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서울로 올라와서 대번 편속촌(김기림 시인)이 박인환 시인을 소개했다. 얼굴, 코가 칼날 같고 맵시있는 청년이었다, 날카롭고, 재치있고, 눈치빠르고, 민감하고, 쾌활하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기질의 시인, 신선한 시같은 인상을 주는 시인이었다. 그후 나는 매일같이 명동에서 그와 어울리게 되었다. 이봉구씨와, 이봉구씨는 술을 많이 했다. 많이 했다기보다는 많이 즐겼다 하는 것이 나을 거 같다. 늘 술집에 있었다, 술집 아니면 다방, 다방 아니면 술집, 뱅뱅 그 언저리를 돌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명동에서 살았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있으면서(수복 후엔 평화신문 문화부장). 우린 이봉구씨를 만나면 즐거웠다. 그 재치있는 말이 안주였다. 애수에 젖은 그의 인생 철학이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처럼 우리를 젖어들게 했다. 그가 죽은 뒤(1983년. 1. 29. 작고) 나는 위와 같은 추도시를 썼다. 이렇게 그는 가고, 남은 우리들에게 수많은 일화를 이어간다. 그 하나로 <서장 초대>가 생각난다. 서울로 수복한 후 어느 사건이 있었다, 문인들을 잡아들이는 일이 생겼다. 1955-6년경. 명동은 폐허에서 다시 부스럼처럼 솟아오르고 있을 때였다. 동동주 술집과 다방, 밤마다 싸구려 돈으로 흥청거렸다, 슬프게, 가련하게, 동방살롱에 어느 날 저녁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평론가 박기준씨를 찾아왔다. 박기준씨는 대구 출신,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도쿄 외국어전문학교에서 영어과를 졸업, 언론계에 종사, 문학평론을 쓰고 있던 멋쟁이 신사였다. 항상 파이프를 물고, 타임지를 끼고, 멋을 스스로 부리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형사가 “선생님이 박기준씨입니까?” “그렇소, 왜 나를?” “네, 저의 서장님께서 좀 보시자고 해서.” “어느 서 말이오?” “서대문경찰서입니다,“ ”서대문경찰서 서장이 왜?“ ”모릅니다.“ ”그럼 갑시다! 오늘 저녁은 잘 먹었는데.“ ”네, 네.“ 이렇게 해서 박기준씨는 다방 밖으로 형사들하고 나갔다. 까만 지프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오르려 할 때 이봉구씨가 나타났다. 순간 박기준씨는 항상 출출한 벗 이봉구씨와 같이 갔으면 하고, ”저기 나와 아주 가까운 이봉구씨가 오는데...” 하자 “네, 같이 가시지요.” 형사의 대답. “이형, 나 오늘 서대문경찰서 서장 초대를 받아서 지금 가는데 어때 같이 가자구.” “아, 그래 한잔 잘 하겠군.” 하며 같이 올라탔다. 탄 건 좋았으나, 그것이 서장 방으로 초대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유치장으로 직행을 한 것이다. 아, 얼마나 서글픈 일이었던가. 한 3일 고생을 하고 나온 이봉구씨는 “나 그동안 서장 초대를 받았었어,” 하곤 웃어댔다. 한동안 명동에선 그 말이 유행이었다. 그도 만년엔 중풍으로 쓸쓸히 사라져가고 묘비도 없었는데 작고한지 3년후인가 김광균 시인의 우정으로 고향땅 안성 그의 초라한 묘 앞에 의젓한 문인비가 세워졌다. 글씨는 송지용씨가. 조병화, 『떠난세월 떠난사람』, 융성출판, pp.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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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학기에 새로운 과목을 맡아서
요즘 꽤 부산합니다.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우고....
그러다 이제사 멜을 보니 한참지난
이런 멜이 있더군요.
사진의 세 사람 둥 천경자 시인만
생존해 있나봅니다.
차암~~
56년도에 한껏 멋을 낸 복장이군요. 이봉구에 대한 표현이 예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