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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강 창세기 12:10~20 애굽으로 내려갔으니 43.16
26.09.19(토)
하나님께서 하란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죠.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보여주신 다음에 그 땅으로 가라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아니죠. 그죠
지금 땅을 현재형으로 보여주시면서 야 이 땅 보이지 이리로 가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가는 것은 현재형인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것은 과거형이나 현재형이 아닌 미래형이었습니다.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보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믿음의 핵심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늘 하나님과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언제든지 보여주시면 보고 가겠다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시고 내가 다 본 다음에 가는 것은 그건 계산이고 거래라 그랬습니다. 그건 믿음이 필요 없다고 그랬죠
보지 않고 가는 것이 믿음이란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거래를 하시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믿음의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는 거예요.
왜 계산과 거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게 큰 것처럼 보여도 내일 저게 큰 것처럼 보이면 얼마든지 거래 중단하고 거래처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영원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든지 믿음의 관계를 우리와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시고 가라고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라 먼저 순종해라 먼저 행하라 그러면 보여질 것이다. 그러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누리게 될 것이다. 항상 우리에게 먼저 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도 않은 그 땅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약속이라는 게 뭐여요?
너로 창대한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크게 해주고 네가 복 그 자체가 되고
아브라함의 현실은 전혀 그와는 동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는 아직 자식 한명도 없고 그의 이름은 박복의 대명사이고 그는 사람들로부터 조롱받는 처지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것 하나도 보여주시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약속만 믿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갔더니 그 땅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그랬다면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에게는 또 믿음이 필요 없겠죠. 하나님이 필요 없겠죠. 주어진 것만을 누리려 하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갔는데 그 땅에는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단 말이죠.
그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은 다 유목민들 아닙니까 유목민들은 자기 바운더리 내에 외부인이 오는 것을 꺼립니다.
왜 외부인이 가축을 끌고 와서 초목을 먹이면 자기네들의 초목에 저 이 저 짐승 가축에 손해가 끼쳐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지 내쫓는단 말이죠.
그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평원도 아니고 벧엘과 아이 사이 산 위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곳에 장막을 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도 원주민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그 땅을 너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또 믿었습니다.
거기서도 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오래 견딜 수는 없었습니다.
계속 남방으로 옮겨갔죠 남방으로 계속 옮겨갔다 장막을 옮겨갔는데 그 원문을 보면 장막을 뽑았다. 걸어갔다 다시 뽑았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마다 원주민들의 텃세와 위협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이곳에서 내일은 저곳에서 잠을 자는 고달픈 삶이 계속된 아브라함의 실상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어 내가 와봤는데 내 계산이나 내 상상하고 전혀 다르군 그러면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고생할 바에야 내가 그동안 잘 닦아둔 기반이 있는 하란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보따리 싸서 과거로 회귀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지키려고 한 것이죠.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얼마나 출중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브라함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에는 전혀 다른 아브라함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지금 그 땅이 어디죠
9절 보니까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남방이여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 저 남쪽 끝에 지금 아브라함이 기거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말로 남방이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말이 네게브인데요. 실제로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제일 남쪽 사막 이름이 네게브입니다.
