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饅頭(만두)
吾家巧媳婦 오가교식부
能作水饅嘉 능작수만가
玉屑鞱金粟 옥설도금속
銀包泛鐵鍋 은포범철와
苦添薑味勝 고첨강미승
鹹助豆漿多 함조두장다
一椀呑淸曉 일완탄청효
崇朝飯不加 숭조반불가
*며느리 식, 만두 만,
가루 설, 감출 도,
생강 강, 짤 함,
우리집 며느리 솜씨가 좋아
맛있는 물만두를 잘도 빚네
옥가루에 금빛 소를 넣어
은빛 껍질로 싸서 철솥에 띄우네
쌉쌀한 맛은 생강이면 딱 좋고
짭짤한 맛은 간장이면 족하리
맑은 새벽 한 사발 먹고 나니
아침 내내 밥 생각이 없네
*이응희 李應禧, 1579~1651
이응희(李應禧)의 「만두(饅頭)」
吾家巧媳婦 能作水饅嘉 | 우리 솜씨 좋은 며느리, 물만두 잘 만들지. |
玉屑鞱金粟 銀包泛鐵鍋 | 옥가루에 금빛 조로 소를 만들어 은빛 피로 싸서 철가마에 띄우네. |
苦添薑味勝 醎助豆漿多 | 찍어 먹는 것엔 쓴맛 더하려 생강맛을 더했고, 짠맛 더하려 간장 더했지. |
一椀呑淸曉 崇朝飯不加 | 한 그릇을 맑은 새벽에 먹으면 아침이 끝나도록 밥 생각나지 않는다네. |
1) 제갈공명이 만들었다는 만두는
이른 시기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시대에 이미 우리 식단에 널리 올랐다.
2) 이색(李穡)의 「이랑가조향만두(二郞家朝餉饅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 흰 피 속에 고소한 기름을 넣어 만들었음을 알 수 있음.
外面團圓雪色凝 | 바깥 면은 둥글고 눈처럼 하얀색으로 엉겨 |
流膏內結曉重蒸 | 흐르는 기름이 안에 뭉쳐 있으니 새벽에 거듭 찐 거라네. |
3) 위의 시를 보면 조선 중기에는 만두가 더욱 발전하여
좁쌀을 소로 하고 생강과 간장을 넣어 물만두를 만들어 먹었음을 알 수 있음.
17세기 향촌생활이 오롯이 담긴 빼어난 풍속시 -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시인으로서의 삶과 저술
이응희(李應禧, 1579~1651년)는 자가 자수(子綏),
호가 옥담(玉潭)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안양군(安陽君)의 현손(玄孫)이다.
성종대왕의 삼남 안양군은 귀인(貴人) 정씨(鄭氏) 소생으로 연산군과는 이복형제간이다.
이복형인 연산군이 즉위한 후 생모 윤씨(尹氏)가 폐출되어 죽게 된 것이
귀인 정씨와 엄씨(嚴氏)가 참소한 탓이라 여겨 두 귀인을 장살하였다.
그보다 앞서 안양군은 봉안군(鳳安君), 회산군(檜山君) 두 아우와 함께
연산군의 학정을 비판하는 직언을 올렸지만 연산군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결국 안양군은 1504년(연산군 10) 충청도 제천에 유배되었다가 제주 적소(謫所)에서 원사(寃死)했다.
부인 능천군(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딸은 견성군(甄城君)의 노비로 넘어갔으며,
그 재산은 모두 몰수되는 참화를 입었다.
다행히 중종(中宗)이 반정으로 즉위한 후, 안양군은 작위가 회복되고 공회(恭懷)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리고 국가의 예법에 따라 그 아들 이억수(李億壽)가 종남도정(從南都正)에 봉해졌고,
손자 이귀의(李貴義)는 덕풍부정(德豊副正)에 봉해졌으며,
증손 이현(李玹)은 여흥령(驪興令)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실의 후손에게 세습되던
이러한 종친부(宗親府)의 벼슬도 관례에 의하여 여흥령 이현의 대에서 끝이 났다.
옥담공은 여흥령 이현과 평산신씨(平山申氏) 계형(季衡)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종실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기에 평범한 향촌의 사족으로 살았다.
경기도 산본, 당시는 과천에 속한 산내곡(山內谷), 수리산 아래 선대부터 살던 집에서 책을 읽고
시를 짓는 일로 즐거움을 삼았다. 젊은 시절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그 뜻이 절실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5대손 이사영(李思永)의 〈선고부군묘지(先考府君墓誌)〉에는 옥담공이 광해군 때
대과(大科)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지만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보고 벼슬에 뜻을 접었다고 하였다.
다음 〈나의 인생[我生]〉은 1625년 무렵 스스로의 삶에 대해 쓴 작품이다.
내 인생 천지간에 일개 무능한 몸 / 我生天地一踈慵
마흔여섯 해 생애에 얻은 것이 없어라 / 四十六年無所得
글을 지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 爲文未遂捿科第
검술을 배운들 어찌 만인을 대적하랴? / 學文焉能萬人敵
방안의 노부모께 맛난 음식 못 올리고 / 堂中親老甘旨闕
산골이라 아내는 반찬 없다 시름하네 / 壑裏妻愁盤膳缺
아들 일곱 있어 공부를 하였다 하지만 / 有子七人縱云學
겨우 글귀나 읽으니 무슨 소용 있으랴 / 摘句尋章何所益
한가하면 술상을 차려 이웃을 모아서 / 閑中置酒聚比隣
강개한 노래 크게 부르니 마음이 아득하다 / 慷慨高歌心漠漠
희끗희끗 백발이 이미 머리에 가득하니 / 種種白髮已滿巓
절로 늙어갈 뿐 무엇을 다시 아쉬워하랴 / 任天從衰何用惜
아아, 타고난 운명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 吁嗟賦命苟如此
술병 앞에서 오래 시름에 잠기지 말자 / 莫向樽前長戚戚
마흔여섯 해 살아온 인생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글을 익혔지만 과거에 오르지 못하였고,
무예를 배운다 한들 나라를 위해 크게 쓸 재주가 되기는 어렵다.
네 번째 구의 학문(學文)은 학검(學劍)의 잘못이다.
이 구절은 항우(項羽)가 젊은 시절 글을 배워도 성취하지 못하고 검술을 배워도 성취하지 못하여
그의 숙부 항량(項梁)이 꾸짖자, 항우가 “글은 자기 이름만 쓸 줄 알면 되고
검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배울 것이 못 됩니다.
만인(萬人)을 대적하는 것을 배우겠습니다.” 한 고사를 따른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라 부모님께 맛난 음식도 올리지 못하고 반찬거리 없다고
푸념하는 아내에게 부끄럽다. 자식에게 부지런히 글을 가르쳐 자신을 대신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쳐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자신은 그저 이웃의 벗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
분수대로 살아갈 뿐이다. 옥담공은 이 시에서 다짐한 대로 살아갔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옥담공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5년에는 선영이 있던 산내(山內)에 새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평생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무렵부터 스스로의 호를 옥담(玉潭)이라 한 듯하다. 집 동쪽에 선대에 파놓은
그리 크지 않은 못이 하나 있어 맑은 물이 흘러들었다.
