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富倫
金富倫字惇叔, 號雪月堂, 光州人。 中宗辛卯, 生進士。 官縣監。 宣祖戊戌卒。
年十六閱書, 至明道先生十六與周茂叔論道, 慨然有求道之意, 歎曰: “吾年亦類是矣。” 作《責沈詩》, 負笈陶山。 篤信師敎, 眞知力踐, 律身制行, 動以禮法自持。
將《心經》、《太極圖》、《義理疑目》、《啓蒙傳疑》, 反復參證, 設爲問目, 以質其疑。 先生亟加稱詡曰: “程、朱師弟之間, 相授受心法如此, 而今足下又能疑及於此。 立志之篤如此, 其所至終可量耶?”
公出爲同福, 建聖廟, 捐俸購書八百卷, 庋諸龕, 著學令, 躬率勸諭, 士風丕變。
壬辰寇深, 公傾家財, 厚助鄕兵, 貽觀察使書, 論禦寇三策, 忠憤動人。 未幾, 守奉化者棄官逸, 公被使檄假守縣城。 上聞公績, 特命爲縣監, 凋瘵者還復舊里, 如不知喪亂。
公出而薰陶則遊大賢之門, 入而講磨則有伯氏山南公、仲氏養正公、從氏後凋公・挹淸公, “魯無君子, 斯焉取斯”者, 其斯之謂歟! 寒岡鄭先生嘗曰: “烏川一里無非君子人。” 蔡濟恭撰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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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월당 김공 묘갈명〔雪月堂金公墓碣銘〕 번암 채제공
내가 일전에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의 유집(遺集)을 읽었는데 당시 문하에 있던 선비들이 학문을 할 때는 덕성을 함양하고, 의심나는 점을 질문할 때는 하늘과 인간의 이치에 대해 끝까지 궁구하니 스승을 대하는 제자들의 온화하며 강직한 의용이 그대로 그곳에 다 담겨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아아, 선비로서 그 시대에 태어나 선생을 만나 귀의처로 삼았던 자는 영광스럽고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삼가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해 보건대, 나는 태어난 시기가 뒤늦은 탓에 우왕좌왕 헤매면서 본받아 따를 분이 없었다. 이에 설월당(雪月堂) 김공(金公)의 행장을 앞에 둔 지금, 어찌 심중의 뜻을 재삼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부륜(富倫), 자는 돈서(惇敍)로 노선생의 수제자이다. 16세에 책을 읽다가, 명도(明道) 선생이 16세에 주무숙(周茂叔)이 도를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서 도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솟구쳤다고 한 대목에 이르러 “내 나이도 이때와 같다.”라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책심시(責沈詩)를 짓고 책 상자를 등에 지고서 도산(陶山)으로 향하였다. 이때부터 주야로 선생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심경(心經)》과 〈태극도(太極圖)〉 가운데 의문 나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논란을 제기하고, “마음속에 한 가지 일도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철저히 궁구하여서는 문목(問目)을 갖추어 질정하고,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는 상례 및 장례와 관련된 의절(儀節)에 대해 질문하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에는 조목별로 열거하여 여쭈고, 의리(義理)에 대한 의문점을 서술한 절목을 통해서 《계몽전의(啓蒙傳疑)》에 대해 누차 다른 글을 참고하여 고증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써 내려간 조목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에 선생은 극진한 찬사를 보내면서 언제나 긴 편지로 답장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께서 사제 간으로 서로 주고받은 심법(心法)이 이와 같은데, 지금 족하께서는 또 능히 여기까지 의문이 미쳐 강구해 터득하려 하는군요.”라고 하였다. 또 “족하께서는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한데 학문을 향한 부지런함과 뜻을 세운 것의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그 종국에 도달할 경지를 예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회암(晦庵)의 편지에 대해 절목을 갖추어 의문을 제기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니, 깊이 궁구하고 정밀하게 사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깊이 바라건대 거듭 말씀해서 빠지고 소략한 부분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보내오신 말씀은 모두 들었던 것을 평상시 마음속에 미루어 검증해 보면서 매우 자세히 사색하고 매우 치밀하게 살펴 식별한 것이니, 여기에서 공력을 들인 절실함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공이 참판공(參判公)의 상을 당하였을 적에 5월부터 겨울이 되도록 죽만 마시는 생활을 이어 나가자 선생이 섶처럼 수척해진 그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였고, 공이 《계몽전의》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고증하자 선생이 그 오류를 깨닫고서 수정까지 하였다. 또 〈독서유감(讀書有感)〉이란 시를 지었을 때는 선생이 평을 하면서 몹시 칭찬하고는 얼마 뒤 또 정문봉 유일(鄭文峯惟一)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김돈서(金惇敍)는 학문에 매우 힘써 무슨 일이든 반드시 옳은 부분을 추구하니,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의 돈독한 효성과 우애는 물론 타고났거니와, 스승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어서 참으로 알고 힘써 실천하며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제어함으로써 언제나 예법으로 스스로 단속하였으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도산의 제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융경(隆慶) 임신년(1572, 선조5)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고 만력(萬曆) 을해년(1575)에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은(謝恩)하지 않고 체직되었다.
