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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짧은 시간의 긴 만남을 위하여
수필은 ‘짧은 시간의 긴 만남’이다. 수필 한 편을 읽는 5분 미만의 짧은 시간에 수필가는 자신이 겪은 일과 생각과 삶의 자양분인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하루를 보낸들, 며칠을 함께 여행한들, 그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비평가 콜라쿠시오가 “한 나라의 민족성을 알려면 그 나라의 고전을 읽어라”라고 하였듯이 한 사람을 알려면 그의 글인 수필을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그만큼 수필은 가장 자전성이 강하게 배어있는 문학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러한 자전성과 문학성을 어떻게 결속시키는가’라고 할 것이다.
수필문학의 정체를 한 줄로 요약하면 물상이 지닌 내적 의미를 밝혀내는 ‘의미화 작업’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의미화는 남다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수필의 수필화는 상상이라는 얼개에 걸려야 한다는 뜻이다.
진지한 수필가라면 한 편의 수필을 쓸 때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체험을 미적구조로 변환시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수필화 글쓰기에서 작가가 상상력에 의존하는 이유는 문학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상상의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이 없으면 현실 상황이나 사물을 묘사하더라도 외적 묘사에만 그치게 되고 그런 수필은 수기나 생활보고문에 그쳐 버린다.
그러므로 왜 문학적 상상을 논하며, 그 구체적인 이론과 실천방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열면서 1 : 좋은 수필의 요건 |
좋은 수필은 시적이고 소설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시보다 영감이 넘치며 소설보다 더 구성력이 뛰어나고 드라마보다 더 현장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수필은 문학 철학으로서 사상과 철학을 담되 영적 소통으로 인간애와 자연애를 그려낼 필요가 있다.
수필은 먼저 진솔하고 격조 높은 언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진솔한 수필은 부끄러운 약점, 잘못된 실수, 숨기고 싶은 결점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면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표현해준다. 그러면서 서사를 전개 시키는 구성, 적절한 비유, 신선하고 유연한 문체를 통해 체험을 형상화하고 의미화한다면 좋은 수필로 도약하게 된다. 수필은 독자에게 춘풍처럼 부드럽게 속삭이고 때로는 날 선 비수처럼 폐부를 찌르고 때로는 가을 낙엽처럼 처연한 몸놀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혹은 수필은 팔방미인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8개의 장점을 갖춘 수필을 말한다. 8개의 장점은 압축성, 독창성, 절제성, 체험성, 소통성, 해학성, 서사성, 그리고 심미성이다.
달리 말하면 수필에는 4차원이 충족되어야 한다.
1차원은 신변이나 신체를 친구나 이웃에게 담담하게 털어놓는 고백의 진지성을 말한다. 사실의 왜곡이나 누락은 진솔하지 못하며 헤픈 넋두리는 잡문이 되기 쉽다. 문학적인 인간은 일상의 다양성, 수용의 다양성, 지식의 다양성,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을 통해 자기의 영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내가 하니까 개성’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으니까’ 개성이다. 다양한 문학의 재료인 인생을 자기의 색깔로 서술하여야 자조와 자성과 자각의 공유가 이루어진다. 수필을 ‘최고의 인생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원은 지적 생산성을 가진 수필을 말한다. 케케묵은 지식이나 피상적 개념으로 짜깁기한 글은 인상미(Impression)가 부족하다. 산문으로서 수필은 신선한 지성, 객관, 논리, 경험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아는 것만큼 쓴다고 하듯이 박학다식한 읽을거리가 있어야 독자가 공감하고 생각할 거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식이 흩어진 낱가리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3차원은 연륜의 향기가 풍겨나야 한다. 연륜이라함은 인공적인 지식이나 싸구려 감정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과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과 관용을 말한다. 과거의 체험을 반추하여 현재와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럴 때 그 수필은 미래와 우주를 꿰뚫어내는 통찰을 갖는 글이 된다.
4차원은 적절한 미적구조와 미학성을 구축하려는 예술가적 소명감을 지니는 경우다. 시적 요소인 미래, 이상, 감각, 사색, 감성, 직관이 수반되는 이 단계에서는 수필의 완성단계인 예술수필이 나타난다. 지정의(知情意)가 서권기(書卷氣)를 얻어 문자향(文字香)을 발하고 우주를 읽어내는 투시력(透視力)을 모두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잡문수필가가 자신이 수필가라는 명예에 골몰하는 현시욕(現示慾)을 바라고 저자수필가는 양적 발표에 집착하는 서권력(書卷力)을 추구한다면 작가수필가는 비로소 문인다운 수필가로서 하나의 표현에도 문학성을 저울질하는 문자향(文字香)을 추구하며 마지막으로 예술가수필가는 영감의 문학화에 헌신하는 일체성을 기원하는 예영기(藝靈氣)를 희구한다고 할 것이다.
열면서 2 : 6행(行)의 고행자 |
인간은 원초적으로 사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유는 근원에 대한 사유, 태생에 대한 사유, 종말에 대한 사유로 구분된다. 어린아이가 철이 들면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성장하며 자연현상에 대하여 궁금증도 키워가고 지긋하게 나이 들면 우주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이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서이고 신화 같은 수필이 창작되는 과정이다. 신화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 점과 같다. 신화의 점은 상상이라는 공간 내에서 좌표로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신화는 인간, 자연, 지구, 우주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신만 있으면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은 성현의 경전이나 석학의 글이 아니다. 다만 체험을 상상의 채로 쳐서 옹이 같은 문장에 담을 수 있으면 수필이 된다. 그래도 장을 담을 때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바라보는 평심의 자세가 필요하다.
