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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앙리 피렌느의 '중세 유럽의 도시'를 읽고 제가 요약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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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도시 - 앙리 피렌느 지음
목차
제 1장 8세기 말까지의 지중해 상업
제 2장 9세기 상업의 쇠퇴
제 3장 키비타스와 부르구스
제 4장 상업의 부활
제 5장 상인계층
제 6장 도시의 형성과 부르주아지
제 7장 도시 제도
제 8장 도시가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
제 1장 8세기 말까지의 지중해 상업
-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로, 해상 운송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 노플, 에데사,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에서 직물
시리아에서 포도주와 올리브유 및 향료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에서 밀
갈리아, 이탈리아에서는 포도주
교역품을 로마로 가져오면서 제국의 상업은 번창했었습니다.
- 로마 말기의 게르만 족 칩입은 로마적 문명의 게르만화에 의의가 있습니다.
로마가 붕괴된 후 게르만족에게 문명전달의 역활을 맡았던 건 지중해 지방(이탈리아, 남프랑스, 스페인)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쇠망하였어도 제도의 일부는 게르만족에 의해 생존하게 됩니다.
시 참사회(decuriones)는 세부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법적, 행정적 권한을 가진 행정관들의 단체로 쇠망후에도 남아있게됩니다. 그밖에도 도시 수호자(defensor civitatis)와 공증된 증서를 기록하는 도시기록부(Gesta Municipalia)도 존재했습니다.
- 로마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은 로마 쇠망후에도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각 도시는 농촌을 위한 시장이었고, 그 지역의 대 지주들이 겨울에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클로비스 시대 국왕과 대지주는 통행세(teloneum)를 받음으로 국가 재정을 늘렸습니다. 통행세 징수자들(telonearii)은 국왕의 가장 유용한 공무원들이었습니다.
클로비스 시대 많은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경제조직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일이 화폐를 계속 주조했는데 솔리두스(solidas), 트리엔스(triens), 데나리우스(denrias)를 주조하였습니다. 이중 솔리두스와 트리엔스는 금으로 주조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항구인 마르세유는 아직 지중해 동부와의 무역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세유로 귀중한 파피루스, 향료, 고급직물, 포도주, 올리브유가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쇠망한 후에도 로마 시대에 비해 쇠퇴했지만, 서유럽에서는 활발한 상업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제 2장 9세기 상업의 쇠퇴
- 이슬람의 등장은 가느다랬던 동부 비잔틴제국과의 유대를 단절시켜버렸습니다.
이슬람의 칩입으로 지중해에 놓여있던 역사적 무게가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서유럽의 운명을 프랑크 왕국이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역사에 새로운 장을 써야했고 메로빙거 시대와 카롤링거 시대는 종교적 감정, 정치, 문학, 제도, 언어, 서체 등 모든 분야에서 대조적으로 변해갑니다.
- 샤를마뉴가 로마황제 및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획득함으로서 이제 비잔틴 제국은 동방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동방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상업의 중심지도 이젠 지중해 연안이 아닌 내륙지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폐쇄적인 국가 경제 체제를 낳아 상업의 쇠퇴를 불러일으킵니다.
- 상업은 남지중해의 이슬람, 북해의 바이킹들의 약탈로 상업의 쇠퇴가 가속화됩니다.
9세기 초 상업활동이 지속된 곳은 북부 갈리아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상업활동이라 볼수 있는 거래 폼목을 보면 포도주, 소금등과 같은 필수품과 불법적인 노예 매매(슬라브족 노예 사냥), 동방상품의 극소량의 거래가 고작이었습니다.
교환 경제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인 정규적, 정상적인 상업활동, 항상적,조직적인 교류, 전문적인 상인계층이 수행하는 교역행위는 카롤링거 시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 9세기 수많은 시장(mercatus)은 존재했으나 사실상 소규모 지방시장이었으며, 농촌의 식량을 그 지방 주민들에게 소매로 공급하는 역활만을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금화인 솔리두스와 트리엔스의 주조가 중단됩니다. 이것은 지중해 봉쇄로 화폐를 만들 금을 수입할수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금화가 쓰이지 않을만큼 경제활동이 축소된 것을 가리킵니다.
