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 2. 14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90
정결례를 행한 바울
사도행전 21장 15-26절(372장)
우리는 이제까지 바울의 3차 선교 여행과 그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급하게 돌아오는 바울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출발하여 밀레도까지 오는 과정에서 성령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그의 선교 사역을 완성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20:23, 24). 그래서 여러 도시를 거쳐 오면서 성도들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해 왔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바울이 원하던 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특기할 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그의 예루살렘 도착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선교 사역에 대해 보고한 것,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권면한 것에 따라 성전에 가서 정결례를 행한 것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사역의 완성에 대한 것도 없고, 결박과 환난에 대한 것도 없이 그저 잠잠하고 평안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같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우리는 숨 가쁘게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후의 바울의 이야기는 조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에서의 체포에서 시작해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통하여 결국 로마에 도착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게 되고, 그곳에서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이 끝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이처럼 흐지부지하게 끝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중간쯤에,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정리할 즈음에 마게도냐로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로마를 거쳐 서바나(스페인)까지 갈 것을 계획했다는 것을 이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19:2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계획한 대로, 하지만 물론 바울이 예상치 못했던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를 로마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은 사도행전의 기록이 끝난 이후에 4차 선교 여행을 통해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작된 사도행전 기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고, 이제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먼저 15-20a은 바울의 예루살렘 도착에 대한 기록인데,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의 일과 예루살렘 교회에 그동안의 사역을 보고하는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두 번째로 20b-26v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정결례를 행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과 그 권면을 받아들인 바울이 정결례를 행하는 내용입니다.
1. 예루살렘에 도착함(15-20a)
1) 도착(15-16v)
15-16절입니다. “(15)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16)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을 더 보낸 바울은 행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 때 가이사랴 교회의 몇 성도가 바울과 함께 갔고, 특별히 나손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나손*은 구브로 출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랜** 제자’ 즉 처음부터 믿었던 그리스도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나손을 데리고 간 것은 바울 일행이 나손의 집에 머무르기 위해서였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 ‘므나손’(Mnavswn)은 ‘기억’(remembering)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헬라 이름이다.
** ‘아르카이오스’(ajrcai'o")는 원래 ‘본래의, 고대의, 옛(시대의 것)’(primeval)이라는 뜻으로 ‘시작부터 있었던, 원래의, 최초의, 아주 고대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 보고와 영광 돌림(17-20a)
17-20a입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20)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은 기쁨으로 즐거이* 그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초기에 헤롯에 의해서 순교했습니다(12:2). 초대 교회는 사도들을 비롯한 몇몇 지도자들(장로)의 공동 지도 체제였는데, 점차로 사도들이 사역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면서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지도 체제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에게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는 표현은 야고보를 지도자로 하고 다른 장로들도 참석해 있는 모임, 지금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 교회의 ‘당회’에 참석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 ‘기꺼이’라고 번역된 ‘아스메노스’(ajsmevnw")는 ‘기쁘게, 즐거이, 즐겁게, 기쁨으로’(with pleasure)라는 뜻이다.
** 행 12: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행 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 ‘파라기노마이’(paragivnomai)는 원래 ‘가깝게 되다, 도달하다, 도착하다, 공적으로 드러나다, 오다, 가하다, 참석하다’(to come, arrive, to appear, to stand by)라는 뜻이며, ‘1)참석하다, 다가가다, 접근하다 2)나타나다, 공개적으로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바울은 거기 참석한 지도자들에게 문안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섬김과 사역을 통해서 이방 지역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특별히 ‘낱낱이’라는 표현은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 하나 다 보고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엑세게오마이’(ejxhgevomai)는 원래 ‘생각해 내다, 연습하다, 열리다, 묘사하다, 설명하다, 선언하다, 이야기하다’(to recount)라는 뜻이며, ‘1)끌고 나가다, 지도자가 되다, 앞서 가다 2)은유. 이야기를 이끌어 내다, 가르침을 설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개역 성경은 간단하게 ‘낱낱이’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카덴 헤카스톤’(kaq! e~n e{kaston)이라고 되어 있다. ‘카드’은 ‘카타’(katav)의 단축형(줄임말)으로서 ‘아래, ~에 따라, ~에 대하여, ~관하여, ~후에, 반하여(그들이 ~이었을 때)’라는 뜻이다. ‘헨’의 원형은 ‘헤이스’(ei|")로서 ‘하나, 어느, 어떤, 풍부히, 서로, 오직, 다른, 누군가’(one)라는 뜻이다. ‘헤카스톤’의 원형은 ‘헤카스토스’(e{kasto")로서 ‘각기, 모두, 각자, 각각, 모든, 낱낱이’(each every)라는 뜻이다.
