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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벧후 3:14-18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4-18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이렇게 닥쳐올 일과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죄를 멀리하고 모든 사람과 늘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그리하여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쁘게 맞아 드리십시오. 15-16) 주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시간을 주고 계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의 많은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러 있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이것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하여 바울의 편지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멸망뿐입니다. 17)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미리 경고해 둡니다. 이러한 악한 자들의 속임수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18) 오직 영적으로 성장하여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영광이 지금이나 또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거룩하라’는 요청을 합니다.
힘써야 할 것(14-16) 그리스도인들이 주 앞에 설 때에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서야합니다. 조롱하는 자들에게 미혹된 방종하는 삶을 경계하고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더디 오신다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했었습니다(9). 조롱자들은 예수의 재림의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구원받을 수 있는 시간을,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을 이룰 시간을 주고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이같이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 때문에 더디 오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뒷받침합니다. 바울의 편지 중에 하나님의 진리를 귀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겸손한 태도로 읽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믿고 순종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편, 베드로의 증언은 바울이 성경을 썼고 거짓 교사들이 그것을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자기 생각대로 풀다가는 진리에 확실히 서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견고하게 서서 자라가라(17-18)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성경을 비틀고 왜곡하리라는 것을 알고 더욱 주의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그들을 미혹하려는 무법한 자들을 삼가라 하고, 적극적인 면에서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가라고 요청합니다.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는 말씀은 도덕적, 정신적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잘 활용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모두 중요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게 높은 신성으로 표현하며 찬양입니다. 그리하여 영원 가운데서 이 땅에 오실 날에 그대로 될지어다라는 자신의 당연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영적인 성장의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온전한 신앙고백이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구원을 위해 인내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당신은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이 잘 자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말씀 앞에 다시 당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모두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모든 성경을 자기 논리에 맞추어 설교하거나 가르치지만 그들 중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하는 자들이나 설교를 듣는 자들은 그 해석이 과연 기독교의 진리에 부합하는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공격이 오더라도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 설 교 >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4-18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정직과 거짓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정직하게 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짓을 좇아내는 용기가 정직을 낳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안중근 의사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안중근은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귀한 벼루를 몰래 사용하다가 그만 깨뜨렸습니다. 그 벼루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벼루였습니다. 이것을 본 하인은 어린 안중근이 아버지께 매 맞을 것을 염려하여 자기가 깨뜨렸다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싫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어린 안중근은 아버지로부터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게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대신 매를 맞겠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하며 하인이 위로를 했습니다. 어린 안중근은 “거짓말은 비겁한 짓이야. 비록 종아리가 아프긴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라고 하면서. 걱정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린 안중근의 어른스런 태도에 하인은 감탄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정직했던 안중근은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정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정직한 사람이 커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잘못을 거짓말로 모면한 일은 없습니까?
아주 혼란한 세상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이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도 안타까운 모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초대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칭송은커녕 욕만 먹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이번 정부 들어 고위직에 추천된 사람들이 온갖 비리로 지탄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의 현실이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온 백성에게 칭송받도록 살아가고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그 말씀 가운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 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성도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얻은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또 다른 말씀이 기억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썼던 당시에는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만물이 영원토록 존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의 창조된 것을 믿으며 또한 세상의 종말을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약속의 말씀을 믿고 종말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과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자세히 설명해준 다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요한이 고백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요한의 고백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믿음은 주님의 재림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올 것 같았던 주님의 재림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백성들이 모두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주의 재림이 막연히 늦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도적이 오는 것 같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야말로 천지의 개벽이 일어나게 되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날을 바라보고 또한 사모할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화를 내고 욕하고 비방합니다. 라가라는 말은 남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욕설로서 “어리석은, 바보, 멍청이”란 뜻의 아람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한 욕설이 아닌 쌍소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말을 흔히 하지는 않습니까? “너는 안 돼”부터 시작해서 “너 같은 게 살아서 뭐하냐?”고 하는 말까지 어쩌면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누구나가 평강을 원하지만 우리의 보통 하는 말로써 벌써 평강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놈,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놈”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쌍소리조차 무의식적으로 내뱉을 정도로 우리의 심성이 악으로 물들어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우리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을 쉽게 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의 평강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신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주님이 대신 치루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셔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은혜 아래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넘어지고 쓰러지는 나 자신을 생각해본다면 다른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를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그 얼굴조차 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로마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알거니와 내 안에 여전히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을 비판하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주시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곱씹어보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셨는데 그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참지를 못하고 있다면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임금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받은바 구원이 바로 그렇게 값비싼 구원입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죽어주실 정도로 비싼 값을 주고 허락해 주신 구원입니다.
주님의 목숨과 바꾼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받은바 은혜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작은 것에도 용서와 관용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런 상대방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게 어떤 직접적인 손해가 끼쳐졌다면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내게 손해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속상한 나머지 외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의 평안이 먼저 사라집니다. 내 마음이 먼저 불편합니다.