그 곁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옥담이라 하였는데, 이로써 호로 삼게 된 것이다.
옥담에는 여덟 가지 풍경이 있었다.
바람을 머금은 푸른 물결이라는 뜻의 함풍압록(含風鴨綠),
조그마한 구리 동전 모양의 파란 연잎이 떠 있다는 뜻의 청전소점(靑錢小點),
높은 산속의 아름드리 소나무라는 뜻의 용문노간(龍門老幹),
겨울에도 푸르른 빛을 자랑하는 바위틈의 소나무라는 뜻의 암변만취(巖邊晩翠),
햇살이 비치는 연못에 부리가 노란 오리가 노닌다는 뜻의 농일아황(弄日鵝黃),
해당화가 농염한 향기를 뿜는다는 뜻의 자금농향(紫綿濃香),
산골짜기에 막 돋아난 대나무라는 뜻의 해곡신총(嶰谷新叢),
해가 뜰 무렵 언덕이 먼저 붉게 타오른다는 안상선홍(岸上先紅)이 그것이다.
하나하나에 시처럼 운치 있는 이름을 붙였다.
옥담공은 초가로 된 집에 서재를 꾸미고 모재(茅齋)라 이름하였다.
다음 〈모재의 봄 풍경[茅齋春景]〉은 1644년 무렵 모재에서의 한적한 삶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의 집에 봄이 반 늙었지만 / 詩家春半老
물색은 더욱 교태를 부리누나 / 物色轉生嬌
여린 버들가지 바람 담뿍 안았는데 / 弱柳含風線
대나무 가지 끝에는 이슬이 맺혔네 / 叢篁滴露梢
제비는 돌아와 옛 둥지를 찾는데 / 燕來尋舊壘
꾀꼬리는 울면서 새 집을 지키네 / 鸎囀護新巢
시 하는 나그네야, 올 것 없다네 / 墨客無相過
한가하게 바둑 두며 혼자 즐기니 / 閑碁獨自鼓
옥담공은 집을 시가(詩家), 곧 시의 집이라 하였으니 시인으로 자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시에서 스스로를 시옹(詩翁), 묵옹(墨翁)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옥담공은 옥담을 사랑하면서 한가하게 시인으로서 평생을 보내었다.
향촌에서 사귄 벗들이나 인근 고을의 관원들과 어울려 시주를 즐겼다.
중년 시절에 관서 지역을 여행하고 호남과 영남 지역으로 나들이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잦은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 때문에 그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전염병이 돌아 모친을 모시고 다른 곳에 가서 잠시 살던 때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서해의 섬으로 들어가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
옥담공은 옥담으로 찾아온 벗들이나 인척들과 어울려 시를 짓는 일로 생애를 보내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지은 〈병이 오래되어[病久]〉에서
“아직도 시 다듬는 병이 남아 있어서,
때때로 좋은 시구 자주 찾노라[尙有攻詩癖, 時時覓句頻]”라 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지은 〈가을날 회포를 적다[秋日書懷]〉라는 시에서는
“사업은 시가 천 수요, 생애는 집이 몇 칸이라[事業詩千首, 生涯屋數間]”라
한 대로 칠십 평생 지은 시가 천 수에 육박하였다.
노년에는 여러 병이 겹쳐 나들이가 불편하였지만,
잠시 병이 나으면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근처 아름다운 물가로 나아가 시를 짓곤 하였다.
1651년 73세로 세상을 떠나던 그 해까지 옥담공은 시를 지으면서 이렇게 살았다.
그리고 나중에 행선략장군(行宣略將軍)으로 추증되었다.
옥담공이 평생에 걸쳐 지은 시는 1,050제(題) 가량 되는데,
그 중 연작이 많으므로 실제 작품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옥담공의 시는 《옥담유고(玉潭遺稿)》와 《옥담사집(玉潭私集)》으로 묶여 전한다.
《옥담유고》와 《옥담사집》에는 옥담공이 제작한 한시의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지만
온전한 문집으로 보기는 어렵다. 《옥담사집》의 마지막 면에
“기축년 2월 12일 필사를 끝내다.[己丑二月十二日畢書]”라고 하였는데,
지질이나 글씨 등으로 보아 1769년 무렵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사자는 알 수 없다. 잘못된 곳이 많은데 다행히 잘못 필사된 곳은
예전의 교정부호에 의하여 표시를 해두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옥담유고》에는 1623년 무렵까지의 시가 실려 있고,
《옥담사집》에는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으니,
서명이 이처럼 달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옥담유고》와 《옥담사집》은
저작의 시기별로 편집되어 있으므로, 《옥담시집》 1, 2로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
옥담공의 저술은 1960년 무렵 석판본(石版本)으로 인쇄되었는데,
《완산세고(完山世稿)》가 그것이다.
《완산세고》는 《옥담공고(玉潭公稿)》에다
《칠자연방고(七子聯芳稿)》와 《진사공고(進士公稿)》, 《정재공고(靜齋公稿)》를 합쳐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옥담공고》는 《옥담유고》와 《옥담사집》에 실린 시 중 일부를 뽑고 그곳에 실려 있지
않은 몇 편의 글을 더한 것이지만, 〈만물편(萬物篇)〉 등 한시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자료적 가치는 오히려 크게 떨어진다. 《옥담공고》에만 보이는 것으로는
〈향로계첩의 발문[享老稧帖跋]〉과 〈석천선생의 제문[祭石泉先生文]〉,
〈명선대부 행 덕성부정의 묘지[明善大夫行德城副正墓誌]〉 등이 있다.
〈향로계첩의 발문〉에 따르면 유순인(柳純仁), 심부(沈溥), 유우인(柳友仁),
안홍제(安弘濟), 송규(宋珪), 이원득(李元得), 이경일(李敬一), 한덕급(韓德及),
안중행(安重行) 등과 절친하였다고 한다. 이들 인물 중 이경일은 같은 왕실로
영흥정(永興正)에 봉해진 사람인데 옥담공의 당숙이다. 한덕급은 제천현감을 지냈으며,
이원득은 조선 중기의 명상(名相) 이원익(李元翼)과 4촌간이다. 이들을 포함한 평생의
지기들은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한 평범한 향촌의 사족이었다.
《칠자연방고》는 옥담공의 일곱 아들의 시를 모은 것이다.
옥담공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김위(金偉)의 딸인 경주김씨(慶州金氏)와 혼인하였다.
조선 중기의 명유(名儒) 송애(松厓) 김경여(金慶餘)가 그 처조카다. 옥담공은 김경여와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의 문집 《송애집(松厓集)》이 온전하지 않아
옥담공과의 교분에 대한 자료는 실려 있지 않다.