① 첫째로, 바울이 보고한 내용이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방 가운데서 일하신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이방 지역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교회가 세워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불신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모이고 여러 가지 행동을 할지라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에 있어서나 교회가 세워지는 부분에 있어서 늘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봉사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역사가 없이도 사람의 힘과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생각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우리는 뒷짐 지고 구경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봉사’란 ‘섬김, 구제, 공궤, 봉사, 관리’ 그리고 기독교의 ‘집사의 직무’*를 가리킵니다. 집사는 한문으로 ‘잡을 집’(執)에 ‘일 사’(事)를 써서 ‘일을 (손에) 잡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의 원래 의미를 추적하면 가장 기본적인 뜻이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으로서 영어로 ‘웨이터’(waiter)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 집사 직분을 받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집사인데!’하는 생각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집사가 뭐 하는 사람입니까? 남자 집사는 웨이터이고 여자 집사는 웨이트리스(waitress) 즉, 여급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집사인데’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디아코니아’(diakoniva)는 원래 ‘(종으로서) 시중(인), (자선적인) 도움, (공무상의) 봉사, 관리(하는 것, 행정, 자), 직무, 구원, 봉사, (특히 기독교인) 선생, (전문용어로) 집사직’(service)이라는 뜻이고, ‘1)섬김, 집행 2)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직무 3)구제 4)집사의 직무 5)공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원형은 ‘디아코노스’(diavkono")로서, ‘시종인,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 종, (기독교인) 선생, 목사, 집사’(waiter)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섬기고 일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일을 손에 잡을 때에,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사’를 꼭 ‘직분’과만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왜 나는 집사를 안 줄까’ 생각하지도 마시고, 나는 ‘집사 안 할 꺼야’ 하지도 마십시오. 직분으로서의 집사는 교회가 필요에 따라서 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집사가 아니니까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집사 안 주면 일 안하겠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집사여야 합니다. 다 웨이터이고 웨이트리스여야 합니다. 모두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일을 손에 잡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십시오. 우리 교회 안에서, 또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시고 하십시오. ‘왜 맨날 나만 하느냐, 왜 맨날 나만 시키느냐’고 하지 마시고 기쁨으로 섬기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②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사역을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방인 선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았지만,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아직도 이방인 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 때문에 정결례를 행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 공식적인 정결례를 행함(20b-26v)
1) 정결례 행할 것을 권면함(20b-25v)
20b-21v입니다.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도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 지적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 만 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율법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바울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들, 열심당과 같은 성향을 가진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세를 배반하라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그리고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가르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배반한다고 하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배반하며 배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규모는 ‘관습이나 법에 의해 정해진 습관, 관례, 제도, 규정’**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모세의 율법과 과거로부터 내려온 할례를 비롯한 모든 관습들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소문이 믿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니, 과거에 바울 자신이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스데반을 죽게 한 것처럼 그들도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바울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 ‘배반하고’라고 번역된 ‘아포스타시아’(ajpostasiva)는 ‘(진리를) 저버림, 변절, 배반, 배신, 배교, 저버리다’(apostasy)라는 뜻이다.
** ‘에도스’(e[qo")는 원래 ‘(관습이나 법에 의해 정해진) 습관, 관례, 태도, 익숙하다’(custom habit)라는 뜻이며, ‘1)관습 2)법으로 규정된 관례, 제도, 규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2-25절입니다. “(22)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23)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24)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이들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에 대해 의논합니다. 얼마 있으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그들 귀에도 들리게 될 것인데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기 위해서 대책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정결례를 행하는 모습을 공식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바울에 대한 소문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서원한 사람 넷과 함께 정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는* 비용을 댄다면,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이요,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하그니조’(aJgnivzw)는 원래 ‘청결하게 하다, 신성하게 하다, (자신을) 정결케 하다’(to cleanse)라는 뜻이며, ‘1)의례적으로 정결케 하다 2)도덕적으로 정결케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비용을 내어’로 번역된 ‘다파나오’(dapanavw)는 원래 ‘소비하다, 비용이 들다, 낭비하다, 부담하다, 쓰다’(to spend freely, squander)라는 뜻이고, ‘1)지출하다, 소비하다, 돈을 쓰다 2)낭비하다, 다 써버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헛된’으로 번역된 ‘우데이스’(oujdeiv")는 ‘하나도 아닌, 아무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no one, nothing)이라는 뜻이다.