내 마음의 불편은 내 삶의 불편과 육신의 불편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짧은 세상입니다. 어차피 잠시 지나다 떠날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물론 살아가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왕이면 풍성하게 누리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먼저 족한 줄을 알면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고 항상 부족하다고만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공동이었습니다. 방 하나를 두고도 온 가족이 다 둘러 앉아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혼자서만 방을 쓰려고 합니다. 물건도 내 것 네 것을 구분할 정도입니다. 이왕 물건을 써도 명품이어야 하고 비싼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명품들이 가장 많이 팔리는 상점들이 다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명품을 쓴다고 해서 내가 명품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부족해도 좋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내일 일까지 오늘 끌어안고 힘들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날의 고통은 그 날로 족하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이 오늘까지 나를 참아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언제든지 기억하십시오. 나는 온전한 자입니까? 나는 그렇게는 안 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누구에게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흠도 점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 같이 상대방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향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입니다. 오래 참고 용납하기를 힘쓰고 서로 손을 먼저 내밀어 상대방을 붙들어주는 푸근한 세상,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알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되고 몰라도 좋은 것은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이단이 어떻고 삼단이 어떻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단을 잘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눅 2:42에는 어릴 적의 예수님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처럼 우리 역시 지혜도 자라고 키도 자라야 합니다. 물론 어른이 되신 분들은 더 이상 키는 안 자라겠지만 지혜와 지식에 관해서는 죽는 날까지 더 자라야 됩니다. 한데 우리는 쉽게 포기하려고 합니다. 이 나이에 뭘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배우기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특히나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입니다. 날마다 내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나가 아니라 이런 나도 사랑하여 주시고 은혜로 세워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부터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고대광실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왕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왕으로 오신 이가 보잘 것 없는 외양간에서 나셨습니다. 구유가 침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목숨을 위하여 애굽까지 피난하셔야 했습니다. 애굽에 사시던 그 곳도 보잘 것 없는 깡촌에 토굴과 같은 곳이 주님이 어릴 적 사시던 곳이었습니다. 얼마 후 헤롯이 죽은 다음 다시 돌아온 어린 예수가 자란 곳이 어딥니까?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시골 골짜기입니다. 가장 대우받지 못하는 목수의 아들로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바로 우리 모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낮고 천한 자라도 주님의 은혜 아래 예외가 없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스스로 서로를 이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결코 그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도 주님께서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한 마디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그 은혜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누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주면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될 때 나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게 되더란 말입니다. 내가 너무도 힘들 때 나의 위로가 되신 주님을 기억하게 될 때 나도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되는 것이요 내가 깊은 수렁의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수렁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경험을 전해주며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가라는 것은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요 동시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깨우쳐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삶의 모습이 우리들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수없이 자기들만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제자들 앞에서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앉을까를 놓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섬김을 받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그 예수님은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 내어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목숨까지도 내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우리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 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말로는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그 마음이 그렇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지 누구나 다 높여줘서 싫다는 사람 있습디까? 높임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데 예수님은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실 알고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는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야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1등은 당연한 것입니다. 1등 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받을 칭찬도 없어요. 오히려 그가 1등을 못하면 욕을 먹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1등을 못했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친구인들 제대로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더 올라갈 자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꼴등은 어떻습니까? 더 이상 떨어질 자리가 없습니다. 꼴지만 벗어나도 잘 했다 소리를 듣습니다.
그렇데 그 사람이 정말 잘 한 것입니까? 당연히 잘 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은 1등도 하고 그러는데 너는 만날 뒤에서만 머무냐?” 그럼 1등은 다 명품 인생입니까? 그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번이라도 1등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분은 명문 대학을 나오셨습니까? 그래서 명품 인생을 사시고 계십니까? 그래서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물론 명품 인생이 되면 좋겠죠.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희생하면서 이루는 명품이라면 그것이 주님 앞에 서는 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나를 위해서 누구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그 일이 더 쉬워집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 자체로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이요 동시에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 안에 새로운 삶의 창조능력이 있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고후 5:17의 말씀처럼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빚어주십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자가 누구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치신 주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주님이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오늘도 내 안에 계셔서 나의 능력이 되시고 치료자가 되심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믿는 자가 되게 하셔서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게 되는 표적을 오늘도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더욱 힘써 알아가고 느끼고 그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이런 은혜의 손길을 펼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살던 시절 이웃과 함께 하던 그 끈끈한 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도 함께 나누려고 하던 그 훈훈한 마음들을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권면처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음에서 떨어질까 삼가고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감으로 하늘 영광이 주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넘쳐 임하심으로 우리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는 주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끈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알아 우리 역시 오래 참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의 길, 형통의 길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계절 따라 오가는 철새와 같이 돌아다니지 말고 제자리를 잘 지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길이길이 자라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을 지킬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자리를 지킬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스스로를 성장시켰음을 알게 됩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수 1:8~9은 말씀합니다.
커가는 것. 그것은 바로 제자리를 지킬 때 얻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피곤하다고 속상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한번도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오늘도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은혜가 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려면
베드로후서 3:14-18
베드로 사도는 이 두 번째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안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그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과정 그 이후에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갔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것을 간곡히 다시 설명하고 또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모양도, 그 성장의 과정도 다양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만 알아도 교회에서 일관된 신앙의 형태를 유지하고 추구한다는 것에서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렇듯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아주 다양하지만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출애굽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 백성이나 애굽과 같은 세상의 종살이를 하는 단계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세례, 곧 물세례이자 홍해를 건너는 과정이 있다. 그때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정이라 생각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무관하다 여기고 자기의 의를 좇아 살지만 그들의 그 의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듯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하는 도화지가 된다.
그렇게 홍해를 건넌, 물세례를 받은 여정을 지나면 광야를 지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광야에서의 삶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라는 신호와 보호 아래에서만 삶이 유지되고 방향을 진행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법도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고, 또 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길가다가 볼 수 있는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지만 그들이 아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육신이 바라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바뀐 여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늘 ‘무엇을 할까?(Do)’, 하는 것과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래 있어야 육신이 생존할 수 있고, 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진행해야 자신의 길도 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서의 의와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목사에게 물어보고, 그 목사들은 그것에 답하거나 그 질문을 받는 권위를 얻기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또 기도하여 영발을 강화하는 등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가진 숨겨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게 무엇을 할까 하는 것을 탐구하는 목적이다.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이며, 예배는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고,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신경 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함이고, 반대로 그것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혹은 그것으로 안 되면 죽어 천국에 가서 세상의 성공 기준과 같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얻으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을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자랑 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 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이라고 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심히 경계하는 신앙의 여정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성도들이야 그런 과정을 지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베드로 서신이 기록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밝힘으로서 이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어떠함을 알게 하여 고백하도록 함이다.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기록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옛 신앙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교회에 다니다가 다시 이전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만 베드로 사도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바라던 것을 동일하게 바라고, 그 바라는 것을 위하여 이전에 숭배하던 것에 하던 행동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사람이 바라는 의와 선함과 소망이 동일한 상태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늘 육신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순교를 앞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기를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구분하려면 그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기가 그 속에 있는 상태로 다른 것을 구분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기 고집에 빠지면 남의 말은 고사하고 자기 상황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잘 구분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벗어나서 충분히 자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여정으로 가나안의 여정이 있다. 이는 마지막이 아니라 사실은 시작이다. 이 가나안에서의 삶을 위하여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온 것이다. 단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구원이 목적이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같은 것이다.
