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10
6월4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WLFafP1HMQ
[서울대교구 박기벽 유스티노(공항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pry3dg_YeE
++++++++++++++++++
<법의 얽매임이 어떻게 자유와 평화를 주는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31)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목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수만 가지 복잡한 율법을 단 두 개의 기둥으로 압축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수직적인 기둥'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수평적인 기둥'입니다. 이 두 기둥이 교차하여 만들어지는 모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내 마음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데, 하느님은 왜 이토록 무거운 사랑의 의무로 우리를 옭아매려 하실까요? 얽매임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어느 날, 세상의 모든 규칙과 인간관계에 지쳐버린 한 젊은이가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와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억울하고, 매일 부딪히는 이웃들의 비위를 맞추며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지긋지긋합니다. 수직적인 의무도 없고 수평적인 관계도 없는, 아무도 저를 간섭하지 않는 완벽하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공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까?"
젊은이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랍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물론 있지. 그곳에 가면 자네에게 세금을 내라거나 법을 지키라고 독촉하는 왕도 없고, 자네의 속을 뒤집어 놓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귀찮게 구는 이웃도 전혀 없다네. 아주 완벽하게 고요하고 자유로운 곳이지." 젊은이가 눈을 번쩍이며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런 천국 같은 곳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랍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공동묘지라네. 오직 차갑게 죽어있는 시체들만이 왕에 대한 수직적 의무도, 이웃에 대한 수평적 사랑의 얽매임도 없는 완벽한 자유를 누린다네. 젊은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면 응당 그 관계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져야 하는 법이라네."
그렇습니다. 의무와 관계의 얽매임을 거부하는 완벽한 자유는 곧 죽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신 이 수직과 수평의 얽매임은 우리를 구속하려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거칠고 무서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생명과 절대적인 자유를 완벽하게 지켜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고안해 내신 가장 완벽한 '안전 시스템'입니다.
이 위대한 십자가의 얽매임이 어떻게 우리를 지켜주고 자유롭게 하는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국가와 법'의 원리를 통해 먼저 들여다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그 나라의 법률이라는 강제적인 사슬에 우리 자신을 묶어야만 합니다. 국가의 모든 법은 가만히 뜯어보면 정확히 두 갈래의 얽매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위를 향한 의무입니다.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대에 가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내 피 같은 돈을 떼어 세금을 내야 합니다. 둘째는 옆을 향한 의무입니다. 형법과 민법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웃을 함부로 때리거나 이웃의 재산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얽매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가지 의무가 답답하다며 이렇게 소리친다고 상상해 봅시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완벽한 자유인이 될 거야!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을 것이고, 내 기분대로 이웃의 물건을 빼앗고 마음껏 때리며 살겠어!' 이 사람이 과연 자유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이 두 갈래의 법을 어기는 순간, 국가는 공권력을 발동하여 그 사람을 체포해 차디찬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는 100퍼센트 영원히 박탈당하고 맙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세금을 내기 싫고 이웃의 비위를 맞추기 귀찮아도, 기꺼이 이 두 가지 법의 사슬에 우리 자신을 묶고 순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가 위를 향해 바친 세금과 국방의 의무로 인해, 국가는 거대한 군대를 키워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우리가 옆을 향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을 지킬 때, 국가의 경찰과 공권력은 강도와 살인자들로부터 '우리의 집과 평화'를 완벽하게 지켜줍니다.
그렇습니다. 위를 향한 국가에 대한 사랑(세금)과 옆을 향한 이웃에 대한 사랑(준법)이라는 얽매임은, 남을 좋게 하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밤에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나의 완벽한 자유와 평화'를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선택하는 생존의 밧줄인 것입니다.
우리가 속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집단의 수준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이 위를 향한 법과 옆을 향한 법이 얼마나 철저하고 깊이 있게 지켜지느냐에 따라, 그 집단이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둠의 세계에 있는 깡패 집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곳에도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고 의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법의 바탕에는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위를 향한 존경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옆을 향한 의리는 돈과 이익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작고 얄팍하기에, 그들은 늘 다른 조직이 자신들을 깔보거나 공격할까 봐 두려워하며, 부하가 언제 배신할지 몰라 밤잠을 설칩니다. 겉으로는 힘이 세 보이지만 내면에는 평화가 전혀 없는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사랑(수직)과 이웃 사랑(수평)이라는 십자가의 계명은 바로 이 가정의 사랑을 우주적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하느님 나라라는 우주 최고의 가정에 소속되어 영원한 보호를 받기 위해 우리가 서명해야 할 '영적 헌법'입니다.