상업교류가 활발할수록 화폐제도가 통일되고 단순화됩니다. 하지만 루이 경건왕(Louis le Pieux, 재위 814 ~ 840 샤를마뉴의 아들)시대 화폐제조권이 수시로 시장이 개설될때마다 부여되었습니다.
- 재정적 취약성이 강했던 카롤링거 제국은 그 당시 사회적 지위로 인해 무보수로 봉사할수 있었던 귀족들을 관리로 등용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프랑크 제국의 본질적인 결함이었으며 제국 해채의 근본원인이 됩니다.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제국처럼 정교한 징세제도와 재정 통제수단, 집중화된 재정구조, 그리고 관리의 급료를 지급하고 공공사업을 추진하며 육, 해군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국고를 가지고 있었다면, 카롤링거 제국은 존속하였을것입니다.
이때부터 사회와 국가의 경제기반은 토지 소유자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 8세기에는 시 참사회원, 도시기록부, 도시수호자는 사라집니다.
- 대토지 소유자들은 팔수 없었기 때문에 팔지 않았고,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팔 수 없었습니다.
제 3장 키비타스와 부르구스
- 교회는 로마시대의 도시인 키비타스(civitas)의 경계를 기반으로 교구(diocese)의 경계를 정했습니다. 게르만족은 교회를 존중하였으므로 그들이 제국의 속주들을 점령한 이후에도 교회는 교회조직의 기반인 도시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키비타스의 지배자인 주교는 교회법규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 정주해야했습니다. 따라서 키비타스들은 상업이 쇠퇴한 이후 시민행정에서는 기능을 상실했을지라도 여전히 종교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 키비타스는 방어을 위해 성채로 지어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 있었던 성채의 형태는 카롤링거 시대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탑들이 세워져있는 정방형 형태였으며, 통상 4개의 성문으로 외부와 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벽을 둘러싸인 공안은 매우 좁아서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길이가 400 ~ 500미터를 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더구나 그것에는 건축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택들 사이에 경작지와 채원이 었었습니다. 메로빙거 시대에 성벽 너머로까지 확대해간 외곽지구( subrbinm 키비타스 바깥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지역 )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 9세기 무정부상태는 프랑크 왕국의 해체를 촉진시켰습니다.
자신들의 관할지역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기도 했던 대지주들은 당시 상황을 아용하여, 완전한 자치권을 차지했습니다. 곧 이어 그들의 관직을 세습화하고, 그들에게 위임된 공권력을 그들 자신의 영지에서 행사하는 사적인 권한과 결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인근 백령(comte)을 장악해 영역 제후령(principuute)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제후들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에 따른 의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의 소유가 된 토지와 신민들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9세기부터 도처에 요새지들이 축조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가장 일반적이고 기술적인 명칭은 부르구스(burgus)입니다.
- 부르구스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사료의 기술로 살펴볼수 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영역을 성벽으로 혹은 목재로된 울타리로 둘러싼 것으로서 형태는 대체로 원형이었고,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중심부에는 강력하게 요새화된 탑과 망루가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공격받았을 때 최후 방어 보루였습니다.
기사들로 구성된 주둔병들(milites castrenses)이 그곳에 항상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인근지역의 주민들 중 선발된 전투병들이 기사들과 교대하여 수비를 담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성주(castellanus)는 이런 병력을 지휘하였습니다.
