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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0일, 사순절 제3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예배의 부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2년 3월 20일, 사순절 제3주(교회창립 44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사순절 제3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경배찬송(일어서서):
찬송가 36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일어서서):
시편 63:1~8 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 대표기도: 베티 스코프스(Betty Scopes)
주여, 주의 자비로 주의 교회를 굽어살피사
주님을 잘 아는 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문을 닫지 말게 하소서
그들은 주께서 사랑하셔서 주님께로 이끈 자들이오니
그들이 우리와 너무 다르고, 너무 까다롭고,
또는 너무 요구가 많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통해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 누가복음 13:1~9 (성경)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 특별찬양: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을 찬송합니다.
*. 말씀선포: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사순절 제3주 주일입니다. 교회 창립 44주년을 맞아 교회창립기념 예배로 드립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소감~)
오늘은 신정론(神正論, 신의 옳음을 인정하는 설)의 주제를 가지고 주님의 뜻을 살펴봅니다. 신정론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선하시고 유일하신 신(하나님)이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면 옳은(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옳지 않은(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왜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담론입니다.
[*. 신정론(神正論, 신의론(神義論), 변신론(辯神論), 호신론(護神論), 독일어: Theodizee, 프랑스어: théodicée, 영어: theodicy, 고대 그리스어: θεός theós‚ 신‘과 δίκη díke ‚ 의로움‘)은 „ 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을 가리킨다. 이 이론은 신이 전능하면서도 선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에게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전능")과 의지("선함")가 있다고 해야할텐데 그럼에도 왜 신이 고통을 허용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신정론이라는 개념은 초기 계몽주의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저서 '신정론 Theodizee'(원제: Essais de théodicée (1710))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혹은 종교철학적 질문으로서의 고통에 대한 물음은 이미 고대 문화, 예를 들면 고대 중국, 인도, 수메르, 바빌로니아, 이집트와 이스라엘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구약성경에 있는 욥의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에서도 신이 (만약 존재한다면) 실제로 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고, 이 주장은 일부 더 나아가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신의 정당화에 대한 물음은 현대에 특히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사건 이후(소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다시금 등장하게 되었다. - 위키백과에서]
2. 신정론(神正論)
신정론(神正論)에 따라 아래의 여러 의문들에 대하여 답을 찾아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제기된 질문들부터 살펴봅니다.
나라를 찾으려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의(義)로운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빌라도 군병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제물에 그들의 피가 묻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이라 함은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절규, 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입니다.
[본문 1~5은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갈릴리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제물을 드리던 중에 빌라도가 군인을 시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로마입장에서) 반역자를 죽이는 일은 흔히 있었던 일입니다. 빌라도가 험악하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이에 직접 칼을 들고 맞서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열혈당(Zealots)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사막의 동굴에서 함께 생활하며 로마에 저항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빌라도의 정치적 핍박과 그에 저항하는 열혈당원의 정당성 등의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종교적, 신앙적)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가 있어서 혹은 회개하지 않아서 이러한 비극을 당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는 어떠한 재난이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한 것처럼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꼭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갑자기 닥쳐오는 어떤 재난을 맞이해서 절규하는 부르짖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명이나 목숨을 잃은 ‘재난’ 같은 경우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던 그 가족들이 맞닥뜨린 절규,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왜 착하게 (죄없이) 남 섬기며 기도생활 잘 하시던 (어느 권사님의) 가정에 불행한 일이 닥치는가? 등의 물음입니다.
[*. 실로암은 기온 샘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었던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입니다. 망대는 적의 침입을 관찰할 수 있는 군사적인 방어를 하는 탑이나, 혹은 포도원이나 농작물을 도적으로부터 지키는 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저수지에 있던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외에도, 성경에서 몇 군데 찾아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었던, 그래서 평생 구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맹인은 그 비참한 삶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요?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 ‘왜?’ ‘누구의 죄 때문에?’ 라는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9:1~2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여기서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물은 것으로 미루어 제자들은 이미 어떤 죄로 말미암아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인지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인지 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한 순간에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죽을 만큼 가려운 병(루퍼스)을 얻고 친구들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황망히 기와로 몸을 긁고 있는 동방의 의인 욥,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변론에 소환하려 하는 욥의 심정에 신정론(神正論)은 답해야 합니다. 욥기 13:3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욥기 13:3)”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앗수르에게 무너져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는 하박국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하박국 1:13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탄식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절규에 신정론(神正論)은 답해야 합니다.
