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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8.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묵상글( 01:50, 05:10. )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 - 06시 이후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05:1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 08시 현재 아직 >
* 정회원 어느 분이나 이 곳에 들어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다른 분(신부님 등)의 오늘 묵상글, 강론글을 이 곳 뜨락에 게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글이 아닌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 묵상글 등 나누기 뜨락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묵상글 뜨락을 '8월 15일 이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에 대한 의견을
전체 공지 H. 260707을 참고하셔서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간 (3 곳을 다니고 참가하며: 2. 2-3. 52번 참조) 이곳 뜨락에서 한 분의 묵상글이라도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나눔의 장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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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1,12-2,4)
12 주님, 당신은 옛날부터 불멸하시는 저의 하느님, 저의 거룩하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주님, 당신께서는 심판하시려고 그를 내세우셨습니다. 바위시여, 당신께서는 벌하시려고 그를 세우셨습니다.
13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
14 당신께서는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처럼 만드시고 우두머리 없이 기어다니는 것처럼 만드셨습니다.
15 그는 사람들을 모두 낚시로 낚아 올리고 그물로 끌어 올리며 좽이로 모으고 나서는 기뻐 날뛰며
16 자기 그물에다 제물을 바치고 좽이에다 분향을 합니다. 그것들 덕분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음식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17 이렇게 그가 줄곧 그물을 비워 대고 민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여도 됩니까?
2,1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 그분께서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내 하소연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리라.
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복음<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14ㄴ-20)
14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15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18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19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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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8.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7,14-20
제자들은 마귀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까닭을 ‘믿음이 약한 탓’이라 하시고,
이어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크고 대단한 믿음’이 아니라
‘작아도 참된, 하느님께 뿌리내린’ 믿음입니다.
산을 옮기는 힘은 ‘나’에게서가 아니라
그 작은 믿음이 의지하는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일깨웁니다.
믿음의 능력은 우리의 ‘크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에서 나온다고.
그러니 ‘내 믿음이 너무 작다’ 낙심할 일이 아니라,
그 작은 믿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기리는 성 도미니코가
바로 ‘겨자씨 믿음으로 산을 옮긴’ 사람입니다.
그는 화려한 권력도 군대도 없이,
오직 ‘진리의 설교’와 ‘청빈한 삶’,
그리고 밤을 새우는 기도로
수많은 영혼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이들조차
‘적’이 아니라 ‘돌아올 형제’로 여겨,
힘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으로 다가갔습니다.
늘 인자하고 기쁜 얼굴로,
마태오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을 품고 다니며
거의 외울 만큼 읽었습니다.
작은 한 사람의 참된 믿음이
팔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 ‘산’을 옮기고 있습니다.
영적 열매의 관점에서 보면
도미니코는 ‘성실’로 진리를 전했고,
‘온유’로 형제를 맞이했으며,
‘절제(청빈)’로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 세 열매가 ‘겨자씨 믿음’과 만나
거대한 설교자회로 자라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내 믿음이 작다’며 낙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작은 믿음을 ‘하느님께’ 두는가, ‘나’에게 두는가?
나는 생각이 다른 이를 ‘적’이 아니라 ‘형제’로 보는가?
나는 힘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으로 다가가는가?
주님,
작은 믿음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도미니코처럼 진리를 사랑으로 전하게 하시고,
겨자씨 같은 믿음으로 당신의 큰일을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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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8.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고통에서 거룩한 상처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욥기는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선사하는 책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욥과 고통의 신비
고통에서 거룩한 상처로~
2026년 8월 7일 금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욥기의 이야기를 단순한 해답집으로 보지 않고, 변화의 길을 보여주는 지혜의 원천으로 성찰합니다:
욥기만큼 "내려감의 길"을 대담하고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종교 문학 작품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어둠을 향해 울부짖으며, 처음에는 결코 생명처럼 느껴지지 않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욥기는 우리 서구인들에게 특히 도전적이지만 중요한 본문입니다. 우리는 본래적이고 필연적인 "내려감의 여정"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 의학, 기술, 속도 덕분에 우리는 조상들과 달리 일종의 "오름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떨어짐의 길"을 익히지 못했고, 크고 작은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욥기는 그 어떤 책보다도 "정답집"과는 거리가 먼 책입니다. 아무것도 고쳐주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설명하려 드는 이들을 오히려 물리쳐 버립니다. 그러나 욥기의 이야기는 영혼을 다시 방향 잡게 하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떤 책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은총의 작용입니다.