- 부르구스는 무엇보다 군사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원래의 군사적 기능에 행정중심지라는 기능이 덧붙여졌습니다. 성주는 기사들을 지휘하며 성주령(chatellenis)으로 불리우는 성벽 주위의 일정지역에 대한 재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성주령은 10세기부터 부여되었습니다. )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부르구스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변 농촌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입으로 살아갔고, 단순한 소비자의 역활외에는 어떠한 경제적 역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러므로 카롤링거 시대 '도시들'은 중세와 근대의 도시들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속성인 중산적 시민(population bougoisie)와 자치조직(organisation)이 없었습니다.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는 행정중심지였지 상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민수도 많지 않아 부르구스의 주민은 수백명, 키비타스의 주민도 2 ~ 3천명을 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카롤링거 시대에는 사회적 의미에서건 경제적의미에서, 법적 의미에서건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수 있습니다.
제 4장 상업의 부활
- 10세기는 회복의 시기는 아니라도 적어도 안정의 시기요, 상대적 평화의 시기였습니다.
10세기와 11세기는 활동재개의 시대입니다.
교회는 봉건제의 상무정신으로 웅장한 사업이 전개되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노르만 기사들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인 및 이슬람교도와 싸웠고 영국을 정복했다. 스페인에서도 톨레도(Toledo)와 발렌시아(Valence)를 정복하였습니다.(1072~1109)
11세기 높은 출생률로 고향을 떠나 먼곳에서 행운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도처에 돈과 일거리를 찾는 모험가들이 있었습니다. 군대는 용병들(Coterelli 혹은 Brabantion라고 불린다)로 가득찼으며 고용만 해준다면 누구에게나 봉사하였습니다.
12세기 초 농민들은 플랑드르에서 네덜란드에 이르기까지 엘베강 유역에 있는 습지(Moor)을 간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출생률로 유럽 농촌의 노동력이 아주 풍부하였으며 대규모 개간 사업도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구증가와 개척활동은 머지 않아 상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11세기는 상업 부활의 시기입니다.
이는 베니스와 플랑드르 연안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베니스에서 상업이 발전할수 있었던 이유는 비잔틴제국과 교류할수 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탈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제국은 강력했습니다. 베니스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고등문명, 즉 고도의 기술, 기업운영, 정치적, 행정적 조직등을 배웠습니다.
베니스는 비잔틴 제국에 밀과 포도주, 목재, 소금을 수출하였고 귀중한 아시아의 향료와 값비싼 직물을 수입하였습니다.
이는 베니스에 국한되었던 것만은 아니였으며. 제국의 영토였던 나폴리, 남부 이탈리아 지방도 이 영향을 받았고 이는 점차 북부, 제노바, 피사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 제 1차 십자군 원정은 로마시대처럼 서유럽의 해상운송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으나 이제 서유럽은 이전과 달리 동방과 교역할수 있는 길을 얻었습니다.
해양상업이 발전하면서 자연히 다른곳으로 퍼졌고, 카롤링거 시대 쇠퇴했던 마르세유와 바르셀로나는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습니다.
- 플랑드르는 지형학적 위치때문에 북유럽연안들에서 행해지는 상업의 서부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플랑드르가 그렇게 일찍부터 상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도착한 선박에 소중한 회송화물(Fret de retour)을 제공할 수 있었던 토착 산업이 존재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모직물을 제조하여 만들어진 옷은 게르만족 칩입때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9세기에 등장하는 ' 프리슬란트 직물'은 플랑드르에서 제조된 것입니다.
- 명확하게 서유럽이 번창하게 된 시기는 12세기입니다.
이때부터 농산물은 교환 대상 혹은 원료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습니다.
상업의 영향으로 옛 로마의 키비타스들은 활기를 되찾았고, 다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의 집락(agglomeration)들이 부르구스 밑에 형성되거나, 혹은 해안가, 강가, 강의 합류점 등 교류의 천연적 중심지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런 곳에는 반드시 시장이 있었습니다.