신앙의 마지막 아니 본격적인 시작인 가나안 땅의 여정은 밟는 모든 땅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이요 생명의 여정이다. 땅을 밟으러 다니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없고 오직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가고 서며 머무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기 안에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표현해낼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밖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안에 그것에 대한 가치와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자기가 그 일에 대하여 인지하고 옳다고 여기는 대로 고집하게 된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좋은 예이다.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귀한 줄로 모르면 그냥 돌덩이와 같이 여기듯,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그 생명이, 그 생명의 의와 비밀이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교회도, 기도도, 성경도 모두 자기가 바라는 대로 취급한다.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면 그 추구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도 성경도 모두 종속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 전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을 단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복락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의지하는 신들 중에서 급이 다른 능력자로 의지하라고 그렇게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도의 전한 것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나 바울 사도나 모두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고자 한 것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 기독교, 혹은 그와 유사한 종교(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인간의 종교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아니다.)들을 보면 교리의 조금만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서로 안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안에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둘 서로 안에 하나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면 서로 다르다고 할 이유는 고사하고 주장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서로가 같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성경을 보는데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난무하고, 이를 바로하기 위하여 다시 더 신학으로 연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더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경을 동일한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집단들과 주장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온전히 있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독수리를 피하는 것은 독수리의 종류와 습성과 피하는 법을 배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본성이 되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해본들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데 왜 그러겠는가? 가나안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던가?
그러므로 성경이 풀리려면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 보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오고, 그 들어온 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의 안목과 가치관과 삶이 되어 살아가다보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알고, 그것으로 보게 되는 그 여정과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으니 성령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풀리는 것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이 아니면 교황 아니라 교황 할애비라도 다 사사로이 성경을 푸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자기 육신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 자라가는 구원
벧후3:14-18
예수님의 제자로서 베드로는 넘어졌다 일어섰다의 연속이었다. 열심도 많았지만 실수도 많았다. 그는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말보다 행동이 더 앞섰다. 기질로 말한다면 다혈질이다. 행동하고 후회하는 일이 많다. 실수도 많고 굴곡도 많았다.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여 나로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러나 물위를 걷자 말자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빠져 허우적거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코믹하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혼자 나서서 대답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곧 이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또 나선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 100점과 빵점 사이를 오고 갔다.
*변화산에서 주님의 용모가 변하자 베드로는 너무 흥분을 해서 천막 짓고 여기서 아예 살자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 오버다. 분위기 파악을 전혀 못하는 행동을 종종 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려고 하자 다들 가만히 있는데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말린다. 그때 예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당장 그러면 아예 목욕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얼마나 징그러운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기도하자 하면 졸고 깨어 있으라 하면 졸던 그가 나중에 하산을 할 때 제사장들의 무리가 오자 갑자기 칼을 휘둘러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
예수님이 말고의 귀에 붙여 주셔야 했다. 베드로는 칼을 써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책망을 받는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그만 여자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하고 떠난다.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하고 만다. 이 정도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제자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순간이 많았다. 핵심적인 특징은 불안정함이다. UP & DOWN이 심하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다. 주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 주셨다.”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다. 게바는 아람어다. 게바의 헬라어가 베드로다. 베드로는 반석이다.
무엇을 느끼는가? 그에게 안 어울리는 이름이다.
왜 늘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그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을까?
지금은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언젠가 변화될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다. 예수를 믿으면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이 된다.
*베드로 후서를 통해 베드로의 놀라운 변화가 비쳐진다.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노사도로서 실수와 허물이 많았던 과거의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성도들을 향해서 가슴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원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이란 외형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보지는 않지만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설 것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안에는 종말론적인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이 있다. 우리의 마지막은 어떤 장면일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 날 어떤 모습으로 서기를 원하는가? 아마도 동일하게 갖는 생각은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 아닐까? 부끄러운 모습으로 설 수는 없다. 베드로는 높은 수준을 기대하고 있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오점, 결함들이 많은가?
*17절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는 여기 “굳센 데서 떨어질 까 삼가라”고 하고 있다. 베드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는 과거에 굳세게 서 있지 못했다. 늘 흔들렸다. 제자로서의 그의 삶은 요동을 쳤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
1: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영적 여정의 길을 걷고 있다. 긴 여정이다. 그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고 위험하다. 여정은 출발이 있고 끝 지점이 있다. 우리는 지금 도상에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넘어지고 추락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어쩌면 나도”하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든다. 여행을 해보면 알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복병이 많다.
영적 여정에서 길을 잃을 수도 조난을 당할 수도 있다. 믿음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순례의 길에 늘 기억해야 하는 단어는 “삼가라” 마지막 골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늘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방심하는 순간 넘어진다. 자동차 사고가 주로 집 근처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
집 근처는 익숙하기 때문에 방심 하다가 사고를 낸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실족한다. 신앙의 여정은 늘 도전이고 시험이다. 한때는 잘 했다가 나중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다. 무엇이든지 갈수록 더 좋아져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한때의 신앙으로 만족하면 안된다. 왕년의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은혜 생활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한다.
끝까지 잘해야 한다. 마지막 성적표가 중요하다. 군인도 마지막 계급장이 중요하다. 군 장성을 지냈는데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사람도 있다. 졸업할 때 마지막 성적표가 중요하다. 베드로 후서 마지막 장을 읽다 보면 마지막 성적표 생각이 든다. 영적 여정에는 늘 긴장감이 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동사가 나온다.
“자라가라”는 동사다. 왜 자라가라고 하고 있을까? 영적 성장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영적 성장을 강조한다. “자라가라” 신앙의 대명제다. 본문에서 “자라남, grow”을 놓치면 안된다. 자라난다는 것은 생명의 특성이다. 생명에 있어 자라남은 절대적인 것이다.
자라남을 생각하기 전에 전제해야 하는 것이 있다. 자라남 이전에 출생이 우선된다.
태어남이 없으면 자라남은 불가능하다. 생명의 탄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영적 출생이 있었는가?
거듭남(Rebirth), 중생(born again)회심 사건을 점검해야 한다.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신자가 아니다. 태어나지 않았는데 성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영적 성장은 영적 태어남을 근거한다. 영적 출생을 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이전 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 영적인 성장은 다른 것이다. 신자의 삶이란 불신자 보다 좀 더 나은 삶이 목표가 아니다.
베드로의 표현대로라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약간의 보수나 개조가 아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변화다.
단순히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이어야 한다.
영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왜 지난날 베드로가 불안정한 삶을 살았는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않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다.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목표는 성장이다.
구원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는가?
