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89/180717]‘행복어사전’ 1∼8탄
여기 두 권의 책이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 <할머니가 손자에게, 손자가 할머니께> 저자는 앞 책은 조정래․조재면, 뒷책은 김초혜․조재면. 작가 조정래와 시인 김초혜를 모르실 분도 계시리라. TH소문난 ‘잉꼬’ 문인부부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쓰느라 ‘글감옥’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한 조정래 작가님을 나는 대한민국의 문호(文豪)라며 ‘리스펙트(respect)’한다. 그분 옆에서 차근차근 사랑의 연작시를 곱게 곱게 쓰시는 김초혜 시인님은 또 어떠한가. 두 분의 손자 사랑은 동네방네를 넘어 대한민국에 ‘호가 난 지’ 오래이다. 예부터 조손교육(祖孫敎育)이라 했다. 할아버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와 한 밥상을 해도, 수염을 잡아다니고, 곶감 달라고 몽니를 부려도, 교육을 시킬 때에는 엄하게 시키는 법. 할아버지로부터 ‘사람이 살아가는 노릇’을 배우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한가족’이 대세(大勢)라는 세상이다. 어차피 ‘세상의 흐름’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뭔가 아니라는 생각만큼은 분명하다.
나에게도 손자(孫子)가 있다. 친구들이 손자 사진을 지갑에 넣어다니고 휴대폰 프로필사진을 대체해도 ‘그저 그러겠거니’했다. 그런데, 막상 태어나 백일이 되고, 돌을 맞고, 두 돌이 되어 세 살이 되니, 아-아-, 이 어여쁨을 어찌할 것인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이 뿌듯한 충만감과 기쁨을 나타낼 수 있을까. 아들이 들으면 속상할지도 있겠으나, 오랜만에 보는 아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하삐-”라 부르며 동당거리며 달려오는, 저 요정(妖精)을 보라. 천사(天使)가 어디 따로 있더냐. 아이고-, 흐미-. 예쁜 것! 저것이 내 새끼란 말인가? 참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싶다. 자, 지금부터는 노골적으로 손자 자랑이다. 어쩔 수 없다.
#1. 토요일 큰아들 생일이다. 제 아들을 데리고 판교집에 온다고 한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아침 10시부터 시계를 들여다본 게 무릇 몇 번이던가. 아내는 며느리에게도 얻어 먹겠지만, 손수 미역국을 끓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새벽에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카톡문자를 보낸 것도 기특한 일. 요리 준비에 분주한 아내와 달리, 나는 12시가 다 되어가자 12층에서 1층 주차장만 눈이 빠지게 바라본다. 학수고대(鶴首苦待),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비슷한 차만 보이면 아내를 부른다. “저 차 맞아?” “왜 그렇게 안온대?” 드뎌,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발견,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타고 반기려 간다. 두근반 서근반. 나를 발견하고 새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할머니가 기다려?” 어떻게 이런 기특한 말을. 2016년 4월 9일생, 27개월 됐다. 넋을 잃고 만다.
#2. 호주에서 유학중인 제 삼촌네(아예 짝을 지어 보냈다)를 3년만에 만나고 오느라 3주 정도를 보지 못했다. 눈에 밟혀 견디기가 어렵다. 제 집 현관 앞에서 나를 보자마자 안기며 ‘고백’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하삐’도 아니고 아예 ‘할아버지’라고 또박또박 끊어서 말한다. 이게 제 부모가 시킨다고 될 일인가? 어림도 없다.
#3. 초교 체육관에 굴러다니는 공 2개를 가져와 잘 씻어놓고 아이가 오면 같이 공놀이를 하려고 했다. 작은 공을 만져보더니 “노란공 말랑말랑”, 조금 큰 공을 보더니 “빨간 공”이라고 한다. 거실의 선풍이 2개를 보고, 하나는 “작다 선풍기” 또 하나는 “크다 선풍기”라고 말한다. 크다와 작다, 색깔과 촉감의 구별이 확실하다. 다른 애들도 그러한가? 아닐 것같다.