1). 소화불량을 즐겨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세 가지 순서를 바꾸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이 아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능력이 벅차고 시간도 많지 않다. 그렇더라도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한 편을쓰기 위해 백 편은 아니더라도 10편의 수필은 읽도록 한다.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자.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만 읽은 사람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특히 초보자의 수필은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원동력에 해당한다. 맛난 음식을 많이 먹어야 요리도 잘한다. 안도현은 “시집은 언제든 연습할 수 있는 악기”라 하였다. 그렇다면 100편의 수필은 100인의 삶이 연주하는 심포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 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2). 동심(童心)으로 낯설게 보라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말이다. 그의 말이 고스란히 쉬클로프스키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에 일치한다.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엉뚱함”을 신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제발 문학에 전범이 있음을, <좋은 수필 창작론>을 창작의 교과서로 믿지 말라. 그냥 참고하라. 낯설게 하기는 관습적인 용어, 관행적인 행위, 타성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낯설게 보고, 참신한 형식을 창조하고 신선한 언어를 찾아내는 행위다. 일상어를 문학어로 전환시키는 것을 유명한 시인들은 동심에 비교한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즈는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이라 하였고 윌리엄 블레이크는 를 노래하였으며 많은 예술가들이 “동심은 마음의 첫 모습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도리와 견문에 빠져 새롭게 보지 못한다. 왜 그런가, 어른이란 이름을 날리고 싶고, 지식만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사상에 앞서 문학에서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투적인 눈,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손, 남의 뒤를 따르는 발걸음으로는 문학의 끄트머리도 붙잡을 수가 없다. 새로운 것과 참된 것은 어린아이의 눈 속에 있다.
3). 귀를 열어라
자연은 가장 거대한 소리의 도서관이다. 책을 읽고 싶은데 주위에 수필 한 권도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숲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고 귀를 열면 된다. 두 귀를 닫으면 마음의 귀가 열린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행동은 책을 읽는 행위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어둠에서조차 더욱 예민해지는 것이 귀다. 장 콕토는 “내 귀는 소라껍질/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고 「귀」에서 말한다. 기형도 시인은 「풍장」에서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창틈으로 새어드는 빗소리를 듣는다. 그는 세상을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말한다. 여자가 죽으면 입만 뜨고 남자가 죽으면 손가락만 뜬다는 우스개가 있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마음은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마음의 표현이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황동규 / 「풍장 27」
4). 사랑을 자주 많이 하라
사랑은 팍팍한 삶을 비춰주는 조그만 손전등 같은 것이다. 사랑만이 “The more, the better” 이다. 어둠에 숨어 손전등에 비친 물체를 향해 나의 모든 촉수를 집중해보자. 그때 나의 온몸은 비 묻은 나뭇잎 소리에 반응하고, 달팽이의 조그만 촉수에도 전율한다. 사랑이란 대상과 맺은 관계를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그물을 만들어낸다. 사랑은 아무리 시간과 돈과 공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는 내게 눈길을 주겠지, 언젠가는 마음을 주겠지 하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집중력과 상상력을 요하는 작업은 없다. 마침내 그가 내 속에 들어오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간다. 자아일체 같은 소재 찾기가 글을 쓰기 위해 첫 번째 실천하여야 할 방정식(나=대상)이다.
사랑의 감정이 없이 수필 한 구절을 얻으려는 것은 맨땅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소나무 둥치를 감고 오르는 칡넝쿨을 가만히 지켜보라. 여린 줄기가 나무에 자국이 남도록 조여서 마침내 덩굴 자국이 새겨지고 잎은 그 상처를 가린다. 글이란 나를 산산이 깨뜨리되 상대를 보듬어 안는 행위다.
중국의 시인 아이칭(艾靑)이 <시론>에서 한 말을 음미할 만하다.
“제재를 완전히 장악해야 비로소 예술세계의 통치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무릇 당신이 눈동자로 본 것,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당신의 사상체계 속에 잘 짜 두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감각과 사유가 한 제재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한바탕의 격투를 치르게 하라. 그 제재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게 하라.”
5). 재능이 아니라 열정을 믿어라
천재 예술가는 과연 있을까? 문학 탤런트가 있을까. 문학적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에디슨도 천재는 1%의 행운과 99%의 노력이라 하였다. 만일 어느 작품을 두고 천재적이라 한다면 작품이 지닌 예술성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작가의 재능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천상병 시인을 가리켜 ‘천상(天性)에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행동을 보니, 기구한 행적을 보니, 글에 사족을 못 쓰는 열정을 보니 “천상에 시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시는 감성으로 쓰고, 소설은 노력으로 쓰고, 수필은 나이로 쓴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있다. 만일 당신이 작가로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수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몇 편의 수필을 쓴 후 펜을 꺾지 말라. 펜을 꺾는다함은 세상에 대한 의분과 열정과 절교하는 것이다. 작품이 여러분의 삶의 나침판이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후천적인 열정을 믿어야 한다.
