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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 개요]
• 날짜·장소 : 2003년 3월 27일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 제한시간 : 각 3시간, 60초 초읽기 5회
• 덤/치수 : 5집반
• 대국자 : 백 이세돌 3단 對 흑 이창호 9단
• 대국결과 : 백 7집반승 (294수 끝)
한국 현대 바둑사에는 대략 여섯 개의 큰 봉우리가 존재했다. 조남철에서 김인으로, 김인에서 조훈현으로, 뒤를 이어 이창호와 이세돌로 내려온 이른바 국수(國手) 산맥이다. 지금은 박정환이 1인자 계보의 적통(嫡統)을 잇고 있다. 승부세계에서 무혈 혁명, 평화적 권력 이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기적으로 인접한 이창호와 이세돌은 대권 이동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꽃 튀는 쟁투를 피할 수 없었다.
두 거장은 지금까지 65전이나 겨뤘고(2015년 6월 현재), 이창호가 34승 31패란 근소한 우세를 유지하고 있다. 65번의 대결 어느 하나 처절하지 않은 혈투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고 주목 받았던 무대는 두 차례에 걸쳐 펼쳐진 LG배 결승전이었다.
최고 상금과 세계 1인자 자리를 놓고 ‘양이(兩李)’는 바둑사에 길이 남을 ‘10번기’ 대혈전을 펼친다. 2001년의 제5회, 2년 뒤인 2003년 제7회 LG배의 두 차례에 걸친 결승전은 국제대회 사상 한국기사끼리 겨룬 가장 처절했던 쟁기(爭棋)로 기록되고 있다. 일종의 ‘시리즈’였던 ‘10번기’를 한데 묶어 분석해야 하는 이유다.
1차 결승 5번기부터 돌아보자. 이 대결은 이창호와 이세돌이 불과 세 합을 겨룬 상태(이창호 2승 1패)에서 이루어졌다. 두 효웅이 아직 상대 주먹에 익숙하지 않던 시기다. 이창호의 결승 진출이야 흔히 보아온 광경이었지만, 창하오, 루이나이웨이, 저우허양을 연파하고 생애 첫 세계대회 결승 진출을 이룬 18세 소년 이세돌의 등장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당시 이세돌은 국내 2관왕에 올라 바둑대상(大賞) 첫 MVP에 오르는 등 막 비상(飛上)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이창호는 절대적 카리스마가 많이 사라지긴 했어도 연초 잉창치배를 손에 넣고 국내 4관왕으로 군림하는 등 여전히 1인자로 인정받는 상황이었다. 전전(戰前)의 예상이 이창호 쪽의 무난한 승리로 모아진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막상 2월 하순 뚜껑을 열어젖히자 의외의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세돌은 2월 26일 1국서 이창호의 흑 대마를 잡고 단 126수만에 선제점을 뽑더니, 이튿날 2국서도 거목의 대마를 또 때려잡고 이겼다. 특히 2국은 국내 검토진이 “이세돌이 곧 돌을 거둘 것 같다”던 상황에서 불과 40여수 만에 역전되며 승자가 바뀌었다. 약관(弱冠)에도 못 미치는 소년이 천하의 이창호를 일찌감치 막판으로 몰아넣자 전국이 들끓기 시작했다.