성화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백성다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추구함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딜렘마에 빠질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성장이 멈추어 버리는 순간이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이다. 소위 성장 멈춤병이다. 신앙이 앞으로 나가기 보다 뒤로 밀려 나는 경우가 많다. 세상과 구별됨이 아니라 세상을 닮아갈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큰 주제다. 신앙생활에서 계속 물어야 한다. 성장의 속도, 성장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드러나야 할 공통점은 자라나고 있어야 한다. 좀 늦게 자랄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자라고 있는가? 자라지 않는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생명은 자란다. 기계나 물건은 자라지 않는다. 생명 안에 성장의 힘이 들어 있다. 성장이 없다면 다른 말로는 생명 없음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영적 성장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상이다. 성장의 갈망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믿음의 근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가만히 있으면 뒤로 밀려가는 힘에 지배를 받는다. “전심전력하여” 변화를 위한 노력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변질된다. 사람이 변질되지 얼마나 쉬운가?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들이 늘 작동되고 있다. 잠시라도 그냥 두면 죄성이 올라온다.
우리는 언제든지 악하고 게으르고 무지함에 빠질 수 있다.
성장을 위해 구체적으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성장은 공짜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한 부분들을 극복하기 위해 영적 훈련을 해야 한다..
이전의 삶 그대로 살고자 하는 관성이 있다. 그 관성의 틀을 깨야 한다.
우리는 매 순간 지속적으로 밀려오는 유혹들과 싸워야 한다.
성장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방치된 영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을 해보라.
영적으로 발버둥을 쳐야 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
가장 무서운 증상은 성장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는 상태다. 더 자라고 싶은 열망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영적인 갈망이 없어져 버리면 자랄 기회가 없다. 그것은 매우 중증 상태다.
신앙의 건강을 테스트 해보라. “지금 내 안에 성장의 욕구가 있는가?” “영적 성장의 의지가 있는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의지가 없는데 노력할 리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그냥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이전과 같이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거룩한 열망이다.
먹고 사는 일상에 쫓기는 삶을 살다 보면 영적인 문제는 뒤로 밀려나 있을 때가 많다.
영적인 부분은 방치한 상태로 두면 금세 뒤죽박죽이 된다. 무너지는 데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 영적인 성장이 가능할까?
거룩한 열망을 가져야 한다. 영적 갈급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의 성장, 한때의 성장으로 끝나면 안된다. 건축을 하는 현장에 가 보면 멋있는 조감도를 세워놓았다. 언젠가 멋진 건물이 지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지금은 먼지를 날리고, 어지럽지만 언젠가는 멋진 건물이 설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짓다가 부도가 나서 오랫동안 방치 된 건물을 보면 귀신이 나올 것 같다. 흉물이다. 우리의 영혼도 그와 같다. 방치되고 가꾸지 않고, 성장하지 않은 영혼의 상태는 상상에 맡긴다. 밭도 비슷하다. 그대로 두면 못 쓰게 된다.
금방 잡초가 생긴다. 돌보지 않고 버려진 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계속 기경을 하고 옥토가 되게 해야 한다.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자신의 영혼을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여러분,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힘들지만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
베드로는 그의 신앙이 자라지 않을 때 그것이 얼마나 주변을 힘들게 했는가?
주님의 일을 얼마나 그르치게 하고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냈었는가?
*영적 성장에 중요한 요소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도 베드로는 낙심해 있었다.
부활의 주님을 보았지만 더 이상 따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너무 비참하게 무너졌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하고 디베랴로 떠났다.
사실상 상황 끝이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을 하기도 부끄럽고 계속 따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 것이다.
세상의 스토리 라면 여기에서 끝난다. 그러나 2막이 시작된다. 2막은 주님의 은혜다.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다시 찾아와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주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추적이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중요하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산다. 영적 성장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 계발이나 자기 관리와 다르다. 죄성을 가진 우리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만으로는 부정적이다. 안된다. 그냥 죄의 힘에 끌려 다니다가 살다 간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더 나빠진다.
우리의 노력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심기워져 있다. 성령이 우리안에 있는 그 씨를 자라게 할 때 성장이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의 자리에는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내미시는 은혜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붙잡는 것이다.
베드로가 지난 날을 회고해 보면서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들쑥 날쑥한데 하나님은 일정하시다. 언제나 신실하시다. 변함이 없이 다가오시는 은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다면 소망이 없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아래 있는 우리는 다르다. 다시 시작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완성의 자리까지 데리고 가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은혜안에서 자라게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힘들지만 순종하게 하는 힘도 은혜의 힘이다. 내가 하려고 하기 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두 번째는 18절을 다시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왜 베드로가 지난 날 그렇게 많은 실수를 했는가?
그가 제자로 따라 다녔지만 주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주님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왜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도상에서 제자로서 부인을 했는가?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전도를 할 때 예수를 전하는 것을 부끄럽다면 아직 주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백성됨의 자랑과 기쁨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영의 눈이 뜨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어떻게 이전에 그처럼 사랑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을까? 주님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주어진 배부름이 그렇게 하게 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는가? 다니엘이 어떻게 사자굴의 위협도 두려워 하지 않았는가? 그런 담대함들이 그저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은 안다는 것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알지어다”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 신선하고 리얼한 체험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험의 발전이 일어나야 한다.
호세아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다. 여기 안다는 것은 깊은 교제를 통해 경험적으로 아는 앎을 말한다. 종교적 격식을 갖춘 형식적인 예배나 기도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신앙이 미궁에 빠지거나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깊어지지 않으면 신앙은 맴돌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뿌리다. 뿌리가 없으면 자랄 수 없다. 하나님을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라.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 나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가장 큰 주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이 크신 분이다. 하나님, 이라는 이름의 바다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혹자는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놀라움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그때 우리안에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영적 여정에서 한 순간도 관심이 식어지지 않아야 할 주제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이다. 신앙의 테크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열심이 주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 혹은 문제들을 만났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삼는 것이 최상이다.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들이 쌓여갈 때 그것이 우리 안에 변화를 일으킨다.
성경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더 깊이 만나는 경험들을 하라.
*베드로는 주님 앞에 서는 날이 가까워 왔다. 그렇게 요동치던 인생이 어느 순간 성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오순절 사건 이후 급속도로 변화를 입었다. 일등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던 그가 겸손해졌다.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흔들렸던 그가 이제는 굳게 세워진 모습이다. 아름다운 종착점을 보여 준 베드로의 모습이다.
주님이 기대하신 대로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뚝 세워 졌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순교함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지켰다.