시장들로 인해서 이제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노동분화가 도입되었습니다. 농촌과 시장 사이에 서비스의 상호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농촌은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고 그 대신 도시는 상업적 물품과 제조품을 농촌에 공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 대 상업 도시로는 나폴리, 밀라노, 마르세유, 리옹 정도가 있었고 10세기 초에 베니스, 피사, 제노바, 브뤼주 등과 같은 항구도시와 밀라노, 피렌체, 이프르, 강과 같은 산업도시에서 상업이 번창하였습니다.
- 베니스와 플랑드르 두 지점에서 상업이 시작되었고 두 지점 덕택에 유럽은 동방과 접촉할수 있었습니다. 또 브뤼주와 베니스의 중간 지점인 상파뉴에서는 12세기에 유명한 정기시장, 즉 트루아(Troyes) 라뉴이(Lagny) 프로뱅(Provine) 바르-쉬느-오브(Bar-Sur-Aube)의 정기시장이 설립되었고 13세기말까지 중세 유럽에서 자본이 집중되고 화폐가 교환되는 장소의 역활을 하게됩니다.
제 5장 상인들
- 어떤점을 보더라도 전문상업이 확대될수 없었던 중세시대. 베니스에서 직업상인이 등장하였습니다.
9세기에 비잔틴 제국과의 무역으로 베니스는 상당한 자본축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 해상교역은 이득을 많이 취했는데 이를 정확하게 기술한 베니스의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제노바의 사료로 베니스의 사료 부족을 보충할수 있습니다.
베니스의 상인들이 급속하게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의 상업조직을 비잔틴의 상업조직과 연결시켜주는, 그리고 비잔틴을 통해서 고대의 상업조직과 연결시켜 주는, 비잔틴과 베니스의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 덕분에 베니스는 로마의 제도를 중세까지 간직할수 있었습니다.
유럽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문상업이 뒤늦게 등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랫동안 전문상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니스는 도시가 형성됨과 동시에 전문상업이 등장하게 됩니다.
- 이후 11세기에 발전하기 시작한 다른 연안 도시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베니스가 상인계층의 형성에 기여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럽내륙에서 전문상인층이 등장한 것은 10세기이며, 11세기부터 가속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은 인구 증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구가 증가하여 토지를 물려받지 못한 농노 출신의 차남들이 방랑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방랑자들 중 수완과 명석함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교류가 불충분하였고 거래가 되는 상품이 적었기 때문에 일부 상품이 높은 가격 수준을 유지하였던 시대였습니다. 불충분한 교류로 인해서 유럽 도처에 기아가 만연했고, 이 기회를 이용해 큰 돈을 벌게 된 것입니다. 단 몇 부대의 밀이라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으로 운송되면 많은 이윤이 생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내륙지방의 전문상인층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지는데 이런 경우를 입중해주는 사료들은 약간 남아있습니다.
- 많은 사료가 남아있기 떄문에 10세기부터 서유럽에서 점차 증가한 상인 집단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장집단이었으며 그 구성원들은 활과 칼로 무장하여 상품을 실은 말과 마차를 호위하였습니다. 대상의 앞에는 기수가 행진하였습니다. Hansgraf(한자의 우두머리) 나 Doyen(최연장자)라고 불리는 우두머리가 이 조합을 통솔하였습니다. 조합은 성실서약(Serment de fidelite)으로 서로 결합된 형제들(freres)로 구성됩니다.
상품은 분명히 공동으로 구매되고 판매되었고, 이익은 조합에서의 각자 몫에 따른 비율에 따라 분배되었습니다.
이러한 조합들은 일반적으로 아주 먼 지역까지 여행했던 것 같습니다.
- 중세 경제 부활의 특징은 대상업, 보다 정확한 용어를 쓴다면 원격지 상업(commerce a longue distance)이었습니다.
많은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멀더라도 특정상품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곳으로 가서 상품을 구입할 필요가 있었고 비싸게 팔려면 먼곳까지 가서 판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상인들의 여행이 멀면 멀수록 그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많았습니다.
