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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자식을 낳은 마음
함석헌
씨알 여러분은 이 글을 쓰는 제 마음의 괴로움을 아십니까?
읽으시는 여러분은 글이 잘됐다 못됐다, 말이 옳다 그르다 하시면서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쓰는 제 마음은 그 소리를 듣기에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아기를 낳는 어머니가 진통이 너무 심해 죽을 판 살 판을 거듭 오르내리다가 간신히 낳아 놓았는데, 그 아기를 받아 놓고 사람들이 사내냐 계집애냐 묻고 있다면,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평한다면, 아마 산모는 죽고 싶을 것입니다. 제 심경은 바로 그것입니다. 저만이겠습니까? 모든 뜻에 살자는 마음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이들의 심정이 다 그럴 것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마디 말을 하기 전에 천 마디 말을 제 속에서 먼저 버려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한 줄 글을 쓰자면 백 줄을 제 손으로 우선 깎아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입니까? 그렇게 해서 간신히 대기속으로 나온 글, 말도 또 캄캄한 숲 속에서 청룡도의 좌충우돌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어떤 물건이겠나 생각하여 보세요. 병신자식입니다. 죽다 남은 찌꺼기입니다.
병신자식일수록, 흉을 본다면, 어머니는 죽을 것입니다. 왜요? 병신일수록 그 어머니는 더 사랑하고 더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병신자식의 의미를 아십니까? 말구유 안에 낳아 놓았던 자식을 두 살 이하의 벌거숭이를 모조리 죽였던 피의 폭풍 속에서 겨우 건져낸 마리아에게 가 물어보십시오.
씨알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뽑아 세계를 둘러보십시오. 글만 아닙니다. 바로 사람을 그렇게 낳고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 아닙니다. 모든 나라가 그렇습니다. 문명이다 행복이다 하지만, 낳은 자식은 하나 빠짐없이 죽이다 남은 찌꺼기입니다. 부모 가 부모가 아니라, 무량수경의 말대로, 자식 죽인 원수요, 자식이 자식이 아니라 그 아비 어미에 대해 원수를 갚을 미생원(末生怨)입니다. 끔찍한 살인귀의 문명 아닙니까? 자식을 죽이면서 아기를 설렀고, 아기를 설르면서 살인을 했으니, 그자식이 성한 사람이겠습니까? 병 신이겠습니까? 낳은 자식 중 가장 잘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악이 그 뼈가 되고 살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씨알 여러분, 몸서리가 치지 않습니까? 이것이 저 자신을 정죄하는 말인 줄을 잘 알고 있지만, 저는 제 마음 위에 내리는 절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이것을 씁니다.
제가 제 양심에 느껴지는 글을 그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겉으로 보면 바깥 힘 때문인 듯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제가 생명을 죽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저로 하여금 양심대로의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 문제 정도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고 지독합니다. 저주 받은 문명입니다.
고민하는 문명
저는 이제 다 죽게 된, 이제 와서야 겨우 회개란 생각을 조금 깊이 정말로 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말대로 옳은 사람은 없으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문명은 썩어진 문명이요, 이 인류는 망할 인류입니다. 이 인류가 결코 유일의 인류도 아니요, 이 문명이 역시 단 하 나의 문명도 아닙니다. 역사는 여러 문명이 과거에 있었다가 망한 것을 말해주고 있고, 진화론은 이 인류가 있기 전 몇 차례의 다른 인류들이 있었던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들도 다 자기네와 자기네의 문명은 영원히 갈 줄로 알았겠지만 다 망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인류, 이 문명이라고 아니 망한다는 법 없을 것입니다. 지성의 인류임을 자랑할수록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망할 원인을 꼽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간단하게 그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자면 오직 하나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지배ㆍ피지배의 관계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지배ㆍ피지배의 관계에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후대에 오다가 강하고 꾀 있는 자들이 짜고 둘이서 폭력과 제도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동물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도 사람에서와 마찬가지로 강약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속에는 생명의 근본 지혜가 있어서 힘이 약한 것도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동물계에서는 힘이 약한 것들이 더 번성하고 있습니다. 맹수류는 결코 자연계를 독점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번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도 본래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자연계 속에서 힘보다도 생각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알기 쉬운 증거가 집이란 것입니다. 집은 결코 지배관계가 아닙니다. 인정과 사랑 관계지. 지배 관계였다면 인정ㆍ사랑이 발달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악용하여서 그 자연적으로 있는 강약의 차이를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영구히 혼자 서 가질 생각을 하는데서 지배는 시작됐습니다.