경진년(1580)에 또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곧 돈녕부 봉사(敦寧府奉事)로 천직해 정릉(靖陵 중종의 능)의 석역(石役)을 관장함으로써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입었다.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과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로 전직하였고, 외직으로 나가 동복 현감(同福縣監)이 되었다. 관아에 도착한 뒤 공성묘(孔聖廟)를 개축하는 한편, 봉급을 출연해 서책 800권을 구입하여 감실(龕室)에 보관하고 학령(學令) 수십 조를 지어 몸소 이끌면서 권면하고 타일렀다. 이에 선비들의 풍속이 일변하고 백성들 또한 크게 화합하여 임기가 다하여 돌아간 뒤에 비석에 글을 새겨 칭송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깊은 곳까지 침입해 들어오자 공이 가산을 털어 향병(鄕兵)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관찰사 김수(金睟)에게 편지를 보내어 왜구를 막을 세 가지 방책에 관해 논하였는데, 전후의 수천 글자 속에 담긴 충의와 분노가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화(奉化)의 수령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발생하여 공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임시로 현성(縣城)을 지켰는데, 그 이듬해 상이 공이 이룬 성과에 대해 듣고는 특명을 내려 현감으로 삼았다. 그러자 피폐하고 지쳐 있던 자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환란을 겪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그렇게 1년을 있다 벼슬을 사양하고 체직되어 귀향하였다.
무술년(1598) 9월 13일에 침소에서 생애를 마쳤는데, 태어난 해인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26)으로부터 68년을 산 것이다. 안동(安東) 방잠리(方岑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바로 참판공의 묘 뒤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탁월한 품성을 지녔다. 12세에 대부인의 상을 당하자 예법을 지키는 과정에서 그 어떤 허물도 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참판공을 모시고 밥을 먹을 적에 시종이 실수로 공에게 고깃국을 올리자 공이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니, 참판공이 어여쁘고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이후 온 마음을 학문에 집중하게 되었을 때, 나가서 훈도(薰陶)를 받으면서는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노닐었고 들어와 강마(講磨)를 하면서는 두 형님인 산남공(山南公)과 양정공(養正公), 사촌인 후조공(後凋公)과 읍청공(挹淸公)과 함께하였으니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하였겠는가.”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은 일찍이 “오천(烏川)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는바, 이는 참으로 식견이 있는 말이다. 공이 이룬 학문의 경지는 물론 후생이 살펴 헤아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삼가 사문(師門)의 기대와 칭찬 및 한로(寒老)의 칭송과 찬탄으로 보건대 찬란하게 덕을 성취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전아한 문장과 굳센 필법 같은 것이 어찌 족히 공에게 특별하겠는가.
공은 본관이 광주(光州)로, 신라 왕자 흥광(興光)의 후예이다. 왕자의 후손인 길(吉)이 고려의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워 지위가 삼중대광 사공(三重大匡司空)에 이르렀다. 자손이 대대로 정승을 지냈는데,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천리(天利)라는 분이 밀직사 부사(密直司副使)를 지냈으며 공에게 6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회(淮)로 현감을 지내고 병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효로(孝盧)로 성균관 생원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는데, 처음으로 예안(禮安) 오천리(烏川里)에 거처를 정하였다. 일찍이 탁월한 행실로 조정에 천거되어 현달한 위치에 오르려 하였으나 마침 기묘년(1519)의 화가 일어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하였고, 사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 주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수(綏)로 성균관 생원이고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탁청(濯淸)이다. 퇴도가 2대(代)의 묘명(墓銘)을 지었다. 모친은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판서에 증직된 김수홍(金粹洪)의 따님이며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공의 선취(先娶)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감찰 박순(朴純)의 따님인데 자식을 길러 내지 못하였다. 계취(繼娶)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부호군 신수민(申壽民)의 따님이며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령(坽)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을 지냈는데, 절의(節義)를 가지고 세속에 따르지 않고 홀로 행동하여 백이(伯夷)의 풍도가 있었다. 숙종(肅宗)의 명으로 승정원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딸은 최민수(崔民秀), 김경업(金景業), 익위(翊衛)를 지낸 이찬(李燦)에게 출가하였다.
령은 4남을 두었는데, 요형(耀亨)과 요립(耀立)은 모두 재주와 훌륭한 품행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휘두(輝斗)는 진사로서 고상한 행실을 지녔다. 휘세(輝世)는 유일(遺逸)로서 등급을 뛰어넘어 공조 좌랑에 제수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요형은 석창(碩昌)을 후사로 삼았다. 요립은 1남을 두었는데 선창(善昌)이고, 휘두는 2남을 두었는데 시창(是昌)과 용(鏞)이다. 휘세는 3남을 두었는데, 석창(碩昌), 참판에 증직된 후창(厚昌), 집(鏶)이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명(銘)을 부탁한 자는 7세손 시찬(是瓚)이다.