5번 3선승제 번기(番棋) 승부에서 선제 2승을 올리면 타이틀은 거의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순 산술적 확률로도 2승자의 우승 확률은 2패자의 그것에 비해 7배나 된다. 더욱이 심리적 여유와 기세란 것도 있다. 2대 0의 상태에서 발간된 2001년 월간바둑 4월호 표지엔 활짝 웃는 이세돌의 사진과 함께 2개의 표제가 굵은 활자로 찍혔다. ‘이세돌 최강 이창호에게 2연승, LG배 반상 쿠데타’, ‘뚫린 방패 이창호, 무슨 문제 있나?’ 정상 교체를 기정사실로 한 이 편집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사실을 당시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두 달 여 뒤인 5월 15일 3국이 속개됐다. 이 바둑 역시 이세돌이 일찌감치 필승의 바둑을 구축했다. 우승자가 거의 결정된 분위기였다. 검토실이 때 이르게 파장 분위기를 맞은 가운데 TV 중계 모니터 속 조훈현은 “이세돌 3단의 우승이 확정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방송사는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었고, 승부는 막판 역전돼 버렸다. 초읽기에 몰린 이세돌의 연속 실착이 주범이었다. “3국을 결승판이라고 생각하고 두겠다”던 이세돌의 다짐이 우승컵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무너진 것이다. 영패 위기를 벗어난 이창호는 여기서부터 완전히 자기 바둑을 되찾았다. 3국에 이어 이틀 뒤 계속된 4국서도 직선 공격을 퍼붓는 상대 예봉을 잘 요리해 백 불계로 낙승했다. 순식간에 2대 2가 됐다.
최종 5국은 4국 나흘 뒤인 5월 21일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서 열렸다. 엄청난 성황이었다. 아침부터 팬들이 속속 대국장으로 몰려들었고, 오후엔 한국기원 총재와 이사장, 주최 신문사 회장, 그리고 연로한 조남철 9단에 이르기까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VIP들이 줄을 이었다. 이세돌의 기세는 이미 1, 2국 때의 그것이 아니었다. 백을 쥔 이창호는 긴박한 가운데서도 관록과 여유를 보이며 242수만에 백으로 불계승했다. 패색이 짙어진 이후 18세 소년이 숨죽인 채 토해내는 한숨, 괴로움에 못 견딘 자책적 몸짓들은 우리에 갇힌 젊은 사자의 단말마를 떠올릴 만큼 처연했다.
당시 LG배 결승은 5번기였고 두 차례에 나뉘어 진행됐다. 1차 라운드로 1-2국을 치르고, 시차(時差)를 두고 열리는 2차 라운드서 나머지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다. 1차대회가 끝나고 77일 만에 2차대회가 속행된 시차가 결과적으로 극적 반전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아무튼 5회 LG배는 세계기전 사상 최초의 2연패 후 3연승 신화와 함께 이창호의 홀수 회(1, 3, 5회) 우승 전통 계승, 이창호의 국내외 기전 통산 100번째 우승 등 각종 기록과 풍성한 화제를 쏟아내고 막을 내렸다.
이-이 LG배 결승 10번기 1차 결전(5회 대회)이 이창호를 위한 제전이었다면 2년 뒤 열린 2차 결전(7회 대회)은 이세돌을 위해 마련된 반전 무대였다. 장주주, 위빈, 원성진을 따돌린 이창호와, 이상훈, 박영훈, 조한승을 무릎 꿇리고 올라온 이세돌이 운명처럼 다시 마주 앉았다. 이창호는 그해 도요타덴소배와 춘란배를 추가, 잉창치배 TV아시아를 포함해 세계 4관왕의 위용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세돌도 더 이상 ‘유망주’에만 머물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직전인 2002년 여름 후지쓰배(15회) 제패로 정상의 일각에 깃발을 꽂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세돌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후지쓰 우승 직후 몇몇 기자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그는 “이창호 사범님은 가장 어려운 상대이긴 하지만 세계 최강자는 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것이 이세돌의 매력이다. 그는 의례적인 겸양 대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한다. 아무튼 한 시대를 대표하던 이들 양웅은 나란히 세계 챔프의 신분으로 LG배를 겨냥한 두 번째 격돌에 들어갔다. 2003년 2월 25일 1국은 이세돌의 흑 불계승, 이틀 뒤 2국에선 이창호의 흑 불계승. 첫 판을 ‘이창호답지 않은 실착’으로 참패한 이창호가 2국에선 특유의 복원력으로 오히려 이세돌의 실족을 이끌며 균형을 맞췄다.