“열정은 미침”이라고 노래하는 시를 읽자
시에 미치고
그림에 미치고
음악에 미치고
춤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고
혼자 미친 것도 좋지만
보는 사람마저 미치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위대한 미침
두려워 마라
미치는 것을
<미친 사랑의 노래 7> / 김순이
열정의 노예가 되어 미친 듯이(狂) 글에 복무할 때 우리는 경지에 미치게(達) 된다.
시간을 투자하고, 내공을 키우고 공력을 집중시켜라. 나이를 먹었다고 감성이 무뎌진다고 한숨을 쉬지 말고 훈련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를 탓하라. 열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청소년에게는 풋풋한 감성이 있고, 청년에게 화려한 감성이 있고 장년에게는 완숙한 감성이 있다. 계란에도 날계란과 반완숙과 완숙이 있다. 봄 여자, 가을 남자라는 말이 있고 남성이 더 무드에 약하다고 한다.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6). 발품을 팔아라
발품은 바람과 길로 이루어진다. 박목월은 젊은 시절에 홀로 동해 해안을 따라 한 달 이상을 도보여행을 하였다. 대구에 사는 수필가 구활 씨는 자신의 삶의 9할이 바람이라고 매번 노래한다. 인간은 애당초 노마드(nomard)라는 염색체를 지닌다. 길을 떠난다함은 존재의 원초성에 다다르는 구도이고 낯선 관찰을 얻을 수 있는 공간적 탈주이다. 달리 말하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재미 수필가들은 방랑자라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체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흩어지다’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유대인의 대명사로 쓰였으나, 근래에는 보통명사로서 이민 민족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한인 LA 디아스포라라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엄격히 말하여 재미교포는 타율적인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제2의 생활공간으로 이주한 트랜스퍼(transfer-sapiens)이다. 그들은 인류 원형으로서의 디아스포라와 개체로서의 디아스포라와 작가로서의 디아스포라를 동시에 의식하고 있다.
신화가 인류의 역사라면 수필은 개인의 신화이다. 기하학적으로 풀이하면 생활의 좌표를 찍는 것이고, 좌표가 어디에 놓이는가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정해진다. 그래서 수필이 수필로 간주되려면 삶을 보고, 재미있게 엮을 수 있어야한다. 수필가는 뒤퐁이 말한 “글이 사람이고 사람이 글이다”라는 명제에 도전하는 고행자가 되어야 한다.
열면서 3 : 6수(手)의 테크니션 |
문학의 전달수단은 언어이다. 언어는 개인 간의 소통수단이므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고 문학가도 언어로 창작한다.
언어의 기능에는 일상적 언어, 과학적 언어, 문학적 언어의 3종류가 있다. 일상적 언어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매체로서 사전적 의미에 바탕을 둔다. 과학적 언어는 어떤 이념, 곧 지식의 세계를 진술한다. 반면 문학적 언어는 체험을 표현하면서 함축적인 의미와 다양한 정서를 전달해준다. 영국시인 코울리지(Samuel T. Coleridge)는 시는 “가장 훌륭한 단어들이 가장 훌륭한 순서로 나열된 것”이라 하였다.
문학어를 구사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문학어는 명료하고 간결하고 자연스러워야 강한 인상과 효과를 남긴다. 널리 알려진 표현이나 구절을 사용한다면 아무리 주제가 특이하다 할지라도 독자는 별다른 감동을 느낄 수가 없으므로 독창적이고 개성이 있는 글이어야 한다. 문학어의 함의는 함축과 연상의 효과를 강조한다. 그리고 다의적, 입체적, 초 논리적, 함축적, 유동적, 모호성, 고차원적인 성질을 지닌다. 문학에서 함축적이고 다양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촉매로서의 언어훈련은 어떻게 하는가.
1). 당신만의 ‘연장상자’를 가져라
글쓰기에서는 자신만의 연장상자(toolbox)를 마련해야 한다. 그 상자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어휘다. 미국의 인기 있는 공포소설 작가 스테판 킹(Stephen Edwin King)이 최근 글쓰기에 관한 조언을 담은 자전 에세이집 “글쓰기에 대하여 (On Writing)”에서 “틀에 따라서 쓰기보다는 개성 있게 참신하게 쓴다. 굴곡 없이 무미건조한 글이나 상투적인 표현은 금물이다.”라고 제안하였다.
소문난 글맛집, 그런 작품집을 운영하려면 비법이 있어야 한다. 작가 이윤기는 글에 하나의 위트를 집어넣어 재미에 대한 기대감을 주며 대구의 수필가 구활은 방대한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일화를 제시하며 전주의 수필가 김용옥은 생소한 토속어를 반드시 사용하며 서울의 수필가 최민자는 한문을 패러디하여 낯설게 사용한다. 탁월한 문장가로 꼽히는 작가 이문열은 논란이 많았던 소설 『선택』에서 예스러운 의고체(擬古體) 문장을 적절하게 구사한다. 김훈은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기행 등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미문으로 독자의 기를 질리게 한다. 이렇듯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나름의 개성을 팡팡 친다. 명문장은 아니더라도, 수필에서 자신의 연장을 휘둘러 볼 일이다. 따뜻한 성품이 우러나는 글, 정직한 글, 재치 있는 글, 시원시원한 글, 팍팍 속도감을 내는 글, 적절하게 영어로 간을 맞추는 글… 모두 매력적이고 좋은 연장이다.