공이 일찍이 냇가에 정자를 지어 학문하는 장소로 삼았을 때 퇴도가 손수 ‘설월당(雪月堂)’이란 3자를 써 주었는데, 그것을 자호(自號)로 삼았다고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퇴도를 스승으로 삼고 / 以退陶爲師
계암을 자식으로 두니 / 以溪巖爲兒
위대하다 공의 도여 / 偉哉公之道
위부터 계승하고 아래로 전했다 뉘 아니 말하랴 / 孰不曰上承而下貽
雪月堂金公墓碣銘 a
濟恭嘗讀退陶老先生遺集。見一時及門之士爲學則涵養德性。質疑則窮到天人。誾誾侃侃之儀依然盡在是矣。嗚呼。士生斯世。得先生爲歸者。豈不榮且幸哉。竊自恨吾生也後。倀倀焉靡所型範。今於雪月堂金公之狀。安得不三致意也。公諱富倫。字惇敍。老先生之高弟也。年十六。閱書至明道先生十六因周茂叔論道。慨然有求道志。歎曰。吾年亦猶是。於是作責沈詩。負笈陶山。自是日夕親炙。勤苦靡懈。心經太極圖。有疑則難焉。心中不可有一事之語推究到底。則設問目質焉。居喪則以喪葬儀節問焉。朱子書節要。起疑則條列禀焉。以至義理疑目。啓蒙傳疑。反復參証。其條非一。先生亟加稱詡。每以長牘見復而有曰。程朱師弟之間。相授受心法如此。而今足下又能疑及於此。欲講而得之。又曰。足下年富力强。向學之勤。立志之篤如此。其所至終可量耶。有曰。晦齋書節目所疑。極其詳悉。非深究精思。何以及此。深望反覆垂諭。庶無闕略。有曰。來諭旨以所聞推驗於日用操術之間。思索儘細。察識儘密。可見用工之切。公之丁參判公憂也。自五月歠粥至冬。則先生悶其柴瘠。貽書勉之。公之考啓蒙疑處。先生覺其誤並改之。公之賦讀書有感詩也。先生評隲嘉奬殊甚。已又與鄭文峯惟一書曰。金惇敍爲學甚力。每事必求是處。甚不易得。葢公之孝友敦厚。固得之天賦。而篤信師敎。眞知力踐。律身制行。動以禮法自持。不問可知爲陶山弟子也。隆慶壬申。薦遺逸除集慶殿參奉。萬曆乙亥。除典牲署參奉。皆不謝而遞。庚辰。又除文昭殿參奉。俄遷敦寧府奉事。差管靖陵石役。被錫馬典。轉濟用直長,內贍主簿。出爲同福縣監。旣到官。改建孔聖廟。捐俸購書八百卷。庋諸龕。著學令數十條。躬率勸諭。士風變民亦大和。及秩滿歸。刻石以頌焉。壬辰倭冦深。公傾家財厚助鄕兵。貽觀察使金晬書。論禦冦三策。上下數千言。忠憤動人。未幾守奉化者棄官逸。公被使檄。假守縣城。明年。上聞公績。特命爲縣監。凋瘵者還復舊里。如不知喪亂。居一年辭遞歸。戊戌九月十三日終于寢。距其生嘉靖辛卯。得年六十八。葬于安東方岑里某向之原。實參判公墓後也。公幼有至性。十二。遭太夫人憂。執禮罔愆。一日。侍食參判公。侍者誤以肉羹進於公。公涕泣不已。參判公憐而奇之。及其專心問學。出而薰陶則遊大賢之門。入而講磨則有伯仲氏山南,養正公。從氏後凋,挹淸公。魯無君子。斯焉取斯者。非此之謂耶。寒岡鄭先生嘗曰。烏川一里。無非君子人。誠知言也。學問造詣。固非後生所可窺度。而竊以師門期詡。寒老稱歎觀之。其斐然成德可知也已。若其文章之典雅。筆法之遒健。何足爲公重也。公光州人。新羅王子興光之裔也。王子之孫吉。佐麗太祖有功。位三重大匡司空。子孫世爲宰輔。入本朝。有諱天利。密直副使。於公六代祖也。曾祖諱淮縣監贈兵曹參議。祖諱孝盧。成均生貟贈吏曹參判。始居禮安烏川里。嘗以卓行薦于朝將顯。値己卯禍作不果。士林立祠以祀之。考諱綏。成均生貟贈戶曹參判。號濯淸。退陶銘兩世墓。母順天金氏。贈判書粹洪之女。贈貞夫人。公先娶密陽朴氏。監察純之女。不育。繼娶平山申氏。副護軍壽民之女。有一男三女。男坽文科司諫。以節義特立獨行。有伯夷之風。肅宗命贈承政院都承旨。女崔民秀,金景業,李燦翊衛。坽有四子。耀亨,耀立俱有才行夭。輝斗進士有高行。輝世遺逸超拜工曹佐郞贈左承旨。耀亨以碩昌嗣。耀立一子善昌。輝斗二子是昌,鏞。輝世三子。碩昌,厚昌贈參判,鏶。玄孫以下不盡錄。今乞銘者七世孫是瓚也。公常構溪上亭爲藏修所。退陶手書雪月堂三字以與之。仍以自號云。銘曰。
以退陶爲師。以溪巖爲兒。偉哉公之道。孰不曰上承而下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