그러면 흔히 반대하기를 나라 없이는 발달할 수 없지 않으냐, 지배 아니 하고는 나라 있을 수 없지 않으냐 하지만, 그것은 벌써 지배주의에 병이 든 생각입니다.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역사에서 공통한 것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그 옛날의 살림이란 지배ㆍ피지배의 관계가 비교적 적은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란 결코 자연대로 발달해서 온 것이 아니고 소수의 강자들이 짜고 둘이서 인위로 만들어 씌운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달한 것은 사실이나 그 발달은 약자를 희생으로 하고서 되는 강자만의 발달입니다. 약자는 그것을 위해 짐승만도 못하게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 발달이 아닙니다. 참 발달은 정신에 있어야 하는 것이요, 정신이란 곧 전체를 하나로 살려서 사는 힘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나라도 인간을 동물보다도 더 천하게 대접하며 참혹하게 죽이지 않고 된 나라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명은 바벨탑의 운명에 떨어지지 않은 것 없습니다. 이 인류의 이 문명만은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은 이것이 과학으로 됐으니만큼 더 오래 갔기 때문이지만, 그러니만큼 그 무너짐도 더 참혹할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양식있는 학자가 과연 이 문명이 최고의 문명이고 이 인류가 정말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민하는 문명이요, 몸부림치는 인류입니다. 다른 나라는 또 모릅니다. 적어도 우리만은 그렇게 보아서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고, 따라서 우리 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역사
저는 거의 50년 전부터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합니다. 그때는 소수의 몇 친구 외에는 그 말을 말로 여겨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부끄러워도 섭섭해도 않았습니다. 믿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 알았노란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지만, 본래 하고 싶어 서 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어서 한 것이므로, 저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해방이 됐어도, 꿈에도 그 역사책이 출판이 되고 팔리려니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읽어주는 사람이 자꾸 생기는데 스스로 놀랐습니다. 저는 비록 제 말이라도 일단 입에서 나간 다음에는 이미 제 말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제 말이라거나 말거나, 고난의 역사는 오늘 적지 않은 사람이 읽는 말입니다. 우리의 고난의 역사는 이제 그만큼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더 깊이 파들어가야 합니다. 왜 고난이냐? 무엇 위한 고난이냐?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거냐?
씨알 여러분, 역사를 바로 볼 사람은 우리뿐입니다. 우리만이 옳은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옳은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자리 없는 것이 옳은 자리입니다. 사람은 서기만 하면 곧 지구 중심 위에 있습니다. 어디서고 언제고 그렇습니다. 그것 말고 또 무슨 자리란 것이 있다면, 지배ㆍ피지배에서 붙이는 자리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거짓,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고, 공중에 권세잡은 자가 만든 자리입니다. 관점(觀點), 견지(見地)라니, 사는 자리가 옳아야 보는 것이 바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지위에서는, 사람을 내시는 이가 준 자 리 아닌 자리인 참 자리를 떠나 제 마음대로 높다 낮다를 붙여서 만든 자리에 서기 때문에, 거기서는 절대로 사람을 볼 수 없고, …그 타락 된 동물만을 보고 있습니다. 동물도 아닙니다. 동물에게는 지배 관계가 없습니다. 이 봉한 두루마리를 풀 것은〈사람의 아들〉을 믿는 우리뿐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말하면서도, 제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그때 그 고난의 짐을 벗는 날이 상당히 빨리 올 줄로 믿었습니다. 그림에서는 원경 근경이 한데 붙어 있는 것을 생각지 못해서 잘못했던 착각입니다. 그래서 제주도를 새 나라의 상징이라 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제시대에 재판까지 받았고, 6.25 때에 우연히 한라산 높이가 1950미터인 것을 발견하고 정말 그 말이 맞기나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제주 대학에 가서 강연하면서 이 섬을 하나의 표본 시험지로 해보자고까지 했습니다마는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이제 제주도는 새 나라의 표본은 고사하고 국제적 공창가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새 나라의 상징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이 우리의 고난은 아직 멀고멀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씨알만이 이것을 이해 할 수 있고, 씨알만이 이것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거기 따라서 한 가지 새로 더 분명해진 것은 세계 문제의 초점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해방의 날이 멀어짐으로 도리어 가까워졌습니다. 그때보다도 지금은 우리 고난의 의미가 더 분명해 졌기 때문입니다.
망해가는 나라들
전문가들의 말이 전쟁을 끝내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인류의 끝이나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의 나라라는 이 나라들이 없어져야 한다 그 말입니다. 지금의 나라는 선진ㆍ후진, 강대ㆍ약소를 말할 것 없이, 폭력을 절대 필요조건으로 하고 서가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나라가 있는 한 전쟁은 불가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 공이 감히 3차 대전은 불가피라고 호언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모를 것 없습니다. 빤히 다 들여다 뵈고 있습니다. 옛날에 소동파(蘇東波)가 사마온공(司馬温公)이 벼슬과 이름을 피해 독락원(獨樂園)에 조용히 있으려는 것을 찬양하면서 하는 시에「아무리 당신이 그 명망을 가지고 평안히 가 있으려 해도 하늘이 허락지 않는다. 당신이나 나나 명성을 쫓아다니는 것들이고 보면 그런 고통거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 죄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벌해서 입힌 죄수복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 국가가 전쟁만 나면 너 나 할것 없이 다 망할 줄을 알기 때문에 될수록 피해보려 하면서도 전쟁 준비만 자꾸 하고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하느님이 만들지 않은 지배관계를 저를 위해 제 맘대로 만들어 인간 위에 씌운 죄로 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면서도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씨은 거기 있다가 같이 망해서는 아니 됩니다. 인류 구원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 나서야 합니다.
