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 드는 길을 알아낸 넉넉한 품
- 이상호, 《당돌한 물음》(넓은마루, 2026)을 읽고
-윤동재
아직은 쌀쌀한 봄날 저녁, 이상호 시인의 따뜻하고 넉넉한 품 같은 시집 《당돌한 물음》을 읽었다. 시와 사람이 꼭 닮았다. 따뜻하고 넉넉하며,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는다.
젊은 날, 이상호 시인과 함께 한국시인협회 간사 일을 맡아 했던 인연이 떠오른다. 그가 이제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되었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시인은 평소 남에게는 봄바람 같으면서도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한 분이었기에, 회장으로서의 소임 또한 누구보다 훌륭히 수행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죽음이 내릴 때까지 / 온전을 비는 사람들 / 목을 쳐도 금세 목을 만드는 풀처럼. / 오늘은 사랑으로 태어났고 / 내일은 믿음으로 태어나리
— <인디언 기우제> 전문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인디언처럼, 시인은 어떤 고난이 닥쳐도(목을 치는 행위) 다시 돋아나는 풀의 생명력을 예찬한다. 오늘 우리가 사랑으로 태어났다면, 내일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시인의 노래는 그의 품성처럼 넉넉한 낙관을 보여준다.
이른 아침부터 세월만 낚던 그 사람 / 해거름에서야 자리를 뜨네 빈손으로 / 뿌리째 건져 올린 뒷산 저만큼 놓아두고 / 잠시 폈던 마음꽃 지는 어둑한 도심으로
— <진짜 낚시꾼> 전문
온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도 빈손으로 자리를 뜰 줄 아는 이가 진짜 낚시꾼이라 말한다. 물질적인 수확보다 마음의 꽃이 피고 지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태도, 그 속에 따뜻함과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천방지축 나대던 시절 / 그 애에게 감꽃 팔찌 만들어 줄 때는 / 감도 홍시도 보이지 않았는데 / 나이 한참 들어 / 곶감 만들려 감 깎다가 보았네 / 단맛 드는 길 / 덜 익으면 떫고 / 너무 익으면 물러터지게 하는 / 시간의 몸
— <때맞춤> 전문
젊은 시절엔 보이지 않던 '단맛 드는 길'이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곶감을 깎으며 깨달음을 얻는 대목은 과연 삼백(三白)의 고장인 상주 출신 시인답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기보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자연스럽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빛난다.
이 시들을 읽는 사이, 나 또한 어느새 조금은 넉넉하고 따뜻해졌을까.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괴팍하거나 난삽하지 않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열리고 이해되는 시들이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마음이 넉넉해지고 느긋해지는 이런 시가 점점 귀해지고 있다. 난해하고 조급한 시들이 넘쳐나 시와 멀어지려는 이들에게 이 시집은 반가운 위로가 될 것이다.
이상호 시인의 귀한 시집 발간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이상호 #한국시인협회 #당돌한 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