우리가 주일의 단잠을 포기하고 성당에 나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예배하고 십일조를 바칠 때(수직적 세금),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뻗어 사탄의 맹렬한 공격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완벽하게 방어해 주십니다.
우리가 내 속을 썩이는 얄미운 직장 동료나 배우자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꾹 참고 용서할 때(수평적 준법), 내 주변은 분노와 복수의 칼날이 사라진 안전한 평화의 요새가 됩니다. 결국 십자가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우주 최강의 보디가드 시스템입니다. 이 법을 지키는 자는, 우주의 통치자가 나를 지켜주신다는 압도적인 자존감 속에서 '왕의 여유'를 누리며 세상을 두려움 없이 걷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기적적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끄시자마자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이라는 무거운 법을 주십니다. 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수직적 계명이고, 4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수평적 계명입니다.
이제 막 자유를 얻은 백성에게 왜 또다시 무거운 사슬(율법)을 채우셨을까요? 만약 광야에서 이 수직과 수평의 법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며칠도 안 되어 먹을 것을 두고 서로를 죽이고 빼앗는 짐승의 무리로 전락하여 사막의 모래에 파묻혀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자유로운 야만인'이 아니라 '안전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남게 하시려고 십계명이라는 단단한 성벽으로 그들을 묶어 보호하신 것입니다.(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20장).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신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사랑의 짐을 거부하는 자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수레바퀴는 축에 단단히 매여 있을 때만 힘차게 굴러갈 수 있고, 악기의 줄은 팽팽하게 당겨져 묶여 있을 때만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두 기둥에 당신을 단단히 묶으십시오. 그 결박이 당신을 천국의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참조)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노트북이 있으니 강론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좌석 스크린에 준비된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이번 순례에서 돌아올 때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국 영화 ‘대가족’이었습니다. 영화는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을 넘어서 사랑으로 맺어지는 가족을 이야기합니다. 주인공은 입양을 통해서 많은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따뜻함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인상 깊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스님이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와 같다. 아이는 부모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아이는 신(神)과 같다. 부모는 신을 모시듯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제게 우주와 같았습니다. 그 품에서 먹고, 자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후에 제게 맡겨진 본당과 공동체가 있습니다. 과연 저는 그 본당과 공동체를 하느님처럼 섬겼는지 돌아봅니다.
여론(輿論)과 민심(民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날씨와 기후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합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해가 나기도 하고, 눈이 오기도 하고, 덮기도 하고, 춥기도 합니다. 기후는 일정한 패턴과 특색이 있습니다. 온대기후, 열대기후, 몬순기후, 아열대기후, 사막기후, 한대기후가 있습니다. 기후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날씨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다면 기후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와 같습니다. 여론은 작은 사건과 사고로 출렁거리곤 합니다. 여론은 주도하는 언론과 방송에 따라서 변하곤 합니다. 그러나 민심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물처럼 민심은 더 깊고 넓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여론을 따라서 춤을 추기보다는 민심을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제 대한민국에서는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있었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파면하였습니다. 작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올해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작년에 새롭게 탄생한 이재명 정부에 대한 민심을 알 볼 수 있는 선거입니다. 정부 여당의 국정 심판에 대한 민심이 크다면 야당에 힘을 몰아 줄 것입니다. 새롭게 탄생한 정부 여당에 대한 민심이 크다면 여당에 힘을 몰아 줄 것입니다. 민심을 반영하는 것은 무엇보다 ‘먹고사는 경제’입니다. 삶의 터전이 ‘부동산 정책’입니다.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큰 대한민국의 민심은 경제 상황과 주식 시장이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날씨처럼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 여론처럼 쉽게 출렁거리는 것이 아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두 가지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온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정성과 마음과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기호에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여건에 따라서 바뀌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겉절이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익은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기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싱겁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체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공포, 액션 영화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가족, 사랑 영화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마르 12,28)라고 묘사합니다. “듣고”, “보고”, “다가와”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 한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 그는 율법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을 묻습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무엇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면, 사랑도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인간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고백하며,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34). 아직 문턱이지만, 이미 빛은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첫째가는 계명”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묻는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하나로 통합하여 답하신다. ★하느님 사랑: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이웃 사랑: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온전히, 갈라짐 없이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라는 뜻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하느님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의 기준이며, 우리의 모든 사랑과 행위가 하느님께로 향할 때 참된 신앙과 덕이 된다.”(De Doctrina Christiana, 1,5 요약)라고 풀이한다. 교부들은 하느님 사랑을 전 존재를 향한 사랑의 총체라고 보았고,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의미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형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신앙”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은 마태 25,40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 증거이다. 교회의 전통적 해석에서도,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이웃 사랑이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랑은 신앙과 실천을 통합하는 핵심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마음, 정신, 힘, 목숨을 분리하지 않고 하느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형제, 자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일상에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교리 지식이나 외적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 속에서 통합될 때, 신앙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하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는 우리가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이미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삶 속에서 살아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랑>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참사랑>
사랑합니다
당신과 나
둘만 있는 듯
사랑합니다
당신 있듯이
나 있도록
사랑합니다
당신 당신이도록
나 나이도록
사랑합니다
당신 나인 듯
나 당신인 듯
사랑합니다
당신과 나
함께 있도록
사랑합니다
당신 있게 하려
나 없어지도록
사랑합니다
당신은 있고
나 없을지라도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더글라스 젠타일의 연구팀 내용이 있습니다. 대학생 496명을 네 그룹으로 나눠서 12분간 캠퍼스 안을 걷도록 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마음속으로 다음의 특정 생각을 품도록 지시했습니다.