- 이렇게 상인들은 부를 축척했지만 사회로부터는 경멸당했습니다. 귀족들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신분 없는 자들을 우습게 보았고 부자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참을수 없었습니다. 귀족집안도 대금업자로서 상업활동에 참여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상업을 불명예로 여기는 편견은 귀족들 사이에 뿌리깊에 남아 있게 됩니다.
성직자는 상인에 대해 더욱 적대적이었습니다.
상인들의 법적 신분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편력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방인으로 여겨졌고 대부분 농노일테지만 그들이 농노였음을 입증되기 전까지는 농노라고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률로 그들은 자유민으로 분류되었습니다.
- 상인들이 부유해지자 왕과 제후들은 상인을 보호하는데 열을 올리게 됩니다.
상인들이 많이 몰리면 지역이 활기를 띄게 되고 통행세를 받을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탈자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왕과 제후들은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정기시장에서도 질서유지와 교역로 안전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제 6장 도시의 형성과 부르주아지
- 도시적 집락은 외부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야만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외부에서 수입한 만큼 제조품을 수출해야 합니다. 이처럼 도시와 그 인근 지역 사이에는 항상적인 서비스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상업과 산업은 이런 상호 의존의 유지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상업이 없으면 도시는 식량을 확보할 수 없을것이고, 산업이 없으면 교환을 위한 상품을 마련할 수 없으므로 도시는 소멸하는 것입니다.
상업과 산업의 공존 속에서 중세도시는 성장을 하게 됩니다.
- 중세 상업 조직의 속성상(원격지 상업) 편력상인들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정지점에 정착하였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특히 악천후로 바다, 강, 도로가 통행할 수 없는 동안 상인들은 일정장소에 모여 있어야했습니다. 상인들이 그들 거주지를 건설한 곳은 당연히 교통이 편리한 동시에 그들의 돈과 상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조건들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키비타스나 부르구스에 모이게 된것입니다.
적에게 대항하거나 주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목적을 가졌던 부르구스는 당연히 접근하기 쉬운 곳에 건설되었습니다.
요새화된 키비타스나 부르구스가 존재하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 상인 정주지가 형성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아직 물리적 환경(산, 골짜기 등 자연적으로 험한 환경)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지 못한 시대에는 자연히 물리적 조건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즉 산맥의 지형과 골짜기의 방향에 따라 강의 흐름이 결정되듯이 중세도시의 형성은 지리적인 환경과 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 키비타스나 부르구스가 상업활동을 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상업활동은 밖에서 그곳으로 온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곳의 유리한 조건 때문에 상업활동이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로 결집되었던것입니다.
- 상인 정주지는 키비타스와 부르구스의 외곽지구에 마련되었습니다. 외곽지구는 계속 팽창하였고 12세기 초 많은 지방에서 상인 정주지 건들이 원래의 요새지인 키비타스나 부르구스를 사방으로 둘러싸 버릴 정도였습니다.
외곽지구에는 항상 시장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시장은 그 지역을 통과하는 수로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장은 농촌지역으로 통하는 성문을 향해 뚫려있는 도로의 교차점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이 거주하는 외곽지구는 곧 방어벽으로 둘러 싸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어물은 아직 만연했던 약탈과 폭력으로부터 돈과 상품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상인 안전의 필요때문에 중세도시들은 요새지라는 기본특성을 띄었습니다.
11세기 초 상인 정주지의 주민은 '부르구스의 주민' 즉 부르주아(Bourgeois 영어로 Burgher, 라틴어로 burgenses)라고 불렀다.