여러분, 승리는 우리의 손에 의해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영적 성장을 위해 멈추지 않는 노력을 계속 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계속 자라가야 한다. 언젠가 완성된 그 날이 올 것을 바라보며 믿음 안에 굳건히 서 있고 계속 성장하는 신앙이 되라. 영적 여정의 끝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을 포기하지 말라.
신앙의 끝 지점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은 한 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조금씩 자라남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신앙의 기쁨은 바로 그 변화에 관한 것이다.
때로는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도 그것으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절망은 세상적인 것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망가지고 없어지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목표가 되면 절망을 전제한 삶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목표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서 품어져 나오는 것이다. 갈수록 향기롭고, 매력적이고, 흠모할 만한 것들이 우리안에서 흘러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빚어질 완성의 날을 바라보며 성장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더딜지라도 낙심하지 말라.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다시 시작하라. 자라가야 한다. 멈추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더 나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그 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라.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7-18 / 조정의 목사
여러분이 만일 유언을 쓴다면 뭐라고 쓰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 죽는다면 나에게 맡겨진 자녀들에게, 청년들이나 성도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쓰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에는 베드로의 그런 유언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14) 여기서 ‘장막을 벗는다’는 것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19).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그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폭스의 순교사에 따르면, 베드로는 9개월 간의 감옥생활을 하다가 매를 심하게 맡고 그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그의 죽음 직전에 쓰인 유언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무엇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분명히 기록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이 편지는 베드로가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직간접적으로 돌봤던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쓴 가장 큰 목적은 그들 중에 있는 거짓교사들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중에도”(2:1) 교회 밖에 여러 이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거짓교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2:1) 이 편지는 그러한 다급함을 담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거짓교사들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호색과 탐심, 정욕, 교만, 비방, 불의, 속임, 의심, 탐욕, 자랑 등의 죄를 언급하는데 바로 거짓교사의 특징들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강림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그러한 태도는 방탕한 삶을 양산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된 삶과 교리를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종합 정리하고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은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도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랑으로 저의 설교를 듣고 계실 것입니다. 주 안에 한 형제 자매이기에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버지가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사랑을 받았고 그 아들이 십자가의 죽으시는 사랑, 성령의 돌보심을 받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1) 베드로는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하고 있는 당부는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전혀 듣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하기 위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2)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하려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주일마다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정확하고 확실한 진리를 전파할 뿐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아는 지식이 정말 내 것이 되도록, 그 아는 대로 살 수 있도록 계속 말씀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신 6).
그 당부의 첫 번째는, “삼가하라”입니다.
이것은 ‘주의하라’, ‘조심하라’입니다. 자신이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마지막으로 한 당부입니다.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위협하는 많은 것들에서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무법한 자들(거짓교사)의 미혹함에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계속해서 미혹합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주의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삶은 불의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성도를 미혹되게 만듭니다. 믿는 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을 했는데, 담당선생님이 일찍 귀가하신 날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있습니다. 저마다 규칙을 어기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도 집에 가지 않고 있다면 그런 유혹이 덜하겠지만 한 명 한 명 사라져 결국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그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인을 유혹합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8-9)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실 정도로 악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롯은 의인이었지만 악한 사람들로 인해 심령이 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의 생각이 곧 법인 사람들입니다. 그곳에 섞여 살다보면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륜이나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불법 다운로드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속이는 것, 분노하고 짜증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교리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당시에도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이단사상이 있었습니다. 기록된 말씀에 권위를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문제들이 무엇일까요? 계시에 대한 가르침(성경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서 감동을 주실 수 있는 분인가, 특정한 구절이나 단어를 통해 감동을 주실 수 있는가)에서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리적인 부분도 바로 서야 합니다. 성경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와 상관없이 나의 깨달음에 의존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려고 노력하는 행동들도 있습니다. 베리칩과 제3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유럽이 하나가 되는 시점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때와 시는 자기의 권한에 두셨고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음모론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교리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적으로 구원은 확정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점진적 과정을 거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영혼, 몸, 삶의 순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영지주의적인 교리도 있습니다. 구원받으면 내면의 영혼은 의로운 사람이 되는데 육체는 죄에 찌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교리도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또 하나, 기복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승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예배하는 신앙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계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 교리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데 성도들은 이 교리들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교사들을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진리를 분명히 알고 그 가운데 서야 합니다.
잘못된 교리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저는 요즘 아내의 건강을 챙기다보니 계속 유기농 음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렇게 먹다보니, 육신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먹는데 내 영혼의 문제에 이만큼 신경 쓰고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영양소가 몸으로 퍼져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영혼에 들어가는 음식들도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해로운 음식이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진리가 아닌 가르침들은 신앙을 병들게 하고 삶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당부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이런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보고 듣고 읽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해로운 것이 섞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봐서 순전한 것인지 진리인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당부는 “자라가라”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앞의 당부가 ‘수비’라면 이 당부는 ‘공격’입니다. 우리가 주의하면 삼가고 덜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비만 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주의하고 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공격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20살인데 갓난아기의 모습이라면 정상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지 10, 20년이 되어도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도 자라가는 것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은혜로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말씀만이 거짓이 전혀 없는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모습을 제공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격입니다. 영적인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할 때 유일한 공격무기가 바로 성령의 검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당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왜 이 당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것은 지상대명령이라고 알려진 명령입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사도들은 말씀대로 제자를 삼아 가르쳤고 말씀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또다른 제자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항상 떠나지 않겠다하신 분이 약속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동일한 명령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입술과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당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대로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들도 잘못 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4-18 / 한마음교회
지난 주일에 김영우 황보미좌 가정이 아들 요한이가 백일이라고 떡을 내고 그 동안 기도해 주신 성도들의 기도에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목양실에 오셔서 잠시 교제했었는데 두 분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결혼 6년만에 낳은 아들이 엄마 아빠도 알아보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의 얼굴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갈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낳으셨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스바냐 선지자는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개역)
여러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 성장을 멈추어 버리면 그 부모의 슬픔과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기쁨이 큰 것만큼 슬픔과 고통도 크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낳은 아들입니까?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슬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생활에 참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2)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8) 베드로후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과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네 가지 “힘쓰라, 여기라, 삼가라, 자라가라”는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간추려 보면 세 가지 권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할 세 가지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I. 흠이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14)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서 도덕적 영적 순결을 나타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힘쓰라는 말은 1장에서도 세 번이나 나온 단어입니다(5,10,15). 그만큼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라, 부지런히 온갖 노력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22장 20절을 보면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하자가 있는 것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7, 개역)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벧전 1:19).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덮어 주시고 앙털같이 희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오점을 남기고 허물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쓰지 않으면 죄악된 습관과 타락한 본성대로 행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만나기 전에 부끄러움이 없는 거룩한 자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정결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인 경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환난 중에 있는 자를 돌아보는 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또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은 유익하지만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말은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마음에 참된 평안한 마음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허물과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흠 없는 자로 설 때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을 자백하고 주짐의 보혈로써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참된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늘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믿음으로 이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II.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15-17)
15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이단자들은 주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을 꼬투리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재림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개역)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주님께서 일절 오래 참으시는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는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서 주의 오래 참으심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참고 계시는 것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이 참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자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진리는 바울의 편지에도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그 편지들 중에는 알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무식한 자는 '배우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입니다. ‘굳세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을 가리킵니다.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지 않은 심령들은 미혹받기 쉽습니다. 가끔 영적으로 귀가 얇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신비주의적인 신앙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신앙은 성경 말씀에 뿌리박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벧후 1장 19절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에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샛별처럼 떠오르기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에 뿌리 내리는 신앙이 가장 확실한 신앙입니다.
