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동지 / 김혜순
눈이 와
흰 벌판 한가운데
물로 만든 척추처럼
개울이 흘렀다
나는 팥죽을 쑤었다
오른쪽 폐에서 피떡처럼
검붉은 기침이 펄떡거리고
집을 떠나 이곳에 오면서
이름도 적지 않고
초대장을 보냈는데
꼭 올 것만 같았다
공중에서 내려온
흰 시트를 헤치자
아빠, 네가 서 있었다
팥이 다 익었을 때
두 눈에 맺힌 아빠를 닦으며
흰 설탕을 넣었다
눈이 더 와
물로 만든 척추를 가진 새가
거대한 날개를 털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작은 물고기들이
폭설처럼 쏟아졌다
쏟아지고 나니 다 은빛 티스푼인
물고기들이었다
챗 GPT분석
1. 제목의 이유
**"레시피 동지"**는 ‘레시피(Recipe)’와 ‘동지(冬至)’의 결합으로, 요리법(레시피)과 동짓날의 풍습이 연결된 제목이다.
‘레시피’는 특정 음식을 만드는 방식이나 과정이며,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로, 한국에서는 팥죽을 쑤어 먹는 전통이 있다.
즉, 제목은 단순한 요리법을 넘어 삶과 죽음, 기억과 의례의 방식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된다.
시 속에서 화자는 동짓날 팥죽을 쑤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는데, 이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의례적 행위로 작용한다.
"레시피"라는 단어는 단순한 음식 조리법이 아니라, 기억과 애도의 방식이 특정한 요리법처럼 반복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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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제
1. 죽음과 기억, 그리고 애도의 과정
시의 화자는 팥죽을 쑤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마치 초대장을 보낸 듯 그를 맞이합니다.
팥죽을 쑤는 동지 의례는 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행위로 그려집니다.
2. 생(生)과 사(死)의 경계, 그리고 순환
동짓날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시점이지만, 그 이후로 낮이 길어지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시 속에서는 죽은 이(아버지)가 등장하고, 흰 눈과 붉은 팥죽이 교차되면서 생과 사가 맞물리는 순환 구조가 암시됩니다.
3. 내면적 고통의 형상화
“오른쪽 폐에서 피떡처럼 검붉은 기침” 등 육체적 고통의 이미지는 상실의 고통이 몸으로 표출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팥죽의 붉은 빛은 피의 색과 닮아 있어 상실과 고통을 시각적으로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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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징 분석
1) 눈과 흰 벌판
눈은 죽음, 망자의 세계, 정적(靜寂), 순수를 상징한다.
"흰 벌판"은 황량한 겨울 풍경이자, 죽음 이후의 무(無)와 연결된다.
또한, 죽은 자의 영역과 살아 있는 자의 영역을 구분하는 경계로 작용한다.
2) 물로 만든 척추
개울이 흘러가는 모습을 "물로 만든 척추"라고 표현한 것은 생명의 흐름을 나타낸다.
"척추"는 몸의 중심이자 생명의 기둥이며,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 매개체처럼 기능한다.
물은 생명과 죽음을 넘나드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흘러가는 개울은 기억의 흐름이나 생명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3) 팥죽
한국에서 동지 팥죽은 귀신을 쫓고 액운을 막는 음식으로 여겨진다.
시에서는 화자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팥죽을 쑤고, 흰 설탕을 넣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상실을 애도하는 동시에 죽은 자를 위한 의례로 해석할 수 있다.
팥이 "검붉은 기침"과 연결되는 부분에서, 팥죽이 신체적 고통(혹은 죽음)과 연결되며, 피와 같은 색깔의 상징성을 갖는다.
4) 공중에서 내려온 흰 시트
"공중에서 내려온 흰 시트"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허무는 상징적 장치로, 망자가 기억 속에서 다시 소환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흰 시트는 죽음을 덮는 동시에 열어 보이는 요소로, 아버지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등장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또한, 눈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죽음을 정화하고 애도의 의식을 완성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5) 눈이 더 와 새가 일어나는 장면
눈이 더 내리면서 "물로 만든 척추를 가진 새"가 거대한 날개를 털며 일어나는 모습은 영혼의 상승, 혹은 죽음 이후의 비상을 암시한다.
새는 종종 죽은 자의 영혼이나 그 이동을 상징하며, 여기서는 떠난 아버지가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방식일 수 있다.
6) 물고기와 은빛 티스푼
"작은 물고기들이 폭설처럼 쏟아졌다"라는 구절은 생명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 은빛 티스푼인 물고기들"로 변한다.
은빛 티스푼은 식사의 도구이자, 음식을 먹는 행위와 연결된다.
물고기가 폭설처럼 떨어진다는 표현은 죽음과 소멸을 의미하지만, 티스푼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이 다시 삶과 연결된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결국 다시 살아가는 방식이 됨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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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김혜순의 「레시피 동지」는 단순한 팥죽 레시피가 아니라, 기억과 애도의 방식,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례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눈과 흰 벌판"은 죽음을,
"팥죽과 피"는 신체적 고통과 애도를,
"새와 물고기"는 죽음 이후의 비상과 영혼의 흐름을,
"은빛 티스푼"은 삶의 지속성을 의미한다.
팥죽을 쑤는 행위는 망자를 위한 의례인 동시에, 남아 있는 자가 슬픔을 견디는 방식이며, 그것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레시피"라는 단어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