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달콤한 목소리 / 한정숙
6개월에 한 번씩 서울 병원에 간다. 기본적으로 피검사를 하고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찍는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 결과를 보러 간다. 가장 불편한 시간이다. 담당 교수를 만나는 시간은 5분이 안 되는데 어쩌면 그리 길고 불편한 지.
의료 대란이 일고 있는 중이라 일정이 흐트러졌다. 8월이었던 정기 검진이 9월 24일로 연기 되었다. 전화로 확인해 보니 그 날 검사 항목이 ‘채혈’이라고 안내한다. 어? 의사 선생님이 안내할 땐 몇 가지 더 있었는데? 다시 확인했으나 자동응답기는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사실 진료가 끝나면 다음 일정을 출력해 주고 휴대폰 달력에 기록도 했으나 매 번 하는 검사이니 이번엔 건너뛰나 보다 생각했다.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는 데 이번에는 여자 간호사다.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세심하여 혈관을 잘 찾는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이번에는 고맙게도 팔에서 채혈을 했다. 고통을 많이 받았던 혈관은 바늘을 감지하면 깊숙이 숨어버려 팔에서 실패하곤 손등에서 피를 뽑았었다. 그리고 보름 이상을 바늘 자국 주변에 생긴 수포로 고생을 했다. 이번엔 검사도 한 가지, 그것도 팔에서 해치웠으니 얼마나 좋은가? 간호사에게 인사하고 나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저녁엔 큰 아이와 함께 시원하게 웃으며 ‘젠틀맨스 가이드’라는 뮤지컬을 보았다.
그 작품은 1909년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몬티나바로가 귀족가문인 다이스퀴스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서열이 빠른 여덟 명의 가족을 죽이고 백작이 되려는 이야기를 다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뮤지컬이다. ‘사랑과 살인편’이라는 부제도 흥미를 끌었지만 좋아하는 ‘정문성’ 배우가 출연하여 보게 되었는데 다이스퀴스 역을 맡은 그는 1인 9역 8명의 다이스퀴스 가족과 청소부 역을 맛깔스럽게 연기하며 관객을 웃음바다에 빠뜨렸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큰 병원에서는 검사와 결과 보는 일을 하루에 하진 않는다.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결과는 일주일 후에 다시 내원하여 담당 교수에게 듣는다.
10월 2일 아침 일찍 2시간 40분 기차를 타고 수서역에 내려 택시로 병원에 갔다. 검사하는 날 워낙 기분이 좋았으므로 결과도 문제없으리라 생각하고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모니터를 확인하는데 예약한 시간이 지나가도 이름이 뜨질 않는다. 궁금하여 접수처에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지난주에 해야 할 검사를 빠뜨렸으니 다시 가서 하고 오라고 한다. 두 가지나 빠뜨렸다. 사실 매 회 피검사와 엑스레이, 초음파 검사는 기본이고 필요시 다른 검사를 더하는 것이었는데 간단한 피검사만 한다고 좋아해버린 것이다. 내심 결과에 따라 부담이 올 수 있는 두 가지 검사를 하고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아들과 뮤지컬 볼 생각에 어떤 일이 중한지 무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의료진들이 병원을 많이 빠져나간 탓인지 환자가 붐비지 않아 장소를 옮겨가며 차근차근 검사를 받았다. 올 때 마다 느끼지만 할 때 마다 편치 않다.
다행히 담당교수님의 진료시간이 끝나지 않아, 조바심내고 기다리다가 맨 꽁무니에 붙어 들어갔다. 4년 전 병원을 드나들기 시작할 때 섬에서 근무 중이어서 병원 자료에는 주소가 신안으로 기록되었고, 먼 곳에서 오가는 나이 든 환자를 매우 걱정스러워 했었다.
“안녕하세요? 한정숙 씨, 건강관리 잘 하고 계시지요?”라고 시작하는 의사의 진료는 피검사엔 특별한 이상이 없고 6개월 전에 주의를 준 것처럼 콜레스테롤이 높으니 자주 다니는 가까운 병원에서 의논하고 약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검사 자료가 없는 것을 알아채고 채근을 한다. 나의 궁색한 변명을 듣고는 딱하다는 눈빛으로 “무슨 말씀이세요? 정기 검진할 때 매번 하시던 걸 안 하면 어떡합니까? 오늘 검사했느니 결과는 다음 주에나 나올 텐데요.” 한다. 잠시 머리가 어질하다. 내가 병원 올 때면 진료에 덧붙여 하고 싶은 일을 한 두 가지쯤 하지만 3주를 연이어 온다는 건 내키지 않는다. 더구나 내 불찰로 병원을 또 오게 되면 가족들도 걱정할 것이 뻔하다.