- 이제 상업 그 자체가 산업을 자극하게 됩니다. 농촌에서 산업이 행해지고 있던 모든 지방에서, 상업으로 인해서 처음으로 산업이 도시에 유치되고 이어서 곧 도시에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럼 도시민들이 농촌민을 끌어들이는 현상은 11세기 초가 되면서 늘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수요가 늘어나 도시는 산업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제조품보다도 직물은 중세 산업의 기반이었습니다. 제련업도 중요성에서 직물에 훨씬 못 미쳤습니다. 제련업은 거의 전적으로 구리 세공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도시와 농촌 사이의 확연한 노동분화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농촌은 농업에만 전념하고 도시는 산업과 상업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제 7장 도시제도
- 부르주아지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인정하였습니다. 기존 사회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군주, 성직자,귀족의 특권과 권위를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이 그들에게 요구한것은 양보였습니다.
상인이나 직인들에게 거주이전의 자유보장, 영주권 아래에 보호받으며 특별법정제정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11세기 초 이후 부르주아지는 기존 질서에 대해 처음으로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12세기 개혁운동으로 도시체제의 기반이 될 기본적인 도시제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 활약의 중심에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 11세기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시 집정관(consulate)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직책의 임기는 1년이고 투표로 뽑혀 이전까지의 봉건관직과 뚜렷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이어 12세기에는 마르세유와 아를(Arles)와 님(Nime)에서 시 집정관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비슷한 시기에 플랑드르와 북 프랑스 지방에도 도시 제도가 등장하게 됩니다.
- 길드는 거의 자발적으로 도시에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였습니다. 성주들은 길드회원들이 그들의 재원으로 아주 명백하게 시급한 일을 해결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성주들은 길드회우너들이 공식적인 도시 행정에서 "임시변통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길드가 도시 자치의 선도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길드는 그 누구도 수행할 수 없던 과업을 스스로 떠맡았습니다. 길드의 우두머리들이 모든 도시에서 도시 행정관 기능을 담당했다고도 볼수 있습니다.
이 결과 부르주아지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점차 특권 계급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회적 집단에서 법적 집단으로 변모하였고 제후들에 의해 인정 받게됩니다.
이런 법적 신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자치적인 사법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 이제 도시에는 인신의 자유와 더불어 토지의 자유도 확립되게 됩니다.
도시민과 자유민은 영주와 토지에 예속되어 있지 않았으며, 토지도 상인공동체에 성격이 달리해짐으로서 '자유보유지(propriete libre)혹은 '부역 면제 자유지(alleu censal)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통행세도 사인들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연세로 바뀌었습니다.
도시민의 신분처럼 토지제도, 세제 법의 성격등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도시행정관이 상업을 감독하고 도향령을 통제하며 산업과 시장을 관리하게 됩니다.
- 하지만 이때까지도 도시에는 영주권이 존재했습니다. 몇가지를 예로 들자면
시설독점권 - 영주가 주민에게 자신의 방앗간과 오븐에서 빵을 굽도록 강요할 수 있는 권리
판매독점권 - 일정기간 시설에서 나온 포도주나 고기를 독점적으로 판매
숙식권(droit de gite) - 영주가 도시에 머무는 동안 도시민들로 부터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을 권리
징발권(droit de requisition) - 영주는 주민들의 선박이나 말을 징발하여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명령권(droit de ban) - 주민들이 영주를 따라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
그 외 지역에 따라 다양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2세기 도시에서는 이와 같은 영주권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 12세기 드디어 코뮌(자유도시라 볼수 있는것으로 키비타스, 부르구스처럼 주교나 성주에게 지배되지 않는 자유민 차지 도시)이 등장하게 됩니다.코뮌은 그 수성원 모두에게 인신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그들은 코뮌 밖에서는 적대적 세계에 직면해야만했고 위험과 재난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들은 코뮌에 대해서 거의 사랑에 가까운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유민들은 자신들의 코뮌을 예술적으로 꾸미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12세기에 존재했던 중세 도시는 코뮌으로서, 상업과 산업으로 살아갔고, 요새화된 성벽의 보호를 받았으며, 예외적인 법, 행정, 사법권( 이런 것으로 인해서 중세도시는 특권적 집단적 법인이 되었습니다.)을 향유하였다고 결론내릴수 있습니다.