만일 포스트모던(탈근대) 시대의 위기가 무엇보다 "자아의 위기"라면, 욥기의 이야기는 그 자아를 올바르고 겸손하며 진실하게 다시 세워 줍니다. 욥과 예수님이 공통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진리란 결국 논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자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자아와 참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결코 빠르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두 만남은 모두 크나큰 고통을 동반하는 점차적이면서도 거룩한 풀어냄(unveiling)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모든 걸음은 자기중심성과 자기통제의 상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이 참된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는 진리와 다시 일치하게 되며, 바로 이것이 영성, 건전한 신학, 그리고 변모를 이루는 본질입니다.
욥기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언제나 "성 밖", 곧 골고타 언덕처럼 경계와 바깥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사실 믿음은 가장 낮은 자리, 깨어진 곳,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가장 잘 뿌리내립니다.
만일 인간의 고통에 어떤 의미도 부여될 수 없다면, 만일 우리의 상처가 거룩한 상처로 변화될 수 없다면, 인류의 여정은 결국 서로를 탓하며 모두가 모두와 싸우는 전쟁으로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희생양과 피해자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욥기가 추구하는 이 질문은 결코 주변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만일 회오리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응답―오늘날 우리가 '성스러운 차원' 혹은 '초월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목소리―이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험하고, 잔인하며, 짧은" 여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거룩한 상처로 변화시킬 자리가 없을 것이며, 상처는 여전히 아프고 피 흘리는 채로 남을 것입니다. 만일 회오리바람 속의 목소리도, 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를 바라보는 평화로운 눈길도 없다면, 인류는 결국 "재더미 위에 앉아 상처를 뜯는" 운명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욥과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참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우리의 모든 상처를 거룩한 상처로 변화시키는 것이고요!
우리 공동체 이야기
어려운 어린 시절을 지나며, 저는 오랫동안 결핍되어 있던 것을 채우기 위해 술과 약물에 의지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제 상처를 덮어주는 약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그것은 어둠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저는 하느님의 빛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매번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저는 그 모든 경험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빛은 제 발에 등불이 되고, 제 길에 빛이 되어 주십니다. 만일 제 어둠이 없었다면, 저는 이 빛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Amy K.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Job and the Mystery of Suffering: Spiritual Reflections (Crossroad Publishing, 1996), 185–18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relio Marcelino, untitled (detail), 2022, photo, Surabaya, Indones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홀로 머물도록 부름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 곁에 모여, 함께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켜 주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함께 증언합니다. 그저 곁에 머물러 주는 그 사랑의 현존이 곧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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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8.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08 05:01
- 악령을 퇴치하려면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께 아들의 치유를 청하는 어떤 이의 얘기를 듣고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라고 한탄하십니다.
얘기는 이렇습니다.
주님과 세 제자가 타볼산에서 변모 체험을 하고 내려오니
주님의 부재중에 마귀 병을 제자들에게 치유 받으려다가 실패한
아이의 부모가 주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그 사실을 말씀드리며
이제 주님께서 오셨으니 주님께서 치유해 주십사 청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한탄하시는데
이때 믿음이 없다고 하시는 것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을 믿지 못한 아이의 부모입니까?
하느님을 믿지 못한 제자들입니까?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둘 다일 것 같지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더 문제시하시는 것일 겁니다.