2). 줍는 손을 가져라
시인 유안진의 「다보탑을 줍다」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제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
정신차려 다시 보니 빠알간 구리동전
이 시를 들으면 대개 재미있다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잠시 정색을 하자, 누가 고개를 떨어뜨리는가. 승자는 목에 힘을 준다. 문학은 승자를 예찬하지 않고 패자를 위로한다. 승리의 기록이 역사에 남는다면 패자의 기록은 문학에 남아 진실을 전한다. 기가 죽었을 때, 실의에 빠졌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모를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인다. 승자는 손을 뻗어 승리의 과일을 따지만 시인은 고개를 숙여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처럼 삶의 길바닥에서 진실을 줍는다. 주우려면 어떡해야하는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한다.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작가가 굽힌 허리에는 겸손과 포용과 인내가 들어간다. 손을 들어보라. 몸이 직선의 칼 모양이 될 것이다. 손을 내려 허리를 굽혀보라. 활 모양이 될 것이다. 줍는 손은 몸과 마음을 굽혀 작고 미미하고 보잘 것없는 것의 품격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 말을 기억하라. 문학가는 버려진 것을 주워 가슴에 담는 넝마주이다.
3). 하이브리드 장치를 달지 말라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플레인 랭귀지(www.plainlanguage.com)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소개한다. 글을 꾸미다 보면 수식어를 자꾸 달고 문장을 길게 쓰고 싶어진다. 마이크를 손에 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는 질문자와 같다. 글줄이 길어지면 문장이 잘못되기 쉽고 주부 술부의 호응이 엇갈리고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오해를 가져온다. 여자의 스커트와 연설은 길이가 짧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one sentence-single idea”(一文一思)가 바람직하다.
단락도 내용에서 심플하여야 한다. 단락이란 내용의 단위로서 단순한 문장의 결합이 아니다. 기본적인 단락 구성은 도입문장-뒷받침문장-닫는 문장으로 이어져 글쓴이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one-paragraph-single topic(一段一脈)에 해당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단락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처음부터 긴 작품을 쓰기보다 단락 완성에 충실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단락을 충실하게 짜고 기본적인 문체들을 쌓아가노라면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
1. 주어와 술어를 바짝 붙여 의미가 분명한 문장을 만든다.
2.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주제만 집어넣도록 한다.
3. 짧은 문장과 문단을 쓴다.
4. 능동태를 쓴다. 주어를 강조할 경우나 꼭 필요한 경우에만 피동태를 쓴다.
5.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간 단어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6. 읽기 쉬운 톤을 유지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형식은 피한다.
7. 단순하고 친숙한 일상어를 사용한다.
8. 전문용어나 약자는 가급적 피한다.
9. 문법을 지킨다.
(1) 문법은 작가와 독자 간의 무언의 약속이다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문법의 오류는 나쁜 문장을 낳는다. 작가를 문장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문장과 문법에 충실하라는 주문이다. 수필 한 편을 쓰면서 국어사전을 곁에 두지 않는다면 못줄이 없이 모를 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객관적인 서술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시각이나 표현은 삼가고 거부감 없는 내용을 넣어야 한다. 인물, 고사, 일화, 숫자, 과학적 사실을 인용할 경우 반드시 그 출처를 밝혀야한다.
(3) 추상적인 문구나 과다한 수사법을 삼간다. 한문이나 외래어가 때로는 고급스러운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치면 현학적이 된다.
(4) 표현과 문체에 일관성을 유지한다. 서술은 한 가지 주제를 충실하게 나타낸다. 수필은 일종의 체험의 자술서이므로 다른 화제로 바뀌면 곤란하다.
4).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고 이어령은 문장론에서 말한 바가 있다. 상 목수는 못 하나 박지 않고서도 아귀를 맞추어 기둥을 잇고 서까래를 깔아 한 채의 집을 짓는다. 문장을 이어가는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로 글을 잇고 불량한 글일수록 마무리를 ‘~다, ~이다, ~한다, ~것이다’라는 망치질을 해댄다. 그런 글은 눈으로 보아도 읽을 마음이 사라져버린다. 수필은 읽는 맛도 있어야 한다. 잘 다듬어진 글은 접속사가 없어도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겨준다. 특히 단락의 첫 문장을 접속사로 시작하거나 단락의 끝 문장을 똑같은 종지형으로 반복하면 안 된다. 초고를 마무리한 후에 ‘~것이다’를 몇 번 썼는가,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를 얼마나 많이 썼는가를 헤아려보라. 그것만으로도 졸문을 명문으로 고칠 수 있다.
5). 기록의 손을 놀리지 말라
여자의 유혹은 본능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소유 당하고 싶은 욕망의 줄다리기가 유혹이다. 사냥꾼과 먹잇감 간에 벌어지는 미묘한 게임. 이 치열한 게임의 목적은 바로 ‘성공적인 번식’에 있다. 작가라면 마땅히 여성이 화장하듯 습관적으로 적고 고치고 다듬을 필요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하는 ‘수차차록법’을 실천하였고 발명왕 에디슨도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작가의 특징은 건망증이며 이름난 작가들은 모두 창작 노트를 가지고 있다. 손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뇌이다. “Memory is short, Note-taking is long.”
