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에서 / 양선례
친구와 일본 북해도(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곳보다는 시원하다기에 피서간다 생각하고 정한 여행지였다. 동행자는 옥과 미, 영과 나까지 모두 넷이다. 옥과 영이와는 초, 중, 고 동창이다. 12년이나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여고 3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한반이 되었다.
3학년 담임은 미혼의 여선생님이셨다. 광주가 본댁이라 자취를 했는데 하필 당숙모 집이었다. 때문에 맏딸인 나와 줄줄이 있는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고 손에 물 마를 새 없었던 엄마 사정도 잘 알았다. 당숙모는 자식이 나 혼자일 때 앞날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따라 살지 말고 도망가라고, 어디 가면 홀몸 건사 못하겠냐며 엄마에게 밤도망을 권했다. 그런데 내가 눈에 밟혀서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던 엄마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늘 따뜻하게 대하고 챙겼다. 엄마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매년 설 무렵이면 작은 선물로 마음을 표했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당숙모는 젊어서 남편을 여의었다. 아들과 딸은 타지로 일찍 출가시키고 나보다 일 년 빠른 늦둥이 아들과 둘이 살았다. 그런데 그 아들조차 대학 들어가면서 집을 떠나게 되니 방을 세놓은 것이었다.
일 년이면 서너 차례 큰딸 집으로 서울 나들이를 했는데 그해에는 좀 길게 다녀온다고 했다. 선생님이 사는 방은 당숙모가 사는 안채와는 떨어진 대문 바로 옆 건물이었다. 미혼의 여선생을 혼자 놔두고 가기 불안했는지 어느 날 당숙모는 집에서 저녁밥까지 먹고 와서, 비어 있는 아들 방에서 잠만 자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혼자는 어색하고 무서워서 불러들인 게 옥과 영이었다.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날부터 약 두 달 간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옥은 나와 한동네 살았다. 우리 집에서 이름을 부르면 대답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그녀의 엄마와 아버지는 하우스 일로 항상 바빴다. 남동생만 셋이 있는 옥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거들었다. 학년에서 키가 가장 작았으나 공부도 잘하고 야무져서 선생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란 줄 알겠지만, 실상은 고명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일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녀 집에 놀러 가면 동생들 밥 차리려고 부엌에 있거나, 온 가족 빨래하느라 수돗가에 있는 게 다반사였다. 일주일 치를 몰아서 하는지 커다란 고무 대야에 담긴 양이 엄청났다. 몇 시간을 해도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영이는 딸만 내리 여섯 있는 집의 둘째이다. 영이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언니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전신전화국에 다니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학교에서는 늘 유쾌하고 웃음이 많았기에 집안의 그런 사정은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야 알았다. 옥이와 내가 한동네 사는 데 비해 영이의 집은 마을과 꽤 떨어진 데다 가로등도 없는 외진 공원을 지나야 했다. 그래선지 걸어서는 이십여 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짐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80kg의 쌀 한 가마니도 거뜬히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뒷자리가 넓었으나 그녀가 타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체구가 작은 옥이가 자전거의 핸들과 안장 사이를 연결하는 프레임에 앉았다. 사람이 앉을 수 없는 곳이어서 조금 오래 타면 엉덩이가 아팠다. 덩치가 있는 내가 넓은 뒷자리에 앉았다. 나랑 체구가 엇비슷한 영이가 모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당숙모 집으로, 군것질 가게로, 또 영이 집으로 여름방학 내내 돌아다녔다. 한여름이라 조금만 타면 땀이 비 오듯 했다. 선생님이 방학을 맞아 광주로 가자 우리 세상이 되었다. 저녁마다 모여서 수다 떠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공부는 낮에 학교에서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위안했다. 냉장고를 뒤져 당숙모가 제사 때 쓰려고 아껴둔 곶감도 먹어 치웠다. 처음에는 한 개씩만 나눠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당숙모에게서 사연을 전해 들은 엄마한테 혼이 나긴 했지만 곶감의 그 달달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돌을 씹어 먹어도 맛있을 열아홉의 여름이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실 북해도는 겨울이 좋다. 춥고 눈 내리는 날이 많아서 일 미터가 넘게 쌓이기도 한다. 도로인 걸 표시하는 표지판이 빨랫줄처럼 공중에서 이어져 있다. 스노우 체인을 낀 차들은 그 사이를 꽤 빠르게 달린다. 하늘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는데 뜨끈한 온천에 몸 담그고 바다처럼 넓은 도야 호수를 바라다보면 신선이 된 듯 황홀해지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겨울의 낭만은 없지만 우리나라보다 조금 시원한 곳이기에 친구들과의 첫 해외 여행지로 선택했다. 보라색 라벤더가 끝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는 ‘후라노’에 갔다. 아쉽게도 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그 꽃을 원료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앉은 자리에서 두 개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지만 비쌌다.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와서- 당시 엔화 환율이 지금의 1.5배였다- 기대하던 라벤다 평원도 못 보고 실망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 우리에겐 밤시간이 있어. 숙소 옆 슈퍼에 들러 간단한 장을 봤다. 드디어 내가 준비해 온 것을 내 놀 차례다. 짜잔. 깨지지 않게 옷으로 여러 겹 둘러싼 다섯 병의 산*춘 등장이오. 당시 함께 어울리던 친한 언니에게서 여자들이 마시기에 적당한 술이라고 추천받은 터였다. 술을 못 마시는 나와 옥이가 반 병씩 나눠 마시고, 남은 친구 둘이서 하루에 각 한 병씩 마시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일본에는 술 없을까 봐 그 무거운 걸 여기까지 가져왔냐, 여행 와서나마 현지 술을 맛보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망했다는 구박이 쏟아졌다. 그런데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기분이 좋아진 친구들은 내 계산과는 다르게 그날 밤에 준비해 간 술을 다 없애버렸다.