2차 라운드는 1차 라운드 종료 26일 만인 3월 25일 속행됐다. 2년 전 5회 대회 때의 77일보다는 짧았고, 무엇보다 대등한 스코어에서 2차 라운드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당시 분위기하곤 사뭇 달랐다. 그냥 결승 3번기를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5번기 결승시리즈의 분수령에 해당하는 3국은 패싸움이 수없이 난무하고 초읽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265수에 걸친 난전 끝에 흑을 쥔 이세돌의 불계승으로 끝났다. 힘겹게 추격한 이창호가 막판 또 다시 무너지자 ‘미세한 장기전으로 이끌면 무조건 이창호의 승리’라던 한국 바둑계의 상식(?)도 함께 의심받기 시작했다.
3월 27일 운명의 4국이 막을 올렸다. 훗날 주최 신문의 기보 해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창호가 ‘막판’에 몰린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이틀 전의 3국을 내주면서 종합전적은 1대 2. 하지만 4국이 시작된 대국장 주변에 파장 분위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말은 않지만 모두 ‘그래도 최소한 5국까지는 가지 않겠느냐’는 얼굴들을 하고 있다. 하긴 국제대회 번기(番棋) 결승서 이창호가 패한 것은 99년 1회 춘란배(대 조훈현 1대2) 한 차례뿐이었다. 그나마 그것은 3번기였고, 11회나 치른 5번기 결승에선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지 않았는가….” 조선일보 5월 13일자
백은 좌중앙 삭감에 나선 흑의 진로를 막아서면서 초반부터 과감한 프레싱 전법을 폈다. 백의 젖힘 강타에 이창호는 무려 36분의 대장고 끝에 49로 끊어갔다. 패(覇)에 이은 바꿔치기. 초반 백이 선취점을 얻었다. 기세가 오른 이세돌은 오후 대국 재개 후 하변에 침투, 다시 두 곳에서 패를 만들며 기분을 낸다. 하지만 흑의 반격이 매서웠다. 또 다시 패 바꿔치기로 하변 백이 전멸해선 역전. 백은 필사적으로 이곳저곳을 찔러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이창호가 걸려든다. 하변서 천려일실의 실착이 등장했고, 세 번째 패 바꿔치기를 거쳐 백 대마가 부활해선 더 이상의 역전은 없었다.
“이세돌이 이끄는 반란군이 성채(城砦) 바로 밑까지 들이닥쳤다. 2년 전에 간신히 쫓아 보냈던 그 부대가 언제 저렇게 사나워졌을까. 망루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적장(敵將)을 내려다보는 이창호의 가슴에 만감이 스친다. 숱하게 전장을 누벼왔어도 국제대회 5번기 결승서 적의 입성(入城)을 허용한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저들의 군홧발에 둘러싸인 채 항복 문서에 서명할 치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승리를 앞둔 이세돌은 새로운 대관(戴冠)의 감격을 상상하며 가슴이 터질 것 같다….” 5월 28일자 조선일보·필자 졸고
상대의 사소한 실수가 나와 돌을 거둘 기회마저 놓친 이창호는 묵묵히 판을 메워갔다. 294수만에 계가해 보니 백의 반면(盤面) 1집 승, 덤을 받고 7집 반 차였다. 이세돌의 우승이 결정된 순간 이창호는 조용히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용변이 급했던 것일까. 아니었다. 그는 정성껏 얼굴을 씻고 나온 뒤 온화해진 얼굴로 8살 아래 후배와 검토에 들어갔다. 이창호는 대국 중에도 자주 화장실을 찾아 세수한다. 몸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는 그만의 습관이다. 그날 종국 직후 이창호의 세면(洗面)은 역사적 변곡점에 서게 된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 충격을 추스르기 위한 엄숙한 의식(儀式)이었다.