옥담공은 두흥(斗興)ㆍ두성(斗成)ㆍ두양(斗揚)ㆍ두여(斗輿, 斗榮이라고도 한다)
ㆍ두환(斗煥)ㆍ두평(斗平)ㆍ두광(斗光) 등 아들 일곱과, 윤진(尹璡)과 박종번(朴宗蕃)에게
출가한 두 딸을 낳았다. 〈유사(遺事)〉에 따르면 이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에서
칠두문장(七斗文章)이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안양군이 비명에 간 이래 옥담공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들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옥담공의 아들 대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를 보기 시작하여
아들과 손자대에 7인의 생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두양은 생원을 하였고,
이두환은 생원을 거쳐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지냈으며,
이두광은 진사를 지냈다. 손자 대에 특히 이정석(李挺晳)은 공조좌랑(工曹 佐郞)과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역임하였다. 《진사공고》는 이정우의 시 1편과 문 1편을 묶은 것이고,
《정재공고》는 이두환의 현손(玄孫)이요, 이정규의 증손(曾孫)인 정재(靜齋)
이사영(李思永, 1728~1793)의 문집으로 몇 편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2. 향촌생활을 그린 일상의 시
옥담공은 평생 시를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시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불행히 당대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지 못하였고, 또 그 저술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재 《옥담유고》와 《옥담사집》에
남아 있는 시만으로도 옥담공은 한국 한시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가로 평가할 수 있다.
옥담공 당대의 조선 시단의 추이는 송풍(宋風)에서 당풍(唐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으며
, 일부 선진적인 문인들은 시필성당(詩必盛唐)의 구호를 외치는
명나라 복고파(復古派)의 문학이론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향촌의 시인
옥담공은 문단의 풍상에 휩쓸리지 않고 두보(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하여 담박한 시를 제작하였다.
옥담공 한시가 이룩한 가치는 두보의 한적한 생활을 노래한 시를 잘 배우되,
스스로의 일상생활을 체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음 〈아침 창[朝窓]〉에는 향촌에서
담박하게 살아가는 옥담공의 생활상이 잘 드러난다.
아침 햇살이 산창을 비추니 / 朝日照山窓
초가에 따스한 기운이 인다 / 白屋煖氣生
처자식은 삼과 모시를 삼고 / 妻孥執麻枲
어린 아들은 시경을 외우네 / 稚子誦詩經
문 앞에 개 한 마리 짖더니 / 門前一犬吠
약을 파는 행상이 들렀다네 / 賣藥行商過
올해는 곡식이 매우 비싸서 / 今年粟米貴
값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네 / 莫得論其價
수리산 산속의 집에 아침 해가 비치니 밤새 썰렁했던 초가집에도 온기가 돈다.
아침이 되자 늙은 처는 길쌈을 하고 아이는 그 곁에서 책을 읽는다.
한적한 마을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이따금씩 오는 약 행상이 지나간다.
올해는 흉년이라 곡가가 매우 비싸서 걱정이다.
산촌 마을에서 담박하게 살아가는 옥담공의 모습이 절로 한 편의 풍속화처럼 다가온다.
옥담공의 시가 두보의 시에 연원을 두었다고 하였거니와,
두보가 〈강마을[江村]〉의 마지막 두 연에서
“늙은 처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는데, 아이놈은 바늘 두드려 낚시 바늘 만드네.
병이 많아 필요한 것 오직 약봉지니, 늙은 내가 이외에 또 무엇을 구하랴
[老妻畫紙爲棊局, 稚子敲針作釣鉤. 多病所須惟藥物, 微軀此外更何求]”라 한 것을 절로 연상하게 한다.
두보의 시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강마을〉에서 보는 것처럼 한적한 맛을 주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스케일 큰 웅장한 시를 짓기도 했으며, 복잡하고 난삽한 구절로 사람들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작품도 남겼다. 옥담공의 한시에서는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시를 배워 창작에 응용한 사례도 찾을 수 있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읽을 수 있는 시는 바로 위에서 본 것과 같은 향촌 사회의 체험을 소박하게 읊조린 쪽이다. 〈콩죽[豆粥]〉에서 이 점이 잘 확인된다.
동짓달에 서리와 눈이 내리니 / 復月霜雪至
농가에는 월동 준비를 마쳤다 / 田家寒事畢
오지솥에는 콩죽이 끓는 소리 / 瓦釜鳴豆粥
먹으니 그 맛이 꿀처럼 달구나 / 食之甘如蜜
한 사발에 땀이 삐죽 나고 / 一椀輕汗出
두 사발에 몸이 훈훈하여라 / 二椀溫氣發
아내와 자식들을 돌아보면서 / 相顧語妻孥
“이 맛이 깊으면서도 좋구나.”/ 此味深且長
아내와 자식들은 웃고 돌아보며 / 妻孥笑相顧
“밥상에 고량진미 없는걸요.” / 盤膳無膏粱
“고량진미 말할 것 무엇 있나, / 膏粱安可說
고기반찬도 무상한 것 모르나?” / 肉食知無常
1625년의 작품이다. 이 해 가을 풍년이 들었다. 쌀 한 말이 베 한 자 값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겨울을 날 채비도 다 끝낸 동짓날, 가족들이 둘러앉아 콩죽을 먹는다. 한 사발 먹으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입맛이 돌아 한 사발 더 먹고 나니 기운이 난다. 처자에게 정말 맛있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한다. 처자는 고기반찬도 없는 평범한 콩죽이 대단할 것 있느냐 핀잔을 준다. 이에 옥담공은 높은 벼슬을 하여 진수성찬을 먹는 이도 언젠가 벼슬이 떼이고 나면 그뿐이니, 진수성찬이 무상한 것이라 하였다. 가난한 살림에서 오히려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처자를 다독인다. 저녁상을 마주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선하다. 가족들의 대화가 시에 인용되어 있어 더욱 더 소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 〈새벽의 일[曉事]〉을 아래에 보인다.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 / 金鷄鳴不已
하늘 가득한 별이 스러지누나 / 滿天星斗落
집집마다 등잔 심지 돋워놓고 / 家家燈花閙
시골 아낙들이 길쌈을 하누나 / 村婦事紡績
산골 아이는 소를 먹이려고 / 山童亦飯牛
오지솥에다 콩깍지를 삶는다 / 瓦釜烹豆殼
쇠죽이 벌써 다 익었나 보다 / 旣已爛牛食
부글부글 쇠죽 끓는 소리 들리니 / 聞粥粥牛食
소 먹이라도 마구해선 안 된다네 / 牛食不可忽
우리 집이 그 힘으로 먹고 사니 / 儂家食其力
한시는 기본적으로 사대부의 것이다. 사대부도 물러나면 향촌에 살지만, 시골살이가 몸에 딱 붙지는 못한다. 그러나 옥담공은 그러하지 않았다. 첫닭이 울었지만 아직도 깜깜한 밤인데도 모두들 일어나 부산하다. 아낙네는 등잔불을 켜고 길쌈을 하고 아이는 콩깍지를 삶아 쇠죽을 끓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옥담공은 아이에게 한 마디 덧붙인다. “저 소란 놈이 우리 집 먹여 살리니, 소 먹을 것이라 하여 함부로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거라.”