**** ‘퓔라쏘’(fulavssw)는 원래 ‘수호하다, 감시하다, 보존하다, 복종하다, 피하다, 조심하다, 지키다, 구하다’(to guard protect)라는 뜻이며, ‘1)보호하다, 감시하다, 지키다 2)탈출하려고 관찰하다, 피하다, 도피하다, 지키다, 순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스토이케오’(stoicevw)는 원래 ‘행진하다, (경건과 덕을) 이루다, (질서 있게) 걷다’(to walk in line)라는 뜻이며, ‘1)한 줄로 행진해 나아가다, 차례차례 가다, (은유)순조롭게 가다, 잘 나가다 2)걷다, 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전에도 설명한 것처럼, ‘나실인의 서원’이 끝난 후 그동안 자르지 않았던 머리를 자르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25절에서 과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선교와 관련하여 결정하고 이방인 교회에 편지한 내용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이것이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문제와 관련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앞에서 이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유대인 성도들 때문에 발생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린 것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거나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혈인 디모데의 경우에도 일부러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16: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헛소문이 퍼진 것은 사실상 이방인 선교에 대한 반감이 다른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을 음해하고자 하는 사람들, 특별히 바울을 미워하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인들, 특별히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진 이들의 손을 빌어 바울을 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헛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사실의 진위(眞僞)를 떠나 현 상태가 그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기 위해 이러한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2) 정결례를 행한 바울(26v)
26절입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나는 그렇게 가르친 적 없다!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고집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강직하고 독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바울로서는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아무 반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이 소개한 네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그들 각자가 제물*을 드릴 때까지 함께 하고서는, 모든 결례가 만기 되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렸습니다. 여기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는 말씀은 ‘그 기한이 끝났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널리 알렸다’**는 뜻입니다.
* ‘제사’라고 번역된 ‘프로스포라’(prosforav)는 원래 ‘(피 없는) 봉헌, 제사 의식, 희생, 헌정’(a presentation, offering)이라는 뜻이며, ‘1)주는 행위, 가져감 2)주는 것, 선물, 산 제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헬라어 원문은 ‘디앙겔론 텐 에크플레로신 톤 헤메론’(diaggevllwn th;n ejkplhvrwsin tw'n hJmerw'n)이다. ‘텐’과 ‘톤’은 정관사이다. ‘디앙겔론’의 원형은 ‘디앙겔로’(diaggevllw)로서 ‘철저하게 예고하다, 선언하다, 설교하다, 나타내다, 전언을 전하다, 어떤 장소 누구에게든지 알리다, 널리 발표하다’(to herald)라는 뜻이다. ‘에크플레로신’의 원형은 ‘에크플레로시스’(ejkplhvrwsi")로서 ‘완성, 성취’(completion)라는 뜻이다. ‘헤메론’의 원형은 ‘헤메라’(hJmevra)로서 ‘낮, 시간, 세대, 날’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그 날/기한의 그 완성/성취를 널리 알렸다’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이렇게 순순히 제안에 따른 것은 그 자신이 고린도전서 9:20-21에서 밝힌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모함이든 헛소문이든, 바울은 그것 때문에 또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자신은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율법 준수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경우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유대인의 경우에도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율법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대했겠지만,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통이고 생활 방식의 하나였기에 구태여 그것을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자유’와 관련된 중요한 원리를 배웁니다. 가끔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초대 교회의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 14:13-15, 20-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5)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20)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예를 들어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음식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초대 교회의 경우에는 우상 앞에 드려졌다가 시장에 나오는 고기를 먹는 문제,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가 그러한 시험 꺼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음식 때문에 형제를 거리끼게 하거나, 근심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전서 고전 8:9, 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13)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어 그들을 망하게 하고 실족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유를 사용하지 않는 것, 바울 자신의 결단처럼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아서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것은 진정으로 강한 자, 성숙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배려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그러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서로를 향한 배려가 많이 행해지기를 바랍니다. ‘자유’가 최고는 아닙니다. ‘배려’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정결례를 행한 배후에 있는 이 정신을 우리가 많이 배우고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