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아사녀>(1963)-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상징적, 추모적, 회상적, 남성적, 확신적
◆ 표현
* 동일한 통사 구문의 규칙적 반복(없어도 ∼ ㄹ지어이)으로 율격이 형성됨.
* 3 · 4연에서는 규칙을 파괴하여 운율과 의미에 활력소 제공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화사한 그의 꽃 → 그의 '영혼'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
* ㄹ지어이 → 평서형 종결어미(당위 + 감탄 + 소망 + 확신)
* 맑은 숨결 → 그의 '영혼'을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
* 행인 → '그'에 대해 그리움을 지닌 존재
시인 자신이면서 3인칭화한 시적 자아일 수도 있음
어두운 시대에 먼저 가신 민중들의 얼을 찾아 헤매는 '탐구자'의 모습
* 쓸쓸한 마음 →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어둡고 무거운 마음
* 눈길 비었거든 → 그리운 그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정신적 공허감.
* 4연
→ '그'가 없는 어려운 시대에 '그'의 뜻을 계승·회복하자는 의미
찾는 눈길에 그리운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거든 산과 들의 바람이라도 담을 일이고,
바람조차 없다면 생전에 나누었던 인정이라도 마음에 담을 일이다.
* 울고 간 그의 영혼 → 그리운 그의 정체가 드러난 표현
억울하고 선량하게 살다 시대적 비극으로 죽은 이름없는 민중
◆ 주제 ⇒ 그리운 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리운 이의 부활에 대한 소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그'의 부활에 대한 확신
◆ 2연 : '그'의 숨결을 느낌
◆ 3연 : '그'의 자취를 찾아 헤매는 행인의 모습
◆ 4연 : 따뜻한 인정 회복
◆ 5연 : '그'의 영혼의 부활에 대한 확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신동엽의 시비(詩碑)에 새겨진 이 시는 그의 문학 정신이 잘 승화된 서정시이다. 개인적인 자아보다는 항상 [우리]라는 민족문학적인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으리라.
이 시는 이 땅에서 한스럽고 선량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이 땅의 산야에 감도는 '그리운 그'(민중)의 넋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시가 쓰여진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보아 4.19 혁명의 영령을 기린 시라고 할 때, '꽃', '바람' 등의 시어는 "고매한 신념과 이상을 가지고, 소리 높여 외치다 죽어간 그리운 그의 환생된 모습" 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행인은 그를 생각하며 쓸쓸한 마음으로 눈 덮인 들길을 걷고 있다. 역사의 '봄'을 위해 한 젊은이가 죽고 난 지금은 '겨울'. '그리운 그'의 얼굴과 노래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텅 빈 듯한 공허함이 '비었거든'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공허감에 그대로 침몰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 공허를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공허를 메울 수 있는 것이 '인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 얼어붙은 삭막한 계절을 녹일 수 있는 것이 '인정'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서로 다독이며 견딜 일이다. 그리운 그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어도 그의 얼굴을 닮은 꽃과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노래를 산에 언덕에 다시 살려내는 일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일 테니까
그래서 이 시 속에는 이러한 절규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 오랜 세월 이 땅을 지키고 살다 간 이름도 없고 삶의 기록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넋은 이 땅의 산에 언덕에 정녕 다시 부활하여 피어나라. 억울하고 설움 속에 살다간 영혼들이여, 당신들의 노래와 영혼(정신)은 마땅히 부활하여 피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자연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의 조화를 시도하는 신동엽의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생명과 민족의 순수성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자연을 포용하는 대지의 이미지는 인간이 가장 순수하게 뿌리내리고 이념의 갈등이나 현실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력의 공간으로 '산'·'언덕'·'숲'·'눈'·'바람' 등의 자연 현상으로 표상되고 있다. 즉, '산'은 수직적 상승 지향성으로 고통과 혼돈의 현실 세계를 초극하는 신성한 공간이며, '들'과 '숲'은 푸르른 생명력을, '바람'은 붙잡을 수 없는 무형의 형체로 시공을 초월하는 정신적 영혼을 나타내는 한편, '눈'은 순결이나 숭고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대지의 이미지는 '그'의 영혼과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작가소개]
신동엽 : 시인
출생 : 1930. 8. 18. 충청남도 부여
사망 : 1969. 4. 7.
가족 : 아들 신좌섭
데뷔 :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작품 : 도서, 기타
충청남도 부여(扶餘) 출생.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건국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당선되어 데뷔하였다. 이후 1961년부터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재직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허구성을 비판하는 시를 짓기 시작한다.
그 후 아사녀(阿斯女)의 사랑을 그린 장시 《아사녀》,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서사시 《금강(錦江)》 등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화(詩化)하였으며,
시론(詩論)과 시극(詩劇)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시론으로는 《시인정신론(詩人精神論)》
등이 있고,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시극동인회에 의해 상연되었다.
특히 4·19혁명의 정신을 되새기며, 인간 본연의 삶을 찾기를 희망한
시 <껍데기는 가라>를 《52인 시집》(1967)에 간행하며 그의 시적 저항정신은
더욱 확고해졌다. 1969년 4월 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약 20여 편의 시를
발표했으며, 사후 유작을 모아 간행된 《신동엽전집》(1975)이 있다.
주요작품으로 《삼월(三月)》 《발》 《껍데기는 가라》 《주린 땅의 지도원리(指導原理)》
《4월은 갈아 엎는 달》 《우리가 본 하늘》 등이 있고, 유작(遺作)으로
통일의 염원을 기원하는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