옥담공의 시는 이러하다. 옥담공은 근체(近體) 율시(律詩)와 같이 형식이 꽉 짜인 시도 잘 지었지만, 오히려 형식이 자유로운 고시도 많이 지었다. 자유로운 형식에 17세기 초반 향촌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풍속화처럼 그려내었다. 이러한 작품과 더불어 옥담공은 향촌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것도 꾸밈없이 시로 드러내면서, 당시 향촌 하층민의 고통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숯장수의 고생[賣炭苦]〉을 아래에 보인다.
숯 파는 일 얼마나 고생인가 / 賣炭何苦業
숯 팔아도 남은 양식이 없어라 / 賣炭無餘粮
송곳 꽂을 땅 한 뙈기 없으니 / 身無立錐地
본업은 농사와 양잠이 아닐세 / 本業非農桑
아침엔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 朝入山中伐山木
저녁엔 구덩이 파서 숯을 굽는다 / 暮劚深坑燒碧炭
나는 재 낯에 묻어 얼굴은 시커멓고 / 飛灰入面狀貌黑
뜨거운 불길에 몸이 뜨거워 땀이 흐르네 / 烈焰燻身流赭汗
열 손가락 다 휘고 살갗은 다 텄는데 / 十指如鉤肌膚裂
허름한 옷 너덜너덜 정강이도 못 가린다 / 短褐懸鶉不掩脚
고생스레 숯을 지고 저잣거리에 들어가니 / 辛勤擔負入城市
추위에 다리 얼어 힘없어 휘청휘청 / 凍脚無力行欹傾
아동들은 거리에 모여 손뼉 치며 웃나니 / 兒童亂街拍手笑
산귀신이 어이하여 이 대로에 왔느냐고 / 山鬼何能臻紫陌
올해는 날씨가 덜 추워 숯이 비싸지 않아 / 今年無氷炭不貴
동쪽 서쪽 다 다녀도 하나도 팔지 못했네 / 足徧東西終未鬻
집에 오니 처는 원망하고 아이는 배고파 우니 / 歸來妻怨子啼飢
하늘에 하소연해도 하늘은 아득하기만 해라 / 仰訴皇天天漠漠
사람이 타고난 운명이 저마다 다르니 / 人生賦命各有差
술과 고기 냄새 풍기는 고대광실을 보라 / 請見朱門臭酒肉
숯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민중의 삶을 걸개그림처럼 그렸다. 옥담공은 〈땔나무 파는 노래[賣薪行]〉를 지어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해서 파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 노래한 바 있다. 한양에 들어가 나무를 팔려 하니 나무 장사가 많아 팔리지 않고 시골에서 팔려 하니 제각기 나무를 해서 불을 때는 바람에 팔 데가 없는 가난한 민중의 삶을 담은 노래이다. 숯을 만들어 파는 사람의 생애는 그보다 더욱 고달프다. 겨울에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하느라 손가락이 다 휘고 살갗은 터서 갈라질 지경이다. 힘들게 나무를 지고 와서 숯을 굽느라 얼굴은 온통 숯검정이다. 어렵게 만든 숯을 팔러 나섰지만, 아이들은 산에서 내려온 귀신이라 놀려댄다. 제대로 팔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오니 처는 원망하고 아이는 배고프다 운다. 옥담공은 이러한 고통 받는 민중의 삶에 대해서 따뜻한 온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옥담공의 시는 이러하다. 옥담공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향촌에서 조용히 살았다. 벗이나 인척이 찾아오면 그들과 시를 지었다. 서당을 열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일곱 아들이 장성한 후에는 그들을 불러 가족간에 시회(詩會)도 가졌다. 노년에 병마로 고생하였지만 이러한 삶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생활을 담담하게 시에 담았다. 다듬고 꾸미기보다는 보고 듣고 겪는 일상생활을 담담하게 시에 담은 것, 이것이 옥담공의 시가 이룩한 개성이고 큰 성취라 할 수 있다.
3. 만물을 노래한 〈만물편(萬物篇)〉과 〈영조(詠鳥)〉
옥담공의 한시가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시로 쓴 백과사전을 저술하였다는 점이다. 옥담공은 〈만물편〉이라는 280수 연작시를 제작하여, 인간세상의 만물을 하나하나 시에 담아내었다. 〈만물편〉은 세상만물을 음양류(陰陽類)ㆍ화목류(花木類)ㆍ과실류(果實類)ㆍ곡물류(穀物類)ㆍ소채류(蔬菜類)ㆍ어물류(魚物類)ㆍ의복류(衣服類)ㆍ패용류(佩用類)ㆍ문방류(文房類)ㆍ주거교량류(舟車橋梁類)ㆍ기구류(器具類)ㆍ기명류(器皿類)ㆍ악기류(樂器類)ㆍ기국류(技局類)ㆍ재물류(財物類)ㆍ축물류(畜物類)ㆍ금조류(禽鳥類)ㆍ수류(獸類)ㆍ행충류(行蟲類)ㆍ비충류(飛蟲類)ㆍ음식류(飮食類)ㆍ약초류(藥草類) 등으로 나누었다. 특히 어물류는 다시 동해산류(東海産類)ㆍ서해산류(西海産類)ㆍ강어류(江魚類)ㆍ천어류(川魚類)로 나누어 총 25류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다시 280종의 사물을 배열하고,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오언율시를 지었다. 우리 한시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만물편〉은 백과사전처럼 25종의 유형을 설정하고 다시 그 아래 280개의 사물을 나열한 다음, 해당 사물에 대한 시를 붙였다. 〈만물편〉의 〈음양류〉에는 음양(陰陽),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오행(五行), 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의 방위, 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의 계절,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흑(黑)의 색채, 조(朝)ㆍ모(暮)ㆍ주(晝)ㆍ야(夜)의 시간, 한(寒)ㆍ서(暑)의 기후 등 추상적인 사물을 먼저 다루었다.
「화목류」에는 당시 문인의 주거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24종의 꽃나무를 들고 있다. 소나무ㆍ잣나무ㆍ대나무ㆍ국화ㆍ매화ㆍ황매화ㆍ모란ㆍ홍도(紅桃)ㆍ벽도(碧桃)ㆍ삼색도(三色桃)ㆍ장미ㆍ사계화(四季花)ㆍ작약ㆍ해당화ㆍ연꽃ㆍ산단화(山丹花)ㆍ옥매(玉梅)ㆍ진달래ㆍ철쭉ㆍ버드나무ㆍ단풍나무ㆍ오동나무ㆍ방초(芳草)ㆍ난초(蘭草) 등을 정원에 심거나 교외에서 쉽게 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실류」에는 복숭아ㆍ오얏ㆍ살구ㆍ앵두ㆍ능금ㆍ포도ㆍ석류ㆍ모과ㆍ배ㆍ밤ㆍ대추ㆍ감ㆍ호두ㆍ은행ㆍ잣ㆍ개암ㆍ추자(楸子)ㆍ팥배ㆍ등자(藤子)ㆍ왕머루ㆍ유자ㆍ귤ㆍ밀감 등 23종을 들고, 이 과실들의 외형과 효능에 대해서 시로 읊었다.
