후퇴시 국군 2사단이 중공군과 전투를 하며 밀리는 곳이고 '51.4월의 중공군 공세시 6사단의 탈출로중 하나다.
비지땀을 흘리며 오후 3시가 다 되어 백둔리 양짓말에 도착하여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자하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곤란하다 한다. 하지만 라면이라도 꿇여 달라고 하자 아주머니께서 계급장을 바라보며 아니 높은 분이 식사도 안하고 지금까지 뭐 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저기 명지산에 올라 국군 전사자 유해의 뼈를 찾으러 다니다 늦었습니다"
"아니 산 위에 무슨 뼈가 있나요?"
"간첩으로 신고하고 밥을 주는 당돌한 아주머니!"
"배가 고프니 밥좀 먹고 말을 계속하겠습니다." 너무 지친 그리고 초라한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20분 기다리라 한다.
그 아주머니 이름은 서정순(당시 67세), 당돌한 여인이시다.
너무 지쳐 그만 벽에 기대어 잠깐 잠이 들어 버렸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눈을 더보니 졸고 있었고 실제 밥이 준비 되었다는 신호였다.
운전을 담당하는 길준이와 숟갈을 들고 꿀같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게 먹고 있는데 밖에 누군가 서성거리는 눈치였다. 나는 누구세요라고 문을 열어 드렸다.
"어떻게 저를 볼일이 있나요?" 나의 질문이다.
"아니 지나가다 군인차가 서 있어 무슨일 인나해서 올라와 보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우린 유해발굴단 입니다. 유해소재 탐사차 명지산에 올랐다 지금 내려 왔습니다."
시골이란 반공 교육이 잘 되어 있어 수상하면 신고 하는 정신이 잘 되어 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 경찰은 떠나고 구수한 누릉지 밥까지 나왔다.
"아주머니 왠 누릉지 밥입니까?"
들랑달랑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아주머니가 미안한 것이다 사실 본인이 신고한 장본인 이었다.
"할아버지와 동네사람들이 밤에 묻는 것 보았어요"
우린 허허 웃고 아예 아주머니와 마주 앉았다. 당돌한 아줌마가 그렇다면 본인이 안내할테니 가보자는 것이다. 우린 귀를 쫑곳하고 말을 듣기 시작 했다.
"저는 저기 도대리 백자동에서 6.25전쟁을 만나고 피난을 가지않고 할아버지와 한곳에 계속 살았어요. 제 나이 9살인가 되었는데 전쟁하느거 다 보았어요."
"그럼 처음전쟁 났을 때도 알고 중공군이 넘어왔을 때도 알고 있습니까?"
"처음 전쟁 때는 바로 윗동네가 조무락골 용수목인데 그곳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는데 뭔지도 모르고 아침에 눈떠보니 북한군이 서성거리고 있어요. 아버지께 뭐하는 분들인지 물어보니 인민군 아저씨라며 괜찮다고 하였어요"
"무슨 나쁜 짓을 하거나 동네에서 사람 죽이거나 하지는 않했나요?"
"저는 어려서 뭔지도 모르고 그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 다녔는데 밤이면 자주 어느 집에 모이는데 나주에 들으니 그집이 빨갱이 집이래요. 거기서 뭐 하느지는 모르지만 뭐라고 하면 박수치고 얼소 올소 하는 소리 기억은 있어요."
"그럼 좀 전에 유해가 묻혀 있다는 곳을 아신다고 했는데 그 말씀을 좀 해 주시면 합니다."
"굉장히 추운 겨울로 생각 되는데 중공군이 온다고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다른 형제들은 피난을 나가고 나는 무섭지 않아서 할아버지와 남아 있기로 했어요 . 그런데 갑작스레 쾅쾅 거리더니 비명소리도 나고 밤인데 불이 번쩌번쩍 하면서 왔다갔다 하는데 난 그걸 지켜보았어요."