그러니까 네게브라고 하는 말은 남방이라는 뜻도 되지만 남쪽에 있는 사막도 부르는 명칭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원주민의 원주민들의 텃세에 밀려서 밀려서 어디까지 갔는가 남쪽 네게브 사막까지 갔는데 그 사막에 기근이 들었단 말이죠.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가
그 다음에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아브라함이 뭐 딴 고민 전혀 하지 않고 기근이 들자마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길이가 장장 6400km에 이르는 나일강이 있지 않습니까? 수량이 풍부해요. 그 땅에도 물론 기근도 있고 가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나일강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네게브 사막보다는 훨씬 견디기가 쉬울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혀 고민 없이 그 나일강이 있는 애굽 땅으로 넘어갑니다.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왜 아브라함이 이처럼 전혀 고민 없이 그저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순식간에 가나안을 넘어서 애굽으로 넘어가는가
10절 다시 보십시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기근이 보통 기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심했습니다. 우리말 시마다로 번역된 된 카베드라고 하는 히브리 말은 아주 무겁다는 뜻이에요. 기근이 극심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란에서 살던 아브라함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근입니다. 평소에도 네게브 사막에 비가 오지 않거나 기근이 들거나 가뭄이 들면 간간히 보이던 풀들도 다 말라 죽는데 기근과 가뭄이 들었으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단 한번도 거기에서 위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더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비옥한 땅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 애굽으로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이 있으실 때 사람들을 애굽으로 불러내셨죠 그죠
이를테면 요셉 같은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애굽으로 불러내셔서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 가운데 총리가 되게 하시지 않습니까?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애굽으로 불러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다르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약속의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10:03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도 가나안 땅을 떠나면 안 되어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극심한 기근이란 현실 문제가 자기 앞에 탁 터졌을 때 지금까지 원주민의 텃세와 이런 것은 잘 견뎠는데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극심한 문제가 터졌을 때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가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하나님의 자유 의지는 무진장한 자유를 의미하지 않지 않습니다. 자기 통제와 자기 절제 없는 자유는 방종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되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을 동시에 주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최초의 인간의 경우에는 지켜야 할 선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에덴 동산 안에서 그들이 무엇을 먹든 무엇을 하든 다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해서는 안 될 하나의 선이 있었습니다. 그건 선악과여요.
그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 그 선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믿음의 선을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가 각자가 지켜야 할 선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은 이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임을 믿는 믿음을 지닐 때만 그 선을 지킬 수 있어요.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갔던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의지했기 때문에 갔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기근을 보니까 그 극심한 기근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성이 상대적으로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선을 넘었습니다.
하와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적인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받고서 그 선악과를 봤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현실의 유혹이 자신을 압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그는 놓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선을 결국 넘었습니다. 그죠 그걸 먹었죠.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실낙윈이었습니다. 내 욕망은 당장 채웠지만 그로 인해서 그는 한평생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지 않았습니까? 보디발이라고 하는 바로 왕의 경호대장 경호실장 집에 종으로 이제 종살이를 하는데 그가 얼마나 충실했던지 보디발이 신임하지 않습니까?
그 집 모든 일을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금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내 아내여오 네가 이 집에서 뭐든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내 아내만은 손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 선이에요.
창세기 39장 7절 보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냥 들어만 보십시오.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그런데 바로 그 주인의 아내가 여주인이 청년 요셉을 유혹했단 말이죠. 동침하자는 거예요.
그랬더니 요셉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우리 주인이 이 집안에서 모든 것을 다 허락했지만 단 하나를 금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다. 이러면 안 된다. 아주 단호히 거절을 했습니다.
한 번쯤은 누구나 다 거절할 수 있겠죠.
창세기 39장 10절입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그 다음날 하루 한 번 더 청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날마다입니다.
그러면 이틀 지나고 사흘 지나고 나흘 지나고 열흘 스무 날이 되면 날마다 똑같이 유혹한다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죠.
그런데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않았다. 요셉은 자기가 지켜야 될 선에 대해서 철저했습니다.
동침 안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여자가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39장 11절 12절이에요.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아마 여주인이 요셉을 유혹하기 위해서 그날은 의도적으로 다른 모든 종들을 내어 보냈나 보죠.
집안에 아무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지금까지는 말로만 매일매일 집요하게 유혹했는데 이날은 아예 요셉을 잡았습니다. 옷까지 잡았어요.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옷을 벗어 던지고 요셉은 나가버렸습니다.
단지 그것이 보디발이라는 자기 주인이 금한 선이기 때문에만 요셉이 이렇게 그 선에 철저했겠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바로 그 주인의 명령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거든요. 남의 아내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을 요셉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 선을 지키려다가 결국 모함 받잖아요.