「곡물류」에는 쌀ㆍ찹쌀ㆍ메기장ㆍ찰기장ㆍ메조ㆍ차조ㆍ보리ㆍ밀ㆍ콩ㆍ팥ㆍ녹두ㆍ메밀ㆍ율무ㆍ수수ㆍ깨ㆍ들깨 등 16종을 시로 읊은 것이 수록되어 있다. 율무는 체증을 낫게 하고 떡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으며, 들깨는 가래를 삭이고 들깨기름은 방습의 효과가 있으며 말린 잎을 달여 먹으면 악취를 제거한다고 하는 등, 각 곡물의 조리법과 효능 등을 두루 다루었다.
채소류를 다룬 「소채류」에는 수박ㆍ참외ㆍ오이ㆍ토란ㆍ상추ㆍ파ㆍ마늘ㆍ가지ㆍ아욱ㆍ생강ㆍ겨자ㆍ부추ㆍ차조기ㆍ동아ㆍ고사리ㆍ삽주ㆍ게목ㆍ순채 등 18종을 다루었다. 오이는 구이를 해먹기도 하고 물에 담가놓았다 먹기도 한다고 하였고, 파는 위장을 따뜻하게 하고 신장을 강하게 해준다고 하였으며, 차조기와 동아는 죽을 해먹는다는 등 채소류의 조리법과 효능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참외(眞瓜)〉를 예로 보인다.
참외라는 이름에서 ‘참’의 의미는 / 名眞意有在
그 이치를 내 따져 알 수 있다네 / 其理我能窮
짧은 놈은 당종(唐種)이라 부르고 / 短體稱唐種
긴 놈은 물통이라 부른다지 / 長身號水筒
베어놓으면 금빛 씨가 흩어지고 / 刳分金子散
깎아놓으면 살이 꿀처럼 달지 / 條折蜜肌濃
품격이 전부 이와 같으니 / 品格渾如此
서쪽 오이란 말과 한가지라네 / 西瓜語必同
참외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그 이름이 보이니,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에 있던 과일이다.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첨과(甜瓜)와 같다고만 하였고, 허균(許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좋다. 작으면서도 씨가 적은데 매우 달다.”고만 적었다. 그러나 〈만물편〉에서는 길이가 짧은 품종이 있어 당종(唐種)이라 하고 긴 품종이 있어 물통[水筒]이라 한다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수록하고 있거니와, 참외의 외형과 맛을 두루 잘 드러내었다. 서과, 곧 수박과 함께 이 시기 가장 맛난 과일로 대접받았음을 이 시에서 알 수 있다. 옥담공이 〈만물편〉에서 읊고 있는 곡물이나 과일, 채소 등은 우리 문학사에서 거의 시로 읊은 적이 없는 것들이다. 옥담공은 〈만물편〉에서 생활 주변의 사물들을 하나하나 오언율시에 담아 사전의 기능까지 겸할 수 있게 하였다.
〈만물편〉은 특히 어패류에 대해 가장 자세하다. 바다에서 나는 어패류를 「어물류」라 하고, 다시 동해와 서해에서 나는 어패류를 나누어 시로 읊었다. 또 강과 개울에서 나는 민물고기도 다시 나누었다. 동해에서 나는 11종의 어패류로 고래ㆍ자라ㆍ대구ㆍ방어ㆍ청어ㆍ문어ㆍ전복ㆍ가자미ㆍ은어ㆍ홍합ㆍ해삼 등을 들었는데, 그 중 고래와 자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식단에 올리는 것들이었다. 은어는 동북 지방의 해안에서 나는 것으로 말려서 구워먹거나 간장에 졸여서 먹기도 하고 콩잎과 함께 먹으면 천하의 진미라 하였는데, 요즘 강으로 올라온 은어를 회로 먹는 것과는 풍습이 다소 다르다. 〈청어(靑魚)〉를 아래에 보인다.
푸른 청어가 남해에서 잡히니 / 靑鮮南海産
강으로 천 척의 배가 들어오네 / 江口入千䑹
알에는 황금 좁쌀이 소복하고 / 卵包黃金粟
창자에는 백설 같은 기름이 엉겼네 / 腸凝白雪膏
구워서 맛난 밥을 먹을 수 있고 / 炙宜餤美飯
말려서 향긋한 막걸리를 마신다네 / 乾可飮香醪
생선의 질이 이처럼 높지만 / 品貴能如此
값이 높은 것만 걱정한다네 / 偏憂索價高
등 푸른 생선 청어가 남해에서 잡혀 1천 척의 배에 실려 도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먼저 말한 다음, 배를 열면 노란 알이 소복하게 들어 있고 창자에는 맛난 기름이 엉긴 모습을 그렸다. 이어 구워서 반찬으로 하고 말려서 안주로 삼는 등 아주 좋은 생선이지만 값이 비싸서 문제라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1570년 이후 청어가 잡히지 않는다 하였고, 허균의 〈도문대작〉에서 청어가 우리나라 도처에서 잡히는데 예전에는 가격이 쌌지만 당시는 어획량이 줄어 가격이 높아졌다고 하였으니, 옥담공의 시는 매우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 하겠다.
서해에서 나는 6종의 어물로는 홍어ㆍ민어ㆍ준치ㆍ조기ㆍ밴댕이ㆍ새우 등을 들었다. 민어는 탕으로 먹으면 좋고 회로 먹기에는 마땅하지 않으며 말려서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고 하였다. 준치는 회와 탕이 모두 좋고, 조기는 탕과 구이가 좋다고 하였다. 밴댕이는 상추쌈으로 보리밥과 함께 먹을 때 진미라 하였다. 해물에 따른 조리 방법을 자세히 적었으니, 옥담공의 실생활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강어류」로는 농어ㆍ숭어ㆍ웅어ㆍ뱅어 등 4종의 큰 민물고기를 들었는데, 뱅어의 경우 회를 뜨기 어려워 탕으로 먹는다고 하였다. 지금 날것을 통으로 먹는 것과는 풍습이 다르다. 「천어류」로는 개울에서 나는 잉어ㆍ쏘가리ㆍ붕어ㆍ게 등을 들고, 물고기의 특성과 함께 맛있게 먹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의복류」에서는 일반적인 의복 외에 여우가죽옷ㆍ양가죽옷ㆍ솜옷ㆍ홑옷 등 당시 가장 일반적인 옷, 그리고 관(冠)과 허리띠, 홀(笏) 등 8종에 대해 시를 지었다. 「패용류」에서는 노리개ㆍ수건ㆍ부채ㆍ빗접ㆍ지팡이ㆍ빗ㆍ도(刀)ㆍ검(劍)ㆍ활ㆍ화살 등 당시 선비들이 지니고 다니던 10종의 사물에 대해 시를 지었다. 「문방류」로는 붓ㆍ먹ㆍ벼루ㆍ종이ㆍ연적ㆍ향로ㆍ궤안ㆍ등(燈)ㆍ촛불ㆍ박산(博山)향로 등 10종을 들었다. 「주거교량류」에서는 배와 수레, 교량을 두고 시를 읊었다.