유혹의 기술을 들어보자. 마릴린 먼로의 매혹적인 금발을 본 전 세계 여성들은 과산화수소로 염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20cm가 넘는 하이힐도 마다하지 않고 신었다. 가슴 크기에 자신 없는 여성이 유방확대 수술을 하고, S 라인의 엉덩이를 갖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도 견뎌낸다. 립스틱이 없던 옛 여성들은 데이트 직전에 붉은 과즙으로 입술을 물들이거나 심지어는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나오게 했다.
이런 고통은 무엇을 말하는가.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라’는 자연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서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기록하되 글자, 문자, 기호, 약자, 음악부호 등 나름의 표기술을 총동원하여 가능한 콤팩트하고 은유적인 글로 독자의 욕망을 자극하도록 하라.
6). 물리치료사의 손을 가져라.
물리치료사는 외과수술을 한 후 신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꾸준히 치료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수필이 아무리 좋은 주제와 가치를 지니더라도 문장이 정상이 아니면 원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여기에 퇴고라는 꾸준한 글 치료가 필요하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의 글에 손대는 것을 권위가 손상당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은 단언하건데 작가가 아니다. 그들의 문장을 읽어보면 유별나게 온전하지 못하다. 부분적으로 표현이 무난하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짜임새가 없으면 잘 쓴 글이 아니다. 퇴고에는 문법 교정, 문장 교열, 글쓰기에 대한 컨설팅이 모두 포함된다. 초고를 쓰는 에너지가 50%라면 재교 삼교 등 퇴고를 거듭하는 에너지가 50%라고 보면 된다. 펜혹이라는 말을 아직 기억하는가? 글의 퇴고는 미용성형이 아니라 정형수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수필에서는 “신변잡기”라는 일상성과 “붓 가는 대로”라는 소위 인스피레이션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글의 생명은 언어가 지닌 의미를 잇는 데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창작을 공학 용어를 빌어 디자인하고 공정(工程)한다고 말한다. 죽은 글은 미사여구에 신경을 쓴 나머지 글의 결속성이 분해된 것이다. 죽은 글이란 알맹이가 없는 글, 내용이 없는 글, 주제가 소멸해 버린 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글, 작가의식이라는 정신이 없는 글의 보통명사다. 항상 정문(正文)을 추구한 수필이 정품의 수필이 된다.
열면서 4 : 상상의 6안(眼) |
노드롭 프라이는 일찍이『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에서, “상상력이란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있음직한 본보기(model)를 구성하는 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베이컨은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영국의 수필가인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1672~1719)는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서 심상을 만들어가며,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상상력이 ‘경험을 토대로’ 한다함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의미하고, ‘있음직한 본보기를 구성하는 힘’이라 함은 ‘우리가 살고 싶은 이상 세계’의 제안을 뜻하며 “새로운 심상을 형성한다”함은 ‘현실의 이상화’라는 변증법적 상상을 의미한다.
수필적 생성은 “새롭게 보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체험 속에서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선택된 소재를 가지고 새롭게 형상화한다. 이때 “새롭게”라는 뜻이 바로 작가 나름의 체험과 인식력을 바탕으로 극히 평이한 소재조차 남다른 가치와 실존상을 부여하는 의미화 작업을 말한다.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면 이미지와 의미가 재창조된다. 작고한 김병규 씨는 “수필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여태껏 발견되지 못한 것을 발견하여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에 해당한다.”라고 했을 때 그가 의도한 창조의 의미는 “새롭게 보기”에 일치한다. 그렇다면 상상은 미완의 무엇을 완전하게 꾸며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상상력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다. 오직 인간만이 시공을 초월하여 경험을 분석하고 종합하며 때로는 의식주라는 생존조건을 무시하면서까지 문화와 예술을 통해 더욱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창조력과 상상력을 가진다. 여기에 상상이 필요하다. 상상이 모색하려는 세계는 우리의 심신 안에 은밀하게 숨어있을 수도 있고, 오감을 넘어선 저편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인류가 꿈꾸는 세계일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우주일 수도 있다. 가령 작가가 꽃병에 담긴 싱싱한 꽃과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든 꽃을 대비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한 편의 글을 쓰게 된다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동일시의 사색 과정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꽃과 인간에 관해 가능한 모든 생각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 미지의 세계로 작가의 영혼을 안내하는 인공위성이 상상력의 정체이다.
상상력의 요체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어째서’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다. 세 질문은 모두 우주를 대상으로 한다.
첫째는 대상이 지닌 근원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다. 이를테면 “무엇?”이다. 오감이 포착할 수 없는 미지(未知) 자체로서 사랑의 근원, 미움의 근원, 존재의 근원, 아름다움의 근원, 갈등의 근원, 죽음의 근원이다. 이를테면 “새(鳥)는 무엇인가”라는 정체로서 그 존재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에 대한 무한한 궁금증을 말한다.