1)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이라며 따뜻한 마음을 보냄.
2) ‘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함.
3) ‘내가 상대보다 뛰어날 것 같은 점’에 주목하도록 함.
4) 상대방의 복장이나 물건에 대해 관찰하도록 함.
그 후 참가자들의 행복감, 불안, 공감도, 타인과의 유대 등을 측정했습니다. 과연 어떤 그룹이 가장 좋은 효과를 보았을까요? 첫 번째, 타인의 행복을 바랐던 그룹이 가장 행복감이 높았고, 불안이 감소했으며, 공감도와 사회적 유대감에서도 좋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하면 결국 자기에게 좋은 영향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에는 집단을 이루며 살 수밖에 없었기에, 그 유전자가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져서 협력관계 안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계된 우리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복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고 묻습니다. 이는 당시 율법학자 사이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질문이었습니다. 수많은 계명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첫째가는 계명’ 하나만을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둘째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계명’은 복수가 아닌, 단수입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을 묶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비의 실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이를 알게 된 율법학자는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있다고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천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만이 결국 나를 행복의 길로 들어가게 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28ㄱㄷ-34)
1)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너는 하느님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쳐야 한다.”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으로 여기고, 너 자신에게 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이웃에게 주어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다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이 말은 부부 사이의 사랑에도, 가족에 대한 사랑에도, 친구에 대한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같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동전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2)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든지 이웃에 대한 사랑이든지 간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3,16; 4,10) <이미 받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3)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라는 말에서,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에게 한 말이 연상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무슨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실행하는 것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4)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그 율법학자를 칭찬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말만 잘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실제 삶으로도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5)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가르침은 ‘황금률’에 연결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나로 압축한 것과 같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말은, 성경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이고,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찾아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려는 그의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찾고자 했던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시하시면서도 레위기에 나오는 이웃 사랑을 함께 언급하십니다.
율법 학자는 두 가지 계명의 중요성에 대해 수긍하며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안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이 두 가지 사랑의 신비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강생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상태로 객관화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인은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사는 위선자입니다.(1요한 2,10-11 참조)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이웃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대로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부자와 차별 대우하지 않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야고 2,8 참조)
=====================
[대구대교구 주민기 베네딕도 신부님]
본당을 잘 사목하자면 먼저 신자들에 대한 파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정 방문’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한 신자의 도움을 받아 신자 가정을 방문하면서 조금씩 신자들의 형편을 알게 되었고 본당 전체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전체 가구수의 80% 정도가 쉬는 교우였고, 신앙생활을 하는 나머지 신자의 90% 정도가 여성 짝교우였습니다. 그리고 직장 남성의 대부분이 공단의 직공들로서 2교대와 3교대 근무를 하면서 불규칙적이며 고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자 대부분이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기에 2-3년이 지나면 철새처럼 집을 옮겨다니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얼굴을 좀 알 만하면 떠나가고 떠나가니 본당 신부로서 사목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면서 가정 안타까운 것은 쉬는 교우들의 냉대였습니다. 냉담한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들의 마음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론 어떤 신자들은 자신의 냉담을 부끄러워하며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뭐가 잘못이냐는 식의 당당함을 보이곤 했습니다.