"아니 어린 나이에 겁이 날텐데 지켜보다니 할아버지는 어디계시고요?"
"그때는 집마다 방공호가 있었어요. 군인들도 가끔 집에 와서 김치나 먹을 것을 가져가곤 했으니 낯설지는 안해요. 할아버지는 동네분들과 방공호에 숨기도 하고 했지요."
"북한군이 와 있을 때는 우리집에서 몇명이 잠도 자기도 했어요. 그놈들은 우리에게 나쁘게 안하고 우리들 모아놓고 글도 기르치고 김일성 노래도 부르게 하고 먹을 것을 주기도 했어요."
"그럼 북한군이 도망갈때 집에 있는 것 다 빼앗아 가지는 안했나요?"
"그런것은 잘 모르겠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가자고 했는데 안가겠다고 한것은 알아요."
"그럼 중공군이 내려 올때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때는 국군이 들어와 함께 집에 있었어요. 그런데 갑작스레 짐을 싸더니 중공군이 온다고 피난가라고 했나봐요. 그래서 다 나가고 할아버지와 저는 남아 있었는데 바로 중공군이 들어왔어요."
"뭘 모르고 자다 눈떠 보니 중공군이 마당에 들어와 있고 마을에 나가보니 여기저기 죽은 군인이 엎드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아주 생생하게 그때를 기억하고 계셨다.
당시에 주변에 사시던 분들도 그리고 누가 빨갱이 집인지 어린 나이에 대단한 기억력이었다.
결혼해서 서울에 살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결국 여차여차한 이유로 친척이 운영하는 펜션에 일하러 왔다가 이곳에 산판 작업이 있다고 하여 당분간 밥집을 운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향이라야 최근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루는 동네사람들 나오라는 자치대의 요구로 할아버지가 밤에 지게를 지고 나가는데 아주머니도 지게를 붙잡고 따라 나갔다고 한다.
여덟살의 나이에 할아버지를 따라 나가니 어두운 밤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들어올리고 하는데 따라가서 보니 죽은 시체를 방공호 구덩이에 집어 넣고 있었다 한다.
무르긴 몰라도 한 40명은 될거라고 하며 한 곳이 아니라 몇군데 더 있다고 한다. 우연치고는 너무 우연한 기회에 천복을 나는 만났다.
바로 차를 몰아 백자동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지형이 바뀌었다. 없던 도로가 크게 뚫리어 원래 매장장소가 흔적이 없다.
아주머니는 잣나무 큰 것이 몇그루 서 있는 한 곳을 지적하며 이 정도가 될 것 같은데 확신이 잘 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당시 주변에 무언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으세요?"
"워낙 나무들이 커 버리고 조그만 길이 넓어지고 아스팔트 포장까지 되어 잘 구분이 어려워요."
"그 뒤에 궁금해서든지 한번 와 보지 않으셨는지요?"
"동네 어른들은 대부분 알아요, 가만 영만이네 아저씨에게 물어보면 확실히 알거같아요."
우린 영만이 아저씨란 분을 모셔왔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지정한 곳이 대략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주머니는 이곳말고도 동네에 물탱크가 있는 곳, 집에서 오솔길로 들어서 또 한곳을 알려주었다.
이곳 일대는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2004년도부터 2006년에도 일대에서 5구가 주민 제보로 발굴 되었다.우린 즉시 발굴 작전에 들어가 발굴결과 36구의 국군 유해를 발굴 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계셨는지 한 삽도 아니다.
불과 작업을 하려 겉 흙을 거둬 내는데 전투화가 보인다.
아니 용사님이 발을 들어 올리셨다.
꿈에도 그리던 군인들이 찾아왔다.
바로 길 옆에서 도쟈가 굴러가고 페이로다가 땅을 긁고 가고 수많은 작업 인원들이 서성거리다 갔다.
조금만 더 나가 와라, 조금만 더 다가 와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어언 60년이 지났다.