「기구류」는 20종에 이르는 집 안팎의 기물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림병풍ㆍ소나무평상ㆍ발ㆍ장자ㆍ휘장ㆍ대자리ㆍ베틀ㆍ다듬잇돌ㆍ키ㆍ빗자루ㆍ말ㆍ저울ㆍ비녀ㆍ거울ㆍ가위ㆍ자ㆍ광주리ㆍ낮은등잔걸이ㆍ높은등잔걸이ㆍ무늬를 넣어 짠 자리 등 잡다한 생활용품을 다루었다. 「기명류」 역시 소반ㆍ숟가락ㆍ젓가락ㆍ가마솥ㆍ세발솥ㆍ술동이ㆍ술병ㆍ술잔 등 8종의 생활용품을 두고 시를 지었다. 「악기류」에서는 종ㆍ북ㆍ거문고ㆍ피리 등 4종을 시에 담았다. 또 「기국류」에는 바둑ㆍ박(博)ㆍ장기ㆍ투호(投壺) 등 4종이 나열되어 있다. 「재물류」는 돈을 대신하여 쓸 수 있는 18종의 물건을 다루었는데, 돈 이외 황금ㆍ백옥(白玉)ㆍ은(銀)과 같은 귀금속, 사(紗)ㆍ나(羅)ㆍ능(綾)ㆍ단(段)ㆍ백주(白紬)ㆍ세포(細布)ㆍ추포(麤布)ㆍ백저포(白苧布)ㆍ면포(綿布)ㆍ견(繭)ㆍ견사(繭絲)ㆍ목면화(木棉花)ㆍ뽕[桑]ㆍ삼[麻] 등 화폐처럼 쓰이는 옷감류를 소재로 시를 지었다. 생활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이러한 잡다한 사물을 소재로 연작 시를 지은 예는 〈만물편〉 외에 거의 찾기 어렵다.
「축물류」에서는 말ㆍ소ㆍ돼지ㆍ양ㆍ거위ㆍ오리ㆍ닭ㆍ개ㆍ고양이 등 9종을, 「금조류」에서는 까마귀ㆍ까치ㆍ부엉이ㆍ올빼미ㆍ박쥐 등 5종의 조류를, 「수류」에서는 기린ㆍ범ㆍ사슴ㆍ원숭이ㆍ여우ㆍ삵ㆍ다람쥐ㆍ쥐 등 7종을 다루었다. 벌레는 기어다니는 「행충류」와 날아다니는 「비충류」로 나누었다. 행충류로는 용ㆍ거북ㆍ뱀ㆍ두꺼비ㆍ개구리ㆍ지네ㆍ지렁이ㆍ개미ㆍ거미ㆍ귀뚜라미ㆍ철써기ㆍ사마귀 등 12종을 다루었고, 비충류로는 나비ㆍ잠자리ㆍ매미ㆍ왕벌ㆍ꿀벌ㆍ반딧불ㆍ모기ㆍ등에ㆍ파리ㆍ하루살이 등 10종을 다루었다.
「음식류」에서는 밥ㆍ국ㆍ구이ㆍ탕ㆍ면ㆍ떡ㆍ만두ㆍ회ㆍ식해ㆍ소금ㆍ장ㆍ차ㆍ술 등 13종을 다루었다. 식염과 소금의 차이는 잘 알 수 없지만, 바닷물을 졸여 흰 소금을 만드는데 콩에 담가두면 붉은 빛이 돌며 단맛이 나고, 오이를 절여두면 색이 노랗게 된다고 하였으며, 식염은 쌀에 넣어두어 깨끗하게 하고 생선이 상하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 구이는 식전에 먹는 음식이라 하고 부잣집에서는 고기적을, 가난한 집에서는 채과(菜瓜)를 먹는다고 하였다. 장은 콩을 삶아서 가루를 낸 다음 소금을 뿌려 독에 담아두면 호박과 같은 붉은 빛이 도는 간장을 얻을 수 있고, 아래쪽에 노랗게 쌓인 된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차는 중국 아산(丫山)의 이름난 품종을 수입하여 마셨다고 적고 있다. 음식에 대한 연작시 역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만두는 옥담공이 매우 좋아한 음식인데, 아래 〈만두(饅頭)〉를 읊은 시를 보인다.
우리집 솜씨 좋은 며늘아기 / 吾家巧媳婦
물만두 예쁘게 잘 만든다네 / 能作水饅嘉
옥가루에 금빛 조를 소로 만들어 / 玉屑鞱金粟
은빛 피에 싸서 쇠냄비에 띄운다 / 銀包泛鐵鍋
생강을 넣으면 매운 맛이 좋고 / 苦添薑味勝
짭짤하게 하려 장을 듬뿍 붓는다 / 醎助豆漿多
한 사발 새벽녘에 먹고 나면 / 一椀呑淸曉
아침이 지나도록 밥 생각 없다네 / 崇朝飯不加
만두는 고려시대부터 우리 식단에 널리 오르던 것인데, 〈도문대작〉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고 짧게 적었고, 《지봉유설》에는 만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만두를 비롯하여 〈만물편〉에 등장하는 많은 음식을 두고 지은 시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만물편〉에서는 옥담공의 생활과 관련하여 물만두를 맛있게 먹는 법을 자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약초류」에서는 삼(蔘)ㆍ이출(二朮)ㆍ복령(茯笭)ㆍ황정(黃精)ㆍ산약(山藥)ㆍ후추(胡椒)ㆍ천초(川椒) 등 7종을 들고 있는데, 후추는 남방에서 수입하고 천초는 중국 촉(蜀) 지방에서 생산되던 것인데 우리나라에 가져와서 퍼졌으며 옥담공의 집에서 재배하였다고 하는 등, 약초의 유래와 효능 등을 시에 담았다. 약을 대상으로 한 연작시 역시 〈만물편〉에서만 확인할 수 있거니와, 〈만물편〉에 수록된 다양한 사물을 연작으로 노래한 영물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옥담공은 〈만물편〉 외에도 사물에 대한 연작시를 즐겨 지었다. 〈만물편〉을 제작한 1649년보다 훨씬 이른 때인 1615년 과천에 살던 벗 안처행(安處行)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자연 현상을 두고 연작시를 지은 바 있다. 처음에는 하늘ㆍ해ㆍ바람ㆍ이슬ㆍ땅ㆍ달ㆍ서리 등 여덟 가지 사물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나중에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다시 여기에 성신(星辰)ㆍ은하수ㆍ무지개ㆍ안개ㆍ 노을ㆍ우레 여섯 가지를 더하여 도합 14종의 사물을 연작시로 노래하였다. 〈수재 안십구가 하늘ㆍ해ㆍ바람ㆍ이슬ㆍ땅ㆍ달ㆍ구름ㆍ서리 등을 읊은 8수의 시에 화답하다[和安十九秀才詠天日風露地月雲霜八首]〉와 〈수재 안십구가 이른 하늘ㆍ해ㆍ바람ㆍ이슬ㆍ땅ㆍ달ㆍ구름ㆍ서리 등을 읊은 8수의 시 다음에 성신ㆍ은하수ㆍ무지개ㆍ안개ㆍ 노을ㆍ우레 여섯 가지 형상을 생각하여 이를 넓힌 것에 차운하다[次安十九秀才所云詠天日風露地月霜八首後仍思星辰河漢虹霞霧雷霆六象以廣之]〉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든 사물은 〈만물편〉의 「음양류」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젊은 시절 사물에 대한 영물시를 즐겨 짓다가 노년에 하나의 체계를 갖추어 온갖 사물을 두루 망라하여 〈만물편〉을 제작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물편〉에 「금조류」를 두어 5종의 새에 대한 시를 수록하였는데, 새의 종수가 매우 빈약하다. 그 이유는 1646년 52수의 새에 대한 연작시를 이미 지은 바 있기 때문이다. 굳이 다시 새에 대한 연작형의 영물시를 지을 필요가 없기에 다루지 않은 새만 대상으로 하여 「금조류」를 갖춘 것이다. 따라서 천지(天地)와 일월성신(日月星辰) 등을 노래한 작품은 「음양편」에 넣고 새에 대한 영물시는 「금조류」에 넣어야 더욱 온전한 〈만물편〉이 됨을 알 수 있다.