의기소침한 환자에게 그는 담백하게 “다음 주 일주일 동안 병원에서 따로 연락이 안 가면 검사 결과가 괜찮은 것이고요, 연락이 가면 내원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한다. 왕래하기 힘들 것이라면서. 진료실을 나오면서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입으로만 ‘채식주의자’인 척했지 이런 저런 핑계로 고기를 입에 대고, 구실을 만들어 달콤한 빵도 먹을 수 있는 면죄부를 받고, 심지어는 기분과 날씨를 탓하며 커피도 허용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건강관리를 전혀 안한 것 같다.
검사 결과는 괜찮았느냐는 남편의 말에 시큰둥하게 그렇다고 답하고 병원의 연락을 기다리는, 아니다 연락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하루하루가 재미없고 지루했다. 시계 바늘은 늘 멈춘 듯이 보였고 온몸이 근질거리고 무거웠다. 우울도 심해졌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러다가 호기롭게 “에라, 모르겠다. 결과 나온 후에 걱정하자.” 했다가도 다시 소심한 천성이 극성을 부렸다. 더디게 일주일이 흘렀다. 휴대폰 진동소리에 깜짝 놀라며 번호를 확인하고 가재 눈으로 문자를 읽었다. 그렇게 한 주일이 무소식으로 지났다. 다행이었으나 기분은 금세 좋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며칠 뒤 생겼다. 여러 날 여행을 갔다 와 짐을 정리하며 소용없는 내용을 지우려고 열어보니 미확인 문자가 수두룩하다. 하나하나 지워 가다 순간 숨이 멈췄다.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담당 교수의 말대로라면 10월 11일까지 이상 있을 시 안내 문자가 갈 거라고 했는데 16일에야 문자가 들어온 것이다. “서울아산병원 00초음파실입니다. 문자 확인하시면 전화 주세요. 감사합니다.” 칼날 같은 내용을 25일에야 확인했다. 큰일이 난 것이다. 온몸이 떨려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아득할 뿐이었다. 기어이 사달이 난 모양이다. 가슴이 쓰리기 시작했다.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 병원으로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험한 소리를 듣는 것은 감당이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분히 생각을 모았다. 주변을 정리해야지 생각하니 기운도 빠지고 앞이 캄캄했다.
나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은 비밀번호가 필요한 것은 모두 내 생일로 했다지만 나는 아니다. 용도마다 따로 정해서 매번 번호를 알아내는 데 애를 먹다가 다시 바꾸곤 하여 난감할 때가 많았다. 통장이랑 보험이랑 한꺼번에 보관하고 알려줘야지 다짐하고 목포 근처에 있는 수목장도 찾아보았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은 죽으니까.
답답한 마음으로 주말을 넘기고 월요일을 맞았다. 언제 전화해야 할까? 요모조모 따져보았다. 오전엔 가까운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고 마음을 다진 후 오후에 전화를 해야지 생각하며 운동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데 감정이 미묘했다.
한동안 물끄러미 앉아 있다가, 미루는 것만큼 아픔이 클 것이다 생각하며 서울로 전화를 했다. 연락하는 이유를 이야기 하고 검사 결과를 물었다. 찾아보겠다는 요원은 검사받는 환자가 많아서 어렵다며 기다리면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묵묵부답이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바를 모르다가 받아들이고 대처하기로 마음먹은 후 크게 숨을 쉬고 전화를 했다. 그런데 신원을 확인하며 자료를 찾는 검사원의 숨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 아, 다음 진료일이 2025년 4월 11일 이죠? 그날 담당 교수님이 학회에 참석하셔야 해서 진료를 못하세요. 그래서 내원 날짜를 옮겨 주시라고 연락했었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를 남겼고요.”
세상에 그렇게 달콤한 목소리도 있을까?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나는 아직 통장과 보험 증서를 정리하지 않았고, 비번도 따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첫댓글 교수님, 부족한 글이 늦었습니다. 제출 기한이 늦었으니 지도 받지 못해도 감당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에구, 얼마나 마음 졸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다고 수목장까지 찾아 보시다니요?
괜찮을 겁니다.
토닥토닥.
따뜻한 마음에 잠깐 목이 메입니다. 그냥 나날이 축복이지요.하하
아이구, 다행입니다. 마음 졸이면서 읽었거든요. 운동 하시면서 마음 편히 잘 지내시면 내년 4월 검사도 아무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아닌 듯 하면서도 극 조심좌라, 하고 싶은 것 하나씩 지우면서 씩씩하게 살아야죠.호~
아주 조마조마하게 잘 쓰셨네요.
저도 마음 졸이며 읽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팬인 제게 위로를 주시니 힘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