아이의 부모가 자기들과 같은 제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만
주님을 줄곧 따라다니며 주님의 치유 행위를 보아온 제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아직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직 믿음이 없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없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문제지만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중에 치유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지요.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주님이 안 계셔도 주님 이름으로 치유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성령을 받고 나서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 안에 계시게 된 성령께서 믿게 하시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렇게도 믿음이 없던 제자들,
유대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이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두려움 없이 주님 부활을 증언하며
병자들을 오늘 주님처럼 거침없이 치유하게 된 것은 성령 강림 이후가 아닙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아이에게 들린 악령들에게 호통치셨다고 하는데
악령에게 호통칠 수 있을 만큼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악령을 물리칠 수 있음을 알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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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8.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여왕은 아침 식사 전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여섯 가지 일을 떠올리면서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연습을 하곤 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습관적 훈련, 즉 수양입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즉 아직 세상과 부딪히기 전 가장 맑은 순간에, 의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그것들이 가능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상상력과 신앙의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자인 루이스 캐럴의 이야기들 속에는 언제나 "넌센스 너머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그리고 누가 그것을 단정할 수 있을까요? 늘 불가능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결코 그 경계선을 넓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형을 바꾸는 일은 우리의 과학 기술로 해내지 않습니까?! 실제로 필요하다면 우리는 높은 언덕이나 산의 흙을 바다에 넣어 간척지를 만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대개 물리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존재성과 관련이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변화 혹은 변모와 관련해서 우리는 우리 믿음의 삶 안에서 그 변화나 변모를 지향하며 살아가면서도 그 변화와 변모를 실제로 이루어지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외적인 것을 바꾸는 것보다 내면을 바꾸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이 내면을 변모시키는 믿음의 여정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큰 관건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바라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정말로 바라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그 그윽한 사랑을 깊이 바라보며 그 변화와 변모의 여정을 걷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 볼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여왕처럼 주님께 마음을 열고 그런 수양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변화와 변모의 과정을 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아닐까요?!!
19세기 맨섬의 시인이자 학자였던 토머스 브라운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앙이 활발히 살아 움직이려면, 종교 안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당시의 차갑고 이성적인 신학에 대한 공정한 비평이었습니다. 토머스 브라운의 이 비평은 신앙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때 더 깊고 힘 있게 살아난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입니다.
사실 너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종교나 신앙은 오히려 신앙을 약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이 말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의지하는 신앙에 대한 치유책은 복음의 역설을 깊이 묵상하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성주의는 신앙의 친구가 아니라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은총도, 깊이도, 역설도, 경이로움도, 유머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좁은 틀 안에서만 분명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앙적인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은총의 자유로움과 넓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런 이는 매 순간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삶을 받아들이며, 의심이나 통제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이 불가능한지는 하느님께 맡기노록 합시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단지 불가능한 것이라 선언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면, 결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그 가능성을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앤서니 드 멜로의 [바다로 간 소금인형]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나쁠 것이 없었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라면 청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나누려면 나눌 수도 있고, 찬미도 드렸고, 감사도 드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완전히 편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내가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기를 바라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려고 들지 않았다. 말이야 얼마든지 떠들어댈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그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하느님과 눈길이 마주쳤다가 내가 미처 뉘우치지 않은 죄라도 들춰지면 어쩌나, 어떤 명령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무엇이 됐든지 간에 하느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없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용기를 다 끌어 모아 눈을 들었다. 나는 어떠한 꾸지람도 듣지 못했다. 어떤 요구도 받지 않았다. 하느님의 눈은 그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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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8.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오늘 묵상글 08시 현재 작은 형제회 홈페이지에 게재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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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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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프란치스칸이 아닌 분이라도 맨아래 쪽 포르치운쿨라1~4의 글을 조용히 읽기만 하셔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올해는 성인 프란치스코의 선종 800주년 기념 해이고, 프란치스칸들은 지난 8월1일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기념하였습니다.
특히 4번째 글에서 우리는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진수, 이웃사랑 곧 만민 사랑의 인간관계, 형제성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이---, 공동체 안에서의 언행에 ---.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