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멸망후 숭정제의 자녀들은 어디로 갔는가?
명나라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이 서안에서 대순정권을 건립한 후, 농민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격했다. 같은해 삼월 십육일 북경을 포위하고, 맹공을 개시한다. 숭정17년 삼월 십구일, 숭정제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느끼고, 주황후는 자결케 하고, 비, 빈, 공주를 직접 칼을 들어 자신의 손으로 죽인 후, 만세산(지금의 경산)으로 가서 괴수(槐樹)에 목을 매었따. 이렇게 하여 명나라는 멸망한다. 그런데,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자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김용이 쓴 소설 <<녹정기>>에서는 ‘백의협녀”의 비구니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녀는 바로 명나라 숭정제의 딸인 장평공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쨌든 소설 속의 이야기이다. <<명사>>에 따르면, 숭정제는 황궁에서 16살된 장평공주를 칼로 내리쳤고, 장평공주는 핏속에서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장평공주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주황후의 부친인 주규의 집으로 데려갔느?, 5일후에 다시 깨어났다고 한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대순천하였다. 주규는 그녀를 남겨두지 못하고, 그녀를 이자성에게 넘긴다. 이자성은 장평공주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는 의외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를 유종민에게 넘겨서 구해주게 한다. ‘대순’은 북경성에서 2달을 머물렀을 뿐이다. 그리고는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 이자성은 장평공주를 데려갈 틈이 없었고, 청나라군대의 추격하에 멀리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순치2년, 장평공주는 순치제 및 섭정왕 도르곤에게 글을 올려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하여, 이를 승락하지 않을 뿐아니라, 순치제는 조서를 내린다: 그녀로 하여금 숭정제가 구해준 부마 주현(周顯)과 혼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택, 금은, 차마, 전답을 하사한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장평공주가 병사한다. 그때가 순치3년이다. 장평공주는 겨우 18세이고, 광녕문 바깥에 안장된다.
장평공주의 행방은 이렇게 결론이 나 있다. 그러나, 숭정제의 아들들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명사. 제왕전>>에 따르면, 숭정제는 일생동안 7명의 아들을 두었다.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킬 때, 황태자 주자랑(朱滋?)이 16세이고, 황삼자 정왕 주자형(朱滋炯)이 14세, 황사자 주자소(朱滋炤)는 10세였다. 이 세 명의 아들 이외에 숭정제의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을 함락시킬 때, 숭정제는 명나라의 혈맥을 보전하기 위하여, 아들들에게 평민의 옷을 입고 태감의 보호 속에 북경성을 떠나도록 조치한다. 죽을 때 유조에서도, 각지의 관리들이 태자를 보좌하여 명나라를 새로 일으키도록 요구한다.
그렇다면, 숭정제의 아들들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첫번째 견해: 청나라조정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는 설이다.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이자성이 패배한 후, 태자는 기회를 틈타서 도망을 쳤느?, 오삼계의 부하에게 체포되었고, 나중에 태자는 다시 도망쳐서 외할아버지인 주규의 집으로 도망쳤는데, 주규는 태자를 숨겨주었다가 나중에 화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여, 태자를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도르곤이 태자를 확인한 다음 죽였다고 한다. 이 견해는 <<석편서후집>>의 <<열제본기>> 및 <,태자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국수록.숭정태자>> 및 <<갑신전신록>>등의 책에도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태자가 청나라조정에 체포되어 나중에 살해당했다고 본다.
두번째 견해: 오삼계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이다.
<<명사기사본말>>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자성이 북경성을 함락시킨 후, 태자인 주자랑과 정왕인 주자형, 영왕인 주자소는 모두 농민군에 체포된다. 나중에 이자성이 청군에 패배하고, 오삼계와 화의를 할 때, 오삼계는 태자와 2왕을 돌려주고 북경성을 떠나라는 조건을 내건다. 이자성이 이에 동의하여 태자등을 오삼계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하여 태자는 오삼계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에 따라, 태자는 이때 이미 살해당했다고 본다.
세번째 견해: 이자성을 따라서 패퇴하였고 그후 행방을 모른다는 설이다.
숭정의 아들 3명은 북경성이 함락된 후, 모두 도망을 치지 못하고 이자성의 군대에 체포되고 만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하여 이자성은 이암등의 의견을 들어, 명나라태자를 송왕에 봉하고, 영왕과 정왕은 다른 작위를 내린다. 나중에 오삼계가 산해관에서 변심하여, 이자성인 군대를 이끌고 출정할 때, 곁에는 명태자와 그 형제를 데리고 간다. 그 속셈은 이들을 가지고 오삼계가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삼계의 투항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자성의 농민군은 오삼계와의 교전에서 패배한다. 그리하여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들 삼형제도 함께 데리고 떠난다.
이때부터 태자일행은 감감무소식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장은 <<명사기사본말>> <<명계유문>> 및 <<명사>>등에 기록되어 있다. <<명사기사본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경성이 함락된 후, 이자성은 태자를 붙잡아, 송왕에 봉한다. 이자성이 서쪽으로 전진할 때, 태자의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명계유문>>의 기술은 더욱 구체적이다: “이자성의 군대가 패배한 후, 낭패하여 경성으로 돌아온다. 그후 서쪽으로 다시 떠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태자와 두 왕도 함께 떠나자고 하였다” <<명계유문>>은 추유기 부자가 쓴 것이다. 그들은 갑신지변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또한 이 책이 나왔을 때는 이 사건이 있은지 10년도 되지 않은 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모은 기록이 비교적 믿을만하다고 본다.
네번째 견해: 이자성을 따라서 패퇴하고 나중에 중이 되었다는 설이다.
어떤 사람은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에서 도망치면서, 유종민이 중상을 입어, 그들 삼형제에 대한 감시를 늦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기회를 틈타서 이전의 스승인 이사순(李士淳)에 의하여 구출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사순의 고향인 광동 가응주 음나산에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절을 지었는데, 이름이 성수사(聖壽寺)이고, 대전은 ‘자극전(紫極殿)’이라 하였다. 절의 곳곳에 스님들의 출신이 신비함을 들어냈다. 태자가 죽은 후 절에는 ‘태자보살’이라는 신위가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신위는 계속하여 모셔졌다. 신해혁명후에 청왕조가 멸망한 후에 사람들은 비로소 원래 이 곳에 모셔져 있던 불상이 바로 명나라의 도망친 태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사순의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가 전란중에 태자를 구하고, 태자를 고향으로 데려왔으며, 두 사람은 함께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상의 네 가지 견해 이외에 <<명계태략.태자일안>>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태자는 이자성의 군대가 도망친 후, 황고사로 데려가서 숨겨진다. 태감 고기와 함께 천진으로 도망친다. 그후에 건문제에 대한 소문과 마찬가지로, 바다로 남하하여, 그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야사무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자는 남경의 남명조정으로 도망치는데, 청나라군대가 남경을 함락시킨 후, 북방으로 끌려오고 그 후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태자는 나중에 전란중에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증거가 없다.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하나도 충분한 증거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청나라 강희제때 어떤 자가 숭정태자의 이름으로 반청의거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가짜로 밝혀진다. 숭정제의 세 아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