성경은 더러는 우리가 알기에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단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들입니다. 억지로 푼다는 말은 ‘왜곡하여 해석하다’, ‘비틀어 풀다’는 뜻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은 편지를 쓴 바울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계시록을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의 참 저자이신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것을 다 무시해 버립니다. 자기들의 논리를 가지고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이단들은 자기들의 교리가 가장 성경적인 진리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성경구절을 여기, 저기서 조금씩 뽑아내어 완벽하게 짝을 맞추어 놓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앞뒤가 잘 맞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또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부분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신천지에서는 무료 신학원을 세워서 진리를 알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불러서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4,4000명의 성도들의 반열에 들어가야 한다고 미혹합니다. 자기들의 교회에 들어온 144000명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난 2000년 동안 믿은 성도들은 다 어떻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가지고 모든 성경말씀은 비유로 해석하고 왜곡하여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주신 사건도 비유로 해석하여 다섯 명의 삯군 목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비유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이며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을 비유적으로,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숭이 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단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려운 구절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어려운 구절을 억지로 풀려고 하지 말고 그냥 묻어 두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말씀들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어릴 때에는 젖을 먹어야 합니다. 딱딱한 음식을 주면 소화를 못 시켜서 배탈이 납니다. 이처럼 어려운 구절이 나오면 나의 신앙이 좀 더 성장한 후에는 깨닫게 되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에 은혜를 받으면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을 굳게 붙잡으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개역)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새번역에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무법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이단의 특징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무법한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있는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1:12). 우리가 말씀에 근거해서 세운 신앙은 가장 확실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또 이단자의 80%는 말세론을 들고 나옵니다. 이들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들고 나옵니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은 수많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이 상징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런 원칙들을 무시하고 상징들을 바로 자신들의 교주와 교리와 접목을 시킵니다. 자기들이 마치 하나님과 직통하는 사람처럼,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처럼, 성경을 100% 확인하고 깨닫고 있는 것처럼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이용해서 성경을 인간의 머리로 억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마귀가 역사하여 사단을 섬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마귀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합니다. 인간적인 본성을 자극해서 세상을 사랑하도록 유혹합니다.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도록 유혹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은혜를 남용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방탕하게 살도록 살도록 합니다. 또 이와는 정반대로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로 유혹합니다. 또 우리가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그 구원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또 전도를 열심히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집집마다 방문하여 전도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전도를 해야 하고, 한 집도 빼 놓으면 그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가가호호방문하여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국 중요한 교단에서 이단으로 결정한 여러 단체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교 장로회 합동총회가 이단으로 결정한 관련 교회 및 단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교, 이용도,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나운몽, 박태선, 동방교, 한국복음신보, 통일교 문선명, 김기동 베뢰아, 신천지 무료신학원(이만희), 할렐루야 기도원(김계화), 류광수, 이재록, 유복종, 빈야드운동, 말씀보존학회 등입니다. 또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이 이단으로 결정한 교회 및 단체는 더 많습니다. 위에 언급한 이단 외에도 권신찬(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 소천섭(구원파), 이선아(밤빌리아추수꾼), 박윤식(대성교회), 박명호(엘리야복음선교원), 이장림(다미선교회), 이초석(한국예루살렘교회), 서달석(강서중앙교회), 황판금, 이옥희(태백기도원), 이단옹호, 기독교 세계 부흥선교 협의회, 기독교 총회 선교연합회, 세계부흥클럽, 성신클럽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을 분별하고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III.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18)
18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이 말씀은 베드로후서의 결론이요 마지막 축도입니다. 우리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영적으로 철이 들고 성숙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래서 떼를 쓰고 자기 욕망만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철이 들어가는 것을 성숙했다고 합니다. 성숙해지려면 초보 신앙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구원받은 것 하나로 만족하고 거기서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 면에서 영적인 성장을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직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안에서 자라가라고 했고, 다른 하나나는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첫째,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은혜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값없이 받는 첫 번째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구속의 은혜입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이 은혜는 가장 기본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순간부터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개정)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자란다로 그랬습니까? 복음 듣고 나서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우리 안에서 은혜가 자라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일 뿐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에서 계속하여 성장하여야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더 은혜가 넘치는 신앙으로 자라가야 하고, 금년보다 내년에는 더욱 은혜에 넘치는 신앙으로 자라야 합니다.
구원 받은 것은 은혜 받는 생활의 시작일 뿐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나에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 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감사하게 됩니다. 자녀들도 어릴 때는 부모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달라집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어머니의 노래’ 어떻게 부릅니까? 그 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멜로디를 따가 웃으면서, 장난치면서 부릅니다. 그러나 4-50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를 때 그 가사가 가슴에 부딪혀 옵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하면 눈물이 고여옵니다. 부모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숙해 진다는 말은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살후 1:3) 이처럼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데 비례합니다.
