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6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오 9,14-15
단식의 이유가 하느님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단신 논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는 단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신랑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희생은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모든 희생은 피 흘림입니다.
피는 생명인데 내가 흘리는 피로 끈끈한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부부관계이고 가정이고 나라이며 넓게는 인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남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까요? 어차피 세상은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희생을 합니다.
그 희생이 자기 자신이 될 때는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에서 주인공은 호화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성공한 월스트리트의 경영자 잭 캠벨입니다.
그는 직업적 성공을 위해 개인적인 관계와 가족생활을 희생하면서 자기 경력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잭은 의문의 남자와의 이상한 만남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다음 날 아침 대체 현실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새로운 삶에서 그는 더 이상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며, 대학 시절 연인 케이트와 결혼한 평범한 교외 가장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방향 감각을 잃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잭은 점차 사랑, 가족, 일상의 단순한 기쁨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가족의 따뜻함, 부모로서의 도전과 보상, 헌신적인 파트너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대체 생활에 더욱 몰입하면서 그는 개인적인 관계보다 자기 경력을 우선시함으로써 자신이 놓쳤던 것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됩니다.
어차피 고생하는 것으로 따지면 같은데 결국 나 자신을 위해 고생했던 것은 외로운 지옥이었음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단식은 이러한 희생과 같습니다.
희생의 목적은 소속감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만을 위한 희생이라면 그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희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영화의 주인공이 가정을 위해 사기를 치고 도둑질하며 살인까지 저지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가족들은 그러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하는 희생이 가정을 위한 것이라면 가정을 지켜주는 더 큰 공동체인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도 지키고 세금도 냅니다.
하지만 오염으로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가정을 위한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한 사랑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가다 가장 큰 공동체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요 모든 공동체의 원인인 하느님과 그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기준이 먼저 신랑이신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도, 나라도, 가정도, 배우자에 대한 희생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국가 유공자로서 가정에서도 환영받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희생이 이기적이지 않도록 모든 공동체의 원인이 되는 하느님을 위한 희생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단식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희생으로 온 인류, 나라, 가정, 배우자를 위한 희생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6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 마태 9,14-15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대받은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일 것입니다.
잔뜩 차려진 음식 앞에 손님들이 눈이 휘둥그래 지면서 정신줄놓고 폭풍 흡입할 때, 초대한 주인도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신이 날 것입니다.
숱한 고민과 갖은 정성 끝에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며 한 젓가락만 먹고 딴청 피운다든지, 요즘 금식기도 중이라며 아무리 음식을 권해도 고개를 흔든다면 초대한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해 준비한 풍성한 천상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우리 각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면서 즐기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단식은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 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잔치를 즐기고 축제를 만끽하라는데 즐길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뭘 즐기라는 거냐는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즐길 거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자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강론>
(2024. 2. 16. 금)(마태 9,14-15)
<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유대인들의 단식은 원래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서 참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식이 ‘슬퍼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참회의 의미는
점점 희미해지고 일상적인 신심 행위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많이, 또 자주 하면 좋은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단식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마태 6,16ㄱㄴ).”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미 메시아가 와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 와 계시는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과 참회하면서 슬퍼하는 단식을 하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지금은 기뻐할 때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본래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구세주께서 오셨고, 내가 그분과 함께 살고 있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당연히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이 말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에 관한 율법 실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 교회의 단식과 금육 문제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극기 고행과 단식과 금육을 잘 지키는 나라가 아니라, 그런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단식이 없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그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이고, 그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메시아와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았기 때문인지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신심 행위로 단식을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아마도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더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단식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단식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이 먹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먹을 것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단식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만일에 그렇게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모르거나 외면하면서 단식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강요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병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병자도 마찬가지인데, 먹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단식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도 자비도 없는 일, 무자비하고 냉정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어떤 죄를 지어서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신앙인들이 신랑을 빼앗긴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몹시 슬퍼했던 신자들은 슬픔이 너무 커서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부러’가 아니라 저절로 단식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를 지어서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황은 정확하게 말하면 ‘신랑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신랑을 떠난 일’입니다.
죄를 짓고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신랑에게로(주님에게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할 때, 단식은 회개와 보속을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단식의
가장 첫 번째 의미는 ‘보속’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보속입니다.>
그러면 꼭 단식을 해야만 하는가? 단식만이 유일한 방법인가?
우리는 단식과 금육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간에 어떤 신심 행위에 대한 강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단식재와 금육재를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경우가 있고, 그 경우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율법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지만, 반대로, “혹시 내가 지키는 단식과 금육도 위선이 아닐까? 나도 위선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에 주눅 들고, 걱정하고, 괜히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도 신앙생활의 기쁨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보속’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기쁨으로 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보속의 의미로 하는 단식도 기쁨 속에서 해야 합니다.
“혹시 나도 위선자가 아닐까?” 라는 걱정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제1독서로 읽는 이사야서의 단식에 관한 말씀은,
단식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