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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털 일곱 가닥
사사기 16:15-19 2024/11/24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 왕국주일
16: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6: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6: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6: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고난 받는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 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우리 교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왕국주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왕국주일, 무슨 뜻일까요?
‘왕국’, ‘하나님 나라’의 주일이라는 뜻입니다.
성령 강림의 최종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주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모임을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담긴 사도 신경에서는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옛날,
사도 신경을 번역한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라는 말보다는 ‘거룩함’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거룩한 공회’라는 말이 더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번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룩함’과 ‘보편성’을 강조한 ‘거룩한 공(교)회’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의 전통이 14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 제3조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 상땅 에클레시암 카톨리캄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누구에게나 머무르는 에클레시아’)와
그래서 ‘거룩한 공회’가 첫 번째로 여기는 사명이
‘거룩함의 교제(Communio Sanctorum 콤뮤니오 상토룸)입니다.
이것을 우리말 사도 신경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로 번역했지만 핵심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거룩함의 교제(사귐)’이지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교인들끼리 의사소통을 잘하고,
서로 상부상조를 잘하라는 뜻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룩함 안에 거하듯이
저와 여러분이 거룩함 안에서 서로 머물러 있고
거룩함 안에서 서로 사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역시 레위기 19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 거룩함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1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를 가만히 기억해 보십시오.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를 때, 뭐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면 그의 자녀인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무엇을 닮아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세상과 구별되는 그 어떤 것, 거룩함입니다.
하지만 ‘거룩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사실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또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함(카도쉬)’이란
죄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
완전한 성화, 완전한 성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카도쉬(거룩)’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자신의 거룩함을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레위기 19장 2절의 말씀인데 새 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새)레19: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죄에 오염되지 않는 (카도쉬)거룩함을 이룰 수 있을 까요?
다행인 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에클레시아에 보낸 편지 속에서
그 해답을 조금 엿 볼 수 있습니다.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도 바울은 두 가지로 이해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처럼 온전한(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3절만 새 번역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새)엡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죄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별된 거룩한 시간, 구별된 거룩한 장소를 갖는 것도 좋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 곧 ‘카도쉬(거룩)’에 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
그 ‘거룩’에 까지 다다르는 성숙하고 성결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해한 레위기 19장 2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첫째 의미입니다.
둘째는 우리 안에 ‘거룩하신 분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울이 이해한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뜻의 둘째 의미입니다.
12절만 새 번역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새)엡4: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다음을 꼭 주의하셔야 합니다.
(새)엡4:14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열두 번째 사사 삼손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사로 부름 받은 삼손은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오염되지 않는 거룩한 삶
나실인의 삶을 태어날 때부터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나실인 삼손이 인간의 속임수에 보지 좋게 빠집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의 의무를 성실하게 지켰던 삼손이 보기 좋게 간교한 인간의 술수에 빠집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삿16: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여기에 보면, 들릴라가 삼손을 속이기 위해 간교한 술수를 부린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어떤 말일까요?
한 번 찾아보십시오.
정답은 ‘사랑한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동사 ‘아하브’는 남녀 간의 사랑에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사 ‘아하브(사랑한다)’의 원래 용도는 이렇게 써야만 했습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아하브)
그런데 들릴라가 삼손을 교묘히 속이면서 유혹하지요.
여호와를 사랑하(아하브)는 것처럼
나 ‘드릴라’도 (아하브)사랑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손이 ‘아하브‘ 사랑의 대상을 속이는 인간 들릴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렇게 근사하게 속임을 당한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 나실인 규정을 들릴라에게 말해 줍니다.
삿16: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6: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결국 사사 삼손은 나실인, 거룩함의 힘을 잃어버립니다.
삿16: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6: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머리털 일곱 가닥’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곱 가닥으로 땋은 삼손의 머리털’입니다.
‘일곱’ 히브리어로 ‘쉐바’입니다.
히브리어 ‘쉐바’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일곱’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것이 동사형으로 사용될 때는 ‘맹세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일곱 가닥으로 땋은 삼손의 머리털’ 그냥 일반적인 사람의 머리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맹세 즉 나실인, 거룩함의 증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의 증표를 나실인 삼손이 속이고 유혹하는 사람에 내어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참한 일들이 오늘도 ‘거룩한 공회’인 ‘교회’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회복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맹세 곧 거룩함의 증표가 우리 안에서 회복되도록 잠잠히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새)16:22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
둘째는 거룩함의 회복을 바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삿16:28 그 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였다.
"주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이렇게 증명해 보이십니다.
(새)삿16:29 그런 다음에 삼손은 그 신전을 버티고 있는 가운데의 두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또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16:30 그리고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니, 그 신전이 무너져 내려 통치자들과 모든 백성이 돌더미에 깔렸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다.
말씀을 마칩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거룩함을 상실한 인간의 비참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새)삿16:21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사로잡아, 그의 두 눈을 뽑고, 가사로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삼손을 놋사슬로 묶어, 감옥에서 연자맷돌을 돌리게 하였다.
하지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거룩함을 회복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21절 뒤에 나오는 22절입니다.
(새)삿16:22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읽혀졌습니다.
그러나 깎였던 그의 거룩함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