7회 LG배 결승은 바둑 역사책에 새로운 사실을 꽤 여럿 적어 넣었다. 20세 청년 이세돌은 이 승리로 세계 2관왕에 오르며 자신의 세상이 도래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무엇보다 그 상대가 불패의 상징이던 이창호였다는데 의미가 컸다. 16차례의 세계대회 결승에 나가 15번 우승했던 이창호의 신화를 처음 깨뜨린 것이다. 이창호가 연하의 기사에게 무릎을 꿇은 첫 국제무대였다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2번(햇수로는 3년)에 걸쳐 펼친 ‘LG배 10번기’는 두 기사뿐 아니라 세계 바둑역사에도 큰 획을 그은 한 편의 파노라마였다. 특히 2연승 후 3연패의 아픔을 딛고 2년 뒤 다시 기회를 잡아 기어이 뜻을 이룬 드라마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젊은 세력과 기득권의 정면충돌을 그린 한 편의 액션드라마라고나 할까. 이세돌의 LG배 정상 등극 뉴스는 3월 28일자 조선일보 1면과 10면(사회면) 등 2개의 메인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빼놓고 지나갈 수 없는 것 하나는 두 기사의 유난스러운 LG배와의 인연이다. 이창호는 1회와 3회, 5회, 8회 LG배서 우승하면서 이 대회를 세계 석권의 교두보로 활용했다. 그가 네 차례나 제패한 국제 기전은 LG배와 동양증권배 2개뿐이다. 이세돌은 97년 제2회 LG배 때 14세 3개월이란 기록적 어린 나이로 참가했다. 이는 그의 국제 대회 첫 나들이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이세돌은 96년 LG배 창설 기념 이벤트 때 갓 입단한 상태에서 조훈현과 기념대국(정선으로 무승부)을 펼치기도 했었다. 이세돌은 역대 LG배 결승에 4번 나가 2번 우승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창호를 막상 본격 번기(番棋) 승부에서 처음 꺾은 뒤부터 이세돌의 이창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내 적수는 이창호 사범님뿐이지만 내가 더 센 것 같다”던 그가 ‘LG대첩‘ 이후 “이창호 사범님이 역시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며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이다. 판수가 거듭되면서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그 큰 승부에 패한 이창호가 그 뒤 위축되지 않고 이세돌과 일진일퇴를 계속해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둘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백36까지 평온한 포석. 흑은 곳곳에 착실히 실리를 챙기고 백은 좌측에 두터운 세력을 쌓은 양상.
우상귀 흑37은 실리로 매우 큰 곳. 반대로 백에게 침투를 당하면 좌변 백 세력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대세를 내주게 된다. 백38은 호방한 대세점. 흑39로 깊숙이 삭감에 나서자 바로 백40에 씌워 전투를 걸어갔다.
좌변 흑의 침입부대는 패싸움 끝에 안정했다. 하지만 꼬리 일부를 뜯기고 방대한 세력을 내준 채 작게 살아서는 흑이 불만스러운 결말. 또한 백78 모착이 빛나는 공수의 요소였다. 검토실에선 흑73으로는 76으로 넘는 게 좋았으리란 의견도 나왔다.
제5보(79~104) 백90-백82, 흑99-흑87, 백102-백92
하변에서 백이 두 군데나 패를 만드는 등 지나친 손바람으로 고전을 자초한 장면. 흑113까지 또 한 번의 패 바꿔치기가 이뤄지면서 흑이 역전 리드를 잡았다. 흑113이 절묘한 급소로 하변 백은 탈출구가 막혔다.
흑이 143으로 상중앙을 보강하자 열세의 백은 144~148로 하변 정리에 나섰는데 여기서 흑은 천추의 한을 남긴다. 흑149를 150으로 받거나 백150 때 흑151로 A에 빠지기만 했어도 흑의 우세였다. 백158·160으로 하변 백의 활로가 생기면서 다시 역전된다.
백166, 172, 178-백△
흑169, 175, 백180-흑163
백190, 196, 202, 208-백X
흑193, 199, 205-흑197
백198-흑191
흑201-백194
흑245, 백294-흑▲
백246-흑203
백288-백242
흑293-백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