둘째는 우주 전체에 대한 질문이다. 작가가 선택한 제재가 우주 전체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외적 물음이다. 우주는 대상 하나 하나와 유기적인 관련성을 맺고, 역으로 대상은 우주와 관련을 맺는데, 작가는 선택한 제재를 통해 우주의 전모를 이해하려는 꿈을 꾼다. 작가는 “새는 왜 나무에 머무는가?”라는 질문으로 새와 나무, 새와 하늘, 새와 노을 등 모든 대상이 우주의 일부이면서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셋째는 선택한 제재를 매체로 인간 세계를 향해 던지는 내재적 질문이다. 곧 “그렇다면”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이 그 제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묻다 보면, 작가는 어느새 대상과 우주와 인간이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유기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새의 울음은 내겐 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작가들은 독특한 인식 방법과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보는가. 사물을 본다면 진정 보는 것인가. 작가로서 본다고 할 때 사물은 무엇을 일러주는가. 왜냐하면 수필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야기꾼이며 타인의 삶을 적는 필경사이며 사회의 삶을 전달하는 리포터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는 언필칭 만능 언어화가가 되어야 한다.
문학쓰기는 대상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적자(適者)인 이유도 적자는 주어진 환경을 적절하게 해석하고 생존에 맞는 방안을 강구하기 때문이다. 수필의 이해와 해석과 창작도 마찬가지다. 수필은 시보다 영감이 넘치며 소설보다 구성력이 뛰어나고 드라마보다 현장감이 넘치는 담론임에도 수필가는 역동적인 대상 읽기에서 미흡하다. 그래서 글 쓰는 법을 배우지만 진정한 창작법은 모르고 있다. 창작은 펜으로 쓰는 시점 이전에 이미 완료되어 있다. 인식이라는 감수성이 화폭에 밑그림을 그려 두었으므로 펜으로 그것을 본뜰 따름이다.
수필을 쓰려면 대상에게 한없는 질문을 던져 근원적인 해답을 찾는 과정이 요구된다. 달팽이의 촉수, 잠자리의 겹눈, 나무의 새순에 담긴 눈, 이런 시선이 인간의 희로애락과 천상계와 지상계에 의미를 찾아낸다. 그 시선은 육안(六眼)으로 구성된다.
① 현미경과 같은 눈
② 망원경과 같은 눈
③ 쌍안경과 같은 눈
④ 잠망경과 같은 눈
⑤ 프리즘과 같은 눈
⑥ 심안
수필은 세상에 대한 “새롭게 읽기”의 과정이고 결과물이다. 이것을 이루려면 다양한 안목이 균형 있게 조성되어야 한다. 사물의 미세한 특징을 살피는 현미경 같은 눈과, 소재의 근원을 찾아내는 망원경과 같은 눈, 선과 악, 미와 추 등의 이미지를 조화시키는 쌍안경과 같은 눈, 소재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살피는 잠망경과 같은 눈, 소재의 색깔, 모양, 어원, 용도 등을 다의적으로 분석하는 프리즘과 같은 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심안이 합쳐질 때 시공을 초월하는 수필이 만들어진다. 그 예를 살펴보기로 한다.
1) 현미경의 눈
이것은 사물에 대한 심층적 안목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장미라면 장미꽃만 떠올리지만 현미경의 눈을 가진 수필가는 장미의 줄기와 가시는 물론 장미의 자양분을 빨아먹는 진딧물도 찾아낸다. 현미경의 눈을 대상 바라기에 비유하면 낙엽으로 사람의 인생 전반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세포를 관찰하듯 작은 실체가 지닌 모든 현상을 놓치지 않는 시선을 말한다. 이러한 안목을 지닌 사람은 대상이나 풍경에 대하여 단세포적이거나 단문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치밀한 묘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 겉 차림새부터도 봐 줄만 했다. 등의 허리부분 중간쯤까지 내려온 긴 머리칼, 그 끝은 한일자 형으로 잘려져 있었다. 마치 자를 대고 면도날로 일직선으로 잘라낸 것 같았다. 그날 입고 나온 레인코트는 또 어떠했는가. 어깨와 팔을 잇는 재봉선은 양쪽 어깨의 끝에서 한 뼘 가량은 쳐져있을 만큼 커서 헐렁거렸다. 그것도 진한 초록색이었으니 가을도 한참 깊어진 그때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었을까. 누구에게서 빌려 입고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박영보 <촌닭 같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2) 망원경의 눈
망원경의 눈이라 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일반인은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하고 귀를 막으면 듣지 못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대상의 근원적 의미를 이해하고 남다른 소재나 의미소를 찾아낸다. 이들은 타성화하거나 일반화된 소재를 거부하고 낯설어 신선하고, 신선하여 충격적인 긴장미와 참신성을 추구한다. 망원경의 눈을 가지면 수필이 지닌 주제와 소재 간의 뛰어난 중매쟁이가 되어 대상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날 밤 일찍이 잠자리에 든 내 곁에서 하마터면 청계천에서 잃을 뻔 한 막내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버지에게 엄마는 나지막하게 전하고 있었다. “이 어린 기그래도 어물 옆에 가 있습디다. 우째도 지 고향이라고 잊어뿌리기야 하겠능교.” 어숨푸레 잠이 들면서도 나는 다시 부산 바닷가, 왁자지껄한 자갈치시장 한편으로 달음질 치고 있었다.
