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년 7월, 의자왕(641~660)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6년 뒤 신라와 당나라가 648년(의자왕 8·진덕여왕 2) 연합군 결성의 밀약을 맺었다. 당 태종은 신라 사신(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을 만나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 백제·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을 의자왕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의자왕은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했다. 의자왕은 처음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성충(?~656)과 흥수(생몰년 미상) 같은 충신들을 몰아냈다. 또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 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도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결국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했다.
소정방(592~667)이 이끄는 당나라군 13만명이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한 게 660년(의자왕 20) 6월21일이다. 이후 황산벌 전투 및 나·당 연합군 본격합류(7월9일)-연합군 사비 진격(12일)-의자왕의 사비 탈출 후 웅진(공주)피신(13일)-의자왕 항복(18일)까지…. 황산벌 전투부터 따지면 단 9일 만에 항복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백제 678년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8월2일 열린 나·당연합군의 승전의식에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615~682)은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벌인다. “당상에 앉은 태종무열왕과 소정방은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을 당하에 앉혔다. 어떤 자들은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라고 조롱했다.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꼈다.”(<삼국사기> ‘신라본기·태종무열왕’조)
9월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만2000명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 왕조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간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었다. 당나라군이 철수하기도 전인 8월부터 남잠성·진현성(충남 대덕) 등지에 항거의 움직임이 일더니 전 좌평 정무가 두시원악(청양)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을 습격했다.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은 무왕(재위 600~641)의 조카인 원로왕족 복신(?~663)이었다.
복신은 660년 9월초 승려 도침(?~661)과 함께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에 나섰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리려고 충남 부여에 세운 <당유인원기공비>(보물)도 “도침과 복신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고 했다. 거병초기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부흥군이 복신의 휘하로 결집되고 있었다. “흑치상지(630?~689)가 별부장 사타상여와 함께 험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에 호응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부흥군이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다. 곧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부흥군은 곳곳에서 진퇴를 거듭하며 나·당 연합군을 괴롭혔다. 그 사이 변수가 생긴다. 당나라가 주적인 고구려 침략전쟁에 전념한 것이다. 신라에게는 평양까지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자 백제부흥군의 운신이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661년 6월~662년 2월 사이 당나라군이 고구려와의 혈투에서 패했다.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러자 당나라 고종(649~683)은 백제고토에서 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있던 웅진도독 유인궤(602~685)에게 칙서를 내렸다. “형편이 어려우니 신라땅으로 가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구당서>는 “백제땅에 주둔하던 당나라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장기화된 전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모두 돌아가기를 바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유인궤는 “평양을 공격하던 군대가 철수했는데, 웅진의 군대마저 뽑아버리면 백제는 다시 일어설 것인데,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키겠느냐”고 백제 주둔을 고집했다.
이 무렵 백제부흥군의 위세가 대단했다. 부흥군 지도자인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게 ‘신분이 낮아 만나 줄 수 없다’고 홀대했다. 복신은 당군 사령관 유인원에게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전송해주겠노라”고 조롱하기도 했다.(<삼국사기>)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라고 해봐야 웅진성 정도였다.
백제부흥군은 661년 9월부터 새로운 왕국의 면모를 갖췄다. 복신 등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풍장)을 백제의 새 임금으로 옹립했다. 어찌 보면 백제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지 1년여 만에 새로운 임금(풍왕)을 내세워 부활한 셈이였다. 풍왕의 등장과 함께 부흥백제왕조의 정통성이 확립됐다.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의자왕(641~660)이 아니라 풍왕(661~663)이라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백제의 32대 왕=풍왕’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풍왕의 즉위는 내부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부흥운동을 이끈 동지였던 복신과 도침이 풍왕의 신하로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결국 복신은 도침을 죽인 뒤(661) 풍왕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웁운.(663년 6월) 하지만 복신의 반란 음모를 알아차린 풍왕이 선제공격에 나서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내부 분열의 대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서기>는 “663년 8월 백제가 복신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가 곧장 백제를 공격해서 주류성(부흥군의 최후 거점)을 취하고자 했다”(‘천지기’)고 했다. 신라는 김유신 등 28~30명의 장수가 지휘하는 5만 정예병을 파견했다.
위기에 빠진 풍왕은 왜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마침내 왜국 장수 여원군신이 이끄는 지원군 1만여명이 수송선 1000여척에 나눠 타고 백제로 달려왔다. 663년 8월 마침내 한반도 남부 서해안의 백강(백촌강·백강구)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백제-왜가 한편이 되고, 신라-당나라가 한편이 되어 치른 동북아시아 국제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 삼국의 역사서에서 저마다 이 처절한 해전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왜·백제부흥 연합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친 당나라군과 잇달아 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당나라군의 포위공격에 물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틈도 없었다.”(<일본서기>)
“당나라 수군이 백강에서 왜병을 만나 4번이나 싸워 모두 이겼고, 왜선 400척을 모두 불태워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자치통감>) “당나라가 수전을 펼치자 신라군은 당나라군의 선봉이 되어 육지(주류성)에서 백제의 정예기병을 깨뜨렸다.”(<삼국사기>)
사서에서 보듯 전투는 백제-왜 연합군의 궤멸로 끝났다. 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은 몇몇 측근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백제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의자왕의 다른 아들들인 부여충승·충지가 지키던 주류성은 9월초 항복하고 말았다. 장수 지수신이 마지막 항전을 벌인 임존성 역시 배신자 흑치상지와 사탁상여의 공격으로 11월 함락되었다.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3년3개월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일본서기>는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이 서로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돌이킬 수 없구나.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기니 조상의 무덤을 어찌 가볼 수 있을 것인가.(州柔降矣 事無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 ‘천지기’)
그래서 백제의 멸망은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 때가 아니라, 풍왕의 고구려 망명과 주류성·임존성 등의 함락이 이어진 663년 9월이 타당하다. 그 후에도 백제 유민들의 무장독립투쟁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664년 3월 백제 독립군이 사비산성(부소산성)을 점령했다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다.(<삼국사기> ‘문무왕’조)
<삼국사기>는 “671년(문무왕 11) 6월 신라가 장군 죽지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했다”고 했다. 백제 독립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다. 그럼에도 가림성 등 일부 성은 신라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이듬해인 672년(문무왕 12) 1월 백제 고성성(사비성)을 공격해서 이겼다. 그러나 2월 가림성을 쳤지만 승리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신라가 의자왕이 항복한 지 12년,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풍왕이 고구려로 망명한 지 9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다. 어떤 연구자는 전한·후한, 서진·동진처럼 백제(기원전 18~기원후 660년)와 부흥백제국(661~663)으로 구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