옥담공이 새를 대상으로 한 방대한 영물시를 지은 것은 〈만물편〉보다 앞선 1646년 봄의 일이다. 이때 옥담공이 병이 들어 누워 있다가 산속에서 새들이 서로 다른 소리로 우는 것을 듣고 〈산새를 읊조린 18수[詠山鳥十八首]〉를 지었다. 황조(黃鳥)ㆍ정소(鼎小)ㆍ숙도(熟刀)ㆍ구욕(嘔浴)ㆍ호로(呼蘆)ㆍ부득(不得)ㆍ훈훈(燻燻)ㆍ소기섭(疎棄攝)ㆍ포곡(布穀)ㆍ산구(山鳩)ㆍ원사(願死)ㆍ호도(胡逃)ㆍ탁목(啄木)ㆍ종달(從達)ㆍ무조(武鳥) 등 15종에 달하는 우리나라 산새를 들어 오언절구로 시를 지었다. 새 이름은 울음소리에서 유래한 것이 대부분으로 당시 민간에서 부르던 명칭을 반영한 것인데 제목 아래 작은 주석을 넣어 울음소리와 별칭, 전설 등을 적고 있어 이 시기의 조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황조(黃鳥)는 곧 꾀꼬리로 황앵(黃鶯)이라고도 한다. 정소는 예전에는 솥작다새라고도 불렀는데 곧 소쩍새로, 두견(杜鵑)이라고도 한다. 시에서는 풍년을 기려 솥이 작다[鼎小]라 운다고 하였다. 숙도(熟刀)는 민간에서 숙도조(熟刀鳥)라 부른다고 하였는데 곧 쏙독새다. 시에서는 효자가 부모에게 맛난 음식을 봉양하려다가 그 혼이 새가 되어 칼로 써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호로라는 새는 직박구리라는 텃새로 제호(提壺), 혹은 제호로(提葫蘆)라고도 하는데 그 울음소리가 ‘호로직죽(呼蘆稷粥)’으로 들려 호로로피죽새라고도 부른다. 포곡(布穀)은 뻐꾸기, 산구(山鳩)는 메비둘기, 탁목(啄木)은 딱따구리를 가리킨다. 종달(從達)은 종다리로 종달새, 노고지리로도 알려져 있는 새다. 민간에서는 금종달(金從達)이라 부르는데 ‘욕귀(欲歸)’라는 울음소리를 낸다고 하고, 시에서는 버림받은 며느리의 혼이 붙은 새라 하였다. 구욕(嘔浴)은 민간에서 구욕조(嘔浴鳥)라 부른다 하였는데 시의 내용에서 오릉(於陵)의 진중자(陳仲子)가 청렴하여 불의(不義)한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형이 가져온 부정한 거위를 모르고 먹었다가 나중에 알고 토하였다는 고사를 인용하였지만, 거위가 아니라 구욕조(鸜鵒鳥)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새는 팔가(八哥)라고도 하는데, 날 때에는 팔자(八字) 모양을 이루고 사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원사(願死)는 울음소리가 ‘원사(願死)’처럼 들리는 새인데 다른 사람의 시에는 ‘욕사(欲死)’, ‘아욕사(我欲死)’, ‘사거(死去)’ 등으로 울음소리를 형용하기도 하므로, 죽고 싶다는 말을 표현한 듯하다. 새타령에서 ‘주걱제금(啼禽)’이라 한 것이 바로 이 새다. 여기서는 〈쏙독새[熟刀]〉를 예로 보인다.
효자가 맛난 음식 이바지하여 / 孝子供甘旨
부모님을 지성으로 받드네 / 爺孃奉至誠
남은 혼이 새가 되었나 보다 / 餘魂應化鳥
늘 쏙독쏙독 도마질 소리 내니 / 長作扣刀聲
시에서는 효자가 부모에게 맛난 음식을 봉양하려다가 그 혼이 새가 되어 칼로 써는 소리를 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쏙독새라는 이름 자체가 칼로 무언가를 써는 소리를 형용한 것이다. 실제 쏙독쏙독 하고 우는 새울음 소리가 도마질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새울음을 형용한 이러한 시를 금언체(禽言體) 시라 한다.
다른 금언체 시에서 다룬 나머지 새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호도(胡逃)라는 새는 울음소리가 ‘호도(胡逃)’와 비슷한데 오랑캐로부터 벗어나기를 염원하는 뜻을 시에 담았다. 그 음으로 보아 후투티라는 새를 가리키는 듯하다. 또 울음소리가 ‘소기섭(疎棄攝)’으로 들린다는 소기섭이라는 새에 대해서는, 어떤 집에 새로 들어온 처와 예전 처가 함께 절구를 찧는데 새로 들어온 처가 예전 처의 아이를 데려다 절구에다 넣고는 달아나버렸는데, 예전 처가 힘이 빠져 들고 있던 절구를 놓아 아이를 죽게 하였다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부득(不得)은 ‘부득부득(不得不得)’이라 우는 새로, 굴원(屈原)이 임금으로부터 등용되지 못하자 한이 맺혀 이 새가 되었다고 하였다. 훈훈(燻燻)이라는 새도 울음소리가 ‘훈훈(燻燻)’으로 들리는데, 훈훈한 온기가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새라고 하였다. 무조(武鳥)라는 새는 활을 쏘는 것과 유사한 소리를 낸다고 하였는데 휘파람새 종류인 듯도 하다. 이러한 새는 다른 문헌에서도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어떤 새를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다.