이화선 <청계천에서 길을 잃다>
3) 쌍안경의 눈
쌍안경의 눈을 가진 사람은 대상을 해설할 때 고정관념에 빠지거나 일차원적인 편견에 빠지지 않고 균형 잡힌 미적 감각을 유지하게 된다. 보통의 수필가들은 사물의 가치관을 말할 때 선악, 남녀, 음양, 영육, 강약이라는 이분법을 적용하고 열거에서는 한 가지 종(種)만을 단문으로 제시하지만 쌍안경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복합적인 예를 제시하고, 다양한 문장과 입체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여 다채로운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쌍안경의 눈을 가진 사람은 폭이 두터운 글을 쓸 수 있다.
친구가 돋보기를 선물했다. 요즘 돋보기는 디자인도 예쁜 것이, 눈이 화등잔처럼 보이지도 않고 돋보기 티가 전혀 안 난다. 책을 오래 읽어도 머리가 안 아프고 컴퓨터할 때 써도 선명하고, 잔글씨 바늘귀도 모두 문제 없는 매직 안경이다. 친구의 사랑이 담긴 ‘돋보기’는 이제 곁에 없으면 안 될 물건이 되었다. 좋은 글을 쓰라며 보내준 ‘돋보기’ 선물에다, 아버지의 옛 시집까지 선물로 받고 보니 올해엔 나의 글쓰기는 큰 진전이 있을 것 같아 설렌다. 사물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건강한 글을 쓰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정아 <선물> 일부
4) 잠망경의 눈
잠망경의 눈을 가진 작가는 대상이 지닌 존재론적,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의미를 다각적으로 넓혀간다. 행위나 소재가 지닌 인문학적 배경을 두루두루 살피고 소재와 관련된 지식을 섭렵하였으므로 폭넓은 상식과 사유가 담긴 글을 쓴다. 동서양을 관통하고 고금을 넘나드는 예를 제시함으로써 교시적 효용을 보여주는 글쓰기에 능란하다. 나아가 대상에 대한 지적 배경을 첨가하여 독자의 이해력을 확장시켜준다.
언젠가 박수치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관찰한 적이 있다. 발을 동동 구름과 동시에, 휘파람을 불면서 박수를 쳐대는데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집단 정신병에 걸린 것 같았다. 영화에서 보았던, 생각없는 군국주의자들이 연상되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수백만 명의 생명도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신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몰아의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격한 분위기를 따져가며 함께 동화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잘못된 대중의 박수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하정아 <박수 유감> 일부
5) 프리즘의 눈
수필은 무엇보다 프리즘과 같은 눈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안목을 지닌 사람은 대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동일한 형상을 색, 냄새, 맛, 감촉, 명암이라는 오감을 통해 살피며, 동일 관념을 희로애락애오욕의 4단(端) 7정(情)을 조명하고, 다양한 표현과 기의를 열거하는데 유리하다. 프리즘의 눈을 가진 사람은 동일 기표에 대하여 풍부한 관점과 기의를 끌어올 수 있다. 눈에 비친 대상을 현상학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현상 뒤에 숨은 본질적 가치나 의미를 부단하게 파고든다. 즉 대상에 대한 구심력이 뛰어나 독자에게 심오한 사물 분석력을 대한다는 엑스터시를 줄 수 있다.
나는 매일은 아니지만 흐린 날이면, 음악과 빗소리가 어우러지는 날이면, 손님을 맞게 되는 때면 촛불을 켠다. 그리고 친구가 보내준 지리산 개화골의 ‘애전차’를 준비한다. 촛불의 분위기에서 마시는 차라면 커피보다 우리가 전통차가 제격이다. 차향에 스며드는 초의 향기, 초 속에 녹아드는 차향이 은은할 때 쯤이면 서나 가든즈의 불 밝던 창가에서 행복한 모습을 선사해주던 노부부처럼 행복해진다.
유숙자 <서나 가든즈의 촛불> 일부
수필의 문학성을 말할 때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감동적인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미적 구조이다. 미적 구조는 글을 설계하고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공학이므로 현미경, 망원경, 쌍안경, 잠망경, 프리즘이라는 안목이 어울려야한다. 디지털시대의 눈은 컴퓨터 스크린으로서 색깔, 동영상, 문자, 그림, 이미지가 결합하여 최적의 소통 효과를 준다. 수필가의 눈도 그러한 화면을 담아낼 때 21세기의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은 문학이므로 영적 감동이 깔려야 한다. 영적 감동은 감수성으로 얻어지며 앞서 이야기한 안경에 덧씌우는 마음의 안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심안으로서 감수성
감수성(sensibility)은 “외계의 자극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프랑스 문학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만물마다 고유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에머슨이 땅벌을 “인간보다 지혜로운 노란 바지의 철학자”로 본 감수성은 “고유한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는 접근 능력”이듯이 감수성은 대상을 포착하는 작가의 심안에 좌우된다.
감수성은 어디까지 확대하는가. 만물의 영육이 존재하는 것은 우주와 도서관이다. 억새라는 책, 붉은 산이라는 책, 거미라는 책, 촛대바위라는 책, 겨울 강이라는 책, 학이라는 책……. 한 권 한 권마다 작가의 미적 촉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만 권을 읽은 것과 같은 감수성을 얻게 된다.