둘째로 저를 아는 지식에 자라 가야 합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지식은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알아가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부부가 결혼을 하면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함으로 서로를 알아갑니다. 맨날 부부싸움만 하는 부부는 서로를 모릅니다. 한이불을 덮고 자도 서로를 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인격적으로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안다는 말은 참으로 폭넓게 사용됩니다. 이름만 알아도 안다고 합니다. 조금 알아도 안다, 많이 알아도 안다고 합니다. 처녀 총각시절에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압니다. 어느 정도 알고 신뢰가 생기면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처녀 총각 시절에 안다고 하는 것은 조금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후에 서로 사랑하면서 계속 알아갑니다. 저는 올해 35주년 기념일을 보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내를 잘 몰라서 섭섭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격적인 존재는 서로 사랑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는 끝이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분을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만하면 예수를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은 일정한 기간이 있어 입학과 졸업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것은 시작은 있으나 졸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지만 우리의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 성경에 증거된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확실한 그리스도이시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면 성경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바로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의 단일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핵심 주제는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바로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호세아 4:6절 다같이 찾아보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무관심하면 하나님도 무관심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으면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 자녀를 잊기를 원하십니까? 기억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 늘 기억해주셔야 됩니다. “Because you have ignored the law of your God, I also will ignore your children.”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 무시하면 하나님은 여러분 자녀들 Ignore해버리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공부를 겸손한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생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가장 고귀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상식, 과학적 지식, 철학적 지식, 종교적 지식들도 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대소변이라는 말인데 배설하고 나면 후련하고 시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그가 좋아하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8절에도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결론적으로 우리가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힘쓰라, 삼가라,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4-18 / 르랑크푸르트 우리교회
거의 10여년을 강해를 해 왔는데요, 매번 한 권의 책을 마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마무리를 하게 될 베드로후서는 다른 책보다 더 그런 것 같아요. 이 좋은 말씀을 왜 이렇게밖에 전하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커요. 그래서 오늘 마지막 강해를 준비하면서 온 마음을 쏟았어요. 여러분과 함께 제가 본문 속에서 경험한 마지막 말씀의 은혜가 나누어지면 좋겠어요.
힘쓰라, 점도 없고 흠도 없도록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베드로후서의 결론에 가깝습니다. 이 편지를 쓴 이유는 3:1절에서 이미 말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일깨워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 기억의 이유는 마지막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거였구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그걸 오늘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서 알려주는데요, 세 개의 명령형 동사를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명령하고 권면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제 오늘 베드로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세 개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천둥 같이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이면 좋겠어요. 함께 진실하게 말씀 앞에 서보지요.
먼저 앞의 두 개가 14절의 “힘쓰라”와 17절의 “삼가라”입니다.
먼저 힘쓰라는 가르침을 볼게요. 무엇을 힘쓰냐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는 거예요.
이 점도 없고 흠도 없다는 것이 베드로의 편지에 이미 두 번이나 나왔어요. 베드로전서 1:19절에서는 우리의 구원의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데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실 때, 그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하신 분이셨다는 거예요. 그게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본질이셨어요.
그리고, 또 이 표현이 베드로후서 2:13절에 등장을 하는 데요, 여기에서는 거짓선생들을 표현할 때, 아예 그들을 “점과 흠”이라고 지칭을 해요.
완전히 구분한 거죠. 예수님은 점과 흠이 없으시고, 거짓선생들은 점과 흠 자체구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바보 같고 아무리 몰라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너무 분명하잖아요.
여러분 “힘쓴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아직 부족하니까, 아직 해야 하니까 힘쓰는 거죠. 노력하는 거예요. 우리가 소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태도가 흠과 점이 없기를 힘쓰는 거예요.
실제로 점과 흠이 아예 없다는 건 우리에게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힘쓰라는 거구요, 힘쓰라는 것은 여전히 모자른다는 것을 전제해요. 그러니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일상에서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된 것들은 심판에 직면하게 될 거구요, 흠 없고 점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심판의 주권자가 되실 거예요. 그 가운데에 서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라는 뜻이에요.
이걸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르게 설명하면요, 이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돌아서야 하고, 우리의 선택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제가지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이제 베드로후서를 마무리하면서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의 매주 참 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에서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것들을 선택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유혹하는 자들에게 넘어가기도 하고, 스스로 불의로 얻는 삯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장 흔한 것은 점점 더 세상에 익숙해 지다보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점점 더 세상에 빠지는 경우일 거예요.
유혹에 넘어가는 것, 불의를 스스로 사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 익숙해져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 그것도 옳은 것은 아니에요. 솔직하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는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결단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러려면 세상에서 손해를 볼테니까요. 여전히 세상이 먼저인 거죠.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알아요. 작은 거 하나 바꾸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는 뜻은요, 우리가 이미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는 뜻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요, 하나 바꾸기가 그렇게 어렵다면, 그건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래서 “힘쓰라”는 거예요. 언제까지 못 들은 척, 나는 아닌 척, 안 해도 괜찮은 듯,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그래서 “힘쓰라” 흠과 점이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삼가라, 미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그 다음 권면은 “삼가라”에요.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베드로는 바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 바울이 여기에 나오는지는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요. 가장 선의로, 가장 오늘 본문의 의미에 맞게 해석해 볼게요. 바울도 재림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 편지에서 언급을 했어요. 당시 초대교회는 박해가 심했잖아요. 그러니, 바울이 가르친 것도 고통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 소망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그 소망으로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바울은 은혜만을 강조했으니, 은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고, 삶은 외면하면서 바울을 핑계 삼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잖아요.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 사람들을 16절에는 이렇게 표현해요. “무식한 자들”이다, “굳세지 못한 자들”이다. 무식한 자들은 진짜 무식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왜곡하는 사람들이구요, 굳세지 못한 자들은 왜곡하는 자들에게 넘어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오해를 한 게 아니에요. 왜곡한 거예요. 오해는 잘 몰라서이지만, 왜곡은 의도적인 거예요. 이들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해요. “억지로 푼다”는 것은요, “밧줄을 꼬다, 팔다리를 잡아 늘리는 고문을 하다” 이런 뜻이에요. 일부러 꼬고, 고문을 해서 상태를 변형시키기까지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모르는 거예요, 악한 거죠.