옥살이 하지 않습니까? 그 선을 지키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그 선을 지키려다 요셉은 고달팠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지켰기 때문에 요셉은 그 이후에 영화로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와는 정반대죠
순간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다가 일평생 고달픈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라면 요셉은 지켜야 될 선을 지키기 위해서 고달픈 삶을 선택했다가 오히려 그의 인생이 영원토록 영화로워졌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지켜야 될 선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망각하고 지켜야 될 믿음의 선 자체를 포기해 버린 거예요.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아브라함에게 생기는가
11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지금 믿음의 선 지켜야 될 선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잊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장 커 보이는 길을 걸어가요
그러면 지금 아브라함 마음속에 지고의 행복과 만족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 속에 지금 불안 걱정이 생겼습니다.
자기 처를 보니까 어제보다 더 예뻐 보여요.
그래서 애굽에 가면 당신은 예쁜 여자라서 남편인 나를 죽이고 사람들이 당신을 뺏어가겠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선을 넘어서면요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불안이고 걱정이에요. 왜 그래요. 걱정을 가불해서 쓰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이 아브라함이 예전에 애굽에 이민을 가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까? 애굽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애굽 사람이 지금 길에서 사래를 보고 아 저 여자 예쁘다 저 남편 누구냐 우리 죽일까? 누군가가 그렇게 수군대고 있습니까? 아무도 그러지 않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있지도 않는 일을 지레 걱정하고 가불해서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을 넘어서면 모든 사람들은 이와 똑같습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끌어들여서 미리미리 걱정을 가불 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 삶이 불안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됐는가
13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가불해서 걱정하던 아브라함이 해결책을 내놨습니다. 우리 애굽에 가서 사는 동안에 당신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가 오빠고 당신은 누이 동생이라고 하자
결국 믿음의 선을 넘어서면 불안과 근심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는 거짓된 삶으로 귀결되는 것이어요
20:27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지금 자신이 거짓의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될 믿음의 선을 안 지키면 말이에요.
우리는 항상 불안에 빠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없는 거짓을 반복하고도 내가 거짓말하고 산다는 것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절대적인 잣대를 이미 상실했거든요
매일 뭐 하나님 앞에 밥 먹으면서 기도할 수 있어요. 시간마다 때마다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 절대적인 신뢰 믿음의 선을 넘어서면 거짓은 우리의 일상사가 되어버려요
왜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14절
아브라함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내를 데리고 이제 애굽 땅에 도착을 했죠.
그랬더니 애굽 사람들이 탁 보자마자 어우 정말 예쁜 여자 왔구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때 사라가 몇 살인지 아십니까? 예 그러니까 이때 아브라함이 75세인데 사래는 아브라함보다 10살이 작거든요. 그러니까 65세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을 오늘날 80세가 명인 우리의 나이 개념으로 아브라함 75세를 노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한 것처럼 사래도 우리 개념으로 65세 할머니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다 100세 이상씩 살 때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의 수명인 175세를 기준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현재 75세라는 것은 그의 수명의 43%를 산 나이라고 그랬죠 만약에 오늘날 80세의 수명에 대입한다면 지금 아브라함은 우리 나이로 약 34세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래는 아브라함보다 10살이 작거든요.
그러니까 그 아브라함의 수명 대비 오늘 우리의 80세 수명과 대비해서 그 10살을 43%로 계산하면 오늘 우리 나이로는 한 4살 차이가 되니까.
사래를 80세 수명 기준으로 볼 때 한 30세 정도의 여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 그러면 충분히 미모를 뽐낼 나이가 되는 것이죠.
또 뿐만아니라 아프리카의 이집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얼굴이 더 검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면 비슷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애굽 사람이 볼 때 팔레스타인 여자는 훨씬 얼굴이 하얗거든요. 또 팔레스타인 여자들은 당시에 얼굴에 면박을 하고 다녔습니다.
거리에서 여자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이집트에서는 여자들이 면박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 얼굴이 검은 사람들 사이에 얼굴이 달덩이처럼 허연 여자가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생각을 하겠죠.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
바로의 대신들도 사래의 미모를 봤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였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바로 왕의 후궁으로 지금 뽑아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 역시 아브라함이 지혜로웠네 아브라함이 역시 생각한 대로 되는구나
그러니까 누이라고 속인 걸 참 잘했구나 라고 우리가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니죠.