성경 외에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전도유망한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어려운 형편을 비웃으며 고리대금으로 모은 (더러운) 돈으로 자신을 희롱하는 노파(와 그 딸)을 죽이며 “그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를!”이라고 자조하는 라스콜리니코프. ‘수백만을 죽인 나폴레옹은 영웅이 되고, 쓸모 없는 노파 한 명을 죽인 내가 무슨 큰 죄란 말인가?’ 라는 그의 절규와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의 질문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세상이 이리 부정의하다는 말입니까?’라는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정론(神正論)에 대한 절규와 물음은 비단 성경 이야기나, 문학 소설 책에서 언급되는 것뿐만 아니라 21세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같은 절규, 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지금 이 시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 온 전쟁,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과 죽음을 일상으로 목도하는 고통, TV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중계방송 보듯이 봐야 하는 21세기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 폴란드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이동건, 이화숙)가 전해 온 소식을 조금 알려드립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상이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주님 주시는 평안이 우리 안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이 (국경이 맞닿아 있는) 폴란드를 비롯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웃인 폴란드에는 이미 1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난민이 들어와 있고, 계속 유입되는 난민들로 인해 폴란드에서 다 흡수할 수 없어 폴란드에서 하루 15000명씩 독일 행 기차에 몸을 싣고 독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유럽 국가들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국적을 가진 모든 난민은 자신의 신분증만 제시하면 전 유럽의 모든 교통편이 무료입니다. 어느 나라든 원하는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폴란드의 모든 호텔과 난민 수용시설들이 이미 난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카톨릭교회와 개신 교회도 난민 수용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폴란드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턱없이 부족한 난민 수용시설로 많은 일반 가정들이 거처할 곳 없는 유랑자와 같은 난민들을 가정에 받아들여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난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두 사람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마리나(21세)와 사샤(15세) 남매입니다. 이 두 남매는 항상 슬픔과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거기서 많은 친척과 지인의 죽음이나 부상을 목격하고 왔기 때문에 자주 눈물을 흘리고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부모님은 둘 다 의사라서 거기 군인들과 민간인들 치료해야되는 신분으로 피난이 불가능해서 우크라이나에 남아있습니다. … 러시아도 전쟁으로 미국과 서방의 경제 제제로 루블화가 두배로 폭락하여 휴지화 되어가고 있으며, 물가는 치솟아 서민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정부의 전쟁 발발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자 급기야 러시아 정부에서는 러시아에게 불리한 모습의 사진을 올리는 자들에 대해 15년형을 선고하는 법을 긴급하게 발표하였습니다. 국민들의 입을 막는 공포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실제로 길에서 경찰들이 길가는 시민들을 무작위로 멈춰 세우고 갑자기 핸드폰을 검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리고 전쟁으로 러시아 국경은 외국인에게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됩니다. … 기도해 주세요.” – 이동건, 이화숙 선교사]
3. 신정론(神正論)에 대한 답변
신정론 주제에 대한 물음에 답변을 찾으면서 세 가지 주님의 뜻을 살펴봅니다.
3-1.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며 사람은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욥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대답하시지만 욥의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지혜는 우주 전체를 망라하는 시로써 표현됩니다(ref. 욥기 38-39장) 하나님에게서 쏟아져 나온 질문들은 오히려 욥을 겸손하게 만들고, 마침내 욥의 질문은 무의미한 것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욥기 38:1~4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자는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쓰고 맛없는 음식(이나 보약)을 먹이는 부모님(의 뜻)을 묵상하며 찾아내야 합니다. 작은 것에 큰 것을 담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영적 존재인 사람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만나면 질문이 사라집니다.
3-2. 우리 모두는 한 몸임을 묵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그물로 얽혀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 ‘인드라 그물’이라고 합니다. 그물의 물방울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듯이 서로가 영향을 미쳐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사람의 생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 사람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때는 아브라함이 리브가를 며느리로 데려온 때까지 입니다. 그 이후로는 뱃속의 쌍둥이(에서와 야곱)가 리브가의 뱃속에서 다투듯이 원인과 결과가 뒤섞여버립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생기는 것이 맞다 해도, 생긴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현재의 결과로 오게 되었는지 누구도 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원인과 결과가 인드라의 그물처럼 수없이 얽혀져 버렸습니다.