체념도 했다. 두고 온 자식마저 잊어버렸다. 그저 편지로 태어났다는 연락은 한 번 있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데 어찌하노, 난 점점 희망이 없어진다.
꿈이라도 좋다. 저승이라도 좋다.
구천에 계신 염라대왕이시어, 내 아이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오!
많이도 울었다.
죽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사나이 대장부가 쓸쓸히 죽을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난 차가운 땅속으로 점점 들어가고 영혼마저 얼어붙어 버렸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또 겨울이 오면 난 그때를 생각하며 아쉬워 했다.
저 화악산만 넘으면 춘천이고 난 다시 광명을 얻어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계곡에 엎드려 새울고 꽃피는 시절이 마ㄶ이도 오고가고
아아, 이제 꿈마저 무너져 내리는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야전삽 소리 들린다.
적군이 오는 것도 아닌데 야전삽 소리다, 점점 내 발끝으로 다가서는 느낌
오오, 신이여 나를 잊지 않으셨군요!
오오, 신이여 나를 잊지 않으셨군요!
지난 60년의 침묵이 깨졌다.
몸부림친 흔적으로 서로를 부등켜 안고 계시는 용사님
어머니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 순이를 부르고 또 사랑한 만덕이를 불렀을 것이다.
흐르는 붉은 핏 빛
나라위해 목숨받쳐 이 화악계곡에 쓰러진 36인의 용사님
꽁꽁 얼어붙은 화악천
북풍한설을 몰고 눈감아 우뚝 솟아 있는 화악산, 명지산, 국망봉,매봉이 서럽다
1950.12.30일에 화악산바라보며 국망봉 넘었다
달겨드는 오랑캐의 총칼은 사나웠다.
물러날 곳도 없어 높은 봉우리보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뛰었다.
눈보라 치고 얼어붙는 군화속의 발이 감각이 없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골 백번 미끄러져 여기와서 멈췄다. 그런데 포격이다~
산산히 찢어지는 육신
순간이나마 몸부림쳐 총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용사님~! 그립습니다. 죄송 합니다.
빛바랜 전투화를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가슴에 품은 이야기 있을까 너무도 조용하게 귀를 대어 봅니다.
흐르는 눈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허라 어허라 우리 용사님 어허라!
유가족과의 DNA검사 일치로 인식표나 다른 증거품없이 소속이 밝혀지다.
하지만 소속이 어느 부대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철모를 쓰고 전투화를 신고 있는 그대로 발굴 되어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제는 과연 6사단인지 2사단인지 또는 5사단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정말 극적으로 대구에 사시는 참전용사의 유복녀께서 사전에 본인의 DNA검사를 해 놓았던 결과와 이곳의 한 구가 일치 되었습니다.
"2사단 32연대 양손호 일병!"
양일병님은 '50년 9월에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려 내려간 상황에 군대 입대하게 됩니다.
이미 나이가 26살이나 되었는데 나라 위한 구국의 일념으로 지원 입대하지만 장가를 들어 생후 5개월된 딸이 한명이 있었습니다. 실제 전사에도 32연대가 '50년 11월 중순에 미25사단에 배속 되어 철원-평강지역의 후방 잔적 소탕작전에 투입된 상태에서 11월말에 배속이 해제 되었으나 계속하여 그곳에서 인민군 패잔병 소탕 임무를 하다 1.4후퇴시 포천 만세교리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동쪽으로 진출하여 후퇴해 내려가는 정황이 있다.
우린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이곳의 전사자가 2사단 이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동네 몇분의 추가 증언에 의해서 추운 겨울날 이었고 매봉과 화악산에 우리 3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사에 나와 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당시 강설과 혹한으로 진지 구축이 어려웠고 동네에서도 일부 나이드신 할아버지들이 지원도 나가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 동네에서 밥도 지어 나누어 먹기도 했는데 '50.12.31일 자정이 지나면서 사전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 되어 어쩔수 없이 후퇴하는 과정에 전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