한참을 설득하고 실랑이를 벌인 뒤에도 그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때는 씁쓸한 마음마저 들곤 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자기 집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는 집을 비워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문을 닫아걸고는 아예 열어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이 냉담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성전 건립에 대한 부담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쉬는 교우들이 성전을 다 짓고 나면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발길을 옮기면서 이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신자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참 너무 하는구나’라는 얄미운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본당 형편을 보면서 실망하고 낙담하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을 때, 저의 부친과 답답한 속사정을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이런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난 뒤 부친께서 저에게 이런 충고를 하셨습니다.
“성당을 다 짓고나서 그때라도 나와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라. 중요한 것은 네가 여기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사목해야 하느냐를 배우는 것이다.”
이 말씀이 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실망하고 낙담하고 있던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미흡한 본당 실정에 대해 조급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지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자들을 사목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입니다. 그들은 나의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감싸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분처럼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 힘을 내서 내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다가가고자 합니다.
“주님, 내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또한 당신의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게 하소서.” 아멘.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지 아침에 생각해셨습니가? 오늘은 여러분들중에는 약간 바쁜신분들도 계실것이고 또 매우 여유로운신분들도 있을것입니다.
어쨋든 나의 하루가 바쁘든 한가하든지 간에 좋은 일들로 가득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해봤습니다. 오늘 하루를 기쁘게 보람있게 즐겁고 신나게 지낸다면 참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다가와서 오늘 하루동안 행운을 안겨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여러분은 오늘 하루가 좋겠습니까?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보세요. 자 다들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럼 조금 색다른 생각을 해보도록 합시다. 오늘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중에 그사람들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좋아할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내가 그사람에게 뭔가 해줄수 있는 것이 있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상상아닙니까? 오늘 내가 그사람에게 행운의 여신이 되어서 그를 위해서 행운을 불어준다고 상상해보세요. 즐겁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상상을 자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못하신다고요 어쩌다가 한번이라고요. 전에 한번 해본적은 잇지만 부끄러워서 실천한적은 없다고요
지금 당장 해보세요. 그리고 생각하신대로 옮겨 보세요. 정말 멋진일이라고 생각해요. 용기를 내어서 꼭 해보세요. 그리고 이런 상상을 자주하시고 그대로 잘 옮기시는 분들에게 하나 더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나면 미소를 지을까 한 번 상상해보세요.
나이가 아주 많으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일들은 어떤 일들이 있을지 한번 상상해보세요. 부담 갖지 말고 한번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해보세요.
머리속에 무엇이 떠오릅니까? 그리고 그것을 했다치고 한번 하느님의 미소짓는 얼굴을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또 환하게 웃으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상상해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상상아닙니까?
매일 아침 이렇게 세가지 상상을 하고 나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고 한번 그대로 해보세요. 아마 그날은 정말 멋진 일들로 가득차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알아채시고 그대를 도와주실것입니다.
이런 상상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 방법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기쁘고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의 길인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 계명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아니면,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우리가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고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며,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재물인가?”
아멘.
-----------------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이웃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30-31)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랑을 가득히 머금고 있기에 자신과 이웃과 모든 생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피조물을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닐지라도 그 사람은 하느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아는 만큼 주님과 일치하고, 주님과 일치하는 만큼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는 만큼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게 됩니다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전 인격체로써 우리가 주님과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통합된 인격체가 아닌 갈라지고 부분적인 인격체로 우리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인격체는 머리로만, 때로는 뜨거운 감정으로만 사랑하기에 이성의 빛으로 식별을 하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이성적인 사고나 감정으로 무장된 사상이나 신심은 보편성을 지닌 가톨릭이 아니라, 자칫 신앙의 탈을 쓴 그릇된 ‘광기’로 드러나기 쉽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통합된 인격체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주님과 자신과 이웃과 피조물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31ㄷ)
<하나의 사랑을 위하여!'>
오늘 복음(마르12,28ㄱㄷ-34)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율법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율법 학자가 '가장 큰(The most)', 최상급의 계명 하나를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자기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 세 개의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는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인가?'
내가 하느님을 닮은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 안에 머무는 것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 또 다른 이웃인 너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너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은총 안에서 너를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해 '나 자신과 너와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사느냐가
우리 삶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결국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는
참된 사랑뿐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근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인간 회복의
참된 본질이
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는 곳에
우리는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은 인격적 만남의
최종본이며 완성입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실천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말할 나위 없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복된 길이며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