이튿날이 되었다. 술을 주도적으로 마신 두 친구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한 친구는 밤새 토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속이 울렁거려 아침도 못 먹었다. 오타루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멀미가 심했다. 괜히 내 탓인 듯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삿포르 맥주의 본고장인 줄 모르고 저지른 실수였다. 특별히 술을 즐기며 잘 마시는 사람도 없으니 그냥 맥주 정도면 적당했을 것을, 여행의 설렘에 과하게 취해 벌어진 일이었다.
항구 도시 오타루는 운하가 유명하다. 주변에는 오래전에 지어진 창고 건물을 레스토랑이나 카페로 개조한 곳이 많다. 당시에는 천장이 높고 지붕이나 벽돌 등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건물이 마무리가 덜 된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그런데 유행은 돌고 돌아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보인다. 오타루는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지여서 특별히 더 기대했던 곳이다. 1999년에 우리나라에 개봉 당시 “잘 지내고 있나요?”라는 의미의 극중 대사인 “오겡키데스까?”라는 말이 유명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서도 내 친구의 뱃속은 편해지지 않았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가스등이 불을 밝히는 밤이 되면 사진 속에서나 보던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되겠으나, 낮에 보는 그곳은 시시했다.
그러던 차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부 끝에 술로 고통받는 친구 이야기를 전했더니 특효약이라며 알려준 처방이 걸작이다. 맥주를 마시면 거짓말처럼 속이 편해질 거란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라며 그걸 사서 길거리에서 마셨다. 어젯밤 취했던 두 친구나, 멀쩡한 두 사람이나 여행의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신이 편안해야 풍경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 아니던가. 더구나 쉽게 병원에 갈 수도 없는 해외에서는 더더욱.
해장술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전날의 술기운으로 거북한 속을 풀기 위하여 마시는 술’로 나와 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침부터 마시기에 그리 부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과연 뜻풀이는 정확했다. 맥주를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숙취에 시달린 친구 둘은 멀쩡해졌다. 아침을 거른 탓인지 점심도 맛있게 잘 먹었다. 나머지 날은 술 근처에도 가지 않은 채 여행을 마쳤다.
북해도 여행을 다녀온 지 십 년이 넘었다. 그 사이 옥과는 작은 오해로 갈라섰다. 그때의 사진을 볼 때마다 잘 살고 있으려나 안부가 궁금해진다. 나는 여전히 모임이 있으면 술부터 챙긴다. 마시진 못하지만 그것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남자와 오래 살다 보니 종류나 특징에도 빠삭하다. 지금도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그 친구들과 슬슬 여행 계획이나 세워 볼까? 문제는 코로나다.
첫댓글 우리 집 남편도 해장술 즐겨 마십니다. 하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게요. 글 읽다 보니 공통점이 많더라고요.
잊지못할 여행이었겠네요. 고놈의 술이 여럿 힘들게 하네. 하하!
네. 지금도 친구들 만나면 종종 이야기한답니다.
북해도 여행의 가신 곳곳의 전경이 눈에 펼쳐지는 것만 같은 글이네요.
네. 겨울 여행지로 추천합니다. 멋진 곳입니다.
지금까지는 패키지로 갔는데 다음번에는 자유여행으로 가 보려고요.
선생님 글 읽을때마다 세세한 기억력에 놀란답니다. 해장술 마시는 사람을 이해 못했는데 그런 효능이 있었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가요? 잘 아는 내용만 글로 쓰다 보니 그런 듯합니다. 저도 그 이후 해장술을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제가 가 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가 북해도인데, 더 가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겨울 여행지로 최고입니다. 이제 코로나 풀리면 계획 세워 보시지요. 요즘 엔화가 떨어져서 더 좋더라고요.
의사들은 해장술이 건강에 좋지 않다며 먹지 말라 해요. 그러나 확실히 속이 편해 지거던요.
아침부터 먹는 술이 좋을리 없지요. 그런데 숙취해소에는 그만인가 봅니다.
제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지만요.
친구들을 소개한 부분만으로도 좋은 한 편의 글이 되겠어요. 내 추억인 것처럼 따뜻하고 그리워집니다.
예리하시군요.
친구 이야기, 여행 이야기를 섞어쓰다 보니 글이 단정하지가 못하네요.
교수님께 야단 들을 각오로 올렸답니다.
여고, 대학, 직장 친구로 부자랍니다. 하하.
@이팝나무 앗, 지적한 것처럼 들렸나요, 선생님. 제가 감히 그런 주제는 못 되고요, 여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구체적이고 생생해서 감동적이라는 말이었어요.
@박선애
아이고, 지적은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글이 좀 길어져서 마음 쓰이던 참이라서 그런 거지요.
저 친구들과의 일화는 담에 또 한편의 글로 만들어야지요.
지금도 자주 만나거든요.
선생님 마음 잘 전해집니다.
눈의 고장 홋카이도 지역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여행지로 가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덕분에 대리만족했네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네. 사실 저는 여러 번 갔답니다.
이 친구들과, 시누이 세 분과 남편이랑, 남편의 친구들 모임 따라서요.
눈이 일 미터 넘게 쌓였던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어요.
같은 공간인데 눈이 없으니 즐거움이 반감되더라고요.
꼭 폭설이 내릴 때 가셔요.
아참, 그러고 보니 이번에 바쁘셨나 글이 없군요.
농촌은 겁나게 바쁠 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