그런데요, 저는 우리가 이런 모습을 닮아 있다는 게, 이 악함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있는데도 모른다는 게, 모르는 척 한다는 게 너무 속이 상해요. 마음이 아파요. 이런 교회도 많고, 이런 교인들도 많아요. 이단도 그렇고, 이단의 행태를 가진 사람들도 그렇고, 보통의 신자라는 사람들도 의도적으로 말씀을 비틀어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몰라서가 아니라 아는 데도 그래요. 이 “억지로 푼다”가 다른 사본에는 “교묘하게 풀다”로 쓰여진 것도 있어요. 이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삼가라는 거예요. 거짓된 것에 미혹되지 말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질까 하는 염려를 가지고 “삼가라”는 거예요. 여러분, 삼가라는 단어는요, 그냥 뭘 해라라는 명령보다는 염려하는 마음과 따뜻함이 더 크게 묻어 있는 단어에요.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거구요. 간절함에 더 가까운 단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잘못된 것에 빠지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그것만 안하면 너무 좋을 텐데 하는 조바심이 있어요. 그러면 빠져들지 말고 삼가라고 자꾸 말하게 되잖아요. 가족 중 누군가 이단에 빠져 들때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오늘 베드로는 우리가 이단에게 미혹되어 빠져들게 될까봐, 그래서 예수로부터 멀어질까봐,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신앙마저 놓치게 될까봐, 그러지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게 “삼가라”는 권면이에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제가 이 마지막 베드로후서를 돌아보면서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면서 가장 깊이 느껴진 게, 예수와 함께 가장 먼저 공생애를 시작했던 사람이, 그 예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3년이나 함께 숨을 쉬며 호흡했던 사람이, 때로는 넘어지고 예수를 부인하고, 결국 통곡하며 돌아오기도 한 사람이, 그가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고 디베랴 바닷가까지 찾아오셔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이렇게 간절하게 염려하면서 하는 말이 얼마나 진실한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동적인가 하는 거예요. “삼가라”는 말에는 그 간절함과 따뜻함이 있어요.
자라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응답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요, ‘오직’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마지막 권면대로 자라가는 거예요.
이제 몰랐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이제 미혹된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겁니다. 수많은 왜곡과 허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 모든 끈질긴 유혹에서 돌아서는 겁니다.
우리는 몰라서가 아니었어요.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기회가 주어졌어요. 김만종 목사가 베드로후서를 하는 내내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못 들은 척했고, 알면서도 머물기를 원했고, 바꾸는데 힘쓰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주님이 아무리 감동하셔도, 나는 세상 자리에 있었던 거죠.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세상 핑계는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십자가의 은혜로 서 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핑계가 아니라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응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진실하고 커진다면, 유혹에 쉽게 넘어서고 욕망으로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정도면 괜찮다는 것은 응답이 아닙니다. 머뭇거리는 것도 응답이 아닙니다. 그건 자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신앙에는 제자리가 없습니다. 제자리에 있겠다고 하는 건 퇴보하는 거예요. 참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실은 날마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돼요.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것들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자라가야”합니다. 영적 성장통을 겪어야 해요. 주님의 은혜에 주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해요.
오늘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말해요. 베드로가 사랑하는 자들, 그들은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이기도 해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기도 하구요. 그래서 베드로는 더 간절한 거예요.
유퀴즈온더블록이라는 프로에 SG 워너비라는 가수 그룹이 나왔어요.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시공간을 초월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이 질문에 멤버 중에 이석훈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바르게 살아라” 그렇게 유언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가서 이야기를 할 때 늘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잘하고 있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잖아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요. 그래야 해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너무 무너지고 절망 앞에 선 것 같은 지금 이 시간, 이 시대, 지금이 우리 한국교회가 주님께로 돌아서고, 주님께로 자라가야 하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을 때는 점점 더 악해가고, 결국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는데, 바벨론 포로기의 그 고통 속에서, 절망 속에서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들이 본 것은 눈에 보이는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아니라, 2,000km나 떨어져 있는 초라하게 무너진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포로라는 절망의 자리가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고, 또 조금만 버티면 그 제국 안에서 성공하게 될 것이라는 세상적 욕망도 아닌, 먼 곳 예루살렘을 소망으로 품었고, 그 마음에서 그들은 신약시대를 준비할 수 있었어요. 그들이 품은 것은 결국 그냥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어요.
저는 지금이 우리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 살아갈 그때라고 믿어요. 저는 초대교회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그들의 삶을 보고 계셨고,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그 마음을 아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보고 알고 듣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만 남았다고 믿어요.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옳은 것에 힘쓰고, 악한 것이나 욕망을 삼가고, 주께로 주께로 발돋음 하듯 자라가는 우리가 되어야 해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이제 머뭇거리지 마십시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서고, 그분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위해 오늘 내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4-18 / 신윤식 목사
사도가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은 신자에게 고난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의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1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를 불렀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어디에서 불러 내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있던 곳이 어디입니까? 세상이고 어둠이 아닙니까? 그곳에서 불러내었다는 것은 신자는 더 이상 세상과 관계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을 자신의 거처로 바라보지만 신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신의 거처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그네일 수밖에 없고, 나그네로 살기에 고난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성취하실 말씀을 조롱합니다. 지금까지 재림이 없었다는 이유로 재림도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3:5절에서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미 물로 세상을 심판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을 부인하면서 세상에 집착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재림이 연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 모두 회개하고 멸망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래 참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날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무런 흠이 없는 삶을 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을 쓴다고 해도 흠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설사 그 행동에는 흠이 없다고 해도 마음은 언제나 흠과 점으로 가득찬 것이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사도는 그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 앞에서 흠있고 점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12-13절을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거짓 선생들을 점과 흠있는 자로 말합니다. 즉 점과 흠있는 것은 거짓 선생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사고방식은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긴다면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점있고 흠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연락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에 평강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강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채우고,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데서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존재도 없는 상태를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강은 세상의 연락을 기뻐하는 마음으로는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천국을 소망하라는 말은 하면서도 왜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천국을 말하면서 세상에서의 복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영혼도 잘되게 하시고 육신도 잘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면 사도들은 영혼은 구원받았으나 육신은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3:15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앙은 천국 하나만을 바라보는 것이지 천국과 세상을 동시에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조차도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약속하신 것처럼 억지로 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16에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들은 성경에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굳센 마음으로 서 있지를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결국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지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가 어려운 단어를 구사하며 편지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존의 상식과는 전혀 상반된 말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사도와 같은 한 성령 아래 있다면 사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이해가 되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미 진리와 상관없는 인간의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만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본다면 이해 못할 내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심정으로 사도의 말을 대한다면 모든 말이 진리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며, 내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나를 자랑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 신자의 본문이며 사명임을 안다면 사도의 모든 말은 생명의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사도의 결론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라간다는 것은 많이 알아가는, 즉 머리에 지식이 쌓여 간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항상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것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와 이유를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두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과 흠이 없는 경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