아브라함이 자기의 누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스스로 자승자박한 것이죠.
만약에 아브라함이 당당하게 가서 내 아내다 라고 했던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16절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후대하므로 여기서 그로 말미암아는 사래로 말미암아 그 말이에요. 사래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후대하므로 아브라함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자 바로가 사래를 자기 후궁으로 이제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로왕하고 아브라함하고 족보가 어떻게 돼요. 예 처남이 되죠.
손위 처남이 되어요 그래서 노비와 양과 암수 나귀와 낙타를 보냈습니다. 이게 뭐예요? 소위 말하는 폐백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루 아침에 지금 애굽에 가서 그 당시로 보면 큰 재산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때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앉아서 스스로 기분 좋다고 생각하면서 역시 내가 잘했어.
내가 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도 잘했고 거 봐 이렇게 재산 생겼잖아. 이렇게 스스로 만족해 한다면 이 사람은 바보죠. 지금 없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보다 더 월등한 재산이 생겼습니다.
상상치도 않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당시 중동 지방에서 제일 큰 제국인 이집트 제국을 다스리는 왕의 처남이 되었습니다. 지위가 격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뭐예요? 자기 아내를 빼앗긴 겁니다. 그 아내를 다시 자기 능력으로 되찾아 올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아브라함에게는 없습니다.
이제 영영 뺏긴 거예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한심합니까?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렇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뛰면서 자기 욕망만을 위해서 많은 물질을 얻습니다.
작년보다 어제보다 10년 전보다 재산은 두 배 세 배 더 늘어나요? 그런데 인간관계는 다 깨어지고요.
정작 지켜야 될 것은 다 놓쳐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그짝이지 않습니까?
왜 내가 그때 가나안 경계를 넘어서 애굽으로 왔을까?
그때 왜 내가 내 아내가 빼앗길까 봐 지레 겁을 먹었을까?
왜 내 아내가 누이라고 거짓말했을까? 후회 막급이었겠죠.
그 비참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사래의 일로 바로 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지금 아브라함은 속수무책입니다. 절망이죠.
그러나 그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지켜야 할 믿음의 선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이미 잊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잊지 않고 계세요.
여인이 젖 먹는 자기 자식을 잃고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혹 긍휼이 여기지 않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들을 잊지 않는다.
너희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일로 사래의 일이라는 게 뭐겠습니까? 바로 왕이 사래를 후궁으로 지금 데려간 일이다.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그냥 사래의 일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렸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일로 그 여자가 아브라함의 아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만히 안 계시는 거예요. 왜 그래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약속을 하셨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라 신인동체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와 나는 일체 동일체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한 것이고. 너를 저주하는 것은 곧 나를 저주하는 것이므로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말은 저주 저주 똑같은 단어로 번역돼 있지만 히브리말은 다르다고 그랬죠 누구든지 사람이 너를 저주할 때 그건 칼날이라고 그랬습니다.
30:47
그것은 경멸없이 까닭없이 사람을 경멸하거나 욕하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너를 그렇게 하면 내가 너를 저주하겠다 라고 할 때는 알아르 그것은 사법적 판단에 의한 신적 심판이라고 그랬습니다.
지금 그 동기야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당신과 약속을 맺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바로가 빼앗아갔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경멸한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것은 곧 그 두 사람을 부부 되게 하신 하나님을 경멸한 결과와 마찬가지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셔요 여기도 아마 그런 질문 그런 동일한 질문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실 텐데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게 바로가 사래와 동침하기 전인가 후인가
그야 당연히 전 아니겠습니까? 그 동침할 때까지 사래가 바로 왕에게 더럽혀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다면 그 이후에 화내실 까닭도 없는 거 아니겠어요.
바로가 내가 이 여자에게 손이라도 하나 대어서는 큰일 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18절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여러분 여기에서 바로가 한 말의 핵심만 이렇게 점잖하게 여기에 기록이 돼 있지 실상 바로가 얼마나 욕 많이 했겠어요.