소위 나라라는 것이 결코 참 나라가 아닙니다. 참 나라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버리지 않는 것이 참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은 인(仁)도 지(智)도 용(勇)도 아닙니다. 거기서 나와서 제 거룩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때가 다 됐다. 하늘나라 가깝다. 회개하고 복음 믿어라”하신 것은 씨을 가짜 나라의 멸망에서 불러내어 참 나라, 뿌리가 있는 나라로 부르신 것 입니다. 지금은 2천 년 전보다 더욱 다급합니다.
오늘의 강대국들이 폭력에 의한 지배주의의 국가관을 버리고 문명을 근본에서부터 고쳐 건설할 각오를 한다면 그에게 다행한 일이 없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 세력과 너무 밀착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사탄의 깊은 곳〉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치, 그 문명은 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의 강대국이 하는 정책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정책 밖에 되지 않습니다. 평화 소리를 하지만 그것은, 마치 잘사는 사람이 자기의 향락하고 남는 찌꺼기를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제 향락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할 용기는 없고 기껏한다는 것이 그것을 밀어 가난한 사람더러 치우게 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현대의 강국들은 아니 터지고는 말지 않을 전쟁을 여러 가지 교묘한 외교로 밀어 불쌍한 후진국에 밀면서 무기를 만들어 팔아먹으면서 이중의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후진국이 그것을 알았다면 단연 거절해야 하겠는데, 그것 역시 망해가는 문명에 병이 들어 기껏 잘 하노란 것이 이제 멀지 않아 엎어질 앞차를 한사코 따라가고 있습니다.
씨알은 죽을 수 없다
이사야는 나라의 멸망이 눈썹에 달릴 때에 “너희가 돌이켜 잠잠하고 믿어야 산다”고 했습니다. 잠잠하여야 마음이 가라앉고 마음이 가라앉아야 일을 바로 보고 판단할 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늘의 벌을 면치 못한 낡은 국가주의자들은 아마 안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오직 하늘이 주신 겸손과 온유를 아직 속에 가지고 있는 씨알은 그들과 운명을 같이해서는 아니 됩니다. 새 시대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씨알은 죽을 수 없습니다. 죽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잠잠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혹시 묻기를 그러면 우리는 그 장차 오는 환란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습니까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결코 그 보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또 누구면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전에는 내가 땅을 흔들었지만 이제 또 한 번 흔들 때는 하늘까지 흔들겠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마 하늘만 아니라 생명까지 흔들지도 모릅니다. 물질을 반드시 조건으로 하고야 나타나는 생명은 아마 이만한 발달이면 그 드러낼 것을 다 드러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은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이 나타나려는 것이 이 환란의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아무도 알 사람이 없지만 그 생각은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만 다음 단계에 대한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인류의 지도자로 자임했던 것들이 면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이 그 옷을 한번 갈아 입으실 필요가 있다면 노아 홍수 때 모양으로 또 한 번 인류를 지면에서 쓸어버릴는지도 모릅니다. 지구까지도 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죽고 사는 것이 문제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에와 마찬가지로 그 새 인류의 씨는 여기서 준비되어야할 것입니다. 제가 씨알이 인류구원의 사명을 진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의미에서 입니다. 오늘의 인류의 씨가 지난날 진화 과정에서 준비될 때 아무도 예측했던 자 없습니다. 이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힘이 그 준비를 시켜 진화의 새 단계는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우리 아는 생명만이 아닙니다. 상상도 못하는 차원의 생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는 이 차원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하나? 전과 다른 것은 이 인류는 생각하는 인류입니다. 마치 전 단계에서 인류가 나올 때에도 그 젖먹이 동물류를 내놓고는 할 수 없었듯이 이번에 이 생각하는 인류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인류 혹은 생명체가 나온다 해도 이 생각하는 것을 터로 삼지 않고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우리가 미리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믿음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예기치 못했던 것도 담을 수 있는 것은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소망, 혹은 사명을 거기까지 가져다 부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고난의 의미가 풀리지 않습니다. 깊은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의 당하는 고난이 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의 당하는 고난은 전체 인류의 짐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풀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없다는 말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리 인정하여도 그것으로 우리 고난의 이유가 다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북의 대립이 지금 모든 고난의 원인이다 하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산주의자들이 양보해서 통일이 이루어질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짐은 우리가 지기에는 너무 큽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이 온다면 반드시 공산ㆍ자유의 구별없이 기성세력은 싹 무너져야만 할 터인데, 그 어느 쪽인들 그것을 뉘우치는 태도로 할 수 있을까? 거의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계는 어차피 무슨 형식으로나 큰 심판을 받고 나서야 새 역사는 나올 것입니다.
저는 우리 고난의 의미는 거기 있지 않은가 합니다. 이미 한 말입니다만은 결코 정치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믿고, 두 강도 사이에 달리는 예수님 모양으로 심판 받는 두 세계의 망하는 세력 틈에 달려 “저들을 용서하소서” 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질 준비를 하잔 말입니다.
그것이 만일 허망이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씨알의소리 1977년 9월 67호 (금지된 씨알의소리 생각사)
저작집30; 9-155
전집20; 8-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