어떻게 하면 감수성을 배양할 수 있는가. 첫째는, 시적 효과와 산문정신을 합치는 훈련을 하는 일이다. 시어는 사물에 지닌 이미지를 포착하여 최적의 문장을 구성하는 수단이라면 산문은 사물의 근본 의미를 찾는 탐구력을 키워준다. 시를 읽으면 근원을 찾는 시인의 감수성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수필을 읽으면 소재와 체험 간의 유기성을 찾는 문필가의 감수성을 습득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동일한 대상을 남다르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창작은 낯섦을 탐색하는 정신적 활동이다. 남다르게 보기, 뒤집어 보기, 거꾸로 보기 등으로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고 부분으로 전체를 간파하는 추리력을 키워야한다. 오동나무 잎과 봉숭아 잎과 솔잎을 서로 비교하면 각각 후덕한 여인의 미덕을, 소박한 처녀의 심성을, 풋처녀의 부끄러움을 연상할 수 있다. 그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감수성이다.
셋째로, 다원적 시각을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물의 미세한 특징을 판별하는 현미경 같은 눈과, 개성적인 의미를 조명하는 망원경과 같은 눈, 양가성을 구분하는 ‘쌍안경과 같은 눈과, 소재의 색깔, 어원, 용도 등을 분석해내는 프리즘과 같은 눈과 대상의 역사적, 문화적 의의를 살피는 잠망경같이 눈을 종합해나간다. 육안(肉眼)에 끌리지 말고 사물의 바닥까지 살피는 안목을 갖도록 노력하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바람이 가슴을 파고든다. 흐드러지게 꽃은 피어나고 나무엔 새잎인가 하면 벌써 신록으로 변하는 물길을 따라 가노라면 질펀한 들과 산허리엔 꽃길이 열린다. 고요한 가슴에 불을 질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용기가 생기게 하는 계절이다.
계절은 찾아왔다 떠나버린다. 바람의 다리를 건너와 잠시 멈칫거리다 또 바람의 다리를 건너 사라진다. 바람은 조용히 때론 무섭게 우리를 흔들고 때론 흙탕물 속으로 밀어내 허우적거리게 지상과 하늘, 대륙과 대륙을, 산과 바다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징검다리, 이 바람 다리를 인생들도 함께 건너가고 있다. 아니 우리 인간들 하나하나가 바람의 징검다리인가 보다. 세월의 바람이 생명 하나하나를 딛고 건너간다.
조옥동 <사월의 바람> 일부
모든 예술은 상상의 태반에서 태어난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문학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하였다. 결국 어떻게 보고 읽고 해석하는가가 수필창작의 근원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더더욱 21세기의 수필가는 대상의 근원을 풀어내는 복합 시선을 가져야 한다. 수필가는 우주의 항해자라는 신분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작품의 품격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사물을 읽는 동력에 비례한다. 앞서 설명한 육안(六眼)은 작품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두께뿐만 아니라, 무게까지 결정짓는 인자(因子)에 해당한다. 작품의 질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체험의 다소(多少)나 문장의 완성도에 앞서 육안(六眼)을 결합하는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5. 에필로그
수필은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이다. 그만큼 수필쓰기는 그만큼 즐거우면서도 고되고, 힘들면서도 보람 있는 작업이다. 당연히 창작의 산고와 희열이 뒤따른다.
문학, 특히 수필을 배우기 전에는 수필을 예사로 생각하여 용을 부리지 않고 하다못해 막 힘도 쓰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을 술술 풀린다고 여기며 그럴싸한 문구가 떠오르면 감정이 영글었다 하여 단숨에 몇 장이고 써내려 간다. 언어를 정선하고 치밀한 구조로 엮으려는 노력보다는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답다는 세간의 속설을 추종한다. 나아가 자신의 글에 도취되어 “참 좋다”는 주변의 덕담을 그런가하고 믿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창작에 회의감이 생겨난다. 시나 소설이나 수필에서 모두 마찬가지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준 높은 작품 앞에 서면서 “왜 나는 작아지는가”라는 상대적 위축감에 빠진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수필의 팩트인 “P․E․N”(조재은)이론과 수필의 4원소인 주제, 소재, 구성,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문자도”(박양근)라는 시스템을 이해하면 지성과 감성이 어울린 글 판이 짜인다. 비로소 수필이 “나 속의 나, 나 밖의 나”가 되기 시작한다.
그 원동력은 상상이다. 상상력은 예술을 창조하고 수용하기 위한 미적 기능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의 말처럼 문학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모든 예술작품은 오로지 상상으로 태어난다고 하여도 될 정도로 상상력은 문학적 우주를 창조하는 동력이자 조건이다. 작가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우주의 경계는 그가 날아갈 수 있는 상상력이라는 동력에 비례하므로 작가의 상상력은 작품 세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두께뿐만 아니라, 사상과 인식의 무게까지 결정짓는다. 만일 작품의 질적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문장표현의 한계가 아니라 우주에 대한 상상력의 한계이다. 화가든, 목공이든, 작곡가든, 창조하는 예술가는 소재에 대하여 얼마나 상상력을 발휘하는가에 따라 예술 수준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력은 작가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자 탐지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문학의 상상이라는 쟁기로 우주를 밭갈이하는 농부다. 고로 작가는 부단하게 상상력이라는 농기구를 개량하면서 문학적 자산을 넓혀나가야 한다. 적어도 문학적 수필을 쓰려는 수필가에게 상상력은 위대한 신약이면서 스스로 짐져야할 시지프스의 바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