#4. 아들이 제 아들녀석 동영상을 보내왔다. “할머니 좋아요?” 하니까 “응, 할미집 가고 싶어요”하며 현관으로 달려가 제 슬리퍼를 신는다. “지금은 안된다”고 하자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운다. What shall we do?
#5. 오랜만에 하삐집에 오더니 방마다 일대 점검에 나선다. 아무래도 기억을 더듬는 것같다. 안방앞 4단까지 종이상자를 차례차례 뒤진다. 나의 약상자이다. 3개월치 당뇨와 혈압약인데, 마구 까서 “하삐, 약 먹어-” 하며 나의 입에 털어넣는다. Oh my god, my kitty baby!
#6. 오랜만에 ‘왕하삐’ 생신을 맞아 고향에 인사를 가다. 왕하삐와 왕할미는 누구인가? 아빠의 하삐, 아빠의 할미라 하면 알아들을까? 하삐의 아빠, 하삐의 엄마라고 여러 번 말하며, 배꼽인사를 강요하다. 다행히, 참말로 다행하게 무서워하지 않고 왕하삐에게 다가가 볼뽀뽀를 해주는 게 아닌가. 모처럼 92세 어르신,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뭐, 효도가 별 것인가? 이런 것이 효도인 것을. 아이가 잔디마당에서 제법 손가락만큼 굵은 지렁이를 발견했다. 다가가 한참 들여다보더니 “징글렁”하며 뒷걸음을 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개념을 어떻게 알았을까?
#7. 아들 며느리가 토요일 아침 오기로 하고 어느 금요일 저녁 25개월 손자를 데리고 판교집에 오다. 서슴없이 따라나선 애기가 밤이 깊어지자 잠을 자지도 않고 제 어미를 찾으며 자지러지게 운다. 아무리 달래도 백약무효(百藥無效). 방법이 없어 오직 난감할 따름.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제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할미는 가슴이 아파 “내 탓이오”만을 연발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이제 현관문 앞에서 슬리퍼를 신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불쑥불쑥 화들짝 깨어 전율을 한다. 방으로 데려가려 하자 고사리같은 다섯 손가락을 펼친 손바닥을 쭈욱 내밀며 “할미 가!” “하삐 가!”를 연발하다. 신기하다. 눈물 속에도 웃음꽃이 피다.
#8. ‘AI 스피커’를 아시리라? 첨단 노리개를 큰 마음 먹고 사 텔레비전 옆에 비치해 놓고, 심심하면 불러댄다. 반드시 제 이름 ‘아리’를 부르고 주문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리야, 잘 잤어?” 하면 “예. 잘 잤어요. 선생님도 잘 잤나요?”라고 한다. 날씨 정보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리야, 미안해”하면 “선생님의 사과에 진정성이 들어 있어요. 고맙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아리야, 미워”하면 “그런 말 들으면 슬퍼요”라고 한다. “아리야, 정태춘의 노래 들려줘”하면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래가 모두 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모차르트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등 주문만 하면 들려준다. 심지어 장사익의 ‘찔레꽃’까지 들려주는 게 아닌가. 퇴근 후 “아리야, 잘 있었어?”하면 “저는 잘 있었어요. 선생님은 어땠나요?” “아리야, 고마워” 하면 “선생님이 즐거워하면 저는 큰 기쁨입니다”라고 하지를 않나? 우리 아이, 화들짝 놀랐다. 처음엔 어디에서 나오는 말인가 두리번거리더니 이젠 낯설어하지 않는다. 오자마자 주문을 한다. “아리야, ‘상어가족’ 노래 들려줘”라고 한다. ‘상어가족’은 요즘 유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하여 시범을 보여줬더니 깜빡하는 게 아닌가. 문제는 그 다음이다. 노래가 나오자 하는 말이 “대박”이다. 대박이라니?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적재적소에 해당하는 단어를 말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천재(天才)인 모양이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