옥담공은 여기에 더하여 더욱 다양한 종류를 덧보태어 〈여러 새를 읊조린 21수[詠群鳥二十一首]〉를 지었다. 여기에는 21종의 새를 두고 지은 오언절구가 연작으로 실려 있다. 봉황(鳳凰)ㆍ난조(鸞鳥)ㆍ공작(孔雀)ㆍ앵무(鸚鵡)ㆍ비취(翡翠)ㆍ백학(白鶴)ㆍ청조(靑鳥)ㆍ창응(蒼膺)ㆍ보조(鴇鳥)ㆍ야적(野翟)ㆍ자고(鷓鴣)ㆍ창경(鶬鶊)ㆍ전순(田鶉)ㆍ초료(鷦鷯)ㆍ치연(鴟鳶)ㆍ효오(孝烏)ㆍ희작(喜鵲)ㆍ연연(燕燕)ㆍ황작(黃雀)ㆍ검금(黔禽) 등이 그것이다.
〈만물편〉에서 대부분의 사물은 생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용과 기린 등과 같은 상상의 동물을 넣은 것처럼, 여기에서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봉황이나 난새 등을 넣었다. 또 청조가 꾀꼬리의 별칭이지만 이미 앞서 꾀꼬리를 따로 다루었고 시에서 서왕모(西王母)의 사신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아 신화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공작새나 앵무새, 비취새 등은 여러 경로로 조선에 들어와 있었지만 옥담공이 직접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시에서도 문헌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을 다루었을 뿐이다.
그밖의 새는 대체로 생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새들이다. 백학은 조선시대 문인의 뜰에서 키웠다. 창응, 곧 매는 사냥에 필수적이므로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조는 《시경》에 〈보우(鴇羽)〉라는 편명이 있어 문인들에게 익숙하고 예전에는 매우 흔한 새였는데 느시, 혹은 능애라고도 불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새는 ‘후후’ 소리를 내면서 운다. 시에서는 말을 조심한다는 점을 들었다. 야적은 들판에 흔한 꿩을 가리키고, 자고는 메추라기와 유사한 흔한 들새다. 창경은 꾀꼬리이다. 앞서 황조 역시 꾀꼬리인데 서로 종이 다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전순은 메추라기로 그 맛이 매우 좋아 다투어 잡는다고 하였다. 초료는 뱁새로 굴뚝새, 붉은머리오목눈이라도 하는 조그맣고 흔한 새다. 효오는 까마귀로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뜻에서 이른 것이고, 희작은 까치로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하여 이른 것이다. 연연은 제비, 황작은 참새를 이른다. 검금은 울타리에 숨어 사는 새로 인간사를 몰래 감시한다고 하였는데 어떤 새인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새는 모두 산이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옥담공은 물새를 빠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시 〈물새를 읊조린 13수[詠水鳥十三首]〉를 더 지었다. 여기에 나오는 12종의 물새는 대붕(大鵬)ㆍ홍안(鴻雁)ㆍ노관(老鸛)ㆍ백구(白鷗)ㆍ청구(靑鷗)ㆍ백로(白鷺)ㆍ부압(鳧鴨)ㆍ노자(鸕鶿)ㆍ다곽(多霍)ㆍ원앙(鴛鴦)ㆍ비목(飛鶩)ㆍ정위(精衛) 등이다. 전설에 등장하는 대붕과 정위를 제외한 나머지는 흔히 볼 수 있는 바다새다. 홍안은 기러기, 노관은 황새, 백구는 흰 갈매기, 청구는 푸른 갈매기, 백로는 왜가리, 부압은 오리, 노자는 가마우지, 원앙은 원앙이, 비목은 집오리다. 다곽은 강직한 새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소리로 보아 따오기인 듯하다. 옥담공은 이들 새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오언절구를 지어 새의 특성을 설명하였다.
이처럼 옥담공은 도합 47종의 새를 52편의 시에 담았다. 역대 새를 두고 이렇게 많은 시를 지은 시인은 없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새에 대한 시는 주로 금언체라는 특수한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한국 한시사에서 금언체가 일찍부터 발달하였지만, 제재로 삼은 새의 종류는 많아야 대여섯 종이다. 옥담공과 비슷한 시기에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새소리 13편[鳥語十三篇]〉이 이 무렵까지 가장 다양한 새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을 통틀어 구한말 최영년(崔永年)의 〈백금언(百禽言)〉 46수가 가장 방대한 규모라 할 수 있지만, 옥담공의 연작시에 비할 바 아니다. 옥담공이 제작한 일련의 새에 대한 영물시는 이 점에서 기릴 만하다.
4. 옥담시집의 가치
옥담공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지 못한 채 《옥담유고》와 《옥담사집》을 보면 대부분은 18세기의 작품이라 생각할 것이다. 한국 한시사에서 옥담공의 시는 한 세기를 앞서 간 것이라 할 만하다. 평생 수리산 아래에 살면서 향촌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하게 적어나갔기에, 옥담공의 시는 17세기 풍속화를 재현한 것이라 할 만하다. 두보의 시를 배우되, 난삽함을 취하지 않고 평담함을 취하여, 향촌생활을 담박하게 묘사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옥담공 한시의 가장 큰 성취다. 17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복고파(復古派)에서 시는 모름지기 고대의 참된 경치와 진실된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이론이 조선에 전해졌지만, 한시의 제작으로 실천된 것은 18세기 무렵에 들어서다. 18세기 조선 땅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조선 사람의 마음을 담은 시가 유행하게 되는데, 옥담공은 바로 그러한 시풍을 먼저 시범해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와 함께 17세기 무렵부터 백과사전식의 저술이 중국에서부터 수입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사 만물을 유형별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옥담공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더 나아가 특히 〈만물편〉에서 세상 만물을 시로 노래하였다. 시라는 정제된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시 안에 담은 사물에 대한 정보는 당시 비슷한 성격의 저술인 《지봉유설》이나 〈도문대작〉에 비해 그 양과 질에서 결코 모자람이 없다. 이 점에서 〈만물편〉과 산새와 물새를 두루 노래한 연작시는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동물학과 식물학, 혹은 생활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만하다.
옥담공 이전에 이러한 대작이 나온 적이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옥담공 이후 몇몇 인물에 의하여 연작형의 영물시가 나왔지만, 〈만물편〉이 삼라만상을 두루 다룬 데 비하여 이들은 특정한 부류에 국한되어 있다. 이 점에서 〈만물편〉은 우리 한시사, 혹은 우리 문화사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으로 대서특필할 만하다.
2009년 10월
ⓒ 전주이씨안양군파종사회 | 이종묵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