제 8장 도시가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
- 도시의 탄생은 서유럽의 내적 역사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입니다.
중세도시의 형성은 농촌의 경제조직을 뒤흔들게 됩니다. 토지로부터 잉여수입을 농민들이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영주들도 도시 발전에 적극 참여합니다. 도시가 발전할수록 영주가 걷을수 있는 통행세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경작지를 늘리고 상인을 보호했습니다. 그로인해 로마 멸망후 늘어나지 않았던 경작지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촌락이 생김으로 영주는 새 촌락에 농민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었습니다.
이로인해 영지에도 농민들의 자유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상업과 도시 경제에 의해 옛 장원 체제는 필연적으로 사라질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 부활로 유동 자본은 점점 더 중요해졌습니다. 중세 장원시대에는 토지 이외에 다른 형태의 재산은 없었으나 이제는 토지 자본 이외에 유동자본의 위력이 확인되었습니다. 화폐로 인해 화폐 혹은 화폐로 측정할 수 있는 상품이 새로운 부의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봉건국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초보적 수준의 재정일 것입니다. 봉건국가에서 돈은 어떤 역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후영지에서의 수입은 거의 그의 개인용도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제후는 세금을 통해서 그의 재원을 증가시킬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재정적 빈곤으로 인해서, 봉급을 받으며 경우에 따라 면직될 수 있는 공무원을 채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후는 공무원이 아니라 세습적인 기신들만을 거느렸습니다. 자신의 가신들에 대한 제후의 권위는 그들이 그에게 한 충성서약(Sermentde fidelite)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업 부활로 인해 제후가 그의 세입을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해져 화폐가 그의 금고속에 흘러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즉각 이런 상황을 이용하게 됩니다. 13세기에 대관(bailli) 들의 출현은 제후들이 진정한 공공행정을 확립시키고 점차 그의 종주권(suzerainete)의 통치권(sourerainete)으로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발전의 첫번째 징조입니다.
제후들은 봉급을 받는 공무원들에 힘입어 그들 영토를 직접 통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프랑스 국왕들은 도시민들의 봉사에 의존하게 됩니다. 국왕들은 자신들을 코뮌의 보호자, 코뮌의 자유의 수호자로 자처하였고, 국왕의 대의가 도시의 자치와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로 보이게 하였습니다.
필립 존엄왕은 이런 정책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성과를 거두었으며 프랑스 국내에서 왕권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확립하였습니다.
-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신비주의적이었던 중세 부르주아지는 이처럼 독특하게 미래의 두 사상 운동, 즉 세속정신의 자식인 르네상스와 종교적 신비주의의 종착역인 종교개혁에서 그들이 행할 역활을 준비하고 있던것입니다.
첫댓글토탈워 카페에 올라왔을 때 보고 피렌느의 주장임을 눈치챘었죠^^ 서양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앙리 피렌느의 이름은 들어봤을것입니다. 경제사 분야에서 방법론적 측면이나 이론적인 측면에서 한 획을 그으신 분이시고 아날학파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친 분이시죠. 이 책 '중세유럽의 도시'도 발간되자마자 많은 논란에 휩싸여고 이후 많은 반론이 나와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죠. 이후의 연구성과까지 공부하신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네요^^
첫댓글 토탈워 카페에 올라왔을 때 보고 피렌느의 주장임을 눈치챘었죠^^ 서양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앙리 피렌느의 이름은 들어봤을것입니다. 경제사 분야에서 방법론적 측면이나 이론적인 측면에서 한 획을 그으신 분이시고 아날학파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친 분이시죠. 이 책 '중세유럽의 도시'도 발간되자마자 많은 논란에 휩싸여고 이후 많은 반론이 나와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죠. 이후의 연구성과까지 공부하신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네요^^
중립지대 // 아 그렇군요. 도시 발전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는데... 이 책 덕분에 유럽의 발전에 대한 윤곽이 보이는듯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