저 멀리 태평양 바다 가운데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이 대서양에 폭풍우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나비 효과’가 오늘날 밝혀진 과학의 현 주소이니, 어느 것 하나 우리 몸의 일부가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햇빛이 온 지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듯 말입니다. 지평을 넓혀보면 나 아닌, 내 몸이 아닌 것이 이 우주 만물 안에 있을까요? 한 몸으로 하나가 되는 지평에 하나님께서도 계시니 말입니다. 요한복음 17:22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나비 효과( - 效果, 영어: butterfly effect)는 혼돈 이론(카오스 이론)에서 초기값의 미세한 차이에 의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을 뜻한다. 이 표현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가 1972년에 미국 과학부흥협회에서 실시한 강연의 제목인 '예측가능성-브라질에서의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는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혼돈 이론에서는 초기 조건의 민감한 의존성에 따른 미래 결과의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어떤 하나의 원인이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 위키백과에서]
모두가 한 몸입니다.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오른 손이 말합니다. ‘아~ 왜 맨날 나만 쓰는 거야, 피곤하게. 밥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싸울 때도, x싸고 뒤처리할 때도 나만 쓰네. 저 왼손은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금반지 끼고 금시계 차고 호의 호식하니, 아 열 받네~ 나(오른 손)는 일만하고 너(왼손)는 놀기만 하고, 좋겠네~ 하며 구시렁거립니다.” 꿈에서 깨어 왼 손으로 오른 손을 빡 세게 한 대 때리며 말합니다. “너가 곧 나야~’ 하면서 말입니다!
[*. 석수장이로부터 임금, 태양, 구름, 바람, 바위, 다시 석수장이로 오는 (석수장이-임금-태양-구름-바람-바위-석수장이) 한 순환의 행복 이야기는 모두가 다 섬기든지 혹은 섬김을 받든지 한 몸이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학살 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원인을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너희는 한 몸이다.’ 2~3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의 답변은 목숨을 잃은 갈릴리 사람들의 죄가 지금 듣는 너희보다 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하라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너희도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살아있는 너희나 ‘같다’고 말해줍니다. 죄가 있다면 같이 있는 것이고, 없다면 같이 없는 것이고. 이 재난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도 같이 죄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나, 지금 살아서 이 이야기를 듣는 너희나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죄가 있고 회개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너희도 회개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린 아이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몸이 가벼운 관계로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잘 죽지 않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유대인들 사이 사람들의 깊은 탄식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그 때에 뒤에 서 있던 랍비가 울며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저기 매달려 계시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우주 만물을 포함하여,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다 한 몸입니다. 누군가 아프면 같이 아픈 법입니다. 하나님도 아프십니다.
3-3. 처음(원인)과 나중(결과)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모두가 한 몸이라면 굳이 처음과 마지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처음과 마지막을 생각해 낸다면, 그 처음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묵상합니다.
지평(paradigm)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원인과 결과는 처음과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처음과 마지막은 사람의 몫(영역)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지막은 곧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종(始終), 곧 처음과 끝은 사람이 측량(판단)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전도서 3:11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시종, 곧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3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라는 의미는 시작(알파)과 마침(오메가)이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탈무드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는 빈 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처음과 끝은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 온 때를 기억 속에서 지우셨고, 세상을 떠날 때를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처음과 끝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돌에 채이면 일단 치료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포도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 몫입니다. 마지막이니까요. 열매의 시작도 하나님 몫입니다. 사람은 다만 현재의 삶에서, 열심히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것’ 뿐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처음과 끝은 본질적으로 처음과 끝이 아니라 그저 “다 지나가리라~”입니다. 참 인간, 성자 하나님의 지평에서 포도원지기가 한 이야기가 곧 우리 사람의 몫입니다. (그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는 포도원 주인이 있고, 포도원지기가 있고,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열매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평(모습)입니다.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지평(모습)입니다. 무려 세 해나 열매를 구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포도원 지기가 나서서 말합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합니다. 참 인간의 지평(모습)입니다. 이 중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물어오시는 것입니다.
[*. 마치,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 가, 돌밭, 가시 떨기, 좋은 땅 모두가 한 인생의 마음 밭을 의미하는 것처럼, 주인의 지평에서 열매를 품(禀)고, 포도원지기의 지평에서 두루 파고 거름을 주며 가꾸고, 무화과나무의 지평에서 열매 맺을 것을 품부(稟賦)합니다.]
4. 나가는 말
불의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신의 정의로움’을 다시 묻습니다. 신정론(神正論).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습니다. 고통스러운 질문 속에서 1)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2) 하나님 창조하신 모든 세상은 서로 의존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깨우치라고(각, 覺), 그리고 3) 처음과 끝의 지평은 사람의 몫이 아니니 지금 현재 그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하는 ‘일(사역)’을 하라고~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질문이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 되리니)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봉헌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봉헌합니다. (찬송가)
*. 봉헌기도(일어서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대면예배로 드릴 경우,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혹은 신협 131-019-734759 (주안대신교회)로 송금합니다.]
*. 교회소식:
*. 찬송(일어서서):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축도 혹은 주기도문(일어서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