그러면서 자 이제 여기 네 아내가 있으니 데려가라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그러니까 그 현장에 지금 여자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아내를 데리고 나올 때 그 아내 앞에서 참 남편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창세기 2장 25절 보면 남자와 여자가 아내가 함께 벌거벗었지만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고 떳떳한 부부는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서로 부끄럽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스스로 자괴심을 느꼈겠는가 우리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절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가 자기 신하들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그와 함께 아브라함이지요
아브라함과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다
이건 보내었다라고 하는 것은 왕궁에서 내보냈다 그 말이 아니라 애굽 경계 밖으로 내보낸 겁니다. 아예 추방한 겁니다.
그러면 어디로 갔는가
13장 1절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바로 이스라엘 경계를 넘기 직전이었던 네게브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있어야 할 자리 지켜야 될 선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바로가 추방해서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그 배후에서 누가 지금 보내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13장 3절요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던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로 되돌아감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지켜야 될 선 지켜야 될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줍니다.
그가 이집트로 애굽로 넘어갔을 때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 되었는데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옴으로써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마지막 지켜야 될 믿음의 선은 선악과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가나안 땅 경계선이었습니다. 그걸 지켜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도 삶의 현장에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그건 다 같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그 선이 요셉처럼 사람일 수 있고요. 어떤 사람에게는 아담과 하와처럼 그 선이 어떤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처럼 그 선이 어떤 공간적인 선일 수도 있습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켜야 될 그 선이 무엇인지 깨닫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선을 지킬 수 없고 그 선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늘 하나님을 등진 불신의 삶을 사는 것을 스스로 의미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어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까?
아브라함이 이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전혀 믿음과는 상관없는 형편없는 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단 번도 아브라함을 야단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야단 듣게 하신 것이죠.
바로가 네가 왜 네 아내를 너의 누이라고 속였느냐고 야단을 칠 때 그때 아브라함은 참 많은 것을 생각했겠죠.
자기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고 하는 그 잘못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긋나 있다고 하는 것 자체를 왜 못 깨달았겠어요.
충분히 깨달았겠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입으로는 질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교육적인 아버지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마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브라함이 위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앞으로도 계속 실수합니다.
위대한 믿음도 보이지만 어처구니 없는 짓도 계속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그를 새롭게 빚어져 가시고 그의 손을 잡고 친히 인도해 가시므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교육적인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교육해 주시는 교육적인 아버지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미래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여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현재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아브라함을 벌써 버리셨죠 나를 믿고 오라고 했는데 그 믿음의 땅에서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애굽으로 가버리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더 이상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게 뭐예요?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면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로 하여금 복 자체가 되게 하고 너의 미래를 이렇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만들어 줄 그 미래를 사랑하세요. 그래서 오늘 아브라함이 실족하고 잘못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은혜로 채워주시고 아브라함의 미래의 실체가 그의 것이 되게 해준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위대한 점이 있다면 뭐예요?
그가 비록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할 잘못도 수없이 거듭했지만 깨달을 때마다 그 하나님의 손에 자기의 인생을 맡겼다는 거예요.
40:29
그래서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삶이 새로워지고 그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그의 인생이 새로워지므로 결과적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게 된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미래와 희망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려는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의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예배 시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교육시키고 계십니다.
그 교육적인 아버지에게 그분의 손길에 우리의 삶을 맡기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이 그려가시는 미래의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고 우리 역시도 부족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대를 위한 아브라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믿음의 선을 떠났을 때에 그는 참으로 비참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지킬 수 없어 빼앗긴다면 그보다 더 실패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 각자가 지켜야 할 선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한번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선을 지키는 것 자체가 믿음을 지키는 것이요.
그 선을 지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뜻하것임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아브라함이 실수하였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를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가게 하시고 그가 무엇을 잘 못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신 교육적인 아버지 그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되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미래를 사랑하시고 그의 미래를 친히 가꾸어 주셨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저희들 비록 부족하지만 교육적인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삶을 맡겨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우리의 미래의 실체를 우리의 삶 속에 다 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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